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3일 선한 사람은 선한 말을 내어 놓습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3-03 06:28:12    조회 : 233회    댓글: 0

▣ 2019년 다해 3월3일 [(녹) 연중 제8주일]

제1독서 집회서 27,4-7
제2독서 코린토 1서 15,54-58
복음 루카 복음 6,3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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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8주일

2019년 다해 3월3일 연중 제8주일

동창들이 제게 정해준 별명이 있습니다. 삼국지에 나오는
‘조자룡’이라고 불렀습니다. 같은 성이라서 그런 것도 같고, 제가
신학교 매점에서 일을 해서 그런 것도 같습니다. 매점 열쇠를 제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인 것도 같습니다. 제게는 과분한 별명이지만
조자룡처럼 의리 있고, 충실하며, 맡겨진 일이 있다면 잘하고
싶었습니다. 가까운 선배와 후배가 저를 기억하는 것은 저의 체력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운동 신경이 없어서 축구나 농구를 거의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저를 기억하는 것은 저의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자치회장에 출마하는 동창신부가 제게 지지연설을 부탁했습니다.
저는 이사야 예언자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과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라는 시를 인용해서 지지연설을 하였습니다. 자치회장이
되었던 동창신부는 제게 곱창볶음을 사주었습니다. 전교생이 성당에
모여서 저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다지 떨리지 않았던 기억입니다.
제가 자치회장이 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또 한 번 선배와 후배가 저를 기억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도 저의
말이었던 것 같습니다. 교황님의 권고로 사제성화의 날을 지내게
되었고, 제가 속한 지역에서 사제성화의 날에 발표할 사제를 정해야
했습니다. 사제가 사제 앞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다들 사양하였습니다. 작은 성당에서 사목하던 저는
발표하면 응분의 사례를 한다는 말에 혹해서 발표를 하였습니다.
제목은 지금 생각해도 너무 거창했던 ‘사목이란 무엇인가?’였습니다.
신문에서 보았던 한시(漢詩)를 몇 가지 정리하였고, 본당에서 있었던
일들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학문적인 이야기가 아니고, 저의 삶을
나누었기 때문에 신부님들은 재미있게 들어주었습니다. 그날 발표한
것이 계기가 되었는지 저는 그 뒤로 사목국 교육담당 업무를 맡게
되었고, 원하지는 않았지만 이곳저곳에서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족한 저의 말을 들어주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제게 말할
기회를 주신 분들에게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 저의 말이 부담이
되었던 분들이 있다면 용서를 청합니다. 돌아보면 저는 제가 한 말을
저의 삶으로 실천하지 못하였습니다. 부끄럽고, 아쉬운 날들이
많았습니다. 나름대로 말을 하면서 느낀 것들이 있어서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변의 작은 것들이라도 유심히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남들이 그냥
넘어가는 것들 중에도 의미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구름도, 나비도,
작은 벌레도, 신문에 난 미담도, 아이의 웃음도 유심히 보면 말의
소재가 되었습니다.

말은 강연과 강의가 아니기에 줄거리가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말도 의미가 있습니다. 영상물을 이용한 말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진솔한 삶의 이야기가 듣는 사람에게는 더
큰 감동이 있을 것입니다.

원고는 충실하게 준비하지만, 말을 할 때는 가능하면 원고는 보지
않는 것이 좋았습니다. 보험을 하는 분들도 원고를 보지 않고 상담을
합니다. 스마트 폰을 파는 분도 원고 없이 제품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도 원고를 보지 않고 대화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원고를 보고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자꾸 하면 가능해집니다.

