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24일 생명의 방향은 회개에 있습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3-24 16:42:21    조회 : 247회    댓글: 0

▣ 2019년 다해 3월24일 [(자) 사순 제3주일]

제1독서 탈출기 3,1-8ㄱㄷ.13-15
제2독서 코린토 1서  10,1-6.10-12
복음 루카 복음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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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3주일

2019년 다해 3월24일 사순 제3주일

본당에서는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사순 특강’을 마련합니다. 저도
사순 특강을 부탁받곤 했습니다. ‘예수님께 위로를 드린 사람,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이란 주제로 강의를 하였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란 주제로 강의를 하였습니다.
오늘은 제가 들었던 사순 특강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주제는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을 드러내는 단어가 있다면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이 십자가와 부활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파스카입니다.
파스카는 ‘건너감’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이집트에서 재앙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 백성의 문설주에 바른 양의 피를 보시고는
건너가셨습니다. 여기서 파스카는 재앙이 건너가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 바다를 건너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것도 파스카입니다. 다시 말해 파스카는 출발점이 있고,
목적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출발했다면 목적지를 향한 여정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셨지만 3일 만에 부활하신 것을
파스카라고 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어둠에서 빛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미움에서 사랑으로 넘어가는 것을 파스카라고 합니다. 둘째
아들이 뉘우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파스카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 것이
파스카입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가던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만나서
다시 로마로 돌아가는 것도 파스카입니다. 

파스카를 위해서는 하느님께서도 우리와 함께하셔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셨고, 예언자를 보내 주셨고,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신공(神功)이라고 합니다. 파스카를 위해서는 우리도
하느님과 함께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그것을 신공(信功)
이라고 하였습니다. 묵주신공, 성로신공, 조과, 만과는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드렸던 신공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보여주신
공과 우리가 하느님을 위해서 노력한 공을 보는 것을 판공(判功)이라고
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1년에 2번 판공성사를 보았습니다. 신자로서
노력을 성실하게 했다면 부활과 성탄을 기쁘게 맞이할 것입니다.
신자로서 노력을 소홀히 하였다면 보속을 하고, 성찰의 시간을 가진
후에 부활과 성탄을 맞이할 것입니다. 

우리가 파스카를 잘 맞이하기 위해서는 출발점이 어디인지, 목적지는
어디인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현 위치를 알았다면
목적지를 향해서 발걸음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멈춘다면 매년 돌아오는 파스카는 전례와 시간의 흐름일
뿐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여정이 함께 할 때만 매년 돌아오는 파스카는
우리를 하느님께서 인도하는 파스카가 될 것입니다. 

합당한 파스카를 위해서 두 가지를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는
안식일입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하느님을 위해서 지내야 합니다. 자는
시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일주일에 14시간은 하느님을 위해서
시간을 내야 합니다. 하루에 2시간은 하느님을 위한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성찰하고, 이웃을 돕고, 책을 읽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안식일을 잘 지키는 사람은 다른 6일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기 마련입니다. 신앙의 선조들이 목숨을 바쳐서
순교할 수 있었던 것은 안식일을 잘 지켰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통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참으로 기쁘고 복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재물의 십일조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재물의
십일조를 하느님께 바치는 사람은 나머지 재산도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곳에 사용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지갑을 여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함께 하기 마련입니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지갑을 연다면
우리의 마음도 어려운 이웃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사는 상인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재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보물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현명한 삶은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재물 때문에 오히려 가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건강까지 잃어버리곤 합니다. 밭에 묻혀 있는 보물을 볼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입니다. 

파스카의 여정은 쉽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야 했습니다. 사도들은 다락방에 숨어서 지내야 했습니다.
광야에서의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두려움과 걱정을 떨구어야 합니다.
커다란 쇳덩어리인 비행기가 하늘을 날 수 있는 것은, 역풍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역풍은 비행기를 하늘로 날아가게 하는 힘입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도 분명 역풍이 있을 것입니다. 역풍을 두려워한다면,
역풍을 원망한다면 파스카를 이룰 수 없습니다. 

구원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했던 분들도 부족한 점이 있었고, 허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맡겨진 일들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구원의 역사에 빛나는 별이 된 것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었고, 자신들의 허물과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은 ‘회개’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도 ‘회개’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성한 사람
아흔아홉도 좋아하시지만 회개하는 죄인 하나를 더욱 좋아하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아시고,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하여, 그 땅에서 저 좋고 넓은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데리고 올라가려고 내려왔다.” 

