2월17일 행복은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2-17 23:27:14    조회 : 247회    댓글: 0

▣ 2019년 다해 2월17일 [(녹) 연중 제6주일]

제1독서 예레미야서 17,5-8
제2독서 코린토 1서 15,12.16-20
복음 루카 6,17.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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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6주일

2019년 다해 2월17일 연중 제6주일

지금은 다른 곳으로 옮겼지만, 의정부 어머니 집에는 어머니가 돌보는
화초들이 있었습니다. 30년이 넘은 것도 있었습니다. 화초들은
어머니와 함께 3번 이사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화초들과 대화를
하셨고, 화초들의 잎도 자주 닦아 주셨고, 화초들의 입맛에 따라서
물을 주셨습니다. 어머니를 만난 화초들은 행복했을 것 같습니다.
30년 이상을 화초들과 함께하신 어머니도 행복하셨을 것 같습니다.

주변을 보면 저와 함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13년 동안 큰 탈 없이
제가 원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저를 데려다주는 자동차가 있습니다.
타이어도 한번 바꾸었고, 엔진오일도 몇 번 바꾸었고, 배터리도 한번
바꾸었고, 와이퍼도 몇 번 바꾸었지만 제게는 든든한 친구와
같습니다. 저의 생각을 적을 수 있는 만년필도 고마운 친구입니다. 5년
넘게 저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노트북과 스마트 폰은 저를 또 다른
세상과 만나게 해주는 소중한 친구입니다. 부족한 저의 생각과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책들도 고마운 친구입니다. 어머니처럼 사랑과
정성으로 대하지는 못하지만 함께 있기에 행복한 친구들입니다. 

예전에 ‘행복’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행복은 하고 싶은 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해야 할 일을 좋아하는 것이라는
말이었습니다. 행복은 채우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작은
것일지라도 만족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채우기 위해서는 비울 줄
알아야 하는데 우리는 비우는 것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소유한다는
것은 마치 바닷물을 마시는 것 같아서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어집니다. 그러기에 채우고 소유하는 것으로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누가 저에게 행복하십니까? 라고 질문을 한다면 저는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어째서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라고 또
질문한다면 저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행복이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길과도 같아서
처음에는 없는 듯하지만 이미 많은 사람이 그 길을 걷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 내린 마당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다. 수녀님이 작은
길을 냈고, 신자들이 길을 내면서 성당까지 길이 만들어졌습니다.
진리를 향해서 길을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걸어간 길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진리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돈으로 따진다면 저는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명예로 따진다면
저는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권력으로 따진다면 저는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건강으로 따져도 그렇습니다. 외모로
따져도 그렇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감히 행복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분께로 조금씩 서툴지만, 발길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부족하지만, 느린 걸음이지만
포근한 마음으로 인내하시며 저를 기다리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제 주변에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분들을 만날 수 있고 그런 만남
속에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런 행복은 돈이나, 명예,
권력이나 힘으로 맛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주님과 함께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언제든지 느낄 수 있는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가 폭풍을
만나지 않고 조용한 바다로만 갈 수는 없다. 멀리 있는 길을 항해하는
배에게 폭풍은 벗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분은 어쩌면 지금 삶의 먼
항해 길에 폭풍을 만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지금 삶이라는
배가 험한 파도에 몹시 흔들리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삶의 여정에서
다가오는 폭풍우를 피하고, 그 폭풍우를 벗어나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 폭풍우를 이겨내고 그 폭풍우와 맞서 싸울 힘과 용기를 청할 수
있기를 기도하였으면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 폭풍우의 한가운데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고, 그 주님의 힘을 느낄 때
우리는 어떤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된 삶의 기쁨과 행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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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가난한 마음으로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17일 연중 제6주일 : 가난한 마음으로

오늘 복음은 우리가 마태오 복음 5,1-12의 산상설교와 내용적으로
일치하고 있는 평지설교의 대목을 전해주고 있다. 마태오 복음은 이
설교를 산에서 하셨고 루가 복음은 산에서 내려와 하셨다고 하고
있다. 마태오 복음의 사상은 예수께서 마치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백성들에게 해방자이며 입법자 역할을 했던 것처럼 ‘새로운’ 모세가
되시며,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들, 신앙인들은 구원의 말씀을
생활화하고 실천하기 위하여 ‘올라가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루가 복음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내려오신다.’ 즉 우리가 당신을 향해 올라갈 수 있도록 당신을 낮추어
내려오신다는 것이다.

