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4일 사랑을 받기보다는 주려고 애쓰는 신앙인이 되어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2-24 06:16:19    조회 : 224회    댓글: 0

▣ 2019년 다해 2월24일 [(녹) 연중 제7주일]

제1독서 사무엘기 상권 26,2.7-9.12-13.22-23
제2독서 코린토 1서 15,45-49
복음 루카 6,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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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7주일

2019년 다해 2월24일 연중 제7주일

예전에 초등학교에서 선생님이 이런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눈이
녹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이들의 대답은 다양했습니다. 물이 됩니다.
길이 지저분해 집니다. 스키장에 가지 못합니다. 그런데 한 아이가
이렇게 말을 했다고 합니다. “봄이 옵니다.” 봄이 오는 것을 눈이 녹는
모습에서 볼 수 있다면 우리들의 마음은 세상을 아름답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봄의 따사로운 햇살에 얼음이 녹듯이, 우리들의
이기심과, 욕심, 교만함이 녹아내려 하느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어릴 때 이솝우화를 읽었습니다. 삶의 지혜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자기의 욕심만 채우려는 이야기로는 서로의 집에 초대한 황새와
여우의 이야기입니다. 여우는 음식을 차렸는데 넓은 쟁반에 먹을 것을
마련하였습니다. 황새의 긴 입으로는 먹기 힘들었습니다. 여우는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기분이 나쁜 황새도 여우를 초대하였습니다.
이번에는 목이 긴 병에 음식을 담았습니다. 여우의 짧은 입으로는
먹기 힘들었습니다. 황새는 긴 입으로 병에 있는 음식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황새와 여우의 이야기이지만, 우리의 삶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당리당략으로 국민의 이익과 국가의 미래를
외면하는 일부 정치인들이 있습니다. 기업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여기며 갑질을 하는 일부 기업인들이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일부 종교인들이 있습니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교육이기보다는 교육을 돈벌이로 여기는 일부
교육인들이 있습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릴 때 국어책에서 읽은 의좋은 형제의 이야기도 있습니다. 밝은
달빛아래 형제가 서로를 위한 마음을 알고 보듬어 주던 그림이
생각납니다. 추수를 마치고 형은 동생 생각을 합니다. 이제 막
결혼해서 필요한 것이 많은 동생을 위해서 형은 자신의 볏단을 동생의
논으로 가져다줍니다. 동생은 조카들이 많은 형님을 위해서 자신의
볏단을 형의 논으로 가져다줍니다. 지금도 초등학교 국어책에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 이야기는 계속 있으면 좋겠습니다. 국어책의
이야기지만, 우리의 삶에서 가끔은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밤하늘은 별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처럼 이런 사람이 있어서 세상은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육성회비를 못내는 학생을 위해서 기꺼이
육성회비를 내 주셨던 선생님이 있습니다. 평생 수집했던 귀한
문화재를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기증하는 기업인이 있습니다. 빈병을
모으고, 폐지를 주워서 어렵게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선뜻 내주신
어르신도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선행을 베푸는 가슴이 따뜻한
이름 모를 이웃도 있습니다. 

제가 아는 한 교우 분의 이야길 할까 합니다. 그분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손자와 함께 여의도의 방송국엘 가던
길이었습니다. 아들이 방송국의 PD였습니다. 화창한 봄 날 여의도를
걸어가던 할머니에게 엄청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술에 취한
젊은이가 차를 운전하다가 인도를 향해 돌진하였고 그만 손자가 그
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젊은이는 감옥에 갇혔고,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할머니가 감옥엘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젊은이를 면회하면서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록
당신 때문에 나의 손자가 죽었지만 난 당신을 용서합니다.”  

