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3일 구원의 보편성을 선포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3-13 07:17:34    조회 : 229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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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9년 다해 3월13일 [(자)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제1독서 요나 예언서 3,1-10 복음 루카 복음 11,2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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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사순 제1주간 수요일 2019년 다해 3월13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안식년을 지내면서 강론을 하기보다는 강론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머무는 본당에는 신부님이 3분 있습니다. 3분의 강론을 듣는 것은 큰 기쁨입니다.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묵상을 말씀의 우물에서 길러 올리는 것을 봅니다. 오늘은 제가 들었던 어린아이와 부자 청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축복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 들어간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린 시절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는 먹는 것, 입는 것, 자는 것, 갖고 싶은 것을 어머니에게 의존합니다. 시장을 갈 때면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고 갑니다. 자칫 어머니와 헤어지면 길을 잃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머니에게 의지하기 때문에 보호를 받을 수 있고, 자랄 수 있습니다. 어머니와 떨어지는 어린아이는 연줄이 끊어진 연처럼 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어린아이처럼 하느님께 의지하고, 맡기면 하느님의 보호를 받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잡고 있으면, 세상의 것을 바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힘들 것입니다. 부자 청년은 예수님의 곁을 떠나야 했습니다. 가진 것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 이 말씀은 부자가 아닌 사람은 모두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위로의 말이 아닙니다. 부자가 가진 것을 나누어 준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는 부자의 행위 때문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자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나누는 것은 필요한 조건이지만 충분한 조건은 아닙니다. 부자 역시 어린아이처럼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의탁해야 합니다.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충분한 조건입니다. 가난한 사람, 보통의 사람도 하느님께 맡기고 의존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욕심을 놓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에서 자유로워야 합니다. 요나는 물고기의 뱃속에서 이렇게 기도를 하였습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을 해 주셨습니다. 저승의 배 속에서 제가 부르짖었더니, 당신께서 저의 소리를 들어 주셨습니다. 저는 감사 기도와 함께 당신께 희생 제물을 바치고 제가 서원한 것을 지키렵니다. 구원은 주님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기도를 하셨습니다.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이 저를 비켜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요나 예언자와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랐고, 하느님께서는 요나와 예수님을 통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전해주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회개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니느웨의 백성들은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악한 길에서 돌아서는 모습을 보셨고, 마음을 돌리시어 그들에게 내리겠다고 말씀하신 그 재앙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사순시기를 지내는 것은 니느웨 백성들처럼 우리들의 잘못을 뉘우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도 이방인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했던 요나처럼 하느님의 뜻을 우리의 이웃에게 전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이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나는 너그럽고 자비롭도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우리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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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핑계대면 자신을 절대 볼 수 없다 2019년 다해 3월13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핑계대면 자신을 절대 볼 수 없다> 복음: 루카 11,29-32 종일 토끼 사냥을 하던 사냥꾼이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빈손으로 산을 내려 왔습니다. “왜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까?” “말도 마십시오. 