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27일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2-27 07:11:47    조회 : 230회    댓글: 0

▣ 2019년 다해 2월27일 [(녹)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제1독서 집회서 4,11-19
복음 마르코 9,3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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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7주간 수요일

2019년 다해 2월27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꽃잎이 떨어져도 꽃은 지지 않네.’라는 책을 다 읽었습니다. 인류의
역사에 많은 현인들이 있었습니다. 등불과 같았고, 이정표와 같았고,
북극성과 같은 분들이 있었습니다. 육신이라는 옷을 입고 이 세상에
왔다가 육신이라는 옷을 벗고 영겁의 시간 속으로 갔습니다. 그런
육신의 꽃잎은 떨어졌지만 그분들의 말과 그분들의 삶은 향기가 되어
여전히 우리에게 등불이 되고 있습니다. 선입견과 편견을 아집에
가두어 두고 살아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가진 것처럼
교만하였지만 사실 꽃잎이 지면서 꽃까지 말라버린 사람들입니다.
길가의 돌부리처럼, 바다의 암초처럼 넘어지게 하고, 부서지게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법정스님은 마지막까지 가지고 싶은 책이 있다면 ‘화엄경과
어린왕자’라고 하였습니다. 안식년을 지내면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이
생각납니다. 마치 오래된 사진첩을 보면서 지난날을 돌아보듯이 제
젊은 날을 일깨우던 책들입니다. ‘어린왕자,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집 없는 천사,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산 바람 하느님 그리고 나’가 생각납니다. 최근에 읽은 책이
있다면 ‘무탄트 메시지, 자발적 진화, 홀로그램 우주, 우주 이야기,
어제까지의 세계’와 같은 책입니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흙에서
태어나지만, 우리의 영혼은 온 우주와 함께하면 좋겠습니다. 땅, 소유,
자본, 명예, 권력이라는 것들을 따라가는 삶이지만 우리의 영혼은
문학, 예술, 역사, 신화, 영혼을 추구하면 좋겠습니다. 세상이라는
꽃잎은 떨어져도 영혼이라는 꽃은 지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해와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떨어지는 꽃잎도, 지는 태양도
아름답게 보입니다. 세상 모든 것이 사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편견과 아집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는 것도,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도,
이방인들과 대화를 하는 것도 논란이 됩니다. 

반만년 역사를 함께한 한반도는 분단 반세기를 넘었습니다.
국제무대에서 한반도기를 들고 함께 입장하는 것, 남과 북의 예술인이
서로를 방문해서 공연을 하는 것, 이산가족들이 만나서 그리움을
나누는 것, 금강산 관광, 백두산 관광을 하고, 개성공단에서 남과 북이
물건을 만들어서 파는 것, 판문점을 넘어 수학여행을 가고, 북한의
노동자들이 남한에서 일하는 것은 진정 이룰 수 없는 꿈일까요? 그
꿈을 막는 것은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일까요? 

박노해님의 시가 생각납니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희망찬 사람은 그 자신이 희망이다. 
길 찾는 사람은 그 자신이 새길이다.
참 좋은 사람은 그 자신이 이미 좋은 세상이다.
사람 속에 들어 있다. 사람에서 시작된다.
다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런 희망을 이야기 하십니다.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부터 베트남의 하노이에서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하시어 한반도에 평화와
화합이 시작되는 회담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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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27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이웃을 판단하지 말라.

복음: 마르 9,38-40: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사람을 못하게 하였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때 예수님은 “말리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는 사람이 그
자리에서 나를 욕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사람은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39-40절)하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져야할 관대함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을 행한다고 한다면 예수님을 마음으로 따르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이미 하느님 자비의 이끄심을 받아
그분께로 나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 사랑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을 향하여 가는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며 한 ‘형제’이고 한 편이다. 교회 밖에서 이런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도 가짜는 얼마든지 있다.

하느님은 명백하게 알지 못하지만, 아마 이것은 우리의 착각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자신의 양심에서 울려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에
맞는 삶을 통하여 인간을 위해 세상의 변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즉 그리스도 신자라는 이름은 갖지 않았지만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숨어있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그런 사람이 겉으로는 주님의 제자로 보이지는 않지만 어떤
면에서 참된 예수님의 제자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을 오늘 복음의
제자들처럼 무조건 편견을 가지고 대하고 판단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친구로 협력자로 받아들이며, 그들에게 우리의 신앙을 완전히 알게
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여야 할
선교이다.