그 할머니로부터 용서를 받았던 그 젊은이는 진심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그 뒤로 교리를 배워 세례도 받고 교도소 안에서도 평온한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서 말씀을 통해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이야길 듣게
되었습니다. 또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사울을 용서하는 다윗의 모습도
보았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일이 육적인 마음만으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적인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우리를 힘들게 하고 우리를 미워하며 우리를 업신여기는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나를 미워한 사람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이유 없이 나를 헐뜯고 나를
비난하고 욕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오늘
용서할 수 있도록 아니 더 나아가 사랑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했으면
합니다. 또한 나의 시기와 질투 나의 욕심과 교만으로 남을 욕하거나
비난하고 헐뜯은 적은 없었는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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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조건 없는 이웃 사랑 /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24일 연중 제7주일: 다해: 조건 없는 이웃 사랑

지난 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가치관이 바뀌어 진정 ‘가난한 마음’으로
축복을 가질 수 있는 혁명적인 말씀을 들었는데,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든 미워하든, 우리에게 선을 행하든 악을 행하든 상관없이 다만
이웃이라는 이유 때문에 다른 사람을 찾으라는 이 사랑의 선언도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늘날 이기적이고
물질적인 가치관이 중요한 이 세상에서 이와 같은 조건 없는 사랑의
증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오늘 복음은 가르치고 있다. 이웃에
대한 색안경을 벗고 그를 사랑으로 대할 수 있다면, 그를 순전히
우리에게 손해만 끼치는 상대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제1독서: 1사무 26,7-9.12-13.22-23: 다윗이 사울 왕을 살려줌

이 사랑의 능력의 예가 1독서에 나타난다. 다윗은 정병 3천 명을
거느리고 그를 죽이러 온 사울 왕을(1사무 26,2)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았지만 목숨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용서하면서 사울
왕에 대한 심판을 하느님께 맡긴다. “야훼께서는 누구든지 참되게
살기만 하면 그대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야훼께서 임금님을
제 손에 붙이셨지만 저는 손을 댈 마음이 없었습니다. 임금님은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이 아니십니까?”(23절).

여기서 사울은 다윗의 적이며 원수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이
원수라는 사실을 넘어 사울이 ‘야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분’,
즉 이스라엘의 합법적 대리자임을 믿고 사울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계획을 보고 있다. 이것이 그의 하느님께 대한 신앙이라고 하겠다.
다윗은 자신의 신앙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긍정적인 태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사울로 하여금 어리석은 사악함을 극복하고 하느님을
만나게 한다. 이것은 오늘 복음의 예시로 보인다. 즉 오늘 복음의
말씀이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거나 이상으로만 가능하다고 할
수 있으나,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이미 그와 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복음: 루카 6,27-38: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복음의 이 특별한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세 대목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대목(27-31절)은 가장 강하고 선동적이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주고...
누가 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주고, 누가 겉옷을 빼앗거든
속옷마저 내어주어라. 달라는 사람에게는 주고 빼앗는 사람에게는
되받으려 하지 말라”. 원수에 대한 사랑이다. 이 사랑은 일반적인
자비의 마음이 아니라, 적개심을 능동적인 사랑의 구체적인 행위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그들을 축복하고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기를 요구한다(28절). 이렇게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앞에서 변호해줄 수 있다는 것은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고”
(로마 12,21) 죄악과 증오의 폭력을 사랑으로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에 그리스도인은 인간들 사이에 새로운 사회생활을
창조해 나갈 수 있다. 오로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창조할 수 있는
성실한 사랑만이 비비 꼬여있는 폭력의 형태를 부숴 버릴 수 있고
인간관계에 깊이 박혀있는 악의 뿌리를 뽑아버릴 수 있다.

