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6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4-26 06:15:28    조회 : 258회    댓글: 0

▣ 2019년 다해 4월26일 [(백)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4,1-12
복음 요한 복음 2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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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지금-여기’에 계시는 주님

2019년 다해 4월26일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지금-여기’에 계시는 주님
복음: 요한 21,1-14

한 부인이 병원에서 아이를 낳고 집에 돌아왔는데 돌연 막연한
공포감이 엄습했습니다.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괜히 불안했습니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오거나 창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았습니다.

‘도대체 내가 왜 이러는 거지?’
퇴근한 남편에게 이런 말을 했더니 시큰둥한 반응이었습니다.
“아파트에서 무서울 게 뭐가 있어? 창문에 쇠창살까지 붙어 있겠다,
아파트 입구에는 경비 아저씨까지 있어. 푹 쉬면 나을 거야.” 

그러나 불안증은 갈수록 심해졌습니다. TV나 신문기사에서 안 좋은
것을 읽고는 그것이 자신에게 일어날 것만 같아 떨렸습니다. 상상에
상상을 더하고 불안에 불안을 더했습니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콜택시를 불러 아기와 함께 30분 거리의 친정으로 달려갔습니다. 집에
있던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너 왜 갓난아기를 안고 돌아다녀?”
그녀는 모든 게 무섭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이렇게 나돌아 다니면 못 써. 어서 돌아가.” 

철석같이 믿었던 어머니마저 자신의 속마음을 헤아려주지 않자 더
절망에 빠졌습니다.

‘나를 이해해주고 보호해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던 중 강가에 내려 아기를 안고 강물로
뛰어들었습니다. 다행히 지나가던 한 시민의 도움으로 그녀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아기는 숨지고 말았습니다.

[참조: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왜 한 가지 생각에
파묻혀버릴까?’, 김상운, 21세기 북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각에 잠기는
것’입니다. 생각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생각하는 일이 일어나고야
맙니다. 생각을 많이 하면 우울해지고 걱정이 많아지며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이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생각하는 것이 곧 믿음이
되기 때문입니다. 믿는 대로 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창조의 힘이 있는데 생각을 잘못하면 잘못된 창조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생각의 95%는 부정적인 것이라고 합니다.
삶이 부정적이 되는 것은 생각을 많이 해서입니다. 

생각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지금-여기’여 머무르면
됩니다. 생각이 할 수 없는 것은 나를 ‘지금, 이 자리’에 머무르게
만드는 것입니다. 생각은 현재가 아닌 과거와 미래의 다른 장소로 나를
옮겨놓습니다. 그래서 현재를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 나타나실까요? 바로 ‘지금, 여기서’
나타나십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하와는 뱀과
이야기하다 하느님의 현존을 잊었습니다. 아담은 하와와 대화하다가
그랬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은 “있는 나(I AM)”입니다. 항상 현재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분’입니다. 현재, 이 자리에
머물면 생각이 끊기고 주님을 만납니다. 

생각을 끊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감각을 일깨우면 됩니다. 현재는
생각하는 시간이 아니라 인지하는 시간입니다. 호흡에 집중하면
좋습니다. 다른 감각들은 그것들이 생각으로 이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호흡은 평소에도 항상 하는 것이기 때문에 호흡에 집중하면
다른 생각으로 건너가지 않습니다. 그냥 매 순간을 호흡에만 집중하는
연습을 해도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같은 주파수에 서게 됩니다.
주파수가 맞아야 그 주파수로 보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라고
하셨습니다(마태 28,10 참조).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머무시는
갈릴래아가 바로 ‘지금, 여기!’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갈릴래아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습니다.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아침 무렵 한 분이 호숫가에서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합니다. 베드로와 동료들은 순종하며 그물을 던집니다.
그랬더니 153마리의 물고기가 잡힙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주파수에
자신들을 맞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내가 평생 갈릴래아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은 베테랑 어부인데 밤새
한 마리도 못 잡았는데 자기가 누구라고 이래라, 저래라 해?” 

