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1일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4-21 06:34:27    조회 : 212회    댓글: 0

▣ 2019년 다해 4월21일 [(백) 주님 부활 대축일]

제1독서 사도행전 10,34ㄱ.37ㄴ-43
제2독서 콜로새서 3,1-4
복음 요한 복음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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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교회의 믿음

2019년 다해 4월21일 부활 대축일

<교회의 믿음>
복음: 요한 20,1-9

유관순 열사와 함께 투옥되었던 8호실 여성들의 1년 이야기를 다룬
영화 ‘항거’(2019)에서 유관순 역을 고아성씨가 맡았습니다. 유관순은
입에 담기도 어려울 정도의 고문으로 사망하였습니다. 음식을 먹이지
않는 것은 고문도 아니었을 정도입니다. 유관순 열사는 죽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 손톱이 빠져나가고 내 귀와 코가 잘리고, 내 손과 다리가 부러져도
그 고통은 이길 수 있으나 나라를 잃어버린 그 고통만은 견딜 수 없다.”

고아성씨는 유관순 열사의 강렬한 눈빛을 갖기 위해 실제로 닷새 동안
음식을 먹지 않으며 유관순을 자신처럼 느껴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3·1운동 1주년을 맞아 감옥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는 장면에서는
자신의 심장이 너무 크게 뛰어 무선 마이크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 달아야 했을 정도였습니다. 매순간 기도하듯 연기한 덕분인지
영화 촬영을 마칠 당시에는 실제 유관순과 더욱 닮아있었던 것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위한 자의적 고통을 말합니다. 부활이 새겨지지 않은
십자가는 헛됩니다. 유관순 열사의 항거도 그랬고 고아성씨의 노력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자의로 받는 고통이라면 반드시 열매를 기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부활의 신앙이 없으면 우리의
매일의 삶은 텅 빌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삶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이 고통이 은총이 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부활신앙입니다.

모든 믿음이 그렇듯 부활신앙도 혼자 보다는 여럿이, 여럿보다는 더 큰
공동체가 될수록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믿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그
힘도 커집니다. EBS 다큐멘터리 ‘상황의 힘’에서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한 사람이 길에 서서 허공을 바라보면 아무도 그 사람이 보는 곳을
바라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둘일 때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세 명이 되자
사람들이 일제히 이 세 명이 바라보는 곳을 바라봅니다. 물론 숫자가
더 늘어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이에 동참합니다. 그 이유는 인간의
본성에 ‘소속되고 싶은 욕구’가 있기 때문입니다. 

1965년 헝가리인인 라즐로 폴가는 클라라라는 여인에게 선천적 천재는
존재하지 않고 다만 교육에 의해 탄생된다는 믿음을 편지로 씁니다.
클라라도 이에 동의하고 둘은 결혼하여 딸 아이 셋을 낳습니다. 자녀를
실험도구로 쓰면 안 되겠지만, 그래도 나름 좋은 의도로 이들을 체스
천재로 만들려는 계획을 짭니다. 공부는 집에서 하게하고 집 안의 모든
환경을 체스를 배우기 좋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장녀 수전은 네 살 때 체스를 시작하여 6개월 만에 성인을 이깁니다.
둘째 소피아는 수전보다 나았는데, 열네 살에 체스 세계챔피언이
됩니다. 막내 유디트는 셋 중 최고였는데 다섯 살 무렵 아빠를 이겼고,
열두 살에는 최연소로 세계 100대 기사에 뽑힙니다. 그리고 열다섯 살
4개월 때 역사상 최연소 그랜드마스터가 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자신들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체스를 두어야 했던
것이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을까요?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체스를 두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언젠가 둘째 소피아가
한밤중에 목욕탕에서 계속 체스를 두는 모습을 아버지 라즐로가
보았습니다. 그리고 “소피아, 이제 체스 말들을 좀 놔주렴.”이라고 하며
그만 자러 가라고 딸을 달랬습니다. 그러자 소피아가 대답했습니다.
“아빠, 전 놔주고 싶은데 이 친구들이 날 놔주지 않아요!” 

