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0일 의인은 선과 악 사이의 싸움에서 하느님께 충실하면서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4-10 06:35:21    조회 : 237회    댓글: 0

▣ 2019년 다해 4월10일 [(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다니엘 예언서 3,14-20.91-92.95
복음 요한 복음 8,3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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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사순 제5주간 수요일

2019년 다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이제 곧 모내기가 시작됩니다. 농부는 모내기하면 논에 물을 채웁니다.
벼는 물이 있어야 잘 자라기 때문입니다. 농사를 오래 했던 농부는
시간이 지나면 논에 물을 뺀다고 합니다. 바닥이 갈라질 정도로 논이
마르면 벼는 물을 얻기 위해서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고 합니다. 그래야
비바람이 불어도 벼는 쉽게 쓰러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좋은 목재는
겨울을 견딘 나무라고 합니다. 향기가 진한 꽃을 피우는 난도 겨울을
지내야 비로소 꽃을 피운다고 합니다. 타는듯한 목마름, 한겨울의
추위는 더 강하고 아름답기 위한 과정입니다. 

하늘을 나는 나비는 죽은 것 같은 고치의 과정을 거치면서 아름다운
날개를 갖게 됩니다. 시간을 앞당기려고 고치를 열어주면 나비는
하늘을 날 수 없습니다. 날 수 없는 날개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병아리는 알을 깨고 나와야 밝은 하늘을 볼 수 있습니다. 알 속이
편하다고 머물러 있으면 구름도, 꽃도, 친구도 볼 수 없습니다. 죽을
것 같은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것, 자아라는 껍데기를 깨는 것은 큰
세상을 보기 위한 과정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유(自由)란 무엇일까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면 자유일까요? 재물, 권력, 명예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까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재물, 권력, 명예가 될 것입니다.
자유(自由)란 스스로 존재 이유를 아는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온
이유와 목적을 아는 것입니다. 그 이유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자유입니다. 

제일 먼저 일어나고, 제일 늦게 잠자리에 들었던 어머니는 진리를
알았습니다. 자녀를 낳고 기르면서 텃밭을 일구어서 가족의 먹거리를
마련하는 어머니는 진리를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을 아셨고,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공중에서
아름다운 3회전 묘기를 보이기 위해서 수만 번 넘어지는 고통을 참았던
피겨 선수는 진리를 알았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운 춤을 보여주기 위해서 수만 번 마루에
아픈 발을 꼿꼿이 세운 발레리나는 진리를 알았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가수 인순이 씨가 부른 ‘거위의 꿈’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난 난 꿈이 있었죠. 버려지고 찢겨 남루하여도 내 가슴 깊숙이 보물과
같이 간직했던 꿈. 혹 때론 누군가가 뜻 모를 비웃음 내 등 뒤에 흘릴
때도 난 참아야 했죠. 참을 수 있었죠. 그날을 위해 늘 걱정하듯 말하죠.
헛된 꿈은 독이라고 세상은 끝이 정해진 책처럼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라고 그래요, 난 난 꿈이 있어요. 그 꿈을 믿어요. 나를 지켜봐요.
저 차갑게 서 있는 운명이란 벽 앞에 당당히 마주칠 수 있어요. 언젠가
난 그 벽을 넘고서 저 하늘을 높이 날을 수 있어요. 이 무거운 세상도
나를 묶을 순 없죠. 내 삶의 끝에서 난 웃을 그 날을 함께해요.” 

진리는 꼭 철학적인 문제로 바라보는 것은 아니어도 될 것 같습니다.
진리는 과학적인 공식으로 풀어야 할 문제도 아닙니다. 버리고, 비우면
보이는 것이 진리입니다. 베풀고 나누면 깨닫는 것이 진리입니다.
어린 새싹을 볼 수 있는 마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으니 이처럼 큰 행복과 은총은
없을 것입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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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혼자 있을 때 속한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

2019년 다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혼자 있을 때 속한 세상이 내가 사는 세상>

복음: 요한 8,31-42

대학생이었던 그는 집안 형편 때문에 취직을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빵공장에서 입사시험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형편에 집안 살림까지 신경쓰다보니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청년은 중간 부분까지는 시원스럽게 써 내려갔습니다. 그런데 끝
부분이 도무지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거의 포기하다시피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취직할 다른 곳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 빵 공장에서 편지가 날아왔습니다.

