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0일 마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2-20 07:37:48    조회 : 233회    댓글: 0

▣ 2019년 다해 2월20일 [(녹)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창세기 8,6-13.20-22
복음 마르코 8,2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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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6주간 수요일

2019년 다해 2월20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안경을 착용한지 14년이 되었습니다. 근시와 난시가 함께 있어서
다촛점 렌즈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안경을 벗으면 운전도 힘들고,
눈이 부셔서 사람을 보는 것도 어렵습니다. 안경은 이제 저의 소중한
벗이 되었습니다. 생물학자들은 작은 것을 보기 위해서 전자 현미경의
도움을 받습니다. 전자 현미경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세포를
아주 쉽게 보여줍니다. 천문학자들은 아주 먼 곳에 있는 것을 보기
위해서 전파 망원경의 도움을 받습니다. 전파 망원경은 우리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별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안경, 현미경,
망원경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들에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안경, 현미경, 망원경을 가져도 볼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원망과 분노로 가득한
마음입니다. 헌신과 자비의 마음입니다. 시기와 질투의 마음입니다.
그런 것들을 보기 위해서는 다른 것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식별할 수 있는 안목입니다. 영원한 것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입니다. 그런 것을 보기 위해서는 매일의 삶을 성찰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길을 보여주는 이정표와 같은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의 선종 10주기를
추모하는 미사가 있었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은 시대의
징표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억울한
이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였고,
주님의 길을 따르는 사제였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교황 대사님,
주교회의 의장님, 평신도 대표의 추도사가 있었습니다. 모두들
김수환 추기경님의 삶을 돌아보았고, 그분의 삶을 기억하였고, 그분이
보여주신 길을 떠올렸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을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총대리 주교님께서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면서 김수환 추기경님을
추모하는 우리의 태도를 이야기하였습니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우리가 추기경님의 선종 10주기를 맞이하면서 그분을 그리워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분이 없는 빈자리를 아쉬워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하느님나라에서 김수환 추기경님은 우리에게 다른 것을
원하실 것 같습니다. 그리움과 아쉬움도 필요하겠지만 추기경님께서는
우리도 그렇게 살기를 바랄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우리의
이웃입니까?’라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강도를 당한 사람을 도와주고 치료해준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를 당한 사람의 이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학자에게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십시오.’ 그렇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우리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도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 10주기를 추모하는 우리의
자세가 되면 좋겠습니다.” 

비둘기가 마른 땅을 발견한 것은 아닙니다. 마른 땅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비둘기가 새로운 시작을 알려 준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린 노아의 안목이 새로운 시작이
된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는
사람에게는, 지금의 삶에 충실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주어지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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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6주간 수요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20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복음: 마르 8,22-26: 베싸이다의 앞 못 보는 사람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베싸이다 소경을 보게 해주시는 기적을
들었다. 좀 특이한 모습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를
치유해주신 것이 아니라, 군중을 떠나 마을 밖 조용한 곳으로 그를
데리고 가시어 치유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신 기적(7,31-37)과 비슷하다. 먼저 사람들이
예수님께 병자를 데리고 온다(7,32=8,22). 그리고 예수께서는 병자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다(7,33a=8,23a). 그리고 환부에 침을 바르신다
(7,33b=8,23b)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마르코 복음에서는 예수께서 기적을 행하시고는 기적의
이야기에 대해 입을 다물도록 명하신다. 오늘의 소경에게도 집으로
갈 것이지(26a) 마을로 들어가지 말라고 하신다(26b).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별난 기적장이로 소문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고난의 길을
가는 하느님의 아들로 남아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기적 사건을 소문내지 않도록 명하셨던 것이다.

옛날 어른들이 하던 일들이 생각난다. 아픈 상처에 침을 발라주는
예가 있었다. 잠침을 발라준다고 하는데, 자고 일어난 후 어머니들이
침을 아픈데 발라주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입에서 나오는 침이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한 것을
당신의 기적의 행위에서 반복하시면서 치유를 해주신다. 이 이야기는
다른 기적사화와 좀 다르다고 하겠다. 여기서 소경은 나무와 사람을
어렴풋이 보다가 차차 확실하게 보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도 하느님의 진리를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단번에 즉시
다 보게 되고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께 끊임없이 회개하면서 그분을 따르려고 하는 마음자세와
함께 매일의 자기의 노력과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끝까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일러주시는 말씀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예수님을 잘 알지 못하였었다. 즉 예수님을 올바로 보지를
못하는 소경들이나 다름없었다.