오늘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하였습니다.
“세상 종말에 다다른 우리에게 경고가 되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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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봉헌하는 것이다.

2019년 다해 3월24일 사순 제3주일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 봉헌하는 것이다>
복음: 루카 13,1-9

공자와 그의 제자 안자가 함께 배를 타게 되었습니다. 그 배의 사공은
그야말로 귀신처럼 노를 저어갔습니다. 안자가 물었습니다.

“나도 노 젓는 법을 배울 수 있겠는가?”
사공이 대답했습니다.

“물론입니다. 수영을 잘하는 사람은 연습만 하면 곧 배울 수 있고,
잠수에 능한 사람은 배를 본적이 없더라도 바로 노를 저을 수
있습니다.”

안자가 사공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하자 공자가 말했습니다.

“수영을 잘 하는 사람은 물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노
젓는 일에만 전념하게 되어 빨리 배울 수 있고, 잠수에 능한 자는 배가
뒤집어져도 당황하지 않기 때문에 더 빨리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두려움은 우리가 무언가 배우고 도전하는데 가장 큰 장애요인입니다.
김연아 선수가 엉덩방아 찧는 것이 두려웠다면 어떻게 스케이트를
배울 수 있었겠습니까? 두려워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두려움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두려움은 내가 다치거나
죽거나 손해볼까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자기보호기능입니다. 내가
죽으면 그래서 두려움도 사라집니다. 우리 안에는 죽어야 하는
‘나’가 있습니다. 이것을 죽이면 두려움이 사라져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회개’에 대해 말씀해주십니다. 회개를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아니 두려움을
사라지게하기 위한 행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우선 회개하지 않으면 그 두려움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부터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예수님은 회개하지 않은 사람을 포도밭에 심겨진
무화과나무로 비유하십니다. 다른 포도나무는 다 열매를 맺는데
무화과나무만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 열매는 무엇일까요?
포도원지기가 원하는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는
‘사랑’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 그것을 위해
포도원지기는 할 수 있는 노력을 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포도 재배인’으로 등장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포도 재배인이 왜 무화과나무에 집착하실까요? 이
무화과나무는 왜 포도밭에 달랑 한 그루만 심겨져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 무화과나무는 스스로 포도나무와 다르다고 믿고 있는
나무입니다. 본성은 자신이 무엇이라 믿는 것입니다. 자신이 늑대라
믿으면 늑대가 되고 자신이 사람이라 믿으면 사람이 되며 자신이
예수라 믿으면 제2의 예수가 됩니다. 무화과나무는 그래서 자신이
특별하여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고 믿는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크게는 자신들만 선택받았다고 믿는 이스라엘 백성을
의미하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고 여길까요? 바로 ‘두려움’
때문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없는 사람은 자신을 가치 있는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타인과의 차별을 두려고 합니다. 성경은 이런 경우 성을 쌓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카인은 아벨을 죽이고 그 두려움 때문에 자신을
해치는 자는 몇 배로 보복할 것이라 선포하며 자신만의 성을 쌓습니다.
로마도 힘이 강대할 때는 그러지 않았지만 점점 힘이 약해지자 성벽을
쌓아 적의 침임을 막으려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허물어진 실로암
탑이 이 상징입니다. 

실로암은 ‘파견된 이’라는 뜻입니다. 파견되기 위해서는 자신을
버려야만 합니다. 주님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 위해 내 뜻이
죽어야하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파견되겠습니까? 복음을 전하기
위해 파견되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 파견 받습니다. 그러나 상처받기 싫어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
있게 성호경도 긋지 못합니다. 이렇게 두려움이 있다는 말은 아직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회개를 위해서는 진정으로 자신을 봉헌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상징으로 빌라도가 제물을 바치려는 사람들을 죽여
그들의 피가 제물에 물들이게 되었다는 사실을 예로 드십니다. 제물을
바치는데 자신은 죽지 않으면 그 제물은 아무 쓸모없습니다. 그냥 남는
제물을 바치고 자신은 죽지 않으려하니 그런 사람은 신앙을 지니고
있어도 두려움 때문에 온전히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봉헌하는 예물에 나의 피를 함께 물들이지 않으면 내가 죽지
않기 때문에 그 봉헌은 의미가 없게 됩니다. 봉헌은 자신의 교만의
탑이 무너지게 하여 자아를 죽이기 위한 목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고 모든 사람들과 섞이며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미국 CBS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서바이버’에서 아시아계 미국인으로는
최초로 우승한 ‘권율’ 씨가 강연을 목적으로 한국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서바이버란 오지에서 이루어지는 생존게임으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엄청난 인기를 얻는 프로그램입니다. 당시
‘권율’이란 한국 이름으로 참가해 국내에도 큰 이슈가 되었었는데,
5만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우승까지 했기 때문에 국내에도 많은 분들이
권율 씨를 알고 있습니다. 