이 모든 것은 라즐로 폴가라는 한 인물의 믿음에 의해 출발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여인이 그 믿음에 동조하였고 그들의 자녀들이 그 부모의
공동체에 속하기 위해 그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자녀들이
갈수록 더 실력이 향상되었던 것은 첫째보다는 둘째가, 둘째보다는
셋째가 더 큰 공동체에서 발휘되는 더 확장된 믿음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첫째는 부모의 믿음만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둘째,
셋째는 형제들의 믿음까지 도움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 부활에 대한 믿음이 몇몇의 특정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특별히 사도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부활은 새벽에 하셨지만 사도들에게는
거의 맨 마지막에 밤에 나타나십니다. 사도들은 낮 동안 예수님을 본
많은 이들의 증언만 들어야했습니다. 이는 부활신앙이 성직자들의
신앙이 아닌 교회의 신앙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본당의
신앙은 본당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신앙이 아닙니다. 모든 신자들의
신앙이 모아진 신앙입니다. 분명 신부님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그 본당만의 신앙 정도에 따라 그 본당에서 세례를 받는 이의
믿음의 정도가 결정됩니다. 그들이 가까이 접하고 배우는 것은 바로
옆에 있는 신앙인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소속되고 싶은 본능은 너무나도 강력하기에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환경과 믿음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땅콩을
쪼개는 더 높은 기술을 습득한 침팬지 무리에 있던 침팬지가 그보다
열등한 기술을 가진 무리에 속하려고 자신이 가진 높은 기술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1950년대 심리학자 솔로몬 애시의 실험으로
인간에게도 적용됨이 증명되었습니다. 아주 간단한 문제도 온 공동체가
다 틀리게 대답하면 자신도 뻔히 아는 답을 틀리게 대답한다는
것입니다. 답을 맞히는 것보다 무리에 속하고 싶은 욕구가 더 큰
것입니다. 따라서 그 무리의 수가 많을수록, 그 무리의 믿음이
확고할수록 그 속에 속한 이의 믿음이 확고해집니다. 

예수님도 신앙이 성직자만이 아니라 교회의 모든 이들의 신앙을 통해
세상에 전해지기를 원하셨습니다. 교회의 신앙은 바로 우리 각자들의
신앙의 총합입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모여 하나의 신앙을 형성하고
그 안에 들어오는 이들이 그 신앙에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당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부류의 여성들에게 먼저
나타나셨습니다. 당신 사도들이 공동체의 믿음을 존중하도록 가르치기
위함이었고 모든 이들이 어디서나 같은 수준의 믿음을 만나게 하기
위함이셨습니다.

그래서 내가 작은 본당 공동체에 속해있더라도, 굳이 바티칸에 가서
교황님으로부터 믿음을 전수받으려 하지 않아도 교회의 믿음을
어디서나 전수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이 강해지면 교회의
믿음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교회의 믿음은 성당에서 만날 수 있는 한
할머니의 믿음입니다. 나의 작은 부활체험들이 모여 교회의 믿음을
형성하고 그것이 새로운 그리스도인의 탄생을 위한 선교의 힘이 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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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주님 부활 대축일: 낮 미사|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1일 예수부활대축일: 낮 미사: 저 위의 것을 추구하는

부활절은 축제 중의 축제로서 그 의미가 참으로 넓고 깊어서 오늘의
전례를 통해 이해하기란 어렵다. 어제 밤에 지낸 부활성야의 빛의
예식과 장엄한 부활선포에서 시작하여 여러 가지 고찰을 할 수
있겠지만 부활 메시지를 종합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신앙의 증거가 되고 우리의
생명에 의미를 부여해 준다는 의미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낮
미사의 독서와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제1독서: 사도 10,34a. 37-43: 베드로의 부활하신 예수께 대한 설교

베드로는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 집에서 예수님의 공생활, 즉 요한의
세례로부터 예수님의 죽음, 부활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요약하여
말하고 있다(39-42절). 베드로는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체험한 것과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에 대한 체험을 전하고 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했다는 것은
그들이 파스카 사건에 대한 회의가 있을 수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하여 당신의 권능과 충실성을 드러내신 하느님께
또한 성실성과 순명을 표현하고 있다.

