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7일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3-17 19:07:14    조회 : 222회    댓글: 0

▣ 2019년 다해 3월17일 [(자) 사순 제2주일]

제1독서 창세기 15,5-12.17-18
제2독서 필리피서 3,17―4,1
복음 루카 복음 9,28ㄴ-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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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2주일

2019년 다해 3월17일 사순 제2주일

작가와 작품 그리고 관객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작가는
정성과 혼을 다해서 작품을 만듭니다. 그래서 작품에는 작가의 뜻과
작가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작가라도 자기의 작품을
봐주고 인정해 주는 관객이 없다면 서운 할 것입니다.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안목과 지식이 없는 사람이 없다면
그 작품들은 마치 길 잃은 아이와 같을 것입니다. 드라마, 영화,
노래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그것을 감상하고, 웃고,
울어주는 관객이 없다면 아쉬움이 많을 것입니다. 화장품과 옷이
새로운 유행에 따라서 등장하는 것은 화장품을 바르는 본인과 옷을
입는 본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화장품을 바르는 사람도, 옷을
입는 사람도 누군가 봐주길 원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늘의 별과 달을 창조하시고,
구름과 태양을 창조하시고, 꽃과 나비를 창조하시고, 새와 양을
창조하시고, 바다의 물고기를 창조하셨습니다. 이런 하느님의 창조를
찬양하고, 감사할 줄 아는 존재가 없다면 하느님께서도 아쉬웠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을 닮은 인간을 창조하신 것
같습니다. 인간은 왜 이 세상에 왔는지를 고민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왔으면 무엇을 할지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어디로
갈지를 고민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입니다.
까닭 없이 남을 미워하기도 합니다. 먹고 살 만큼 이상의 것을 채우려
합니다. 같은 인간을 죽이는 존재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관심 분야에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좋은 음악을 떠올릴 것입니다.
미술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한 폭의 그림을 생각할 것입니다.
금융을 하는 사람은 세상을 보면서 경제적인 이익과 손실을 따질
것입니다. 농사를 짓는 사람은 봄이 오면 무엇을 심을까를 생각할
것입니다. 원망과 분노가 가득한 사람에게 세상은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세상은 아름답지도 않고, 세상은
악취가 풍기는 더러운 곳으로 보일 것입니다. 걱정과 근심이 가득한
사람에게 세상은 불안하고, 허무하게 보일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
욕심이 가득한 사람에게 세상은 누군가를 밟고 올라가야 하는
약육강식의 전쟁터처럼 보일 것입니다. 

보는 것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와 무학대사의 이야기입니다. 이성계는 무학대사를 놀릴
생각으로 무학대사의 드러난 겉모습을 꼬집어서 ‘그대는 돼지처럼
보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무학대사는 이성계를 바라보면서
‘왕께서는 부처님처럼 보입니다.’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이성계는
‘나는 그대를 놀리려고 돼지라고 하였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나를
부처님이라고 합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무학대사는 뼈있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돼지의 눈에는 세상이 돼지처럼 보이고,
부처의 눈에는 세상이 부처님처럼 보이는 법입니다.’ 이 말에 태조
이성계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슬픔과 고통을 넘어서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둠이 깊으면 밝은 빛이 드러나는 새벽이
가까이 옴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면 사랑할 일들이 생기고,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생기며, 세상 모든 것들에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하느님의 영광’입니다. 오늘의 제1 독서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약속하셨습니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희
후손들에게 준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과 아브라함의 순명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율법의 대표인 모세와
예언자들의 대표인 엘리야’를 보았습니다. 율법과 예언은 예수님의
거룩한 모습을 통해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지금은 비록 외롭고 힘든
여정이지만 예수님을 충실하게 따르면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될
것이라고 미리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영광을 보고, 참된 신앙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오늘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늘의 시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유명하게 하고,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지고 가신 십자가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영광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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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기도의 효과를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2019년 다해 3월17일 사순 제2주일

<기도의 효과를 알면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복음: 루카 9,28ㄴ-36  

유튜브 채널 ‘마인드풀 tv’의 운영자가 말하는 명상이 주는 효과입니다.
그녀는 심한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삶을 포기하고 싶은 지경까지 삶이
무너졌지만 신경안정제 하나도 복용하지 않고 명상으로만 자신의
모든 정신적 문제를 극복하였다고 합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명상을 전파하고 있고 구독자수가 상당히 많은 인기 유튜버가
되었습니다. 물론 삶도 매우 생기 넘칩니다.