그러나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순종합니다. 밤새 고기를 잡은 것이 지금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게
만드는데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물고기를 잡지 못하게 되어
창피를 당하게 될 미래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나 미래, 그리고
자신들이 있는 장소가 자신들의 생각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단순해지고 그저 어린이처럼 겸손할 뿐입니다.
그리고 현재에 머물기 때문에 그 주파수를 통해 들려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음성이 153마리나 되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낚을
수 있게 만듭니다. 부활하신 분은 생각이 멈추는 바로 이 장소, 이
시간 내 앞에 계십니다. 주님을 만나는 주파수는 지금-여기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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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6일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베드로의 주님 사랑

복음: 요한 21,1-14: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베드로와 토마스, 나타나엘,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들이 함께 있었는데,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3절) 하자 모두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다.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
주님께서 성령을 불어 넣어 주셨는데, 제자들은 갑자기 예전의 직업,
고기를 잡는 어부로 돌아갔다. 사도라는 직책도 자기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그들이 일하다가 지쳤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신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고기잡이를 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것을
보신다. 그분은 그들과 대화를 나누느라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지
않으신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못 잡았습니다.”(5절)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제자들은 스승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잔뜩 잡았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제자들은 배에 있었다. 다른
제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는데,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7절)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분께로 달려갔다. 다른 제자들이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8절)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9절)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물고기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물고기가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물 밖으로 나와야 하며, 죽어야 하고 그리고 불에 구워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에게 구원의 원천이
되기 위하여, 당신의 신성을 버리시고 즉 물 밖으로 나오셨고 죽으시고
(십자가 형) 영광을 받으셨고(성령의 불꽃)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제는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고집으로부터 나의
선입견에서 과감히 벗어나(물 밖으로 나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이 죽는 삶(죽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삶
(성령의 불로 타오름)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삶이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되어야 한다. 

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는 음식이 될 수 없다.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자신 항상 나의 편견이나 아집에서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탈출하는 삶이 필요하다. 여기에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와 하느님
안에 기쁨이 있다.

다음으로 153마리에 대한 것이다. 이 100이라는 숫자는 앞으로
그리스도에게로 모이는 이방인들이 가득 찬다는 의미일 수 있다.
그리고 50 역시 완전한 숫자 7의 일곱 배와 1이 더해진 숫자이다.
50은 여기서 또한 충만한 숫자이다. 희년이 50년마다 오고 있다.
이것은 모일 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를 뜻한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마지막으로 3은 삼위일체를 뜻하며 모든 것은 그 영광을 위하여
이루어진다는 뜻이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10은 10계명을 의미하며,
7은 성령을 나타내는 수이다. 그래서 1부터 17까지를 더하면 153이
된다. 이 숫자는 계명과 성령 안에서 은총을 나누는 모든 사람의 수를
상징한다고 한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10절)

153은 물고기의 종류가 또한 그만큼 된다는 것으로 모든 종류를
포함한다는 의미이고, 고기가 그토록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라는 그물은 아무리 많은 나라의 백성들이 들어와도
그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그물을 베드로가
끌어올렸다는 것은 그의 역할로서, 백성들을 모아 사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가리키고 있다고 보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잔치를 벌이신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13절)

부활 팔일 축제 내 금요일

물에서 나와 인간의 음식이 되는 고기처럼, 하느님이신 아드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구원의 빵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도 같은 삶으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그분을
닮아 가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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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어두웠던 실패의 밤은 지나갈 것입니다.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2019년 다해 4월26일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어두웠던 실패의 밤은 지나갈 것입니다.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실 것입니다!

밤새 허탕친 제자들의 허탈한 모습을 묵상하다보니, 낚시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들이 떠오릅니다. 해 떨어질 무렵이면 연세
지긋하신 조사님에게 집중적으로 전화가 옵니다. 백퍼센트 요즘 가정의
절대권력자들이신 안방 마님들이십니다.