토끼란 녀석은 귀가 얼마나 예민한지 가랑잎 소리만 나면 벌써 도망을 갑니다. 촉각은 얼마나 발달되었는지 조그마한 발자국 진동에도 적을 알아차립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토끼는 앞다리가 짧고 뒷다리가 길어 언덕을 오르는데 명수입니다.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때 마을의 현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자신이 토끼를 못 잡는데 대한 논리와 철학으로 그런 상황에서도 토끼를 잡는 다른 사람들을 분석해봄이 어떨까요?” 핑계는 자신의 잘못을 가리는 눈가리개입니다. 핑계는 자신이 저지르는 실수를 지속하기 위한 자기합리화 수단입니다. 자신을 합리화하면 자신의 잘못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해야합니다. 그래야 교정을 할 수 있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잘못을 저지르고 가장 먼저 했던 행위는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라고 말하는 핑계였습니다. 이 핑계는 “앞으로 이런 상황이면 또 그러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핑계를 대는 것은 우리 인간의 본성입니다. 제가 군대 있을 때 큰 차량사고를 내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였습니다. 만약 그 생각을 따랐다면 뺑소니가 되었을 것입니다. 혹은 약속에 늦었을 때 언제나 핑계를 대었습니다. 다음부터는 절대 늦지 않겠다는 결심과 함께 그 상황만 모면하려고 핑계를 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핑계를 대는 이상 약속시간에 늦는 습관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변화는 핑계를 멈출 때 시작됩니다. 운전하며 교만해져 전방주시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사고가 난 것이고, 상대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이 부족하여 약속시간에 늦게 나갔던 것입니다. 핑계 없이 자신의 현실과 직시하게 되어야 반성하고 발전하게 됩니다. 핑계 대는 습관은 어렸을 때부터 형성됩니다. 부모가 핑계를 대면 자녀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신도 그런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하려합니다. 따라서 어렸을 때부터 핑계를 대지 않는 습관을 키워주는 것이 좋습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부모가 핑계를 대지 않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에 그랬다느니, 상황이 그래서 그랬다느니 등의 말투는 자신의 자녀들도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대는 인생을 살게 만듭니다. 핑계는 이 세상에서도 패배자로 만들지만, 더 나아가 하느님도 믿지 않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핑계를 대는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반면 핑계를 안 대는 이들은 같은 상황에서 예수님을 믿습니다. 핑계 대는 이들은 표징을 청합니다. 표징이 너무 약해서 못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엄청난 표징을 청합니다. 웬만한 기적으로는 자신들을 설득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머물다 나온 것을 본 니네베 사람들이 회개한 사실을 예로 드시며 요나보다 더 큰 예언자가 있는데도 믿지 못하는 그들을 나무라십니다. 또 아무런 표징도 없었지만 솔로몬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 아주 멀리서 그를 찾아왔던 남방여왕도 예로 드십니다. 핑계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핑계는 굉장히 논리적인 사고 같지만 실제로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지게 만듭니다. 부모는 자녀가 자신이 부모라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을 만큼의 사랑을 줍니다. 하물며 하느님은 당신이 창조주이시며 아버지이심을 믿게 하시기 위해 얼마나 완전한 표징을 주고 계실까요? 내가 부모의 사랑으로 부모를 믿게 되었다면 하느님의 사랑으로 하느님을 믿지 못하는 것에 대한 핑계는 있을 수 없습니다. 표징을 달라는 것은 그냥 믿지 않기 위한 핑계입니다. 철학자 플라톤이 한 번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서 심각한 오해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비방하는데도 그는 자기의 처지를 변명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한 제자가 플라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선생님! 왜 변명을 안 하십니까?” 그때 플라톤은 다음과 같이 답변했습니다. “그들의 비난을 종결시키는 것은 나의 변명이 아니라 나의 행위이다." 핑계는 접어두고 행동으로 보여주십시오. 핑계를 대지 않으면 자신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납니다. 핑계를 대지 말아야하는 이유는 자신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자신을 알아야 고치고 발전할 수 있습니다. 핑계는 자기를 못 보게 가리는 눈가리개입니다. 지금 비난을 받더라도 절대 핑계대지 않는 습관을 기릅시다.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비난에 핑계가 아니라 행동으로 응답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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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사순 제1주간 수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13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1,29-32: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기적에 대한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하신다. 그리고는 요나의 기적 하나만 주시겠다고 한다. 요나의 기적을 보여주시겠다는 이 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요나가 기적적으로 살아서 니네베에 나타났던 것처럼, 예수님도 기적적으로 부활하여 종말론적 사람의 아들로 나타나는 표징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왜 예수님은 그들이 요구하는 기적을 거절하셨을까? 