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7일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4-07 06:09:48    조회 : 211회    댓글: 0

▣ 2019년 다해 4월7일 [(자) 사순 제5주일]

제1독서 이사야서 43,16-21
제2독서 필리피서 3,8-14
복음 요한 복음 8,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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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나는 얼마만큼 더럽혀질 수 있는가.

2019년 다해 4월7일 사순 제5주일

<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더럽혀질 수 있는가?>

복음: 요한 8,1-11

파락호(破落戶)란 단어는 양반집 자손으로써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 파락호 중에 일제 식민지
때 안동에서 당대의 파락호로 이름을 날리던 의성金씨 가문 학봉
김성일(鶴峯 金誠一)선생 종가의 13대 종손인 김용환이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노름을 지나치게 즐겼습니다.

당시 안동 일대의 노름판에는 꼭 끼었고 초저녁부터 노름을 하다가
새벽녘이 되면 판돈을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주특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만약 배팅이 적중하여 돈을 따면 좋고, 그렇지 않고 배팅이
실패하면 새벽 “몽둥이야!” 하고 큰소리로 외쳤다고 합니다. 이 소리가
나오면 도박장 주변에 잠복해 있던 그의 수하 2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나타나 판돈을 덮쳤습니다.

판돈을 자루에 담고 건달들과 함께 유유히 사라졌던 노름꾼 김용환.
그렇게 노름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수 백 년 동안의 종가
재산으로 내려오던 전답 18만평,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도 다 팔아
먹었습니다. 그렇게 팔아먹은 전답을 문중의 자손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걷어 다시 종가에 되사주곤 했습니다. “집안 망해먹을 종손이
나왔다.”고 혀를 차면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당시는 종가는 문중의
구심점 이므로 없어지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한번은 시집간 무남독녀 외동딸이 신행 때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이 있었는데 이 돈마저도 친정아버지인
김용환은 노름으로 탕진했습니다. 딸은 빈손으로 시댁에 갈수 없어서
친정 큰 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가면서 울며 시댁으로 갔다는
일화도 있습니다. 이 정도니 주위에선 얼마나 김용환을 욕했겠습니까?
김용환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 세상을 떠납니다.

이러한 파락호 노름꾼 김용환이 사실은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사후에 밝혀졌습니다. 그간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이 밝혀졌습니다.
독립자금을 모으기 위해 철저하게 노름꾼으로 위장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야 일제의 눈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용환은
독립군의 군자금을 만들기 위하여 노름꾼,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살면서도 자기 가족에게 까지도 철저하게
함구하면서 살았던 것입니다. 임종 무렵에 이 사실을 알고 있던 독립군
동지가 머리맡에서 “이제는 만주에 돈 보낸 사실을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나?”고 하자 “선비로서 당연히 할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 할 필요
없다.”고 하면서 눈을 감았다고 합니다. 지금의 안동독립운동기념관이
이 김용환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김용환의 무남독녀 외딸로서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받은 돈도 아버지가
노름으로 탕진하여 큰어머니의 헌 농을 싸가지고 간 김후옹여사는
1995년 아버지 김용환의 공로로 건국훈장을 추서 받았습니다. 훈장을
받는 그 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우리 아베 참봉 나으리”
라는 글을 발표했습니다.
(출처: ‘예화1302, 누명쓴 애국자들’, 작성자 cyjung0103) 

남을 돕는 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가난해지며 남을
돕는다면 이는 더 높은 경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불교에
지장보살이라고 있습니다. 자신이 직접 지옥에 가서 지옥에 있는
중생들을 구제하겠다는 보살입니다. 타인의 고통을 덮어쓰면서까지
타인을 구제하려는 경지가 아마도 사랑의 최종점일 것입니다.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옥에 가도 자신은 보살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저는 최대한 남의 말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꼭 타인에 대한 안 좋은
말을 하면 그 사람을 만나게 되고 그러면 제가먼저 서먹한 마음으로
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상대는 이미 제가 그 사람에 대해 안 좋은
말을 한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누구와도 편하게 대하기
위해 뒤에서 남의 말을 최대한 자제하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부작용이 큽니다. 다른 사람들이 함께 동조해서 그
사람의 험담을 하는데 혼자만 가만있으면 왠지 그 험담하는 사람
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는 동조해 주어야합니다.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그 무리에서 환영받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더라도 끝까지 버티면 그 무리 전체가 정화될 확률도 있습니다.
군대 첫 휴가를 나온 아는 형님이 그랬다고 합니다. 친구들은 다 그
형님에게 술을 먹이고 안 좋은 곳으로 끌고 갔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러기는 싫었는지 친구들에게 완강히 저항했다고
합니다. 옷도 찢기고 허리띠도 끊어졌고 안경은 나뒹굴었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그 곳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친구들도 결국엔
포기하고 다 함께 술을 한 잔 더 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세상은 남을 심판하기 좋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이 세상에서 외톨이 되는 십자가를
감수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간음하는 여인을
나무라지 않기 위해 세상과 적이 되셨습니다. 당신 손에 흙을
묻히셨습니다. 세상에서 그 여인 대신 당신이 더러운 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그 여인에게 던지려던 돌을 놓고 돌아갔지만
결국 그 방향을 예수님께 틀었습니다. 그러나 그로인해 그 여인은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타인의
죄를 대신 뒤집어쓰실 수 있으셨던 이유는 그래도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지위가 변하지 않음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믿지 못하면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까봐 타인의 잘못까지 뒤집어 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남을 심판해서 누군가를 정화할 수는 없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깨끗하게 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피 흘림입니다. 누군가를 닦아주면
그 닦아준 것은 더러워지게 됩니다. 이를 감수하지 못하면 누군가를
깨끗하게 해 주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물론 자신은 깨끗한
사람이어야지 자신이 더 더러운 사람이라면 깨끗하게 해 준다고 하면서
더 더럽히게 됩니다. 죄를 짓지 않으면서도 남의 죄를 묻지 않는
사람이 세상을 정화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겐 세상의 때가
묻습니다. 그러나 마치 보석에 묻은 흙처럼 그 때는 닦으면 사라집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바로 이렇게 우리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흘리셔야
했던 예수님의 피 흘림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자녀를 씻어주지 않는
어머니가 없듯, 이웃을 씻어주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도 없습니다.
판단할 것이 많아도, 내가 더러워져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자신 혼자 깨끗하자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예수님처럼 조용하게 바닥에 글을 쓰며
자신이 더럽혀지면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는 깨끗해지게 될 것입니다.
결국 나의 십자가는 타인의 죄를 씻어주기 위해 나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만 질 수 있는 것입니다. 