“점수 : 64점으로 합격, 직위 : 과장”

이 빵공장은 적어도 80점을 맞지 못하면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었는데,
64점으로 합격을 했을 뿐더러 과장 직위에까지 올랐으니 참
황당했습니다. 어쨌든 입사는 되었고, 청년은 성실하게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회사 사장님이 볼 일이 있다고 와달라는 호출이
들어왔습니다. 마침 그 합격통지서도 물어볼 겸 사장실로 달려갔습니다.

사장실 문을 열자, 사장님이 웃으면서 흐뭇하게 말하였습니다.

“나한테 이런 과장이 있다는 것이 너무 좋네. 앞으로 자네가 성실하게
일하면, 내가 직위를 사장직까지 올려주겠네!”

“아, 참. 그런데, 합격통지서엔 64점이라고 쓰여 있었는데요?”

사장은 시험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사장님의 눈길이 맨 마지막 문제에
쏠렸습니다.

“바로 이거네.”

청년은 시험지를 뚫어져라 바라보았습니다. 문제는 ‘빵을 만드는
주원료는 무엇인가?’였습니다.

“아직도 모르겠나? 네가 ‘정성’이라고 답을 쓰지 않았나?” 

어떤 회사에 남이 보지 않는데도 정성을 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 회사를 자신의 회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구든 회사의
책임자라면 그 사람에게 회사를 맡기고 싶을 것이 당연합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위에서 오셨고 바리사이들은
아래에서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위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아래에는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가 선택하고 속한 세상에서 영원히 살게
되리라고 하십니다. 내가 세상 것을 좋아하면 세상에 속하고 그 세상
것에 지배를 받으며 삽니다. 하늘에 속하면 하늘에 계신 분께 지배를
받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든 지배를 받아야합니다. 예수님도 하늘의
지배를 받으시는 분이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 8,29)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이 말에 자신들도 하느님을 아버지로
여긴다고 주장합니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우리 신앙인들도 특별히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아버지라
말하고 믿습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기고 지배받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만약 하느님을 아버지라 여긴다면 세상 것에는
지배를 받지 않고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할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그분께서 무엇을 원하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우선은 그분께서 뜻을 알려주려 파견하신 분을 믿어야합니다.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니 아버지를
사랑하면 예수님도 사랑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물론 지금 우리는 아드님도 눈으로 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드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사랑하면 됩니다. 교회에서 시키는 일을
하면 예수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사랑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떻게 증명될까요? 바로 ‘정성’입니다.
정성은 남이 안 보더라도 보는 때와 똑같은 열정을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내가 어느 세상에 속해있는가는 그래서 혼자 있을 때 더 잘
드러납니다. 혼자 있을 때도 교회의 사람으로 정성을 쏟는다면 참으로
교회의 주인인 것입니다. 내가 혼자 있을 때의 모습을 온 천하에
보여주어도 괜찮도록 살아야합니다. 하늘의 교회인 모든 천상 군단과
하느님께서 언제나 나의 모습을 다 보고 계십니다. 혼자 있을 때 내가
어느 세상에 속하는지 가장 잘 드러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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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사순 제5주간 수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10일 제5주간 수요일

복음: 요한 8,31-42: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 안에 머무르라고 우리를 초대하신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31절)
우리가 그 말씀 안에 머무른다는 것은 진리와 자유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우리가 신앙인이라는 것이 바로 믿음과 희망으로 사는
이들이며, 진리와 자유를 얻기 위해서 기다림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절) 이 때에 우리는 진리 자체를 향해 가는
것이며 그 진리는 참된 자유를 주시는 분이시며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하느님의 참된 자녀가 된다.

이 자유는 우리가 진리에 우리 자신이 온전히 따를 수 있을 때 얻을 수
있다. 이 진리는 우리를 죽음, 곧 죄의 노예상태에서 자유롭게 해주시는
하느님이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진리를 누리지 못하는 한 어떠한
자유도 누리지 못한다. 자유롭게 된다는 것은 죽음으로부터,
부패로부터, 변하는 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는 의미이다. 진리는
그 자체가 죽지 않고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죽지 않고 썩지 않으며 변하지 않는 것은 하느님이시다.