두 번째 대목(32-36절)은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따라야 하는 하느님 사랑이 순수한
무조건적인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이 바로 창조적 사랑이다.
“너희가 만일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칭찬 받을 것이
무엇이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한다...너희는
원수를 사랑하고 남에게 좋은 일을 해주어라...그러면 너희가 받을
상이 클 것이며 너희는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가 될 것이다. 그분은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32.35-36절).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사람만 사랑한다면 그것은 상호교환에
불과하고 상업적인 행위이고 계산이 들어있는 사랑의 유사품에
불과하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하느님의 사랑은 이해타산이 없다.
하느님은 착한 사람들과 그 은혜를 아는 이들에게 하시듯이
“은혜를 모르는 자들과 악한 자들에게도 인자하시다”(35절).
우리들이 이 사랑을 실천하려 노력하며 그분이 보여주신 조건 없는
무한한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능력을 재생시켜 감으로써 “지극히
높으신 분의 자녀들”(35절)이 될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처럼 사랑할 수 있고
또 그러한 사랑에로 초대받은 사람들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실천한 사랑은 더욱 충만하게 우리에게로
되돌아올 것이다. 이에 대해 세 번째 대목(37-38절)이 말해주고 있다.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러면 너희도 비판받지 않을 것이다. 말에다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후하게 담아서 너희에게 안겨주실 것이다.
너희가 남에게 되어주는 분량만큼 너희도 받을 것이다”. 자녀들은
자기 형제들에게 베푼 사랑에 대해 하느님께로부터 갚음을 받는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은 이 무조건적 사랑의 원인도 되시고 모델이시며
내용이 되신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온전히 혼신을 다
해 사랑할 때 그 사랑은 이미 보상을 받는다. 그러한 사랑을 통해
하느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랑의 문화를 이루라고
바오로 6세 교황께서는 말씀하셨다. 사랑의 유일한 원천이신 하느님을
거부하는 곳에는 사람들이 서로 서로에게 위험한 존재로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매일 신문의 사회면의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는 알 수
있다.

제2독서: 1코린 15,45-49: 하늘에 속한 그분의 형상을 지닐 것이다

제2독서는 육체의 부활에 관한 내용이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우리가 비록 세상에 살고 있지만,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고 그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자녀로서
그 아들의 모습을 갖게될 것이고 그 모습을 이루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닮게되고
하느님의 아들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마땅히 이러한 삶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어야
한다.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적개심을 품게 하는 사람들을 위해
기도로 사랑하기 시작하여 다윗과 같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사랑으로 대해줄 수 있는 삶을 노력하며
은총을 구하도록 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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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한 원수 사랑

2019년 다해 2월24일 연중 제7주일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느님의 힘으로 가능한 원수 사랑

원수(怨讐)란 말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요즘은 ‘웬수’, ‘평생 웬수’란
말을 더 자주 사용합니다. 원수란 한 마디로 적(敵)을 의미합니다.
내게 치명적인 손해를 끼쳐 사무치는 원한을 맺히게 한 사람입니다.

조금 더 범위를 넓혀 생각해보니 이런 사람들도 원수에 포함시킬 수
있겠습니다. 내게 깊은 상처를 준 사람, 견딜 수 없는 수모를 준 사람,
그래서 대면하기 껄끄러운 사람, 같은 식탁에 앉아 밥 먹기 싫은 사람,
자다가도 얼굴을 떠올리면 심장이 벌렁벌렁 뛰게 만드는 그 사람, 내
인생에 매운 고춧가루를 뿌린 사람, 틈만 나면 내 인생길을 가로 막는
사람...

결국 원수는 멀리 있지 않고 아주 가까이 살아가는 존재들이군요.
원수는 어느 다른 하늘 아래 있는 존재들이 아니라 내 가정 안에, 내
직장 안에, 내 공동체 안에, 나와 같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가운데
버젓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비하신 주님께서 바로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 원수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상종하기 싫은 사람이라고
안면몰수하지 말고 먼저 다가가서 인사하라고 권고하십니다. 내
마음에 쏙 드는 사람만 사랑하지 말고 꼴 보기 싫은 그 인간도
사랑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네 뺨을 때리는 자에게 다른 뺨을 내밀고, 네 겉옷을
가져가는 자는 속옷도 가져가게 내버려 두어라.”
(루카 복음 6장 27~29절)