보석은 자신이 더렵혀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흙이 묻어도
보석은 보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보석이 아니고 약해서 세상 것과
섞이면 내 자신까지 더럽혀질까봐 자신을 보호하느라고 타인을
판단하거나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동조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가
보석임을 알 때 세상의 묻은 때를 벗겨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죄를
짊어져도 상관이 없으려면 얼마나 완벽해야 할까요? 그렇게 완벽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세상의 모든 죄를 씻어줄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나는 얼마만큼
더러워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아야겠습니다. 닦아주려면 더러워져도
괜찮은 나여야 합니다. 더러워져도 괜찮은 나임을 알려면 내가
보석임을 믿어야합니다. 주님을 이것을 믿도록 당신 보석을 우리를
위해 희생시키셨습니다. 내가 보석임을 알 때 남의 때가 묻는 것을
견뎌낼 수 있어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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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용서와 자비를 통한 새 창조|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7일 제5주일:용서와 자비를 통한 새 창조

오늘의 전례 역시 지난 주일에 이어 하느님께서 용서와 자비를 통해
만들어 내시는 ‘새로움’에 관한 주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제1독서: 이사 43,16-21: 내가 이제 새 일을 시작하였다

이사야 예언자는 귀양살이하는 사람들에게 머지않아 바빌론의
종살이에서 해방되리라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그 해방은 옛 출애굽의
사건들 즉 홍해를 건넘, 파라오 군대의 패퇴, 광야의 고달픈 여행에서
일어나는 기적들과 하느님의 도우심 같이 나타나고 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19절). 하느님의 ‘새로운’
개입을 말씀하신다.

이 ‘새로운’ 것은 이중적 차원으로 이해된다. 첫째는 ‘재생적 차원’
으로 지나간 모든 것은 인간에게 다시 제시되는 구원의 선물로서
하느님께서 당신 사랑에 한결같이 충실하심에 대한 성사적 표징이
된다. 둘째로는 ‘창조적 차원’인데, 하느님은 과거에 얽매여 있지
않으시고 창조적 능력으로써 당신의 구원계획을 성취시키신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새로운 것’ 안에서는 과거가 재현되고
또한 미래가 예견되고 있다. 이 모든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큰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새
사람이 되어” 주님께서 이루어주신 구원을 자신 안에 충만히
실현시키도록 불림을 받고 있다.

그러나 누가 이 부르심을 완전히 산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우리는 모두 아직 ‘묵은 사람’이다. 진정한 대탈출이 우리 자신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나로 변화되어가야 한다.

복음: 요한 8,1-11: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말라

오늘 복음도 그리스도를 사랑과 자비가 충만하신 분으로 제시하면서
‘새로운 소식’을 계시하고 있다. 이 새로운 소식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단죄하기를 바랬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오늘의 말씀은 지난 주일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와 연속성이 있다.
단지 차이점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아버지가 주인공이지만,
오늘 복음에서는 그리스도 자신이 주인공이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데 있어서도 아버지의 완전한 모상이시라는
것이다(골로 1,15).