이 제자들의 눈을 뜨도록 해 주시는 의미가 베싸이다의 소경의 치유에
있다. 이 소경이 조금씩 보게 되었고 예수께서는 다시 그 눈에 손을
얹어 완전히 보게 해 주신 것처럼, 제자들의 신앙의 눈을 뜨게 하시어
당신을 완전히 잘 보고 당신을 따를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항상 어렴풋하게 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 자신도 베싸이다의 소경의 모습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의 신앙이 바로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눈을 뜨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을 통하여 노력한다면, 점차로 잘 보게 되고
이다음에는 당신을 따르는 자들을 위하여 준비한 모든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러한 희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여야 하겠다. 그것은 순간순간의
삶을 열심히 이어가려고 노력할 때에 점차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눈을
가지고 있으되 올바로 보지 못하는 우리에게 영적인 시력을 청하면서
기도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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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이 시대 또 다른 벳사이다!

2019년 다해 2월20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

이 시대 또 다른 벳사이다!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님께서 모든 고을에서 환영을 받으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분을 노골적으로 무시한 3대 대표 고을들이
있었는데,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하나, 예수님께서 세 고을을 각별히 생각하시며, 더 많은
기적들을 행하신 고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고을 사람들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람들, 틈만 나면 하느님을 외치는 사람들이 가장 하느님과
멀리 떨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벳사이다(Bethsaida)는 갈릴래아 호수로 흘러드는 요르단 강의
북동쪽에 위치한 어촌 고을이었습니다. 베드로 사도와 그의 동생
안드레아 사도, 그리고 필립보 사도 역시 벳사이다 출신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벳사이다는 불행하게 되었습니다. 철저하게
파괴되었으며, 이제는 겨자꽃과 잡풀만이 지천으로 무성한, 쓸쓸하고
음산한 폐허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벳사이다로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한 눈먼 사람을 만납니다.
지극정성으로 치유해주신 예수님께서는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면서,
한 가지 당부를 하십니다.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마르코 복음 8장 26절)

외관으로는 번성했지만 영적으로는 피폐한 고을, 살아있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은 고을, 끝까지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않는
타락한 고을, 상식이나 논리가 통하지 않는 비정상적인 고을
벳사이다로 들어가지 마라는 당부입니다.

나라 전체가 정신나간 일부 정치인들과 이성을 상실한 추종자들의
518 망언으로 떠들썩합니다. 그들이 무한반복 재생산해내는
터무니없는 망언들과 유언비어로 인해, 또 다시 깊은 상처를 받고
계시는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마음을 생각하니, 분노를 넘어
참담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고한 희생자들과 유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받고, 안그래도 쓰라린
상처위에 굵은 소금을 뿌리는 그분들은 정말이지 이성을 상실한
사람들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살아있지만 죽은 사람들,
결국 죽음과 멸망의 도시 벳사이다 사람들이 분명합니다. 그 마을로는
들어가지도 말고, 눈길조차 두지 말아야겠습니다.

모였다 하면 음모를 꾸미는 사람들, 입만 열면 뒷담화요 불평불만을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사람들, 영혼은 뒷전이고 육신만 남은 사람들의
집단 역시, 이 시대 또 다른 벳사이다입니다. 그런 고을로는 발길을
들여놓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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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
(마르 8, 25)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20일 수.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마르 8, 25)

무엇을 보고 무엇을 못 보며 살고 있는 지를 반성해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욕심이 빼앗아 간 시력을 되찾아 주십니다.
찬미해야 할 주님의 아름다운 선물입니다.
마음의 눈을 감고 오래도록 살았습니다.
마음의 눈을 열어주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묶여 있던 것을 풀어주십니다.
마음의 자리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의 치유는 마주보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으로 마주보며 우리는 아름다운 기쁨이 됩니다.
회복되어야 할 우리의 시력 우리의 사랑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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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무엇이 보이느냐?|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2월20일 연중 제6주간 수요일(마르8,22-26)

무엇이 보이느냐?