이 말씀에 유대인들은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33절) 라고 한다. 이 말이 이미 진실이
아니다. 요셉이 팔려갔고(창세 37,28 참조), 예언자들이 포로로
끌려가지 않았는가?(2열왕 24 참조) 또한 400여 년 동안 이집트에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들며 이집트인들을 섬기지 않았는가?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하던 집에서 구해내시지 않았는가?
(참조: 탈출 13,3; 신명 5,6) 그리고 지금도 유대인들은 로마에 세금을
내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34절) 어떤 문제 어떤
상황에서든 악에 의지할 경우 그는 죄의 종이 되는 것이며, 죄로 인해
생긴 상처와 낙인은 그 도망친 종이라는 드러내 준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아들과 딸의 참된 자유를 주신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머무른다.”(35절) 죄의 종은
하느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영원한 벌을 받지만, 자유를 얻을
자격을 받은 아들딸은 언제나 하느님의 호의를 받고 결코 그것을
빼앗기지 않는다. 아들을 통하여 자유롭게 되고 아들의 자격을 얻으면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37절)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도
게으름으로 소홀한 실천으로 그의 자손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릴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을 알려주신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즉 그들의 마음이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말씀이 그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시면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39절)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말하고 있다. 전
생애를 통하여 하느님과 아브라함이 가졌던 관계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그러한 신앙으로 살아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40절)고 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41절)
하시니까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41절)라고 한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42절) 하느님은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이들의 아버지가 아니시다. 예수님께서 사랑받으셔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셨고, 그 하느님을 자기들의
아버지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들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또한
아버지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이 순간 이후 진정 우리는 하느님 앞에 그리고 다른 사람 앞에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도록 노력하면서, 이 사순절을 통하여 나 자신이
하느님과 이웃 앞에 새로이 태어나는 기회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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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 3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 32)

참된 사랑은 서로를 자유롭게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진리는 우리를 죄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우리가 찾아야 할 참자유는 그리스도인의 참된 자유입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우리 스스로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자비가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참 진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참행복이 있고 참된 구원이 있음을
진실로 믿습니다.
십자가의 참된 자유로 우리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릅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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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그리스도인은 오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입니다!.

2019년 다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그리스도인은 오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입니다!

다니엘서를 읽고 묵상하다보니, 주변 강대국들의 횡포로 인해 이스라엘
민족이 대대손손 겪어왔던 고초가, 어찌 그리 우리 민족이 겪어왔던
고초와 꼭 빼닮았는지 깜짝 놀랐습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만 해도 그렇습니다. 당시 근동 지방을 주름잡던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는 강력한 군대를 앞세워 이스라엘을
침략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성전 보물들을 강탈해 갑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왕족과 귀족 가운데, 가장 쓸만한 청년 네 명
(다니엘, 하난야, 미사엘, 아자르야)을 볼모로 끌고 갑니다.

그 뿐인가요? 바빌론 임금은 유다인들이 유일신이신 하느님만
경배하는 줄을 뻔히 알면서도, 이스라엘 청년들에게 자신이 세운
우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합니다.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다니엘서 3장 14~15절)

이 상황에서 우리나라를 침략한 후 강제로 합병한 것도 모자라, 끝도
없는 만행과 횡포를 저질렀던 일본제국주의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창씨개명, 신사참배, 강제 징집, 강제 징용, 한글 사용 금지, 갖은
수탈...

근동 지방에서 바빌로니아에 이어 페르시아 제국이 세력이 쇠퇴한 이후
BC 2세기 초엽, 이스라엘 왕국은 세력을 한껏 키운 셀레우코스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가는 정치적으로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유다인들을
크게 박해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 침입하여 철저하게 파괴한 후,
성전의 모든 보물들은 탈취해갔습니다. 성전 한 가운데에는 자신들의
신상을 세워 유다인들에게 말할 수 없는 수모와 치욕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놀라운 사실 한 가지, 막강한 셀레우코스 왕가의 지배를 받는 와중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끝까지 저항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마카베오
가문을 중심으로 비록 그 힘이 미약했지만, 무장 독립운동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지식인들도 강력한 침략국의 횡포에 맞서 싸우는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유딧기, 에스테르기, 토빗기, 다니엘서 등의
문학작품을 탄생시키며, 유다인들의 가슴에 희망의 불꽃이 피어나도록,
자극하고 격려했습니다. 문학작품들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지금의 이 끔찍한 고통, 반드시 지나갈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 민족 이스라엘을 저버리지 않으실 것입니다. 원수와 적군들의
모진 박해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끝까지 주님을 신뢰하고, 순수한
믿음을 보존해나간다면, 반드시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해주시고,
적군들을 멸망시킬 것입니다.’

