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4일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4-14 06:05:12    조회 : 216회    댓글: 0

▣ 2019년 다해 4월14일 [(홍) 주님 수난 성지주일]

제1독서 이사야서 50,4-7
제2독서 필리피서 2,6-11
복음 루카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22,14―2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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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흐르게 하러 오신 예수님

2019년 다해 4월1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흐르게 하러 오신 예수님>

복음: 루카 23,1-49

어느 날 부처님이 제자와 함께 길을 걷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그 종이를 주워오도록 한 다음
“그것은 어떤 종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제자가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남아 있는 향기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제자의 말을 들은 부처님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를
걸어가자 이번엔 길가에 새끼줄이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부처님은 제자를 시켜 새끼줄을 주워 오도록 했습니다. 그리고는 전과
같이 “그것은 어떤 새끼줄이냐?”고 물으셨습니다. 제자가 다시
대답했습니다.

“이것은 생선을 묶었던 줄입니다. 비린내가 아직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이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이 원래는 깨끗하였지만 살면서 만나는 인연에 따라
죄와 복을 부르는 것이다. 어진 이를 가까이 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가지만,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곧 재앙과 죄가 찾아 들게
마련이다. 종이는 향을 가까이해서 향기가 나는 것이고, 새끼줄은
생선을 만나 비린내가 나는 것이다. 사람도 이처럼 자기가 만나는
사람에 의해 물들어 가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있나요?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향기를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로부터 나는 향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나에게 오게 되어있습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중간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의 수준이
곧 나의 수준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수준을 높여주러 오셨습니다. 좋은 향기가 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나귀와 같은 존재입니다. 나귀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지만 천상천하의 왕께서 타고 다니시기는 좀 겸손한
동물입니다. 그러나 겸손하신 왕께서 그 위에 타셨습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자신의 발밑에 겉옷을 깔았습니다. 나귀는 주님을 만날 수
있었기에 주님을 맞아들이려는 사람들과의 중간에 서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향기를 내게 되니 사람들의 겉옷을 밟으며
예루살렘으로 입성합니다. 

사고가 나서 머리에 피가 고였을 때 그 피를 빼어주지 않으면 상당히
위험하다고 합니다. 오히려 피를 흘리는 것이 그 피가 머릿속에서
응고되는 것보다 낫습니다. 피는 흘러야합니다. 그리고 피가 흐르기
위해서는 어떤 곳이 찢어져야합니다. 우리는 처음에 우리 것을
흘려주지 않으려고 찢어져야 할 곳을 막았습니다. 그래야 더 부자가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피는 많아봐야 소용이 없습니다. 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막힌 혈을 뚫으러 오셨습니다. 예수님을
모신 성전은 그 뚫린 곳으로 흐르는 피 때문에 살게 됩니다. 피는
흘러야하고 그 흐르는 심장의 역할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한국전쟁 때 한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얼어 죽었습니다. 아기는
살았지만 어머니는 돌아가셨습니다. 미군에 의해 발견되어 미국에서
자란 이 아이는 청년이 되어 어머니 산소를 찾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겉옷을 벗어 어머니 산소를 덮으며 이렇게 말합니다.

“어머니, 그때 얼마나 추우셨어요.”

어머니의 옷 벗음이 청년을 옷 벗게 했습니다. 누군가의 피 흘림이 나를
피 흘리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피 흘릴 수 있을 때 모기에서
예수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모기는 관계를 맺을 수 없지만 예수는
처음 만난 사람과도 가족을 만들 수 있습니다. 자신의 것을 내어줄 줄
알기 때문입니다.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내어줄 줄도 모릅니다. 이렇게
새로 태어나게 만들기 위해 예수님께서 먼저 당신 자신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당신께서 나귀 위에 타신 이유입니다. 

예수님을 맞아들이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합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잘못된 것일까요? 빨리 불쌍한 이웃들을 만나
사랑을 전해야할까요? 아닙니다. 우선 나의 수준을 끌어올릴 필요가
있습니다. 나의 수준을 끌어올리면 그 수준에 맞는 사람들도 나의
향기를 맡고 나에게 오게 되어있습니다. 우선 그분으로 내가
흘러야합니다.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이 예수님을 자신 안에 받아들이는 날입니다.
그분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팔마가지를 흔들었고 자신의
겉옷을 그분이 오시는 길에 깔았습니다. 겉옷은 당시 매우 귀중한
물건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흐르게 하신 것입니다. 누군가와
만나려면 반드시 내 것을 내어놓을 수밖에 없습니다. 