예일대 로스쿨 출신의 변호사라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이런 특이한
방송에 나가게 된 것은 바로 두려움의 극복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인종차별과 강박증으로 인해 공황장애를 겪었던 권 씨는
지금의 두려운 삶을 이겨내기 위해선 ‘내가 변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느끼고 이후부터는 ‘두려운 일에 오히려 도전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그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기 시작 했습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데도 스카이다이빙에 도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 대통령의 오바마 대선
캠프에 들어가고, 예일대 로스쿨에 들어가 변호사 자격증도 따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서바이버 경쟁에 도전하여 우승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두려움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만약 내가 돈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봉헌을 더
많이 해 보면 됩니다. 그러면 돈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그러면
돈이 더 많이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회개를 한 사람이 하게
되는 행위입니다.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더 기도와
봉사를 많이 하면 됩니다. 그러면 더 시간적 여유가 있어짐을 느낄
것입니다. 사람이 두려우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두려운 사람과
더 함께 하기 위해 다가가면 됩니다. 그러면 생각보다 친절한
사람이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남들에게 평가받는 것이 두려우면
어떻게 하면 될까요? 당당하게 나의 것을 드러내어 많은 평가를
받아보면 됩니다. 그러면 남들의 평가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도로에서 안전지대만 찾는 사람은 운전을 할 수
없습니다. 운전을 즐기려면 안전지대에서 나와야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지 않으셨다면 당신도
세리와 죄인들과 섞여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회개는 우리 자아를 죽여야만 온전해진다는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 제물을 바치며 자기 자신 또한 바치는 것입니다. 렙톤
두 닢을 바치는 과부는 내일 먹을 음식 값까지 다 주님께 바쳤기
때문에 더 이상 잃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아무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나의 욕구 중에 소유욕과 육욕, 교만이 있는데 제물을 봉헌하는 것은
이 세 가지를 다 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가 두려움을 없애는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제물에는 항상 내 자아의 피가 섞여야합니다.
우리가 바치는 제물은 또한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봉헌을 통해 두려움을 극복해보십시오.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회개는 자아를 죽이기 위해 두려움과 맞서 내가
두려운 일에 도전하게 만듭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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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마음의 회개로 자유를 누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24일 사순 제3주일: 마음의 회개로 자유를 누림

오늘의 전례는 우리 생활의 크고 작은 사건들 속에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의 표징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자 하고 있다. 하느님
현존의 표징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냥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어 나갈 때, 즉 회개할 때 그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사순절의 특별한 메시지며 오늘 복음의 주제이다.

제1독서: 탈출 3,1-8.13-15: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분은 나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모세에게 계시하심으로써, 당신이야말로
항상 모세와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계시며 구원해주시는
분이심을 선언하신다. 이 야훼라는 이름은 하느님의 본질을
나타내기보다 그분의 구원적 능력을 나타낸다. 그 이름은 ‘나는 있는
나다’라는 의미이며, 이는 ‘내가 있다!’ 즉 ‘나는 너희와 함께 있으며
구원하는 하느님이다’고 하시며 하느님의 백성을 이끌어주시고
구원해주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그분은 이스라엘 백성을 무로부터 창조하시어 자유로운
백성으로, 구원받은 백성으로 살게 해 주셨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그들과 함께 계신 하느님을 따라야 한다.
하느님께 자신을 일치할 때 그분의 구원적 능력이 나타난다.