어떤 어르신들은 아주 그럴싸하게 핑계를 댑니다. “지금 어디야? 왜
아직 안들어와?” “응, 지금 친구들이랑 어디 좀 나와있어.” “어디?”
“아~ 그~ 저~ 영안실에.” “또 영안실? 이미 돌아가실 분들 다
돌아가신 듯한데!”

또 다른 재미있는 현상 한 가지가 있습니다. 고기를 많이 낚아올린
사람일수록 목소리의 톤이 커지고 높아집니다. 흥얼흥얼 콧노래가
저절로 나옵니다. 우쭐한 마음에 못잡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해보라,
저렇게 해보라 훈수도 뜹니다.

집에서 전화라도 걸려오면, 주변 사람이 다 들릴정도로,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외칩니다. “스무 마리나 잡았어. 회를 떠갈까? 오케이! 다들
모이라 그래!”

그러나 헛탕친 사람은 잔뜩 주눅이 들어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습니다. 뭘 물어봐도 허탈한 웃음만 짓습니다. 자신감도 없어지고
태도도 크게 위축됩니다.

단체로 밤낚시를 떠난 제자들이 그랬습니다. 스승님이 그리도
무기력하고 끔찍하게 세상을 떠나신 후, 제자들의 심정은 참담함,
당혹스러움, 난감함, 그 자체였습니다. 갑자스레 삶의 의미요 기둥,
존재의 이유가 송두리째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자신들의 장밋빛 미래요 희망이었던 스승님께서 그리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시고 자신들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셨으니, 사는게 사는게
아니었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는 돌아버리겠다는 생각에, 몸이라도
좀 움직일까 싶어, 고기를 잡으러 야간 작업을 나간 것입니다.

고기라도 넉넉히 잡혀주었다면, 숯불구이에 술이라도 한잔 하면서
참담하고 쓰라린 심정을 달랠 수 있었을텐데, 그날 따라 밤새 애썼지만
단 한마리도 못잡았습니다.

뭘해도 안되는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기도 하고, 비참하기도 해서,
넋을 잃고 앉아있는 제자들 사이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등장하십니다.
그러자 우울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급반전됩니다.

“애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못 잡았습니다.” “그물을 배 오른 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요한 복음 21장 5절)

지극히 간단하고 명료한 대화, 그리고 제자들의 단순한 순명과 실행의
결과는 엄청났습니다. 그물이 찢어질듯 엄청난 고기가 잡혔습니다.
얼마나 많이 잡혔던지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일하느라 벗고 있던 겉옷을 두른 후 물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가 겉옷을 입은 채 물속으로 뛰어든 행위는,
스승님임을 인식한 수제자의 큰 수치심, 송구스러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주님이 계시지 않던 밤 바다는 어두웠던 실패의 밤이었지만, 날이
밝아오면서 이른 아침의 신선함 속에 주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제자들의 실패는 주님의 현존으로 인해 대성공으로 변화됩니다.