주님의 부활은 당신의 인성이 아버지의 영광에 참여함을 의미하며, 그
결과 이제는 그분의 몸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게 되었습니다.”(에페 2,18)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 때문에 더 이상 인간을 내치실 수가
없으시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 주님의 부활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사랑과 충실성의 행위로서 받아들이면 된다. “이 예수님을 두고 모든
예언자가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43절).

복음: 요한 20,1-9: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

오늘 복음은 역시 주님의 부활의 실재성을 증명해 주고자 한다. 막달라
마리아는 새벽녘 ‘아직 어두울 때’에 무덤으로 가서 ‘돌이 치워져 있는
것’을 보고 본능적으로 누군가 밤중에 주님의 시신을 훔쳐갔다고
생각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전한다(1-2절).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가 그 사실을 확인하고 믿는다(4-8절).

여기에 중요한 것이 있다. 처음에 막달라 마리아가 빈 무덤을 보았고,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보았는데 베드로는 수의가 흩어져 있고,
예수님의 머리를 싸맸던 수건은 따로 한 곳에 잘 개어져 있었음을
보았으나 그는 신앙의 눈으로 보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다는 것’은
믿음을 일으키게도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부활이 빈 무덤이나, 예수님을 싸맸던 물건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었다는 것으로 추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의 믿음은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나
(blépein,1절), 베드로의 경우처럼(theoréin,6절) 시각적인 면에서
‘보는 것’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차원, 즉 피상적인 차원을
넘어 내적인 의미를 파악함으로써 이해하는 그런 차원에서 ‘보는 것’
(oràn)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보기 위해서는 자신이 파악하려고 하는 것에 감화되고 매료되어
자신을 그 현실에 동화시킴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랑, 연민, 다른
사람의 요구에 대한 개방성 등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보고 믿었던’
‘다른 제자’가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2절)라는 독특한 표현으로
소개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요한으로 하여금 아직 예수를 보지 않고서도-실제로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나타나심은 후에 나타난다(20,19-29)-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보다 깊이 ‘보고’ ‘믿게’ 해준 것은 바로
사랑이다. 이 사랑의 힘에 의해 요한만이 빈 무덤과 개켜져 있던 수건에
감추어진 의미를 이해했다.”
(D. Mollat, La foi pascale selon le chapitre 20 de
l'Evangile de Jean, in Resurrexit, Libreria Ed.,
Vaticana, Roma 1972, pp. 316-332). 

참된 믿음은 하느님의 말씀, 구체적으로 성서의 말씀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이지, 빈 무덤이나 잘 개켜진 수건과 같은 어떤 구실이나
단서를 찾는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사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성경 말씀을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9절).

제2독서: 골로 3,1-4: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시어(루카 24,34) 하느님의 영광 중에 살아
계신다면, 이제 우리는 믿음을 통해 그분과 친교를 나눌 수 있고, 그분과
함께 살 수 있게 된다. 그분은 이제 당신 자신을 온전히 우리 인간들에게
내어주시기 때문이다.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이 창조된 새로운 창조물인
우리 그리스도인은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천상을 갈망하면서
부활을 숨 쉬며 살아야 한다.