요나의 표징은 예수님 안에서 완성된 수난과 부활을 나타낸다. 부활하신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생명이 주어지겠지만,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이다. 요나의 표징이 이렇게 니네베 사람들에게 두 가지 면으로 도움이 되었다. 만일 그들이 요나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요나처럼 산 채로 저승에 갔을 테지만, 회개했기 때문에 요나처럼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었다. 즉 주님의 경우에도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살거나 그분의 죽음을 통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심판 때에 남방 여왕이 이 세대 사람들을 단죄할 것이다.”(31절) 이 여왕은 교회의 모습이다. 남방 여왕이 솔로몬에게 왔듯이 교회는 주님께 왔고, 지나가 버리고 말 세상의 지혜와 죽을 수밖에 없는 임금을 보고자 했던 남방 여왕이 회당을 단죄한다면 영원한 지혜와 영원히 사시는 임금을 사모하는 교회는 얼마나 무섭게 이 믿지 않는 세대를 단죄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예수님은 역사상의 인물인 시바의 여왕과 니네베 사람들을 예를 들어 정신을 차리라고 경고하신다. 솔로몬 왕 때, 시바의 여왕은 하느님의 지혜를 드러내는 솔로몬의 소문을 듣고는 먼 길을 여행하여 지혜를 배우고자 찾아왔으며, 니네베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를 한번 듣고 즉시 왕으로부터 짐승에 이르기까지 단식재계를 했었음을 상기시켜 주신다. 시바의 여왕이나, 니네베 사람들은 하느님께 선택받은 백성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었다. 이 이방인들이 솔로몬의 지혜와 요나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던 하느님께 선택받았다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솔로몬보다, 요나보다 더 훌륭한 현자이며 예언자이신 예수님의 말씀과 기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일깨워 주신다. 예수님의 이 경고는 바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무서운 말씀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우리가 바라고 하느님께 청해야할 기적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 자신이 변화되는 기적이다. 이 세상이 모두 변화되고 그야말로 기적이 일어난다 해도 그 기적을 알아볼 수 있도록 내 눈이 바뀌지 않으면 그것은 기적이 있지만 기적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을 보여 달라고 하면서 기적을 볼 수 없다면 그 기적은 항상 없는 것이다. 이제 바로 내가 사랑할 수 있고 또 다른 사람들로부터 사랑 받으며 살아가는 나 자신으로 변화될 수 있는 기적을 청하며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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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 3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13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보라,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에 있다.(루카 11, 32) 안으로 깊어져야할 우리의 신앙입니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우리의 길이 되셨습니다. 회개를 통해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합니다. 예수님으로 더욱 깊어지는 우리의 사순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최고의 해답이 있음을 아프게 깨닫습니다. 솔로몬 보다 요나보다 더 큰 이는 우리를 업고 사순의 이 여정을 걸어가십니다. 크신 그 사랑을 바라보게 됩니다. 크신 그분께 우리의 모든 죄를 내려놓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당신 먼저 당신을 내려놓으시며 아버지 하느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표징은 내려놓는 회개임을 믿습니다. 회개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다시 보게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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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나도 주님 구원의 대상이지만, 내가 미워하는 그도 주님 구원의 대상입니다! 2019년 다해 3월13일 사순 제1주간 수요일 나도 주님 구원의 대상이지만, 내가 미워하는 그도 주님 구원의 대상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간결하면서도 재미있는 구약 성경이 한권 있는데, 요나서입니다. 요나서는 예언서에 포함되어 있기는 하지만, 다른 예언서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지닙니다. 통상 다른 예언자들은 장황하고도 엄숙하게 하느님의 신탁을 백성들에게 전하는데 비해, 요나 예언자의 신탁의 말씀은 딱 한 마디 뿐입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요나서 3장 4절)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보통 다른 예언자들은 비록 주님의 명령이 두렵고 떨렸지만, 거부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때로 너무 부담스러워 주님께 따지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했지만, 대체로 마지막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주님께서 전하라고 하는 말씀,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네베로 가서 그 성읍을 거슬러 외쳐라. 그들의 죄악이 나에게까지 치솟아 올랐다.”는 예언의 말씀을 들은체만체 하며, 주님을 뒤로 하고 도망쳐버렸습니다. 부담스런 주님과 엮이지 않으려고 타르시스로 가는 배를 타버린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불순종한 요나를 절대로 그만두지 않으십니다. 