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4일 그분이 먼저 알려주셔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4-24 06:00:38    조회 : 205회    댓글: 0

▣ 2019년 다해 4월24일 [(백)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3,1-10
복음 루카 복음 24,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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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성경말씀으로 예수님을 만나려면

2019년 다해 4월24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성경말씀으로 예수님을 만나려면>
복음: 루카 24.13-35

1701년 작품, 이아생트 리고의 그림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불 같은 망토를 뒤집어쓰고 허벅지까지
드러나는 스타킹을 신고 족히 15cm가 넘는 붉은 색 굽의 하이힐을 신고
긴 가발을 썼습니다. ‘탈롱 루즈’라고 하는 이 하이힐의 발등 부근에는
붉은 리본모양의 장식도 있습니다. 

루이 14세는 당시 통풍과 류머티즘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왕권의 당당함과 위엄을 지키고 싶어서 이 초상화를 그리게 했습니다.
당시 그렇게 높은 굽의 하이힐은 아무나 신을 수 없는 특수 제작된
형태의 것이었고, 스타킹 역시 만들기 매우 어려워 값비싼
물건이었습니다. 가발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300여년이 지난 지금 그의 초상화는 남성의 권력을 느끼게 하기
보다는 왕을 매우 여성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옆구리에 칼을 차기는
했지만 복장 자체로만 보면 매우 여성스럽다 할 수 있겠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있는 ‘기도란 무엇인가?’란 강의에서 예수회의 정규한
신부는 위의 예를 들며 그때의 사람과 지금의 사람은 가진 지식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그림을 보아도 같게 해석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각자가 가진 지식의 한계 내에서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그림을 가장 온전히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림을 그린 사람뿐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는 사람들보다는 그때의 문화에 살았던 사람이 더 잘
해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도 적용됩니다. 성경은 하느님을 만나게 하는 목적으로
쓰였습니다. 특별히 성경의 모든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로 수렴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성경 속에서 예수님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그들의
지식과 믿음이 구약에 묶여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 자신이 가진
지식과 믿음의 틀 안에서 성경을 해석합니다.

오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도 그 틀에 묶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구약의 모든 내용을 통틀어 설명하시며 당신이
죽으셨다 부활하셔야 함을 깨닫게 해주십니다. 처음엔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도 알아보지 못했지만, 성경을 이해하고 나서는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이해하게 된 것은 성경을
읽어서가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올바른 해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온전히 이해하려면 하느님으로부터 설명을 들어야합니다.
하느님만이 성경의 저자이시고 성경을 가장 잘 이해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을 올바로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오늘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성경말씀을 듣고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라고 말했습니다. 성경공부를 하며 머리가
뜨거워져서는 안 됩니다. 가슴이 뜨거워져야 주님께로부터 설명을 들은
것입니다. 성경으로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으면 부활하신 예수님을 볼
눈이 뜨이지 않습니다. 

말씀은 그 자체로 힘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문자와 믿음이 결합된 말씀을 의미합니다. 문자 자체가 진리라는
착각으로부터 수많은 이단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문자는 사실 각자의
지식대로 해석되기 때문에 오히려 영혼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목적지로 가기 위한 도구이지 그것 자체가 새로운 믿음이 생겨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이미 희망하는 것을 믿음으로 확증해주는 것이
성경입니다. 목적지가 없이 마구잡이로 탔다가는 시간만 허비하다
지쳐버립니다.

