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3일 확실할 때만 말하고 행동하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4-03 08:04:07    조회 : 212회    댓글: 0

▣ 2019년 다해 4월3일 [(자)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 49,8-15
복음 요한 복음 5,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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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4주간 수요일

2019년 다해 4월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컴퓨터로 글을 쓰면서 좋은 점이 있습니다. 맞춤법이 틀리거나, 문장이
어색하거나, 외래어를 쓰면 빨간 줄이 그어지면서 고칠 수 있도록
알려줍니다. 대부분은 컴퓨터의 지시를 따르지만 강조하기 위한
말이나, 특별히 쓰는 외래어는 그냥 사용하는 편입니다. 그런데도 글
아래에 빨간 줄이 있으면 다시 고치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데 사람이 어느 순간 안식일에 구속되어 있듯이,
컴퓨터도 사람을 위해서 있는데 어느 순간 컴퓨터의 뜻이 제 뜻보다
먼저인 것처럼 여겨지곤 합니다. 스마트 폰, 텔레비전, 구글,
페이스북, 카카오톡은 분명 소통을 위해서 만들어진 도구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명상, 독서, 기도, 희생이라는 더 소중한
것들과 멀어지기도 합니다. 

가톨릭교회에는 4대 교리가 있습니다. ‘천주존재, 삼위일체, 강생구속,
상선벌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선을 행한 사람에게 상을 주고, 악을
행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강생구속입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심판하시고, 벌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하면 하느님을 우리의 ‘틀’에 가두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자비하신 분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관한 이야기를 제1 독서에서
들었습니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오늘 영성체송은 이렇게 선포합니다. “하느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받게
하셨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도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신 것도 사랑의 실천입니다. 표징을 보여
주시고, 제자들과 함께 지내시고,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것도 사랑의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천상병 시인의 ‘행복’이란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는 세계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느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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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확실할 때만 말하고 행동하라.

2019년 다해 4월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확실할 때만 말하고 행동하라>

복음: 요한 5,17-30

어린이들이 복사를 처음 설 때 매우 긴장하고 당황해하는 경우를
봅니다. 어떤 아이들은 식은땀을 흘리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심지어
제대에 구토를 하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어렸을 때 저도 어찌 할 바를
몰라 혼났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배우는 복사를 소복사라 하고 선배
복사를 대복사라 합니다. 소복사를 몇 번 서봐야 대복사를 설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소복사를 한 번밖에 서보지 않았는데 수녀님이 대복사를
시키셨습니다. 물론 후배가 보는 가운데 못한다 할 수 없어서 하기로
했지만 매우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때는 신부님이 미사 중 손 씻는
수건도 매우 복잡하게 접혀있었습니다. 저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것을
거의 5분 가까이 벌벌 떨면서 접었습니다. 잘 접히지 않으면 그냥
내버려두면 되는데 어찌할 바를 몰라 중요하지 않은 일에만 집중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성체축성 때 종을 쳐야 하는 것까지 잊고 그것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종을 치지 못해 신부님에게 혼이 났고 더 이상
복사를 서고 싶지 않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매우 큰
두려움입니다. 이 두려움 때문에 아무렇게나 말하게 되고 행동하게
되어 불행을 자초하게 됩니다. 모르면 물어보면 되고 모르면 알려줄
분을 바라보면 됩니다. 저는 신부님이 종을 치라고 눈짓을 하는데도
여전히 등을 보이고 수건을 접는 것에만 열중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그것이 화가 나게 만든 것입니다. 아니면 수녀님을
보았어야했습니다. 두려움이 나 자신만 바라보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가장 큰 이유는 하느님과 당신을
대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대등하다고 믿는 분이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그 두려움을 없애는 길은 자신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뜻을 없애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보고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라고 하시며 언제나 아버지를 바라보고 계심을
알려주셨습니다. 

초등학교 때 연극에서 대사를 잊어버리면 그 밑에서 알려주시던
선생님이 기억납니다. 어찌해야 할지 모를 때 바라봐야 할 분이
계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오히려 안정이
되어 선생님을 볼 필요도 없이 모든 대사를 다 외워냅니다. 내 힘으로
하려는 두려움이 그 두려운 결과를 초래하게 만듭니다. 

워런 버핏은 주식투자로 세계의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의 지론은
확실하지 않은 것에 투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야구에서야 스트라이크
존에 볼이 들어오면 투 스트라이크 노 볼이라도 스윙을 하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하지만 투자는 삼진아웃이 없습니다. 그냥 한 없이
기다리다가 70% 이상 확실한 것이 있다면 그것에만 투자하면 됩니다.
그가 비록 마이크로 소프트나 아마존에 투자하지 못하였지만 그는
그것에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는 컴퓨터를 잘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아는 코카콜라와 같은 것에 투자했습니다. 코카콜라 값을
1센트 올리면 1년에 6조 원 가까이 더 번다고 합니다. 그는 그냥 그가
잘 아는 것에만 방망이를 휘두를 뿐이었습니다. 