적당한 유머가 필요합니다. 의자에 앉아서 듣는 분들은 5분 이상
집중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저도 강의를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석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진실과 진심어린 이야기입니다. 말을 듣는 사람은
10분이면 말하는 사람의 진정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말’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체로 치면 찌꺼기가 남듯이 사람의
허물은 그의 말에서 드러납니다. 옹기장이의 그릇이 불가마에서
단련되듯이 사람은 대화에서 수련됩니다. 나무의 열매가 재배 과정을
드러내듯이 사람의 말은 마음 속 생각을 드러냅니다. 사람은 말로
평가됩니다.”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을 수도 있으며,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합니다. 주변을 보면 말 때문에 상처를 주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 역시도 듣기보다는 말을 먼저하면서 실수를 하곤
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찌하며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여러분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합니까?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곳간에서 악한 것을 내 놓습니다. 마음에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입니다.” 위선과 가식의 말을 삼가라고 하십니다.
남의 허물을 탓하기 전에 자신의 과오는 없는지 살피라고 하십니다.
고백소에서도 본인의 잘못을 고백하기보다는 이웃과 가족의 죄를
고백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고백성사는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고백성사는 자신의 잘못을 겸손하게 뉘우치고,
하느님과 화해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2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형제 여러분, 이 썩는 몸이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이 죽는 몸이 죽지 않는 것을 입으면, 그때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죽음의 독침은 죄이며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더욱 많이 하십시오.” 힘들고
어려운 시기를 살고 있는 신앙인들에게 용기와 힘을 주는 말입니다.
죽음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선포하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니 걱정하지 말고 복음을 전하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2000년이 넘은 지금에도 전해지고 있으며, 장례미사의 독서에도
봉독되고 있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말이 진실과 정의를 선포하는 말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에 별처럼 빛나도록 여러분은 생명의 말씀을 굳게 지녀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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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언행의 중요성|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3일 연중 제8주일: 언행의 중요성

지난 주일에 우리는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원수까지도 사랑하여 그로
하여금 하느님을 만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랑의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것에 대해 들었다. 이제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 자신의 우리가
사용하는 언행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인간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본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자신을 열어 보이고 다른
사람과 자신을 나누는 도구 중 하나가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속담에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듯이 한 마디의 말은
다른 사람에게 기쁨과 희망을 주기도 하지만, 슬픔과 분노를
자아내기도 한다.

제1독서: 집회 27,5-8: 열매로 그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1독서에서 말이 인격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말한다. 말은 내면적
인간의 외적 표현이다. 말은 사람의 속마음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사용하는 말이나 말씨야말로 그 사람의 됨됨이를
재는 저울이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의 속뜻을 드러내신 것이
말씀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말씀은 창조적인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인간을 해방시킬 수도 있고 구원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닮은 사람들이니 우리가 하는
말도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즉 우리의 모든
말과 행동이 늘 하느님의 말씀과 일치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 루카 6,39-45: 마음속에 가득 찬 것이 입 밖으로 나온다.

오늘 복음은 평지설교의 결론 부분이다.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스승을 따라 행동하라고 가르치신다. 제자가 스승의
가르침을 올바로 알아듣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가르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으며 올바로 인도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다른
사람의 잘못을 고쳐주는 것도 힘들다. 그러기에 먼저 자신의 삶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하신다.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어서는
안 되며, 자신이 스승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자신은 큰 잘못을 범하면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고, 남이 범하는
조그만 잘못도 참아주지 못하고 드러내려는 위선적인 면을 없애라고
하신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요한 8,7)고 하시지 않았는가? 그렇지 않으면 위선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에 대한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집에서 잘 기른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절대로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반대로 나쁜 나무는 즉
손질을 받지 못한 나무는 별 도움이 안 되는 열매를 맺는다(43절).
나무가 어떤 지는 그 나무 열매를 보고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가시나무에서 아주 맛있는 무화과를 거둘 수 없고, 가시덤불에서
포도를 거둘 수 없다(44절). 이것은 우리가 판관 9,1-21에서 왕으로
선출된 아비멜렉의 이야기를 보면 알 수 있다. 여룹바알의 막내아들
요담은 아비멜렉이 자기 형제 70명을 죽이고 왕이 되었을 때에 왕의
선출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거기서 올리브 나무와 무화과 그리고
포도나무의 선성에 대해서 이야기하였다. 이 나무들은 자기의 소임을
버리지 않고 자신의 일을 충실히 하겠다고 하였다. “내 어찌 기름을
내지 않고, 이 훌륭한 과일을 내지 않고, 이 술을 내지 않고, 다른
나무들을 내려다보며 으스대겠는가?”(8-13절)하고 왕의 자리를
사양했으나, 가시나무는 수락하여 왕이 되었고 그 가시나무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아비멜렉을 선출하여 왕으로 세운 세겜
사람들과 아비멜렉은 멸망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참조: 판관 9.22-57절).