성경말씀은 믿음과 함께 먹고 소화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당신 믿음으로 성경말씀을 요리하여 알아듣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자 믿음이 생겨 예수님을 알아보게 된 것입니다.
성경 자체로 힘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믿음과 결합될 때 힘을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성경말씀을
들었다면 마음이 그만큼 불타올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믿음이 말씀과 결합되어 그들을 깨달음으로 인도한 것입니다. 전해주는
이의 믿음이 성경말씀이라는 매개체로 전달된 것입니다. 성경을
아무에게서나 배우면 안 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칼은 그것을
통제하고 유용하게 사용할 능력이 있는 사람이 휘둘러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마음이 뜨거워졌다면 예수님께서 설명해 주신 것이고
그만큼 그분이 눈에 보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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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4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빵을 떼실 때에 주님을 알아 봄

복음: 루카 24,13-35: 엠마오의 제자들

두 제자가 길을 가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의 죽음과 유대인들의 불의한 짓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분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모르고 있다. 그때 부활하신 주님께서 나타나시어
함께 걸으시면서 다정하게 말을 건네신다. 그분을 알아볼 눈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17절)

주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뒤, 당신의 두 제자가 길을
걸으며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시고
물으신 것이다. 제자들은 눈으로 그분을 보았지만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스승님께서 그들과 함께 길을 가신다. 그분이 바로 길이셨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길을 걷고 있지 못했다. 그분은 그들이 길을 벗어나
헤매고 있음을 아셨다.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18절) 그리고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을 모두 말해
주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좌절과 상처를 감추지 않고 곧장 의사이신
그분께 모두 털어 놓았다.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21절) 예수님의 십자가형은 그들의 모든
바람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일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아보게 하려고 성경을 풀이해 주신다. 그들이 실망한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미 모세로부터 시작하여 예언자들에게 이르기까지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풀이해 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들은 그
가르침을 듣고 마음이 불타올랐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 빛을
알아보지는 못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구약의 말씀을 설명하신 다음에야 그들의 눈을 열어 주시어,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임을 알게
하신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을 때 성령의 작용으로 마음이
타오른 것이다. 그들의 마음을 타오르게 한 불꽃은 예수님께서
풀이해주신 성경말씀의 불길이다. 믿음은 그치지 않고 사랑의 불길을
일으키며, 그 불길이 지금 제자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떼어진 빵 조각이 눈을 열어주는 열쇠다. 엠마오의 식사는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의 최후의 만찬을 재현하는 것인 동시에 성사로 주님의
부활을 기리는 교회의 성찬례가 시작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축복이 담긴 빵을 떼어 나누는 행위가 이루어질 때마다 그 안에서
당신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서 사라지신 것은 이제부터
말씀과 성찬 안에서 믿음으로 당신을 모실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오늘도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알아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빵을 떼어 나누면서 그리스도를 알아보았다. 그 빵은 우리가
매일 먹는 빠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아 그리스도의 몸이 된
빵이다. 두 제자가 주님을 알아보게 한 것도 그 빵이었다. 빵을 떼어
나누는 가운데 그분께서 그 자리에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임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성체성사로 그분을
알아봄으로써 하나가 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오늘 복음 역시, 이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체험하고 그 기쁨을 다른 제자들과 나누기 위해 얼마나 서둘렀는가를
볼 수 있다. 즉 예루살렘까지 ‘30리 길을’ 서둘러 되돌아갔던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주님께 대한 체험을 이웃과 나눌 수 있을 때 완전히
자기의 체험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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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나는 불이로다. 내게 가까이 오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2019년 다해 4월24일 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

나는 불이로다. 내게 가까이 오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

엠마오 이야기는 여러 부활 이야기들 중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 십자가 죽음 앞에 큰
실망과 좌절을 느낀 나머지 쓸쓸히 낙향하고 있는 두 제자의 슬픔
여행길에서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여행의 결말은 부활하신 스승님을
되찾은 큰 기쁨으로 마무리됩니다.

엠마오 길의 두 제자는 열두 사도단에 속한 사람들은 아니었지만,
확대된 제자단에 속해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서 곧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보이실 것임을 기대하며 예루살렘까지 따라갔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파스카 축제를 맞아, 모세나 위대한 예언자들처럼
이토록 굴욕적이고 비참한 현실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벌어진 일은? 예수님께서 무기력하게도 중죄인으로
단죄받고, 세상 사람들의 놀림감이 되었고, 마침내 비참한 십자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해방자 주님을 기대했건만 죄수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악을 정복하리라 희망했건만 악에 굴복한 것입니다. 왕이
되기를 바랐지만 졸병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두 제자의 낙담이 얼마나 컸던지, 삶의 의미를 완전히 상실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들이 꿈꾸던 미래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 삶의
기둥, 의미가 무너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먹고 살아야 하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주님 부재 체험으로
낙담해하고 있는 제자들 사이로 그분께서 끼어들어가신 것입니다.