저도 확신이 없는 글들을 써서 실수를 할 때가 많았습니다. 확신 없이
하는 행동들이 항상 나와 남에게 피해를 줍니다. 그리고 자신이 왜
그랬는지 모른다고 말합니다. 불확실한 것 같으면 그냥 넘기면
됩니다. 확실한 것만 기다렸다고 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내 앞에서 아직도
말씀하시고 행동하고 계십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그분의 일을 바라보지 않아 헛수고가 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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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사람의 아들|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당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하심

복음: 요한 5,17-30: 아들도 살리고 싶은 사람들은 살릴 것이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38년이나 고생한 병자를
고쳐주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17절)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의 행위는 실상 아들 안에서 일하시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하신다. 이렇게 아버지를 언급함으로써 당신을
하느님과 대등하게 만들었다고 분노한 이들에게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셨다.

‘여태’라는 말은 아들이 말씀으로서 아버지 안에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모든 것은 말씀을 통하여 생겨났다.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께서 창조하신다면, 그분은 창조주 하느님의 말씀이시며 당신
아버지와 모든 면에서 같으시다. 안식일의 의미를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는 사람들은 불쾌해했다. 하느님께서 쉬셨다고 하는 것을 더
이상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라고 하시어 그들을 혼란에 빠뜨리셨으며, 그래서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며 당신을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표현하시어
그들을 더욱 혼란에 빠뜨리셨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19절) 당신은 하느님의 모습으로가 아니라, 종의
모습으로 오셨기 때문에 당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고
하시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나약하기 때문에 그런 면에서 힘이
없으시다는 말씀이다. 육은 나약하다. 그래서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마태 24,41)고 한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사랑하신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21절) 죽은 이를 되살리는 것은
하느님의 속성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따로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들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부활의 권능을 가지고
계시며 아들 또한 하느님의 본성상 그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아버지께서는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고
한다. 즉 아버지께서 심판하시지만 눈에 보이는 사람의 아들을 통해서
하신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아들도 공경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똑같이 공경을 받는 분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게 그분을 믿는 사람은 이미 생명의 나라에 들어간
사람이라고 하신다. 아들을 믿지 않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믿지 않는
것이며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라고 하신다. 또한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주셨기 때문이다.”(26절)라고 하신다. 도 아버지께서는 사람의
아들에게 심판의 권한도 주셨다고 했다.

그러므로 모든 말씀과 업적은 당신이 독자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함께 아드님께서 하시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아버지와
아들이 성령 안에서 이루시는 말씀과 업적이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30절)고 하시며 당신을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는
분이심을 알고 우리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따르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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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마음 둘 자리|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4월3일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요한 5,17-30)

마음 둘 자리

예수님의 관심사는 오직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일치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 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결국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마더 데레사).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 나시길 기도드립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성형수술 :

못난 얼굴 수술 하는 것보단 못난 마음 수술하는 것이 더 낫다.
못난 얼굴 수술하면 얼굴만 예뻐지지만 못난 마음 수술하면
얼굴은 따라 예뻐지기 때문이다. -이규경-

이 사순절에 마음을 수술하여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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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4월 3일 (수) - 준비 잘 하는 성도

오늘은 ‘준비 잘 하는 성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신명기 1장 22절 말씀에 “우리가 사람을 우리보다 먼저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과 지혜롭지 못 한 사람으로
구분한다면 당연히 우리 성도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 지혜의 첫 번째 기준이 바로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턱대고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간 것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정탐꾼을 미리 보내어 얼마만큼의 환경인지를 미리
알고 그에 대비하면서 그에 걸 맞는 전투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은 아주
기초적인 상식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도 보면 이 기초적인 상식인 미리 준비를 하지 않고
마음이 늘 취침 상태에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늘 깨어있어야 한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것은
언제라도 무슨일을 미리 준비하고 미리 대비하고 미리 챙길줄 아는
사람을 통하여 쓰시겠다는 것을 반증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12명의 정탐꾼을 보낸 그 근본에는 결코
실수를 하지 않아야겠다는 자세와 또 반드시 승리해야 되겠다는
전제하에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력이 약해도 전쟁에서
이길 수는 있어도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으면 결코 그 전쟁은
승리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부터 준비 잘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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