향을 싼 종이는 향내를 내고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은 생선비린내를
풍깁니다. 이 냄새 때문에 모여드는 사람이 다를 수 있습니다. 향내를
좋아하는 사람이 종이로 모여오고 생선을 좋아하는 고양이는 새끼줄
쪽으로 모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도 같은 향을 풍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성령을 흘려보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에제키엘 47장에 보면 성전 오른편에서 물이 흘러내리는데 그 물이
가는 곳마다 죽었던 땅이 살아난다는 예언이 나옵니다. 그 성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그분의 오른쪽 옆구리에서 흘러내린 피와
물이 우리 메마른 땅에 들어와 우리를 다시 생명의 땅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해처럼 꽉 막혀있던 우리도 이젠 갈릴래아
호수처럼 오른쪽 옆구리가 터지며 우리 물을 이웃에게 뿌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웃이 우리가 뿌리는 물로 살아납니다. 그러면 그들도 흐르게
됩니다. 

내 겉옷을 벗어 그분께서 들어오실 길 위에 깝시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그러면 생명의 물이 흘러내리는 성전이 됩니다. 그리고 나를 통해 다른
이들도 뚫리게 되어 성령이 흐르는 성전을 친구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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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1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고통받는 하느님의 종

오늘은 ‘성지주일’이다. 이것은 예수께서 축제 기분에 들뜬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성대하게 예루살렘에 입성하심을 기념하고 있다. 이
예수님의 성대한 예루살렘 입성은 수난의 짓누르는 고통을 먼저
거쳐야만 하는 ‘야훼의 종’의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예언적 전조와도
같은 것이다.

제1독서: 이사 50,4-7: 나를 때리는 자들에게 등을 맡기며...

제1독서는 ‘하느님의 고통받는 종의 셋째 노래’를 전하고 있다. 이
‘종’은 주님의 사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당해야할
고통에 대해 예고하고 있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6절). 즉 그리스도의 수난에 대한 표현의
일부가 여기서 이미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이 종은 주님께 대한 충실성과 형제들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는 내 얼굴을 차돌처럼 만든다. 나는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안다.”(7절).

복음: 루카 22,14-23,56 - 주님의 수난

루카복음에서는 수난에 관계되어 있는 모든 사건들에 대해 그리스도의
절대적 ‘지배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휩쓸어버리려는 그 파괴적인 공격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계시다.

루카 복음에서 주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당신의 생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심”(9,51-19,27)과 일치시키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예루살렘에서의 사명과, 당신의 마지막 공적 가르침
(금화의 비유), 그리고 이후 직접적으로 계속되는 사건들, 즉 최후의
만찬, 겟세마니, 재판, 십자가, 부활과 그 후의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들을 일치시키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예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과 파스카를 거행하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내가 고난을 겪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파스카 음식을
먹기를 간절히 바랐다.”(22,15). 이 파스카는 확실히 죽음을 통한
봉헌의 표지로서 식탁에 놓였던 최후의 만찬의 빵과 포도주로 상징되는
그분의 생명을 통한 희생적 봉헌의 예표이며 동시에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22,19-20).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면서도 당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걱정을 하신다. 그래서 슬픔에 잠겨 십자가를 따라오는
예루살렘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 때문에 울어라. 푸른 나무가
이러한 일을 당하거든 마른 나무야 어떻게 되겠느냐?”(23,28.31).
그러나 애석하게 생각하고 울어야 하는 사람은 패배당한 것같이 보이고
천시당한 예수님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죽음에 처한 사람들이다.
실제로 이 여인들은 자신이 무엇을 위해 울어야 하는지를 모르면서
우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마지막 순간에 있어서도, 다른 공관복음의 절망적
외침인,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시편 21,2)가 아니라, 아버지께 평온히 의탁하는 태도로, “아버지,
제 영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23,46; 시편 30,6). 그러므로 아버지
‘하느님’이 ‘아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다.