이제 이 비유는 사람에게 적용되고 있다. 어떤 사람이 착하다면 좋은
나무와 같이 자기 마음의 좋은 보물창고에서 선을 내어놓을 것이다.
반대로 악한 사람은 그의 마음의 악한 창고에서 오직 악만 흘러나올
것이다(45절; 참조: 마태 12,34-35). 사실 인격을 나타내는 마음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통하여 말하게 되는 것이며, 선이나 악을
말한다면 그것은 각자 안에 담겨져 있는 “창고”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입은 인격의 도구이며, 행위에 있어서 전 인격을 가리킨다. 이것은
긍정적일 수 있거나 파괴적일 수 있다(45절). 그러므로 좋은
나뭇가지에 시간에 맞추어 붙어있으면서 좋은 나무를 기르는 것이다.
그리고 당신의 모든 자녀들의 마음에 하느님 자신이 주시는 아주 귀한
보물을 지키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자신뿐 아니라
남에게 있어서도 망가지고 말 것이다.

제2독서: 1코린 15,54-58: 흔들리지 말고 주님의 일을 하라

사도 바오로께서는 부활의 희망이 주어진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때문이라고 하면서 이 때문에 굳건히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님의
일을 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하는 일은 헛되지 않다고
하신다(58절).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닮고 또 잘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행하지 않고 사탄의
말에 그 마음을 빼앗긴 결과 죄를 짓게 되었다. 잘못된 말과 거짓된
말을 받아들여 표현한 것이 죄가 되었고 죽게 되었다. 우리 마음의
창고가 악으로 가득 차 있어 거기에서 거짓된 말이나, 잘못된 말을
꺼내게 되면 그것은 죽음에로 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참된 좋은
말을 꺼내면 우리를 또 다른 사람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게 될 것이다.

말씀 자체이신 예수께서는 진리의 말씀으로 사탄과 거짓을 이기시고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셨다. 이 거짓된 마음에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의 말씀에 귀기울이고 우리의 마음에서 좋은 것을 꺼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 말씀을 행할 때,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다.
그러기에 주님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다고 사도
바오로께서는 말씀하신다. 이제 다시 한번 우리의 마음이라는 창고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재고조사를 해보자. 재고조사를 하면서 그 안에서
우리 자신을 더럽힐 수 있는 악한 것들은 모두 버리고 좋은 것들을 잘
정리하여 언제든지 원하는 때에 원하는 좋은 것을 꺼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정리해 보자. 항상 좋은 열매를 꺼낼 수 있기 위해서는
이러한 마음의 정리를 통하여 하느님 앞에 올바로 서 있을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의 창고에서 무엇을 꺼낼 수
있을까?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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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말과 행동이 어떤 나로
끝내기로 결심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2019년 다해 3월3일 연중 제8주일