요나가 탄 배에 철퇴를 내리십니다. 큰 폭풍을 일으켜 배가 거의 부서질 정도가 되게 하십니다. 난데 없는 불행의 원인이 요나였음을 뱃사람들이 알게 되고, 졸지에 요나는 인당수에 재물로 바쳐진 심청이처럼 깊은 바닷 속으로 던져지고 맙니다. 큰 물고기 뱃속에 사흘 밤낮을 갇히고 나서야 요나는 참회와 동시에 찬양의 기도를 주님께 바칩니다. “제가 곤궁 속에서 주님을 불렀더니 주님께서 저에게 응답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 바다 속 깊은 곳에 저를 던지시니 큰 물이 저를 에워싸고 당신의 그 모든 파도와 물결이 제 위로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주 저의 하느님 당신께서는 저를 구렁에서 저를 건져 올리셨습니다.”(요나서 2장 3~7절) 일종의 사흘간 죽음 체험을 진하게 하고 난 요나는 주님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겨우 큰 물고기 뱃속에서 빠져 나오게 됩니다. 그제야 정신이 바짝 든 요나는 주님께서 주신 신탁의 말씀을 니네베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합니다. “이제 사십 일이 지나면 니네베는 무너진다.” 놀랍게도 요나로부터 전해진 신탁의 말씀에 니네베 주민들은 임금에서부터 시작해, 모든 대신들과 백성들이 참회를 하게 됩니다. 단식과 금육을 실시하면서 크게 가슴을 쳤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좀 웃기은 일인데, 죄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가축들에게까지도 자루옷을 입혔습니다. 요나의 신탁에 대해 니네베 사람들은 집단적으로 회개하였으며, 주님으로부터 전격적인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참으로 특별한 요나의 처신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요나는 즉각적이고 집단적인 회개로 용서받은 니네베 사람들의 모습 앞에 큰 불평을 터트립니다. 이방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주님의 처신에 분노한 것입니다. 요나의 구원관은 참으로 편협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유다인들만이 주님의 백성이고 구원의 대상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이방인의 도시 니네베 사람들의 회심과 구원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니네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수이기 때문에 무조건 벌을 받아야 마땅하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이런 요나를 향해 주님께서는 장엄하게 구원의 보편성을 선포하십니다.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른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요나서 3장 11절) 우리 주님은 크고 너그러우신 분입니다. 그분께는 요나도 소중했지만 니네베 사람들도 소중했습니다. 그들 역시 당신께서 손수 창조하신 사랑스런 피조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로서 주님께서는 당신께서 선물로 주실 구원이 혈연이나 지연에 따라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따르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임을 재확인하신 것입니다. 요나서는 주님의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한없이 넓고 무한한 표용력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만 선택받았으며 구원의 대상이라고 착각하는 유다인들의 편협된 구원관을 여지없이 파괴하셨습니다. 나도 주님 구원의 대상이지만, 내가 가급적 멀리하고 깊은 이웃, 내가 정말 미워하는 이웃, 백번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 못하는 이웃도 주님 구원의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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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타] 3월 13일 (수) - 깨닫지 못 하는 서너가지 오늘은 ‘깨닫지 못 하는 서너가지’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 30장 18~20절 말씀에 “1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자취 2 반석위로 기어다니는 뱀의 자취 3 바다로 지나다니는 배의 자취 4 남자와 여자가 함께한 자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특히 이와 같은 자취를 남기게 되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가 함께한 자취도 남게 되면 특히 음녀의 자취도 남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들은 눈앞에서 감추면 문제가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든 행위는 어떤 모양으로든 그 자취가 남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눈앞에서 감추면 다 감춰지는 줄로 착각하고 도리어 큰 소리를 치거나 자신들이 똑똑한 사람으로 비웃는 경우들이 많지요. 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을 해서는 안 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야 하고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있는 그대로를 고백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바로 회개하는 자를 기뻐하지요.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고 하나님을 속이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한 모든 것들을 우리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합니다. 바로 회개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가까이 하십니다. 또 우리가 필요한 것들을 구할 때 하나님이 응답까지 해 주십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프랑수아 쿠프랭//클라브생 모음곡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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