복음: 루카 13,1-9: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렇게 망할 것이다

오늘 복음은 두 대목으로 되어있는데 모두 다 ‘회개’와 연결되어 있다.
첫째 대목은(1-5절) 갈릴래아 사람들이 파스카 축제 때에 희생제물을
봉헌하고 있었을 때에 빌라도가 그들 중 일부를 학살한 사실과,
실로암에 있던 탑이 갑자기 무너졌을 때 그들 가운데 열여덟 명이
희생당한 사실이다. 이 사실에 대해 예수께서 어떠한 반응을
보이시는가를 보고 있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했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망할 것이다.”(2-3절).

그들은 모든 불행을 다 정해진 죄에 대한 형벌로 생각하였다. 이것은
어떤 면에서 현실을 보다 깊이 깨닫기를 회피함으로써 자기의 마음을
평온히 유지하는 편리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러한 신앙의 모습을 거절하신다. 이러한 생각과 똑같은 것은
아니더라도 오늘날 우리가 현실을 오로지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거나,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자연적 수단이나, 정해진 사회의 구조에 의해서만
설명할 때에는 그와 비슷한 잘못을 범하는 것이다.

이렇게 대중적 신앙을 두 번씩이나 거절하시면서 말씀하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망할 것이다.” 이 ‘망한다.’는
말은 육체적인 죽음보다도 영적인 ‘파멸’, 즉 다른 모습으로 변화되고자
하는 원의를 갖지 않는다면 인간 그 자체로서 이르게 되는 본질적
파멸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결국 회개는 생명을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즉 회개는 그
자체가 고통스러운 면이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생명과 성장을
위한 것이다. 여기서 회개란 우리 자신의 피상적인 신앙을 버리고,
또한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라는
초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다른 사람들은 덮치면서 나를 스쳐 가는 이유가 특별히 있기
때문인가? 만일 하느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택하시고 나를 택하시지
않으셨다면, 그분께서 내게 아직 결정적으로 마음을 결정할 시간을
주시기 위함이 아닌가?

그리고 죄 없는 사람들의 고통을 볼 때에 나 자신이 더 열심히
투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지 않는가? 이러한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건을 통하여서든지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위한 하느님의 메시지를 깨달으려는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나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회개는 바로 매일의
현실에 근거하기 때문에 항상 계속되어야 한다. 이것이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그리고 두 번째 가르침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대한
비유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마태오(21,18-19)와 마르코(10,12-14)
는 예수께서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말라죽게
하셨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주어질 운명을 상징적으로
표현하였지만, 루가는 심판과 처벌의 의미보다는 자비와 기다림의
의미를 부여하고자 했다.

주인은 ‘삼 년’을 기다리면서 열매를 기다렸지만 열매를 얻지 못했을
때에도, 포도원지기의 요청을 받아들이는 주인의 모습이다. 주인은
이런 아량을 통해 자신의 크나큰 자비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인내로이 기다려주신다. 그것은 우리가 적절한 시기에 결실을 맺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 기다려주신다는 것은 그분의 자비의 표징이면서 또한
심판의 표징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분의 인내로운 기다림을 저버리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더 무서운 ‘심판’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처럼
우리 각자에게 있어서 매순간순간은 항상 마지막 순간이 될 수 있고
우리의 영원한 운명에 대해 책임을 지는 순간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회개하고 그에 맞는 열매를 맺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함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은총이 크면 큰 만큼 책임과
위험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자신이 변화하고
회개하기를 거부하거나 게을리 한다면 우리에게도 같은 불행이 덮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맞은 위험에 놀라서 이집트 노예생활에
대해 향수를 갖고 끊임없이 불평을 한다. “이집트에는 묏자리가 없어
광야에서 죽으라고 우리를 데려왔소? ‘우리한테는 이집트인들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나으니, 이집트인들을 섬기게
우리를 그냥 놔두시오.’ 하면서 우리가 이미 이집트에서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소?”(탈출 14,11-12).

자유로운 존재가 되는 것은 쉬운 일도 안이한 일도 아니다. 사순절의
메시지는 우리에게 매일의 사건들과 현실들을 통해 입증되는 마음의
회개로써 ‘자유’를 성취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회개하여 하느님께로 되돌아감으로써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자유를 누리며 사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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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 5)|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3월24일 사순 제3주일.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5)

신앙의 진리들은 회개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회개는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입니다.
회개는 소중한 우리의 생명입니다.
소중한 생명은 주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아갑니다.