제자들이 힘을 합쳐 물가로 끌어올린 그물 속에 든 물고기의 숫자는
153마리였습니다. 500그람짜리 우럭 10마리가 든 어망 무게도
엄청난데, 1킬로씩 나가는 큰 물고기 150마리였으니, 그 무게가
엄청났을 것입니다. 큰 물고기 153마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하느님 나라의 풍요로움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주님의 현존과 부재 사이의 차이는 엄청납니다. 주님께서 우리
내면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부재하실 때, 풍기는 분위기는 절망과
낙담, 고통과 시련, 우울함과 나약함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활발히 현존하시도록
우리를 비우고 말끔히 정화시킬 때, 풍기는 분위기는 따스함과 기쁨,
희망과 풍요로움, 강한 생명력과 낙천성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절망과 시련의 바다를 항해하는 우리를 향해 친히
다가오시고, 풍요롭고 따뜻한 밥상을 차려주십니다. 실패와 좌절 속에
힘겨워는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이 아침 우리에게 건네는 말씀이 참 따스합니다.
“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복음 21장 12절)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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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4월26일 주님 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 (요한 21,1-14)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우리 앞길에는 항상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놓여 있습니다. 이중에서
하나를 선택하며 살아갑니다. 오르막길은 어렵고 힘들지만 보람도 있고
기쁨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리막길은 쉽고 편하지만 밋밋하고
지루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기왕이면 쉬운 길을 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지나고 보면 거듭나는 길은 어렵고 힘든 것을 통해서
입니다. 어려움을 겪지 않고는 결코 새로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후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과 함께 있었는데 그는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우리도 함께 가겠소.”하였습니다. 일상으로 돌아간 고된 삶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고 그래서 마음을 잡을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할 수밖에요.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하며 그들에게
말하였지만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지 못했습니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라는 예수님의 물음은 이미 빵을 준비해
놓고 당신의 식사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는 물고기의 유무를 물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부활 식사를 위해 너희가 할 수 있는 몫이
무엇이냐?’그분의 나눔에 우리 역시 무엇인가를 준비하기를 바라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불행이도 제자들은 예수님의 식사를 위해
아무것도 준비할 수 없었습니다. 밤새 애섰으나 그들의 손에는 그 어떤
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힘없이‘못잡았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들이 먹을 양식조차 구하기 힘든 무력함과 고단함이
느껴지는 이 자리에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이르셨고 이 말씀을 받아들인 순간 나눔의 자리는 풍성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하고 이르셨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베드로에게“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베드로는 덜컥 겁을 먹고 호수로 뛰어들었습니다. 자신의 힘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내지 못할 사건이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내려놓는 포기를 통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받는 제자는
누구보다 빠르게 주님을 알아봤고, 베드로는 빠르게 행동으로 사람으로
기억됩니다. 깨달음과 행동의 조화로움이 어디에서든지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고기 몇 마리를 직접 요리하시고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습니다. 제자들 가운데는
“누구십니까?”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본 것은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지고 난 후
입니다. 이른 아침 왠 젊은이가 나타나서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했는데 그들이 어부라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세워 그대로 행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그들은 여전히 주님을 알아 뵙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순명을
한 것입니다. 순명은 주님을 알아보는 눈을 뜨게 했고, 많은 고기를
낚는 기적을 낳기도 했습니다. 순명은 이성과 판단의 희생입니다.
어부의 자존심을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이 희생은 다른 어느
것보다 주님의 마음에 드는 것이었습니다. 삶이 우리 뜻대로만 되지
않는데서 오는 포기의 순간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근심과 걱정, 실망과 좌절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여전히 함께하십니다.
다만 문제에 집착해서 그분의 손길을 느끼지 못할 뿐입니다. 내 것을
내려놓고 주님의 뜻에 나를 맞추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제자들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을 잃은 것이 더없이 큰
아픔이었지만 주님의 부활을 통해 믿음을 키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계실 때 수 차례 당신의 수난과 죽음, 부활을 예고했지만 제자들은
그것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이상 “누구십니까?”
하고 묻지 않았습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거듭날 수 있는 기회로 알고
기뻐하는 오늘이기를 기도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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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4월 26일 (금) - 약속을 지키는 성도

오늘은 ‘약속을 지키는 성도’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도행전 1장 4절 말씀에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약속 중에서도 여러 가지 약속이 있지요.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의 약속은 간혹 무슨 일로 취소되었으면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다려지는 사람과의 약속은 얼마든지 궁금하고
기다려지고 설레고 합니다. 더욱이 오래된 사람들과의 만남은 더욱더
설렐 것입니다.

특히 남녀가 결혼을 전제로 처음 선을 볼 때의 만남은 이거야말로 정말
가슴이 뛰는 약속의 만남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분명히
오신다고 약속하신 성령님을 만나려는 제자들의 사모하는 마음은 그
어느 때 보다도 절절한 약속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만나기 위해서는 기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
중심에는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분명히 성령을 보내 줄
테니 성령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약속은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짊어지고 가시면서 명령하신
것입니다. “너희 죄를 내가 다 짊어 질 테니 너는 성령을 받아 내가 못
다한 일을 하라”는 약속을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지키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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