이렇게 루카복음은 예수님의 수난사를 과장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인간으로서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께서 가지셨던 ‘고뇌’에 대해서
아주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22,44). 이 표현은
예수께서 ‘수난’을 능히 극복하고 지배하실 수 있지만, 죽음 앞에서의
인간적 한계와 번민에서 그를 제외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때문에 예수께서 위대하신 것이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하느님께 의탁함으로써만 절망의 공포와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십시오.”(22,42).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人性)은 지극히
고통스럽고 굴욕적인 처지에 처하게 되는 바로 그 때 참으로 신성
(神性)을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이 수난기가 하나의 역사적
사건만을 전해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신비가 드러나는, 즉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음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들과 군인들의 태도와는
달리 적개심보다는 호기심과 놀라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 마음에는
후회의 감정이 있었다.

“구경하러 몰려들었던 군중도 모두 그 광경을 바라보고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23,48).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백인대장은 하느님을
찬양하며 말하였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23,47). 이는
마르 15,39에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로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백인대장의 이 고백은 그 고백자체보다도 이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영광’을 직관할 수 있는 그 능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십자가의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는 사람들을 변화시켜 ‘구원’되도록 한다.
오른 쪽 강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함께 못 박힌 다른 강도의
예수께 대한 조롱에 “‘같이 처형을 받는 주제에 너는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 우리야 당연히 우리가 저지른 짓에 합당한 벌을 받지만, 이분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다.’ 그러고 나서 그 죄수가 예수님께
간청하였다.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23,40-43).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은 그 강도에게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되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자격은 인간의 모든
비열한 행위와 배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용서의 심판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에게만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그것을 모르고 잘못하고 있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23,34). 이렇게 우리를 위로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제2독서: 필립 2,6-11: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높이 올리셨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십자가상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당신 자신을
낮추시는(6-8절) 그리스도의 낮추심에 대한 훌륭한 묵상이며 찬가라고
하겠다. 그분은 십자가에 돌아가시지만 그것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9-11절). 이렇게 파스카의 빛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순간 온 땅을 뒤덮었던 그 무서운 어두움을 이미 벗겨내고
있다(루가 23,44).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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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루카 22, 58)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14일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루카 22, 58)

너무나 빨리 변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믿고 사랑한 사람에게서 깊은 배신을 당하시는
예수님의 고통앞에서 우리의 모순과 한계점을 보게됩니다.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주님의 수난입니다.
주님께 상처와 고통을 안겨준 장본인은 바로 우리자신입니다.

약하디 약한 가지처럼 약한 것이 우리들 신앙입니다.
우리의 약함을 처절히 만나는 은총의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우리들 배신에도 불구하고 삶의 길을 사랑으로
밝혀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주님이 오셨기에 모든 것이 다시 열리기 시작합니다.

모든 열림은 수난에서 시작합니다.
우리의 잔인한 욕망을 꺼내어 대면하게 해주는 주님의 수난입니다.
성주간은 우리자신을 만나는 시간입니다.
주님 수난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성주간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주님의 수난은 다시금 이러한 우리를 껴안는
진정한 사랑과 용서임을 고백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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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주] (홍) 주님 수난 성지주일|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1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오늘 교회는 정신을 집중하여 주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루카는 주님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의 수난을 회상하도록
도와줍니다.

마태오와 마르코와 달리, 루카는 예수님께 침을 뱉고 주먹으로 치며
손찌검하는 행위, 가시나무로 엮은 관을 씌우는 행위, 거짓 증인들에
대하여 들려주지 않습니다. 또 루카는 예수님을 고통받는 의인,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온갖 고통을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이 회개하고
하느님과 일치하도록 도와주시는 분의 본보기로 여기며 찬미하는
마음을 보여 줍니다.
 
번민에 싸이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올리브산에서 예수님께서는 몸소 제자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 보여 주십니다. 기도를 마치신 뒤 예수님께서
다시 “왜 자고 있느냐?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여라.”
하고 촉구하십니다.

예수님의 관대함과 자비로움은 당신께서 잡히실 때부터 드러납니다.
제자 한 사람이 칼로 대사제의 종을 쳐서 그의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을
때 예수님께서 종의 귀에 손을 대어 고쳐 주십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뉘우치는 죄수에게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표현들은 예수님의 관대하고 인자하신 마음뿐만
아니라 그분께서 거두실 승리의 확신을 보여 줍니다.

수난은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가장 위대하게 드러내는 순간입니다.
수난의 상황들은 분명 비극적이지만 사랑으로 극복되고 승리를
거둡니다.

- 광주 가톨릭 대학교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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