참된 생명의 시작은 회개입니다.
생명의 방향은 회개에 있습니다.
회개의 본질은 가치를 일깨워주는 우리 인격의 실천입니다.
회개는 인간존중의 진실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생명을 가져다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뜨겁게 만나는 것입니다.

회개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우리의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죽어야 모두를 살리시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회개로 생명의 질서에 순종하는 순종의 사순시기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순종은 신앙의 기본이며 회개의 삶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생명의 날 되십시오.
우리를 멸망에서 구원하는 회개입니다.
회개는 순종임을 잊지마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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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어떤 십자가가 제일 무겁고 견디기 힘드십니까?

2019년 다해 3월24일 사순 제3주일

어떤 십자가가 제일 무겁고 견디기 힘드십니까?

재의 수요일이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사순 제3주간! 본격적인
사순시기로 접어 들었습니다. 이 사순 시기 교회는 우리에게 평소보다
좀 더 자주 십자가를 바라보고, 좀 더 자주 십자가를 묵상하고, 좀 더
기꺼이 십자가를 지라고 초대합니다.

천천히 지난 세월을 돌아보니, 그리 길지도 않은 우리네 인생, 무슨
십자가가 그리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십자가들이
끝도 없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우리 어깨 위에 얹어집니다. 하나
지나가고 나면, 어느새 또 다른 십자가가 다가옵니다.

여러 유형의 십자가들이 있는데, 어떤 십자가가 제일 무겁고 견디기
힘드신가요? 아무리 노력해도 극복이 안되는 약점이나 결핍인가요?
수십년간 끝도 없이 반복되어온 끈질긴 악습인가요? 아니면
지긋지긋한 가난인가요? 혹시 혹독한 병고인가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인가요?

참으로 다양한 형태의 십자가들이 우리네 인생을 좌지우지하고, 때로
우리를 깊은 나락으로 떨어트립니다. 그런데 요즘 와서 자주 느끼는
바 한 가지는, 여러 십자가 중에 정말이지 특별한 십자가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존재로서의 십자가 인 듯합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그런 사람 꼭 있습니다. 마치 ‘로또’ 같은 사람, 나와
절대로 안맞는 사람, 달라도 너무나 다른 사람, 백번 천번 생각해도
이해가 안되는 사람...재미있는 것은 그런 사람이 좀 멀리, 시드니나
뉴욕에 계시면 좋을텐데, 너무나 가까이 계신다는 것^^

이번 사순 시기, 다른 십자가도 잘 견디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신비로운 십자가, 존재로서의 십자가를 슬기롭게 견디고 극복하고,
더 나아가서 영성 생활 진보를 위한 유익한 도구로 활용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왜 주님께서는 하필 이렇게 나와 맞지 않은 이분을 내게로
보내주셨는지, 진지하고도 근원적인 성찰을 해보면 좋겠습니다.
분명히 그 존재가 내게로 온 주님의 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나와 철저하게도 다른 그를 통해 내 인생의 그릇을 넓혀보라는 주님이
초대가 아닐까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못할 그를 통해 내 영적 시야를
확장시켜보라는 주님의 부르심이 아닐까요? 주님께서는 나의 넘침으로
그의 부족함을 채워주라고 인연을 맺어주신 것이 아닐까요?

십자가 앞에 설 때 마다 우리는 이 십자가를 보내시는 분은 바로
주님이시라는 진리를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십자가 그 너머에
계시는 주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를 보내시는 그 이면에는 항상 주님의 사랑이 자리잡고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 삶이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영적으로 쇄신되라는 신호를 보내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 마다 십자가 그 자체에만 집착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십자가 그 이면에 담겨있는 주님의 의도,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치워버리려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설명하러 오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분은 당신 사랑의
현존으로 우리와 함께 십자가를 나눠지려고 오신 것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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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 심보를 바꾸는 것|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3월24일 사순 제3주일(루카13,1-9)

심보를 바꾸는 것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많이 사랑합니다. 한 주간 행복하셨습니까?
예. 행복하시게 지내신 분은 행복에 행복을 더하시고, 혹시라도
행복하지 못하셨다면 지금부터 행복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지 못한 것은 우리 마음이 문제 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마음을
닮을 수 있는 은혜가 함께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를 회개에로 초대 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뉘우치고 슬퍼하는 것을 회개라고 알고 있습니다. 회개란 쉬운 말로
심보를 바꾸는 것입니다. 자기의 인생관을 바꾸는 것입니다. 이 지상의
마음가짐에서 하늘을 향한 마음으로 탈바꿈하는 것입니다.