복음: 루카 6,17.20-26: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성서에서 ‘축복’이란 미래에 얻게 될 기쁨을 선포하거나
(이사 30,18; 32,20; 다니12,12), 현재의 기쁨에 감사를 드리거나
(시편 32,1-2; 33,12; 85,5-6.13) 보상에 대한 약속을 표현하는데
(잠언 3,13; 8,32.34; 시편 1,1; 2,12) 사용된다. 때문에 축복은 항상
하느님께서 당신께 충실한 사람들에게 주실 ‘기쁨’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축복이란 어떤 희망사항이나 원의의 표현이
아니라, 예수께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시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상황을 뒤집고 그 나라를 실현시키실 것을 장엄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오늘 복음의 축복이 지금 현재의 상황이 뒤바뀌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어떻게 바뀐다는 것인가? 가난한 이들이 부유하게 되고,
배고픈 이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그런 상황으로 된다는 말은 아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의 축복은 불행한 사람들과 행운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처지만 바뀔 뿐 여전히 세상에 불의는 존속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예수께서 계속해서 부유한 사람들과
배부른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유해지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 입장에 놓이게 되면 그 때문에
다시 저주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뒤집어엎는’다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일어난다. 즉 정신적 내면 상태의 변화와 또한 마음의
회개로 말미암은 외적 변화를 통해 일어나게 된다.

사람들의 이기심으로 이 사회에 가난한 이들, 배고픈 이들, 고통 받고
박해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은 하느님의 나라가 아직 이루어지고 있지
못하다는 증거이다. 그러나 그 나라는 이미 그리스도와 더불어 역사
속에 이미 활동하고 있고 이러한 상황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여기에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가난한 사람들은 물질적인
면이 충분치 못할 뿐이다. 그들이 영적인 배부름과 기쁨을 주시는
하느님을 드러내는 밝은 생활을 할 때는 부요 하다. 이 같이 예수님의
말씀은 인간의 생활이 감추어진 차원 즉 세상이 간단히 알아챌 수
없는 깊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지상의 부와 외적으로 드러나는 성공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난은 더 이상 단순한 빈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에
대한 인간들의 마음의 개방이다. 이 때문에 자신들의 행위와 법에
의존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부유한 자들로 여겨지듯이 물질적
재화의 풍요를 자신의 생활의 기반과 보증으로 삼는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은 구하는 사람이다. 즉 하느님께 자신을
열고 청하는 사람이다. 가난이라고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법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하며 구체적으로 가난한 이들과
자신의 삶을 그리고 물질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모든 형태의 가난한 이들, 지상에서 안주할 곳을 찾지 못하고 헤매는
이들 모두가 축복의 대상자들이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용서와
참된 재화와 풍요로움과 즐거움의 형태로 모든 이에게 주어졌고 또한
거기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이다”
(J. Pikaza, Leggere Luca, Torino 1976, p. 42).

오늘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축복’이나 ‘저주’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 모두는
형제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진정 가난한 사람들이 되어야 하며,
그래서 다 함께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 육체적 정신적 굶주림을 채울 수 있는 것들을 하느님과
사람들로부터 채워야 하는 그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잘못으로 인해 야기될 수 있는 영신적, 물질적인
악에 대해 회개하는 용기를 가짐으로써 하느님께로부터 위로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나 자신의 마음의 비움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는 가난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때에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다”(23절).

제2독서: 1코린 15,12.16-20: 주님의 부활이 보증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알아듣기 힘든 역설적인 것이지만, 사도
바오로는 그 보증으로서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고 있다. 가장 심한
박해를 당하신 그리스도께서는 부활의 영광을 입으셨다. 고통과
부활의 신비 안에서 우리는 오늘 복음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뜻에 배고프고 고통당하고
가난하게 될 수 있도록 나 자신을 끊고 살도록 노력한다면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잠시 조용한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며 우리 자신을 반성해 보기로 하자.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지금 굶주린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배부를 것이다. 지금
우는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너희가 웃게 될 것이다”(21절).
아멘!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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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초연히 떠나가는 수도자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2019년 다해 2월17일 연중 제6주일

초연히 떠나가는 수도자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사제나 수도자들의 소임 이동 시기가 되니, 초보 사제 때의 일이
기억납니다. 한 아동 보육 시설에서 그야말로 신명나게 사목에
전념하고 있었습니다. 하루 해가 짧을 정도로 해야 할 일이 많았고,
혈기왕성했기에 의욕이 넘쳐 뭐든 다했습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지상천국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도회 장상께서 갑자기 저를 부르시더니, 대뜸
하시는 말씀, “하던 일 즉시 정리하고, 비자 수속 마무리되는데로,
즉시 유학을 떠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마치 하늘이
무너져내리는 듯 했습니다.