그녀가 주장하는 명상의 효과는 1. 현실개선, 2. 정신건강을
상승시키고 스트레스를 줄여줌, 3. 두뇌가 변함, 4. 건강이 개선됨
등입니다. 명상을 주장하는 이들 중 대부분은 ‘자신의 생각이 세상을
창조한다.’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불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면 그 마음 때문에 불안한 일이 일어나게 되는 환경으로 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긍정마인드’를 가지라고 합니다.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하는 호흡을 가져와 의식적으로 호흡을
함으로써 자아와의 거리를 두게 만드는 것이 명상입니다. 모든 불안과
우울, 스트레스는 무의식에서 올라오기 때문에 호흡을 의식적으로
하면 무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현대 과학자들이 명상을
많이 하는 티베트 스님들의 뇌를 조사한 결과 전두엽이 다른
사람들보다 발달해있다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물론 게임만 하고
인터넷을 많이 하는 사람들의 뇌는 퇴화한다는 것도 밝혀냈습니다.
우리 자신은 우리가 노력하여 발전시키고 창조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분이 좋아지니 스트레스에서 오는 병들을 이길 수 있게
되어 건강이 좋아진다는 것도 맞습니다.

달라이 라마가 이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전 세계의 8세 이하의 아이들이 명상을 교육받는다면 우리는
단 한 세대 만에 전 세계의 모든 폭력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명상이라고 하는 것 안에 주님의 현존을 넣으면 기도가 됩니다. 명상은
자아로부터 우리를 분리시켜놓습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베드로
사도가 물 위를 걷게 하신 것과 같습니다. 바다는 우리의 잠재의식,
혹은 자아라고 하는데 그 자아에 빠져들지 않게 만드는 것이 명상,
혹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자아의 부정적인 본성을 기도를 통해
‘감사’로 이끌라고 하는 것이 명상과 기도의 공통점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한 일이 더 많이 일어납니다. 그러니 내 마음을 부정적이 되지
않게 만들면 삶이 훨씬 수월할 수 있다는 것은 신앙이 있건 없건 간에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현실이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긍정적 마인드를 가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기도나 명상이
필요한 것입니다. 현실은 우리가 창조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맞닥뜨린 현실을 어떻게 극복하시는지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 현실 앞에서 어떻게 긍정적이 될 수 있을까요?
하느님이 인간을 위해 세상에 내려왔지만 인간은 그분을 무시하고
침 뱉고 십자가를 지우고 조롱했습니다. 이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으셨을까요? ‘기도’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오늘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기도는 기도가 어떻게
부정적 현실 앞에서 긍정적으로 살 수 있게 해 주는지를 보여줍니다.