신자중에 가장 무서운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예, 배신자. 그러면
신부가 제일 싫어하는 신자는 누구라고 했죠? 원불교 신자,
‘원망’하고, ‘불만’이 가득하고 ‘교만’한 신자입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이 ‘사랑’하고 ‘포용’하며 ‘겸손’의 마음으로 바뀐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대표적인 배신자 베드로는 위기를
모면하고자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닭이 두 번째
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하신 말씀이 생각나서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마르15,72). 주님의 말씀이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의
연약함을 의탁할 수 밖에 없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태어나서 주님의 으뜸제자로 주님의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던 인물입니다. 그가 말합니다.
“이 말은 확실하여 그대로 받아들일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 가운데 첫째가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셨습니다”(1티모2,15-16). “나는 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내 달리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늘로 부르시어 주시는 상을 얻으려고,
그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필리3,14). 바로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만약에 과거에 매여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면
하느님의 복음을 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국 회개는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철저히 맡기고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과거는 지나간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올지 모르는 신비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오늘이 선물로 주어졌고
오늘을 통해서 미래가 열립니다. 그러므로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오늘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세관장 자캐오라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6). 하고 이르시자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19,9).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캐오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 삶의 변화된 모습을 구체적 행동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행동의 변화 없는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한 신부님께서 오랜만에 출신 본당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오래도록 살고 계신 신자분이 반가워하시며 환영해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한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오랜만에 친정에 오셨는데
떡이라도 해 오셨습니까?” 신부님께서 능청스레 대답하셨습니다.
“네, 그러잖아도 떡을 해 오려고 했는데 집사람이 없어서
못해왔습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핑계를 댑니다. 집사람 핑계는 왜댑니까? 남편을
탓하고, 자식을 탓하며 부모를 원망하고 이웃을 시기하는 마음, 탓을
남에게 돌리는 심보를 고쳐야 합니다. 잘된 것은 자기가 잘해서 그런
것이고 잘못되면 조상 탓으로 돌리는 마음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삶의 회개입니다.

십자가의 오른쪽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매달린 죄수하나가
“당신은 메시아가 아니오. 당신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 보시오.”하며
예수님을 모독하였습니다. 그러나 오른쪽에 매달린 강도는 그를
꾸짖으며 말하였습니다.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느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갈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카23,42-43).

왼쪽 강도의 모습을 통해서 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을 비방하고
모욕하는 마음입니다. 사실 주변에서 일어나는 남의 잘못된 일을 보면
“내 그럴 줄 알았다. 네가 사는 것이 그 모양이더니 결국 그 꼴이구나”
하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남을 심판하는 태도를
가질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추스르는 근신의 태도를
취하는 것이 믿는 이들의 자세입니다. 그의 안쓰러운 모습에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고 또한 회개의 기회로 삼는 겸손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른쪽 강도처럼 마지막 순간에라도 마음을 돌려서 간구하면
주님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하고 약속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회개의 기회를 미루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사람들이 당한 불행이나
고통,실로암 탑에 깔려 죽은 사람이나 그들은 ‘죄가 많아서’, ‘믿음이
없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셨고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루카13,5)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재앙을 당하기 전에 미리 준비하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주변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말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 여기서 준비하고 있으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결코 우리의 멸망을 두고 보실 분이
아니십니다.

방탕했던 아들의 비유(루카15,21)을 보면 작은 아들이 “아버지, 저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이제 저는 감히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라도 삼아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방탕하였던 아들은 겸손되이
저 밑바닥으로 내려갔습니다. 아버지의 머리위에 올라가서 아버지를
애먹이던 그가 품팔이꾼, 종의 모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집의 풍요로움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기억을 통해 하느님을
삶의 첫 자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내 좋은 일에는 둘러리로 전락시키고 마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요? 주님, 주님! 하면서도 참으로 그분을 주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오히려 종으로 취급하는 경우가 많음을 솔직히
인정해야겠습니다.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기도 전에
이미 아들을 용서한 아버지, 그 아버지께서 우리도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한 주간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감이 곧 회개요, 그리고 그 회심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되새기며 주님의
사랑을 드립니다. 성 아프라테스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마음의 할례를 받고 회개의 눈물로 다시 태어나는 이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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