엠마오 이야기는 오늘 우리가 매일 집전하고 참여하는 성체성사 안에서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 안에서 주님께서는 살아있는 말씀으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십니다. 무지한 우리들에게 친절하고도 자상하게 하나 하나
설명해주십니다. 각박한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들의 영혼을 따뜻이
위로하시고 달래주십니다. 세파에 냉랭해진 우리들의 마음을 당신
사랑의 불로 뜨겁게 만드십니다.

엠마오로 가는 길의 두 제자는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주셨을 때,
비로소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성찬의 전례 안에서
주님께서는 사제의 손을 통해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게 하신 후, 그것을
떼어 신자들에게 나누어주십니다.

결국 엠마오 길의 두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뜨거운 마음의
감동을 느꼈으며, 그분과 함께 한 식탁에서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뵙게
된 것입니다.

제2경전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나는 불이로다. 내게 가까이 오는
사람은 불에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다.”예수님께 가까이 다가설수록
뜨겁고 열렬한 마음이 생깁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멀리할수록 우리
내면 안에 예수님의 자리가 줄어들수록, 우리 마음은 냉랭해지고
신앙의 불길은 꺼져버리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다가오시자, 기꺼이 그분을 환대하였을뿐만 아니라, 그분을
기쁜 마음으로 저녁식사에 초대한 엠마오 제자들, 그들이 타오르는
불이신 그분 옆에 앉자마자 즉시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들
역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낙향행을 접고,
다시금 그들의 발걸음은 예루살렘으로 되돌리게 만들었습니다.

자상하신 예수님의 따뜻한 동반과 현존은 엠마오 길의 제자들이 겪었던
깊은 슬픔을 더할 나위없는 큰 기쁨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쓰라린
절망은 따뜻한 희망으로 변화시켰습니다. 도피 행각에서 있던 그들을
당당한 부활의 증거자로 변화시켰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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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그분이 먼저 알려주셔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4월24일 주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루카24,13-35)

그분이 먼저 알려주셔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 일을 치루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 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었으니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튀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는 기쁨을 차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아보기가 무섭게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성경
풀이를 듣고 마음이 타올랐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를 배우게 됩니다. 마음을 재빨리
움직일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은 ‘믿는 마음’,
‘듣는 마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솔로몬이 지혜를 청하지 않고 ‘듣는
마음’(1열왕3,9)을 청한 이유를 함께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미루지 않는 사랑,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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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4월 24일 (수) - 가나의 혼인잔치

오늘은 ‘가나의 혼인잔치’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요한복음 2장 1~11절 말씀에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혼인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집니다. 이것은 정말 큰일입니다. 지금처럼
바로 옆에 슈퍼마켓이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술을 새로 만든다는
것은 하루 이틀만에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시절의 정황으로는 잔치를 하는 사람의 집에서 포도주가 떨어진다는
것은 정말 사고도 이런 큰 사고는 없습니다. 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만들었지요.

그리고 그 기적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었고 기쁨을 불어
넣었고 즐거움을 제공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기쁨을 제공하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자리에서 어머니에게 너무나도 어처구니 없는
소리를 하지 않습니까? 어머니라고 하지않고 여자라고 하며 포도주를
만들기를 원했던 어머니에게 때가 되지 않았다고 딱 잘라 버립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를 이루길 원하십니까? 문제가 해결되기를
원하십니까? 반드시 눈앞에 가로막혀있는 안타까운 시간을 통과해야
합니다. 힘든 시간 통과해야 합니다. 슬픔의 시간 고통의 시간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바로 이 어려움을 통과한 사람, 이 사람을 통해서 기쁨과 기적이
체험되기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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