우리는 가끔 죄인에게는 벌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교회를
멸시하는 사람들을 이방민족으로 여기고, 걸림돌이 되는 지체를
교회로부터 떼어 내라고 한다. 이들은 때가 되기도 전에 가라지를
솎아 냄으로써 교회의 평화를 해친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도의
일치에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바로 이러한 오류에 눈먼 그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류에 빠져서는 안 된다.

가톨릭교회는 개신교나 다른 종교가 우리와 함께 있지 않고 우리를
거슬러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분열과
평화와 진리를 거스르는 교설을 비판하고 금지하는 것이다. 분단과
분열을 일으키고 평화를 거스르는 면에서 그들은 우리를 반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모아들이지 않고
결국 흩어버리는 자들이다.

하여간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모습을 닮은
사람들이며, 우리에게는 사랑의 대상이다. 우리의 삶을 통하여
진정으로 모든 이에게 너그러운 자 되어 그들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기도하자.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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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2019년 다해 2월27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가장 지혜로운 사람은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는 지혜에 대한 새로운 개념과 지평을 다시
한번 확장시키게 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마태오 복음11장 25~26절)

이 선언으로서 예수님께서는 지혜에 대한 종래의 고전적인 가르침,
고정관념을 180도 완전히 뒤집어 버리셨다고 생각합니다.

이로써 그간 가방끈이 길어, 나름 지혜롭다며 ‘개폼’ 잡고 다니던
사람들이 아주 부끄럽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오랜 세월 청춘을
바치고, 혼신의 힘을 다해 쌓아올린 세상적, 학문적 지혜는 이제 많은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핬습니다. 그들이 보물처럼 소중히 여겼던
인간적 지혜가 영원한 생명과 구원, 참 진리를 얻는데는 오히려 큰
장애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자칭 지혜로운 사람들, 엄청난 학문적 성취를 통해
한 분야의 최고봉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때로 유치원생 보다 못한
사고를 하는 분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기에 요즘 와서 자주 생각하는 것이 편식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한 과목에 집중하지 말고, 여러 과목에 골고루
신경써야겠다는 생각입니다.

우리가 그토록 기를 쓰며 쌓아 올리고자 노력하는 학문적, 세상적,
인간적 지혜 위에, 인문학적, 영적, 정신적, 신앙적 지혜가 가미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첫째 독서로 봉독한 집회서에서는 참된 지혜가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집회서는 유다교 문학의 지혜 장르를
보여주는 탁월한 본보기가 되는 성경입니다. 집회서에서 ‘소피아’로
인격화된 지혜는 자신과 하느님의 영원한 관계에 관해 설명하고,
모세의 율법과 자신을 동일시합니다.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지혜에 대한 개념은 대폭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간 자칭 지혜롭고 슬기로운 존재라고 자처했던
사람들, 비본질적인 것, 가시적인 것에 집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 내면적인 것을 놓쳐버린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지혜로움의 끝판왕이라며 자부심이 대단했지만 사실,
지혜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스스로 지혜의 최첨단을
걷고 있다고, 사실 가장 우둔하고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가장 똑똑한 척 했지만, 사실 가장
멍청한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은 순식간에 지나간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영영세세 지속되는 또 다른 세상, 하느님 나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식한 사람입니다.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 가장 큰 은총의
선물임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함께 지상천국을 건설할 수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혜로운 사람은 나 자신의 부족함을 기꺼이 수용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하고 부끄러움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굳게 믿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을 주님께서
거처하시는 거룩한 성전으로 여기고, 나 자신에 대해서도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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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막지 마라.(마르 9, 39)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2월27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

막지 마라.(마르 9, 39)

그 어떤 것도 고집하거나 독점할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다양한 빛깔과 향기로 하느님 사랑을 드러냅니다.
우리들또한 서로의 좋은 점을 인정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입장과 주장만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좋은 일들을 많이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들은 함께 많이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삶이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는 삶입니다.
니편 내편에서 벗어나 예수님을 향하는 성숙된 삶이 중요합니다.
성숙한 신앙은 언제나 힘들고 고통받는 이웃들을 향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사랑의 실천으로 이끕니다.
사랑의 실천을 그 어떤 것으로도 막지 마십시오.
유대와 연대를 통한 사랑의 실천이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구원의 방법입니다.
막지 말고 응원해주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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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이기주의를 넘어서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2월27일 연중 제7주간 수요일(마르9,38-40)