즉시 ‘나만 바라보고 있는 저 아이들은 어떡하지?’ ‘내가 지금 빠지면
잘 운영되고 있던 이 시설, 순식간에 쫄딱 망할텐테’ 하는 걱정도
앞섰습니다. 그래서 ‘당장은 안된다. 한 일년만 더 있게 해달라.’고
졸랐지만, 씨알도 안먹혔습니다.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한 몇 년 떠나있었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그
시설을 방문했습니다. 속으로 ‘내가 없는 시설, 쫄딱 망했겠지?’
아니면 ‘문닫기 직전이겠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도착해 보니 웬걸!
그 시설은 제가 운영할 때 보다 훨씬 더 조직적이고 원활하게 잘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

이제 또 다시 또 다른 임지로 정처없이 떠나셔야 하는 분들, 너무
걱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내가 떠남으로 인해 한동안 여파도
있을 것이고, 어려움도 겪겠지요. 그러나 일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 사랑과 능력으로 모자람을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본격적인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도 발길 닿는 곳 마다 놀라운
기적과 업적을 드러내시자, 군중들은 집요하게 그분을 따라다니며
그분을 붙잡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놀라운 일을 행하신 다음에는 즉시
물러나셨습니다. 또 다른 곳을 향해 아무런 미련도 없이
떠나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들을 버려두신 채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마르코 복음 8장 13절)

떠나야 할 순간이 왔을 때, 아무런 미련도 집착도 없이, 훌훌 털고
초연히 떠나가는 수도자들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떠나야 할 순간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적미적 대는 모습은 또 얼마나
서글픈지 모릅니다. 지난 삶의 모든 것은 하느님 자비에 맡겨드리고,
또 다시 펼쳐주실 미래를 흥미진진하게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가야겠습니다.

오늘도 바리사이들은 무례하게도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해도 해도 너무한 무례한 요구에 깊이
탄식하십니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마르코 복음 8장 12절)

사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황당한 요구를 들어주는 것 식은
죽 먹기였습니다. 순식간에 불벼락을 내리는 것, 다양한 하늘의
이상징후를 보이는 것, 예수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ㅕ 그들의 불신앙을 신랄하게 꾸짖으십니다. 그들의 불신과
완고함에 큰 슬픔을 느끼시며, 그들을 뒤로 하고 떠나가십니다.

혹시라도 오늘 우리도 예수님께 특별한 징표를 집요하게 요구하는
것은 아닐까요? 얼토당토 않은 엉뚱한 기적을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는 털끝만큼의 노력도 하지 않은채 손을 놓고 있으면서,
하느님 편의 기적만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진정한 기적은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 안에 다 있습니다.
참된 기적은 우리가 정기적으로 들어가는 고백소 안에서 늘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참된 기적은 우리가 얼마나 먼저 변화하고
쇄신되고자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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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 20) |한상우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17일 연중 제6주일.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 20)

우리 마음이 하느님께 있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텅비어 있는 가난한 마음에 하느님을 담는 것이 행복입니다.
하느님 안에서는 존재자체만으로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행복은 지극히 관계적인 행복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행복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인지를 우리들에게 잘 가르쳐주십니다.
하느님 안에서 받아들임이 참된 행복입니다.
자신이 만든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가난함도 굶주림도 울음도 미움받음도 추방도 모욕도 중상도
예수님께서 겪으신 행복의 여정이었습니다.

행복은 예수님 그 자체입니다.
예수님은 행복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는 행복합니다.
하느님 안에서 의미를 찾고 하느님 안에서
사는 모든 이들은 행복합니다.
나의 뜻을 내려놓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진정 행복합니다.
하느님 나라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진정한 하나가 될 것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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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행복한 사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2월17일 연중 제6주일 (루카6,20-26)

행복한 사람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참으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지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이 시간 참된 행복에 눈뜨기를 기도합니다.