부활을 숨 쉰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삶이 매순간 부활을
체험하며, 부활 체험 안에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권고하고 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1-2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저 위에 있는 것들은 바로 우리 이웃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기울이는 사랑의 마음과 봉사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며, 이로써 부활하신 주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이다. 그분이 바로
형제를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시고 구원을 주실 수 있었던 한없는
사랑을 사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 사랑에 대해
하느님을 향한 감사의 삶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러한 삶은 바로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천상의 삶을 이미 이
땅에 끌어내려 사는 삶이 될 것이다. 이 삶은 바로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며, 부활한 후의 삶은 바로 이런 모습이라고 그분이 우리에게
확실히 알려주셨기 때문이다. 남은 것은 이제 우리가 부활을 확실히
체험하는 것이다. 천상의 것을 추구하면서 이 세상에 살고 있으나 이
세상에 대해서 죽는 연습, 아니 죽어야 한다.

죽는 삶을 통해 우리는 부활을 체험할 수 있으며, 우리는 사도들이 한
말과 같이 “우리로서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도 4,20)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복음선포이며, 그리스도, 즉 구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오늘 참으로 “주님께서 부활하셨도다.”라고 찬미드릴 수 있어야
하겠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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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참 사랑이 충만한 이곳,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2019년 다해 4월21일 예수 부활 대축일 

참 사랑이 충만한 이곳,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의 진수요 핵심, 본질이요
전부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교리며 전례, 신학이나 전승 등 모든
것은, 예수님 부활이라는 정점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단 한보도 뒤로 물러설 수 없으며, 타협하거나 절충할
수 없는 그리스도교 절대 가치요 핵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가톨릭 교회의 전례 안에서 예수님의 부활은 최고봉이요
정점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부활대축제보다 더 상위에 놓을 수 있는
축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8일 동안 부활 팔일 축제를 경축하며,
부활시기는 50일간이나 지속됩니다.

좀더 강조되고 경축해야 할 축제가 예수님의 부활 축제입니다. 그분의
부활 빼놓는다면 우리 교회는 아무 것도 아닌 단체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부활 없이는 그 어떤 것도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그분의 부활로 인해 모든 것이 의미와 가치를 지니며 제 빛깔을 지니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잘 파악하고 있었던 바오로
사도는 부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되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됩니다.”(1 코린토서 15장 14절) 결국 예수님의 부활 사건 자체가
복음이요 기쁜 소식 전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부활은 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가톨릭 교회 역사 안에서 셀수도 없이 많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된
그릇된 교리와 오류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났고, 신앙교리성으로부터의
단죄와 처벌이 있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너무 과도하게 연구하고
고민하던 끝에 아주 엉뚱한 방향으로 빠져버렸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후, 제자들은 더욱 똘똘 뭉쳤습니다.
제자공동체는 매일 그분과 동고동락하면서 느끼고 체험했던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동, 그분의 몸짓을 상기했습니다. 결국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현존을 생생히 드러내는 특권적 상징임을 깨달았습니다.
제자들은 끊임없이 스승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을 기억해냈고, 그러한
기억을 표현한 기록이 바로 성경 속 부활 이야기입니다.”

신앙의 신비인 부활입니다. 인간의 지성으로는 백번 천번 고민해도
이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이런 부활을 자꾸 인간적 사고의
틀 안에 가둬놓고 설명하려고 기를 쓰다보면 생겨나는 것이, 이단이요
오류인 듯 합니다.

결국 부활의 신비를 열수 있는 열쇠는 어린이 같은 단순성이요, 순수한
신앙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아가페적 사랑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 좀 더 깊어지면, 그분의 부활은 좀 더
우리 가까이 다가올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안치되었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치워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무덤은 텅 비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은
부활하셨으므로 더 이상 여기에 계시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계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불신과 의혹으로 가득한 이곳, 여기에 더 이상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거짓과 위선, 악의와 폭력으로 가득한 이곳, 여기에 더 이상
주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참 사랑이 충만한 이곳,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풍요로운
사랑의 나눔 있는 이곳, 여기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상호
존경과 헌신이 있는 이곳, 주님의 성령으로 가득한 이곳, 고통과 결핍
속에서도 기뻐하고 희망하는 이곳에 부활하신 주님께서 계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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