몇몇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것을 알고, 그분께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3절)를 데리고
와서 심판해 주기를 요구했다. 모세법(레위 20,10; 신명 22,22)에
의하면 그 죄는 돌로 쳐 죽이도록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할 때 예수의
심판은 단죄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그들의 요구가 순수하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했고 “예수님을 시험하여 고소할 구실을 만들려고 그렇게
말한 것이다.”(6절). 만일 죄를 용서해주라고 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범한 사람으로 고발할 수 있을 것이고, 단죄하는 경우에는 죄인들의
친구로 지내온 예수님께서 모순을 범하는 것이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함정같이 보인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히려 그 반대자들을
함정에 빠지게 하신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 대한 심판보다도 각자가 스스로 자신에 대해
심판을 해야 할 것임을 보여주신다. 두 번이나 땅에 ‘쓰시는’(6.8절)
행동은 간교한 속셈으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면 법조문
자체만 읽을 것이 아니라, 그 법의 근본정신을 읽으라고 하시는 것
같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생각을 알아듣지 못했을까봐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7절) 하고 말씀하신다. 그들이
나이 많은 자들부터 시작하여 하나씩 하나씩 떠나간 것은 바로 이
말씀을 들은 때였다(9절). 물론 그들은 간음죄가 아니더라도 어떤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에 떠나갔을 것이다.

이렇게 우리 자신이 하느님 앞에 죄가 있다면 어떻게 우리 이웃을
단죄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예수께서는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네가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뚜렷이 보고
빼낼 수 있을 것이다.”(루가 6,42). 그러기에 ‘심판’은 오직 하느님께
맡겨야 한다. 그분의 심판은 인간을 해방시켜 ‘새로운’ 정신으로 다시
일어나게 하신다.

예수께서 간음한 여인에게 하신 말씀에 이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 여자가 ‘선생님, 아무도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10-11절).

예수님의 용서는 낭비적인 용서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신 안에 있는 죄를 극복하도록 변화시키기 위해 용서하시는 것이다.
하느님의 심판은 생명을 위한 심판으로써 단죄와 죽음만을 추구하는
우리 인간들의 심판과는 다르다.

특히 용서와 사랑의 심판인 파스카를 맞이할 우리는 남을 단죄하거나
서로를 단죄하는 유혹을 물리쳐 이김으로써 오직 하느님만이 심판하실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야 하며, 그럼으로써 이 지상에 예루살렘을 건설하도록 하여야
한다.

제2독서: 필립 3,8-14: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

이에 대해 바오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말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의 체험이다. 하여간 그는 비록 자신이 목표하는 바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리스도를 닮고자 하는 노력을
경주한다. 바오로 사도는 그 길을 계속 달려간다. 또한 더욱 빨리
달려가기 위해 ‘대탈출’의 진정한 자세로써 겉꾸미는 과거의 모든
화려한 옷을 벗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따라 무엇보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신비 안에서 그분과
일치를 이루면서 우리 안에 능력을 드러내실 그분의 부활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노력해야 한다(10-11절).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새로운 것’은 파스카의 신비 안에 내포되어
있으며, 사순절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그 신비를 재발견하도록
준비시켜주는 영역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기에 자신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기를 바란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9절).

이러한 관계에서만 우리는 주님께서 용서를 베푸시어 내면으로부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도록 한 그 간음한 여인과 같이 주님 앞에 자유로운
모습으로 설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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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 8, 11)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7일 사순 제5주일.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요한 8, 11)

단죄하지 않으시는 예수님의 뜻을 따릅니다.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온전히 깨닫기까지는
많은 죄악과 실패를 반복합니다.
육신의 옷을 입고 사는 나약하고 죄 많은
우리 현실을 다시 직면하게 됩니다.

나약한 우리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아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나약하고 부끄러운 우리들 삶 그 자리에서
우리 죄를 용서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단죄가 아닌 용서를 통해 사로잡혀 있는
욕망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매순간 건강한 사랑의 관계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육신을 사랑했던 옛 모습은 사라지고 새로운 삶이 되게 하십니다.
고난을 통한 영광으로 우리를 이끄십니다.
영원한 사랑은 하느님 사랑뿐입니다.
우리의 사랑을 다시금 성찰하는 거룩한 사순주일 되십시오.
일으켜주시는 주님의 손을 항상 굳게 붙잡으십시오.
새롭게 하시는 주님의 사랑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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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사순 제5주일|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2019년 다해 4월7일 사순 제5주일

오늘의 묵상

루카(21,37-38 참조)에 따르면, 지상 생애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낮에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올리브산에 가시어 묵곤
하셨는데, 군중은 그분의 말씀을 들으려고 이른 아침부터 모여들었다고
합니다.

오늘 복음이 들려주듯이, 아침에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말씀하셨을 때,
그분 앞에 곤혹스럽고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간음하다 붙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을 던져 죽여야 한다고 말하며 예수님께
묻습니다.

“스승님 생각은 어떠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조용히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 쓰시다가 그들이 줄곧
물어 대자 몸을 일으키시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아무도 이런 대답을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나이 많은 자들부터 하나씩
둘씩 모두 떠나갑니다. 왜 나이 많은 자들이 먼저 떠났을까요?
나이 많은 이들이 더 나쁜 죄를 지어서, 아니면 더 현명해서일까요?
그곳에는 예수님과 여자만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여인아, 그자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단죄한 자가 아무도 없느냐? ……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 여자는 예수님께 감사하며 감동의 눈물을 흘립니다.

사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모두 죄인입니다. 주님께서 베푸신 용서의
눈길은 그녀에게 생명과 무엇보다도 개인적 존엄성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태어남을 느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가 사람의 권리를 되찾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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