얼마 전 한 식당에 들렀는데 젊은 분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열심히
숫자를 조합하고 있었습니다. 궁금해서 무엇을 하시느냐고 물렀더니
복권번호를 선택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만원을 가지고 복권을 사고
그 당첨발표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너무 행복하다” 고 하였습니다.
숫자 조합을 하는데 한 시간은 족히 걸린다고 합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듣고 속으로 그 시간에 성경을 읽으면 얼마나 좋을까? 말씀 안에
행복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가?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어찌 되었든
그들은 복권에서 행복을 찾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시적인 행복감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찾아야
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은 참으로 행복하다.” 고 하였습니다.
성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 뿐입니다.” 하고 고백하였습니다. 사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

오래 전 입니다만 제가 꽃동네에 있을 때 만난 사람 중에 배영희
엘리사벳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19살에 뇌막념을 앓고 나서 앞 못
보는 전신마비장애인이 되신 분입니다. 그는 온 몸이 마비된 채
누워계셨는데 얼굴이 항상 맑고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미소가 너무
아름다웠습니다. 1999년 12월 서른 아홉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장애인이 된 후 ‘나는 행복합니다’, ‘소라의 꿈’,
‘당신이 머무는 곳’등 많은 영혼의 시를 쓰셨습니다. 그 중에
‘나는 행복합니다’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아무것도 아는 것 없고
건강조차 없는 작은 몸이지만 나는 행복합니다.

세상에서 지을 수 있는 죄악
피해갈 수 있도록 이 몸 묶어 주시고
외롭지 않도록 당신 느낌 주시니

말할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세가지 남은 것은 천상을 위해서만 쓰여질 것입니다.

그래도 소담스레 웃을 수 있는 여유는
그런 사랑에 쓰여진 때문입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이 자매님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신마비 장애인이요, 불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서 아주 행복한 삶을 사셨습니다.
사람들은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이 지배하는 데서 행복을 찾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천상 것을 추구하는 가운데
행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른 말씀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남들은 말할 것도 없고 스스로도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가난하고 굶주리고 울고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욕을 먹고
누명을 쓴 사람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들, 부요 하고 배부르고 웃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 받는
사람을 오히려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이해하기 힘든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사실 예수님시대를 보면
예수님을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그분을 열심히 따랐던 사람들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인정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를 갈망하였고 더 나은 세상에 대한 희망을 주님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그러나 부유하고 배부른 사람들, 소위 한자리 하는
사람들은 주님을 배척하고 결국은 십자가에 매달아 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은 구세주를 찾아 구원을 얻었고,
배부르고 등 따뜻한 사람은 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불행하게 보였던 사람들이 주님을 차지하였고 부하게 보였던
사람들은 재물과 권력, 그리고 악에 지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1독서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지만 주님께 신뢰를
두는 이는 복되다’ 는 말씀 그대로 입니다. 저주를 받는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벌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욕심으로 자기 파멸을
가져온다는 말씀입니다.

잠언30장 8절에서 9절의 말씀을 보면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약속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 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결국 참된 행복은 물질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신뢰를 두고
그분을 차지 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오늘 화답송의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 1,1-3).

여러분은 진정 행복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믿는다면 말씀대로 행하십시오. 그리하면 반드시
행복해질 것입니다. 주님을 차지 하십시오. 성모님께서도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5)으로서
행복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사물의 거죽만 보고 그것이 전부인 줄
압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하느님나라가 있고,
웃게 될 날이 있고, 받을 상이 크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곡식 단 들고 춤추게 될 날을 알기에 지금 눈물로 씨를
뿌릴 줄 압니다.

사실 오늘날의 불행은 모자람이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습니다.
넘치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며 감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고 남에게 행복해 보이려고 포장하다가 불행해 집니다.
여러분은 제가 행복해 보입니까? 예. 왜 행복할까요? 여러분을 만나서
행복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여러분도 저 때문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저를 보내신 하느님 때문에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한번 옆 사람 좀 바라보세요! 그분 때문에 행복하십니까? 예,
행복하시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지…….한번 쥐어박고 싶은 분도 계시고 때로는 밥맛이 떨어질
때도 있을 것이고, 안 봤으면 속이 시원할 것 같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그 사람을 통해서 나를 단련시키시고
다듬어 주셔서 행복하게 만드신다는 것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의 ‘눈이 밝은 사람은 종이 한 장에서 구름을
본다’ 고 하였습니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없고, 비가 없으면 나무가
없고, 나무가 없으면 펄프가 없고, 펄프가 없으면 종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현상만으로 행복과 불행을 단정 지을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렵고 고달프고 힘들더라도 부디 하느님
안에서 행복 하시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하루를 즐거워하려면 이발을 하고, 한 주간을 기쁘게 살려면
자동차를 사라. 그리고 한 달을 기쁘고 즐겁게 살려면 결혼을 하고
한해를 즐겁게 살려면 새집을 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생
즐겁고 행복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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