눈 먼 사람이 보게 된다면 얼마나 큰 기쁨이겠습니까? 그러나 보고
싶은 것도 많고, 볼 것도 많지만 정작 보아야 할 것을 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보다’라는 동사는 단순한
시력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와 깨달음’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생명의 빵’이신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빵이 없다고 걱정하였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마르8,18.21)는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참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눈 먼 이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하고 물으셨습니다. 침은 생명의 힘인 성령을
상징하고 성령은 마음을 흔들어 일깨우는 역할을 합니다. 손을 얹은
행위는 치유의 능력, 성령의 힘이 전달되었음을 알려줍니다.
“무엇이 보이느냐?”는 말은 단순히 육안으로 보이느냐? 의 질문이
아닙니다. 새로운 세상이 보이느냐? 능력을 지닌 구세주가 보이느냐?
는 물음입니다. 그렇다면 내면의 치우가 먼저입니다.

우리는 흔히 눈을 ‘육안’, ‘심안’, ‘영안’으로 구별합니다.

육안은 그야말로 밖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보는 눈입니다. 현상을
보는 눈도 중요합니다. 검은 것은 검게 보고, 흰 것은 희게 봐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눈도 필요합니다.

심안은 마음의 눈입니다. 품은 생각을 드러내는 눈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서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똑같은
것을 보아도 어느 사람은 긍정적으로 좋게 보고, 어떤 사람은 굽은
눈으로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표출하게 됩니다.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눈은 네 몸의 등불이다. 네 눈이 맑을 때에는
온몸도 환하고, 성하지 못할 때에는 몸도 어둡다. 그러니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아닌지 살펴보아라”(루카11,34-35).

우리는 각자의 직분에 맞는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는
부모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하고 자녀는 자녀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스승은 스승으로서의 마음을, 제자는 제자로서의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성직자는 성직자로서의 마음을, 수도자는
수도자로서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맑은 눈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영안은 신앙의 눈입니다. 영안은 겉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보는
눈도 아니고, 내 마음의 잣대로 판단하는 눈도 아닙니다. 영적인 눈은
하느님의 말씀에 비추어진 눈이요, 내 눈으로, 내 마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눈으로,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눈입니다. 그야말로
“당신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이옵니다.”
(시편119,105) 영안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으로부터
빛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시니 말씀을 통하여 능력과 지혜를 받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눈 먼 이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 사람들을 보았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을 걸어 다니는 나무처럼 보았습니다. 이것은
평상시에 익숙해져 있는 대로 본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다시
손을 얹으시자 똑똑히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겉으로만 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능력은 아버지 하느님 안에서 행하여지고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다는 깨달음을 얻기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멉니다.

예수님께서는 눈을 고쳐주신 다음 “저 마을로는 들어가지 마라.”
(마르8,26)고 하셨습니다. 저 마을이 무슨 마을일가요? 바리사이와
헤로데의 누룩이 만연하는 마을입니다. 어둠과 죽음의 그늘진
곳입니다. 그 마을로 들어가면 또다시 예전처럼 죄에 물들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니 그 마을로 가지 말라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이
하신 일이 마음이 굽은 사람들의 눈에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주님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늘의 뜻에 따라 하였지
사람들에게 보이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육안의 눈을 넘어 마음의 눈을 뜨고, 영적인 눈을 뜨기까지 사랑과
정성으로 기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시면 “예, 주님, 뚜렷하게 보입니다.” 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미루지 않는,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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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2월 20일 (수) - 함께하시는 하나님

오늘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시편 139편 1절 말씀에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게
하시며 나의 모든 길과 눕는 것을 살펴 나의 모든 행위를 아십니다.
그리고 내 혀의 말도 다 아시며 나의 앞뒤를 둘러싸고 하나님의 영적
손으로 우리를 안수까지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르는 것이 없으며 못하는 것이 없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우리가 하늘에 올라가도 계시고 지옥에 자리를 펴도 거기 계십니다.
새벽 날개를 치고 바다 끝에 가도 주의 손이 인도하여 우리를 붙들어
주십니다.

흑암중에도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내 내장을 지으시고 모태에서
나를 만드셨습니다. 정말 나를 지으신 하나님은 신묘막측한
분이십니다.

내 생각을 다 아신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세어보려고 해도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아 셀 수 없습니다. 오늘도 불꽃같은 눈동자로
함께하시는 하나님 바로 그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하는 여기에도 함께하십니다. 이 자리에
계십니다. 하나님 결코 우리처럼 가방 메고 출장가지 않으십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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