예수님의 당부말씀을 하나하나 따지고 보니 해도 해도 너무한 요구를
하고 계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건 뭐 속도 밸도 없는
사람으로 살아가라는 말씀 아닌가요? 그저 바보 멍청이처럼
살아가라는 말씀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정말이지 인간의 힘,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을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듯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아무나 실천할 수 없습니다.
‘과거의 나’를 탈피할 때, ‘나’라는 질그릇 안에 들어있는 과거의
자아를 완전히 비워낼 때 실천 가능한 가르침입니다.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하느님화’될 때, 인간적 관점을 버리고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원수를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참으로 나약하고 부족하며 죄인인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자취’가 남아있고 ‘하느님의
인호’가 아로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비참하지만 하느님께서
위대하시기에 우리는 성장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힘입어
인간의 비루함과 옹색함을 벗어나 광활한 사랑의 평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원수조차 사랑할 기적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진짜 원수는 사람이 아니라 죄와 사탄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늘 우리 곁은
졸졸 따라다니는 ‘평생 웬수’ 같은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한 세상 열심히 살아가다보니 어느 순간 그 ‘웬수’가 다르게
보일 때가 있더군요. 그 순간은 그의 내면에 아로새겨진 깊은 상처를
확인하는 순간이었습니다. 앞에서는 있어 보이려고 기를 쓰는 그의
쓸쓸하고 허전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그의 말 못한 사정을
알게 되는 순간입니다. 뒤돌아서서 흘리는 그의 눈물을 바라보는
순간입니다.

그 순간, 나도 나약한 한 인간이지만 그도 나약한 한 인간이로구나,
그때 내게 준 괴로움이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표현이었구나, 좀 더
사랑해달라는 손짓이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되더군요.

원수에 대한 사랑, 참으로 어려워 보이는 일이지만 그 사랑이
실현되는 곳에 놀라운 기적과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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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24일 연중 제7주일.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 28)

셀 수 없이 수많은 용서를 받으며 살아온 우리들 삶입니다.
학대하는 자들또한 하느님께서 만드신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짧디 짧은 우리들 삶입니다.
잠시 쉬어가는 우리의 시간입니다.
사랑도 미움도 연민과 학대도 안쓰러운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사랑과 미움이 합성된 삶을 반복하며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미워하면서도 된장찌개를 끓이는 우리들 일상입니다.
미워하는 것이 더 고통임을 깨닫습니다.
미움도 죽어야 사랑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로 다시 길을 만드십니다.

서로의 허물을 판단하지 않고 용서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미워하는 원수는 누군가에게는 가장 소중한 사람으로
서 있습니다.
힘겹지만 복음은 삶을 교정하기 위한 십자가를 주십니다.
십자가가 있기에 기도하게 되고 기도를 통해 낮아지게 됩니다.

힘들기에 가치가 있고 아프기에 성숙이 있는 것입니다.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모두를 끌어안습니다.
먼저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고 먼저 하느님께서 용서하셨음을
기억합니다.
우리모두는 기도가 필요하듯 용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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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녹) 연중 제7주일 / 이성근 사바 신부 강론 묵상
 
2019년 다해 2월24일 연중 제7주일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실천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가지 말씀을 하시지만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와 “네 원수를 사랑하여라.”
입니다.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도 정말 이해하기 어렵지만, 원수까지
사랑하고 원수가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은 참으로
이상하고, 충격적이고, 역설적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보통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보다는 오히려 악에 맞서서 악과 싸우고,
악을 응징함으로써 정의를 세워야 한다는 논리가 훨씬 마음에 와
닿고 실천하기도 더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웃 사랑과 함께 원수 사랑에 대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은
역사 안에서 언제나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이 가르침이
있었기에 사회 안에서도 인권이 존중되고,

인간의 존엄성이 지켜져 왔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를 내세운 폭력과 권력은 오히려 인권과 인간 존엄성을 파괴하는
부작용을 낳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실현하신 하느님 나라는 결국 악에 대한 선의 승리를
뜻합니다. 물론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곧 원수를 용서하고, 원수가
원하는 대로 해 주고,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는 그 모든 것이 어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하시며, 또 “주어라. 그러면 너희도 받을 것이다.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 되어 너희 품에 담아 주실 것이다.”
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남에게 베푼 대로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이며,
우리가 준 것보다 더 후하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사랑을 받기보다는 주려고 애쓰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 이성근 사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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