다니엘서는 예언서로 분류하고 있지만, 그 내용상 일종의 묵시문학
형식을 지닙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저자는 부단히 이스라엘 역사에
대한 주 하느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고통 속에 있는 동족 유다인들의
믿음을 자극하고 북돋아주고 있습니다. 어떤 환난 앞에서도 하느님을
향한 믿음과 충실성을 잃지 말자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오늘만 바라보는 사람들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비록 심연의 고통과 죽음과도 같은 시련 속에 잠겨
있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현존을 굳게 믿으며, 그분의 섭리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사람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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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사순 제5주간 수요일|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다니엘 예언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저자는, 시리아의 셀레우키아 임금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시대에 일어난 종교 박해의 상황을 나타내고 그들의 신앙에 충실한
유다인들을 지키려고,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론 유배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전해 줍니다.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상을 세웠던 것처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도 자신이 세운 상에 절하지 않는 모든 이를
사형에 처합니다. 

다니엘의 젊은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는 임금이 세운 상에
절하지 않아 사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에서 세 젊은이를 구해 주시고 불경한 임금은 회개하게 됩니다.
박해는 의인의 믿음을 보여 줍니다.

의인은 선과 악 사이의 싸움에서 하느님께 충실하면서 학대와
고문에도 자신의 내적 자유를 지키며 하느님의 은혜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고 맙니다. 

초기 박해들부터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졌으나 하느님을
찬미하며 견디어 낸 세 젊은이로 표상된 교회를 보게 됩니다.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끊임없이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으로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적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변론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응답하면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마음을 지닌 자유를 표상합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태도를 닮아 가는 이들입니다.

오늘날 개인적인 신앙보다는 하느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만이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 광주 가톨릭 대학교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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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4월10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요한 8,31-42)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아름다워지는 일입니다. 사랑하면 그를 닮게
되고 상대방의 모습으로 변하게 됩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면 사랑하는
이와 하나가 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사랑하는 이에게 맞춰주기
보다는 나에게 맞추려 하고 내 마음대로 하려고 한다면 아직 깊은
사랑을 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주님의 삶의 모습에 이끌려
그분의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야말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사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마음에 새기고
사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다고 하더라도
마음에 주님의 말씀을 새겨 두지 못하였고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겉모양만 제자처럼 보일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요한8,38).고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의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참된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나 깨나
당신을 세상에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을 생각하고, 당신의 삶으로
하여금 오직 그 말씀이 실현되게 하신 분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제자라고 하면 하루에 하느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기억하고 실행하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제자는 한시도 스승의 가르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말씀을 실천할 때이고 사랑할 때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할 때 우리는 세상의
흐름, 세속의 그늘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써 우리에게 죄악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말씀을 깊이 새겨 말씀 안에서, 말씀과 함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것은 말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일상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언제나 실천을 요구 합니다.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노예가 될 것을 원하지 않으시고
강요하지도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발적인 협력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용서함으로써 우리에게 자유를 주십니다.
그리고 자유로운 사람은 하느님의 뜻인 진리를 따릅니다. 또한 진정한
자유는 나 자신 뿐만 아니라 이웃도 자유롭게 합니다.

그러니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모습을 비추어 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야고1,25). 자기 얼굴을 비추어 보고 무엇이 흉하게 묻었으면 지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무엇이 잘못되었으면 고쳐야
합니다. 우리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곧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그 말씀에 비추어 영혼이 자유롭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과 하나가 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하겠습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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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4월 10일(수) - 임하시는 성령

오늘은 “임하시는 성령”에 대해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누가복음 1장 35절 말씀에 “성령이 내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은 전지전능하십니다. 사람의 몸에 들어가 사람을 잉태하는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살아계신 예수님이 탄생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람에게 임하신 곳에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천지를 창조할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면서
빛이 있으라고 명령함과 동시에 기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때이후부터 요한계시록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것도
기적일 뿐 아니라 본 그대로 내려오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두가 다 정상적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적과 기적이
아닙니까? 바로 성령이 함께하면 이와 같이 이적과 기적이 때와 장소와
관계없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빌립은 사막에서 기적을 체험하였고 모세는 홍해바다에서 기적을
체험하였고 심지어 삭개오는 뽕나무 위에서 영생을 체험하였습니다.

오늘도 성령은 우리와 함께 역사하기를 강력히 원하십니다. 바로 이
성령의 역사는 우리와 성령님과 함께 일하고자 마음을 내밀고 손을
내밀고 몸을 내밀 때 역사하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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