끼리끼리의 이기주의를 넘어라.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마르9,35).라고 하시며 제자들에게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것을 당부하시고는 여러 가지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공동체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신들만을 위해
똘똘 뭉친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피아 집단이나
조직 폭력단도 자기들끼리는 피를 나눈 형제처럼 서로 극진히
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우애는 자기 집단의 경계를 넘지 못합니다.
제자들의 삶은 이들과는 달리 이웃에 대한 사랑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요한이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하고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막지마라.”
고 이르셨습니다. 그 이유는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다고 말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고,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비록 당신 제자의 무리에 속하지 않더라도 인간구원이라는 당신의
사명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긍정적으로 여기신 것입니다.
나와 조금 다르다고 해서 그것을 막아서서는 안 됩니다. 세상은 정말
막아야 할 것은 막지 않고 도리어 막지 말아야 할 것에는 많은 제한을
두는 현실입니다. 예수님께로 향한 시선을 자신에게로 돌리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예수님을 반대하는 사람입니다.

인간은 편 가르기를 좋아해서, 어떤 사람이 자기편에 속하지 않으면
그 사람이 좋은 일을 해도 달갑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강합니다.
‘나는 해도 되지만 너는 하면 안 된다.’는 특권의식이나, ‘우리는
되지만 너희는 안 된다.’는 편 가르기를 합니다. 그러나 저희를
따르는 사람인가 아닌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있다면
예수님의 일을 하는 것이고, 그것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에 협조하는 사람이라면, 내편 네 편 가르지 않고
존중하는 개방된 자세를 갖춰야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희”라는 것은 집단 이기주위를 낳을 수도 있고, 사실
교회는 “나”나“저희”를 따르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야지 성직자나 수도자, 영적지도자에
매이면 불행해 질 수 있습니다.

각 본당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단체가 있는데 독선과 편
가르기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저희 본당, 저희
단체, 저희 공동체....’,성경을 공부하면서도 공부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서로 편 가르기를 하는데, 이는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대끼리, 꾸르실료는 꾸르실리스타끼리, 성령기도회는
성령기도회끼리, 빈첸시오회는 빈첸시오회끼리, 레지오 마리애는
레지오 마리애 단원끼리..등등 편을 가르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스스로 적을 만들고 울타리 안에
갇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권을 움켜쥐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폐쇄적인 집단이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개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막지 마라.”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선한 이에게나 악한 이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시는 하느님같이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있는 사람이고 모든 이를
포용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적을 만들
것이 아니라 그를 받아들이고 그가 하는 좋은 일을 칭찬해 주는
넉넉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을 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사랑해야 할 형제로
보셨습니다. 우리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그야말로 미래의 고객입니다.

‘가톨릭’은 보편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다는 의미입니다. 모든 것을 포용한다는 뜻입니다. 열린
마음으로 주님을 증거 하는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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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2월 27일 (수) - 군중 속에서 기도 굴로

오늘은 “군중 속에서 기도 굴로”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민수기 14장 10절 말씀에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군중 심리에 휩쓸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대긍정의 말을 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을 오히려 돌로 치려고 합니다.

군중들의 휩쓸림은 자신들의 의사와는 정말 관계없이 휩쓸려 갑니다.
마치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다 보면 그 많은 사람들이 이동을 할 때
개개인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군중들에게 떠밀려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지요. 그래서 성도들은 군중, 그 안으로 들어가지를 말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들은 어떤 문제가 있으면 군중들 속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 굴속에 들어가야지요. 문제 해결은 기도로
해결해야지 군중들의 힘이나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해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군중들의 힘으로 문제해결을 하려고 한다면 사람이 많은 곳에
기적이 넘쳐나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나 혼자 기도 굴에서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산기도 속에서 사명의 음성을
듣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놀라운 하나님의 기적, 오히려 소수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역사가 더 많이 일어난다는 사실,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분노의 군중 속으로 들어가지 말고 조용한 기도 굴속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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