<​말과 행동이 어떤 나로 끝내기로 결심했는지 보여주는 지표다>
복음: 루카 6,39-45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란 무거운 주제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판타지 영화 ‘헬보이’(2004)를 만들었습니다. 엄청나게
오른 팔이 크고 뿔 잘린, 지옥에서 온 헬보이가 주인공입니다.
헬보이는 아기 때 우연히 지옥에서 나와 항상 묵주를 들고 다니는
인간 아버지에게 키워집니다. 그리고 지옥으로부터 나온 자신과 같은
괴물들로부터 인간들을 지켜내는 일을 합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지옥의 괴물들과 결탁함으로써 지구는 다시 위험에
빠집니다. 그 인간은 지옥의 힘으로 자신과 애인이 불사불멸의 존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헬보이는 그 사람 속에 들어간 악의 세력과
싸워야했습니다. 그런데 그 악의 세력은 헬보이도 자신과 같은 지옥
출신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던 애인의 영혼이
지옥에 갇히게 되자 그도 정신을 잃고 지옥문을 열려고 합니다.
그러면 수많은 괴물들이 나와 지구를 멸망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남긴 묵주의 십자가가
손바닥에 새겨지며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깨닫습니다. 출신은
지옥이지만 천국의 사람이 되겠다던 결심을 다시 되새기며 애인의
영혼을 포기하고 지옥문을 닫아버립니다. 그리고 지옥문을 열면서
다시 생겨난 자신의 뿔을 자신의 손으로 잘라버립니다. 지옥이 주는
힘을 스스로 거부하고 인간들을 지키려 한 것입니다. 물론 결론적으로
자신의 여자의 영혼도 되찾아 해피엔딩으로 끝납니다.

영화 마지막에서 감독은 또 묻습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어디서 태어났는가?’인가? 아니다,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은 ‘결심’이다.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에 대한 결심이 아닌, 어떻게
끝내야하는 가에 대한 결심이다.”

한 인간은 지옥에서 태어났지만 천국에서 끝내려는 결심으로 천국
시민이 됩니다. 한 인간은 천국에서 태어났지만 지옥에서 끝내려는
결심으로 지옥 시민이 됩니다. 어떻게 시작되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끝내야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렇듯 내가 무엇이 될 것인가는 ‘어떻게 끝낼 것인가에 대한 나의
결정’에 달려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은 사실 그런 결정을 내리고
있고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이 그 사람이 어떤 목적지로 가고 있는지를 말해줍니다. 이 말과
행동이 내가 한 결정에 대한 열매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하시며, 그 열매가 나무를 증명해준다고
하십니다. 열매란 행동입니다. 나의 행동이 어떻게 나오느냐에 따라
나의 본성이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내가 하느님으로 끝내겠다는
결정을 내렸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미워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먼저 빼내야 남의 눈의 티를 빼 줄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남을 판단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그 열매는 그
나무가 천국이 아닌 지옥에 가기로 결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들보란 옛 본성을 의미하는데 본성은 믿음에 의해 결정됩니다. 믿음은
내가 누구인가 결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믿는다면 여전히 들보는 내 눈 안에 들어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보지는 못합니다. 다른 새 본성이 들어와야 옛 본성이 보입니다. 내가
하느님이라 믿는다면 옛 인간의 본성이 보이게 됩니다. 내가 하느님이
되지 못하게 만드는 옛 본성인 들보가 눈에 들어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처럼 살아보려고 해야 옛 본성이 걸림돌로 작용함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꾸준히 하느님임을 믿고 하느님으로
끝내려고 결정하면 결국 그 들보를 빼낼 수 있습니다.

말도 하나의 열매입니다. 본성이 선한 사람은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을 내놓고 악한 자는 악한 것을 내놓습니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는 법이다.”라고 하십니다. 본성이 변했는지
아닌지를 가장 잘 알 수 있는 열매가 바로 ‘말’이란 뜻입니다.

부산교구의 한 신부님이 계단을 내려오시다가 무릎이 아파 병원에
가셨습니다. 마침 은퇴하신 부산교구장 고 최재선(요한) 주교님이
병실에 입원하실 때였습니다. 돌아가시기 한두 주 전이었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먼저 주교님 병실을 방문하여 인사를 드렸습니다. 무릎이
찌릿찌릿 한 걸 보니 당신도 나이가 들어가는 것 같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아흔이 훨씬 넘어 임종을 앞두신 주교님께서
혀를 차시며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쯧쯧쯧. 죽으면 썩어버릴 육신 아끼면 뭐할라꼬!”