먼저 예수님은 기도 가운데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십니다. 그리고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그랬던
것처럼, 새 계약과 세상의 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길이 꼭
필요함을 되새기십니다. 기도하면 이렇듯 부정적인 생각에만 빠져있는
사람이 닿을 수 없는 높은 진리를 깨우치게 됩니다. 그래서 왜 어려운
현실이 닥치는지 이해하게 되고 그것을 극복해야만 하는 이유를 알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그래서 현실이 부정적이더라도 그 부정적인
현실 뒤에 있는 부활의 영광과 그 열매들을 봅니다. 그래서 힘든
현실도 잘 극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 안에서 깨닫는 이런 진리들은 우리 자신을 주님의 뜻에 봉헌하게
만듭니다. 마치 빵과 포도주가 봉헌되면 그것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되돌아오듯 봉헌은 아픈 것이지만 더 좋은 것으로 되돌려주심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뜻에 순종하게 되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 자신을 봉헌할 수 있게 만듭니다. 이 자기봉헌이 자신과
주의의 현실을 재창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모습이 환하게 빛나셨듯이 나의 본성이 변화됨을
자신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내가 생각과 하나인 줄 알았지만 생각은
뱀과의 대화였음을 깨닫게 되고 그 어둠에서 멀어지며 빛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어떤 선택이 자신을 더욱 빛나게
하는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깊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사람보다
생각 없이 즐거운 아이들의 얼굴이 훨씬 환하게 빛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자아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얼굴이 어두워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빛났던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얼굴은 빛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믿음을 주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환하게 변하시는 것을 보고는 그 제자들이 큰
믿음을 가지게 된 것처럼, 기도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게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을 전해주게 되는 것입니다. 40일 동안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온 모세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빛나고
있었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무엇을 느꼈겠습니까? 그들은 모세를 보고
하느님의 현존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듯 기도하는 사람은 주위
사람들에게 은총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리더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기도를 마치신 다음 하늘에서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께 순종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사람들을
이끌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더 기도해야합니다. 그래야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그 책임자의 말을 잘 따르도록 마음을
이끌어주십니다. 기도는 자신만이 아니라 주위의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나와 이웃의 환경을 변화시키는 힘인 것입니다. 

제가 성지순례 갔을 때 함께 한 인솔자가 사제가 되려다가 나와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결혼하여 아기를 가지게
되었는데, 태중의 아기가 불구로 태어나거나 사망할 것이라는
엄청나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가톨릭신자는 낙태를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나오는데 병원 문 밖에 나오니 다리에 힘이 풀려
그냥 털썩 주저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혼자 기도할 수 있는 수도원 성당에 들어가 한없이
울었습니다. 신발을 십자가에 집어던지며 심한 욕까지 했다고 합니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리 고통을 주시냐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주시지 왜 죄 없는 아이에게 그러시냐고 밤새 소리소리 지르며
울었다고 합니다. 새벽 동이 터 올 때쯤에는 제정신이 들어 이젠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비뚤어진 십자고상을 바로 세우고 자세도
바로잡고 한 번만 더 도와달라고 청하였습니다. 아이는 정상으로
태어났습니다. 

리더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성체 앞에서 일정 시간만 머물러
있으면 먼저 내가 변화되고 그 다음엔 나에 딸린 사람들이 변화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 가족이나 단체를 이끌려는 사람은 리더의 자격이
없습니다. 나의 부족함을 기도로 채울 줄 아는 사람이라야 참 리더의
자격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기도하셨다면 우리도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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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17일 사순 제2주일: 예수님의 영광스런 모습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변모! 조용히 참회와 보속을 하는 시기에
영광스러운 모습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오늘의
루가복음은 사순시기의 의미를 더욱 깊이 있게 파악하도록 해주고
있다.

복음: 루카 9,28-36: 예수께서 기도하시는 동안에 그 모습이 변하였다

오늘 복음은 사순절의 분위기로 이끄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산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이 ‘기도’로써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28-29절). 여기에 예수께서 기도하신다는
것이 반복적으로 강조되고 있고, 그 기도가 그 영광스러운 변모를
가져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래서 열심히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생활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맡길 수 있다. 루가복음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기도의
주제가 바로 이 사순시기에 언급되고 있는 것은 사순절의 의미가
기도의 표지 아래서 더 잘 드러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기에 우리가 참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열렬히 타오르는 기도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복음에서는 단순하게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이야기하고
있었다(30절)는 사실만 전해주고 있는데 반해, 루가 복음은 두 인물과
예수님과의 대화 내용에 대해서도 전해주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
(31절).