주교님은 추운 겨울에도 불을 때지 않은 방에서 주무실 정도로
극기하셨던 분이셨다고 합니다. 이에 신부님도 치료를 받지 않고 집에
돌아왔는데 그 날 저녁부터 무릎이 쑤시지 않더랍니다.

본성에서 행동과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평소의 삶이 나의
본성입니다. 몇 마디 잘 해보려고 해봐야 결국 내 본성 안에 있는
것들이 입 밖으로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대화를 조금만
나눠보면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어떤 것들이 들어있는지 어렵지 않게
알게 됩니다.

저는 뇌졸중으로 돌아가시면서도 계속 “예수-마리아-요셉”만을
반복해서 중얼거리시는 한 할머니 신자분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분을 보면서 ‘내 안에도 오직 주님만을 모시고 살았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수많은 세상 것들로
쌓여있더라도 하느님의 자녀로 끝내기로 결심했으니 조금씩
하느님으로 더 채워나갈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역시 속도가 아니라
방향인 것 같습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을 잘 돌아보아야겠습니다.
그것이 내가 나를 어떻게 끝내기로 결심했는지 보여주는 열매들이기
때문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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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3일 연중 제8주일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루카 6, 42)

우리자신의 모순과 어리석음을 되돌아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갈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참된 인간이 되도록
제자들의 내면을 보여 주십니다.
복음은 우리모두를 인격성숙으로 이끕니다.

인격성숙은 내적인 태도 변화입니다.
성경의 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온몸으로 부딪히며 삶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말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우리자신입니다.
우리자신을 모르면 모든 것은 허사입니다.

남을 이기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자신의 들보를
빼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납니다.
우리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가득 채우는 은총의
주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좋은 나무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하느님이 중심이 되는 삶을 살아갑니다.
하느님 중심적인 삶은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활을
진심으로 회개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내놓아야 할 것은 회개입니다.
회개로 우리 눈에서 들보를 먼저 빼냅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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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연중 제8주일 / 염철호 요한 신부 강론 묵상
 
2019년 다해 3월3일 연중 제8주일

오늘의 묵상

오늘 제1독서인 집회서는 말의 중요성을 잘 설명합니다.
사람은 말을 통하여 수련되는데, 말을 들어 보면 그 사람의 마음속
생각, 그 사람의 장점과 단점이 드러납니다. 이처럼 말은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 주는데, 하느님께서도 마찬가지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 드러내십니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죄가 바로 죽음을 가져다 준 독침이며,
율법은 죄가 죄로 드러나게 만드는 구실을 한다고 강조합니다.
율법 앞에서 우리 모두는 죄인, 곧 죽을 운명을 지닌 존재임이
드러나는데,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죄를 용서받아 구원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비록, 썩는 몸, 죽는 몸을 지니고 있는 우리이지만, 그리스도 덕분에
썩지 않는 것을 입고, 죽지 않는 것을 입어 죄와 죽음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었고, 주님의 일을 충실히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이었습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만을 지적하는 위선자들을 나무라십니다.
자신도 그리스도 덕분에 구원받았으면서, 형제를 용서하지 못하고,
비난하는 위선을 버려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사실, 위선자들의 입에서는 위선의 말이 나올 뿐입니다.

결코 좋은 열매가 열리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넘치는 것을 입으로 말하기 마련인데, 입으로 형제들을
비난하는 이는 악한 마음, 곧 자신의 들보를 보지 못하는
위선자들입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선한 곳간에서 선한 것, 곧 선한 말을 내어 놓
습니다. 그런 사람은 좋은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 부산 교구 가톨릭 대 신학 사무처장 염철호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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