여기서 ‘죽음’이라고 한 말은 원문으로 ‘exodos: 출애굽, 대탈출이다.
즉 결정적인 해방과 약속의 땅을 향한 출애굽의 모든 주제가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예수님의 죽음은 출애굽 사건과 같이
결정적인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사건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거룩한 변모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탈출하여 약속의 땅으로 가고 있는 고달픈 여정이나,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그 여정을 반복적으로 이해시키고 있는 사순절의
분위기로 우리를 이끌어주고 있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세 사도들의 졸린 눈에 그리스도의
얼굴에 빛나는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났다는 내용이다. “베드로와 그의
동료들은 잠에 빠졌다가 깨어나 예수님의 영광을 보고, 그분과 함께
서 있는 두 사람도 보았다.”(32절). 그리고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34절)고 한다. 이 구름은 특별한 신적 현존을 나타내는 것으로
예수께서는 사도들에게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하느님의 영광과 권능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예루살렘, 즉 십자가의 길을 향해 가시는 예수님은 수난과 수모를
당하시겠지만 한결같이 하느님 아버지께서 ‘택하신 아들’(35절)
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아무 힘없이 십자가 위에 죽음을
당하시지만, 그분은 산에서 보여주신 영광을 받으실 분이라는 것을
알아 그 고통과 괴로움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님의 ‘변모’는 부활의 영광에 대한 ‘예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죽음은 부활의 빛을 위한 것으로써, 우리가 지내는 사순절의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택하신 아들’ 예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참여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포기하고 십자가에 못 박는 길을
가는 것이다.

이러한 삶을 살아갈 때에 예수께 일어났던 그 사건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된다. 우리 자신이 신앙을 통해 아브라함이 변화되고 그의
자손들이 은총을 입었듯이 그처럼 변모되어갈 것이다. 하느님의
아들딸로, ‘그분과 같이’(1요한 3,2) 될 것이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는 내가 선택한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35절)는 말씀을 잘 따라야 한다. 우리는 신앙으로
약속된 땅을 향해 걸어가고 있지만, 이미 그 영광을 미리 내다보고
있고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은 결코 우리를 속이거나 실망시키지 않는다. 우리는
‘그의 말을 들으며’(35절) 즉 그분의 말씀을 따르며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에 그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음도 알고 있다.

그러기에 광야와 같은 이 사순절은 어떤 두려운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목적지에 미리 도착할 수 있게 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순간순간의 삶을 통하여 우리는 이미 부활의 신비를, 영광의 신비를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든 삶이 이렇게 될 때, 진정
파스카 신비의 완성인 하느님 나라는 지금 여기에서의 삶에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제2독서: 필립 3,17-4,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변화시켜주실 것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께서도 이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자신들의 생활에서 고달픈 십자가를 회피함으로써
사순절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자주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는데,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의 끝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자기네 배를 하느님으로,
자기네 수치를 영광으로 삼으며 이 세상 것만 생각합니다.”(18-19절).

즉 갈바리오를 향한 여정이 없다면 파스카의 기쁨은 없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하늘의 시민으로서(20절)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변모의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생활을 매일매일 변화시켜 가는 삶을 통하여
하늘 나라의 시민이 될 자격을 갖춤으로써 신앙 안에서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우리가 묵상한 바와 같이 이 사순절이
바로 우리 자신의 변모를 이룰 수 있는, 그래서 우리가 합당하게
파스카의 신비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의 시기가 되어야 한다. 우선
우리의 열심한 기도를 통해서 그리고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함으로써
그 변모를 이룰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만물을 당신께
복종시키실 수도 있는 그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시켜주실 것입니다.”(20-21절).
나 자신의 참된 변화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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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 29)|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17일 사순 제2주일.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데, 그
얼굴 모습이 달라지고 의복은 하얗게 번쩍였다.(루카 9, 29)

이 땅의 날씨와 이 땅의 시간을 받아들이며 봄꽃이 피어납니다.
받아들이는 변모는 기도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기도의 이 순간이 온통 아름다운 변모의
순간들입니다.
죽음까지도 함께하는 것입니다.

삶이 아름다운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다른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하느님 사랑만을 바랄뿐입니다.
우리를 향한 소중한 하느님의 고백과 약속은 사랑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또한 아름답게 변모될 것입니다.
기도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기쁨입니다.
모세도 엘리야도 기도의 여정을 걸어갔던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기도의 여정을 걸으며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만납니다.

예수님으로하여 과거와 현재는 아름다운 선물이 됩니다.
이 사순 주일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거룩한 주일이길 기도드립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임이 뜨거운 변모의 힘찬 신앙고백이 됩니다.
받아들임이 깊어지는 신앙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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