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8일 자비는 선한 일을 우리가 실천하는 기쁨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4-28 06:53:01    조회 : 214회    댓글: 0

▣ 2019년 다해 4월28일
[(백)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 (이민의 날)]

제1독서 사도행전 5,12-16
제2독서 요한 묵시록 1,9-11ㄴ.12-13.17-19
복음 요한 복음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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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목적이 있는 삶과 없는 삶

2019년 다해 4월28일 부활 제2주일

<목적이 있는 삶과 없는 삶>
복음: 요한 20,19-31

같은 장소에 있어도 목적 없이 있는 사람과 목적 있게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차이는 매우 크다 할 수 있겠습니다. 바다에 떠 있으면서
노를 저어도 방향을 모르면 그것은 그냥 고생하는 것밖에 안 됩니다.
우리 인생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피고에게 징역 20년을 선고합니다.”

피고의 나이 겨우 24세. 출옥하면 40대 중반입니다. 아내도 아들도
자신을 버리고 떠날지 모릅니다.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나 홀어머니와
어렵게 살다 동네 깡패들의 유혹에 넘어가 마약거래에 발을 디딘 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자네가 하는 청소는 엉망이야. 오늘부터 주방 설거지를 하라고.” 

재소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설거지입니다. 끼니마다 1500명의
식판을 닦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와! 주방 일이 이렇게 재미있을 줄이야!”

그는 주방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든 재미있었습니다. 설거지하느라 손이
퉁퉁 부어올라도, 증기솥에 피부가 발갛게 데어도 주방에 들어서기만
하면 신이 났습니다. 

“이게 바로 내가 할 일이구나! 감옥에서 나가면 요리사가 되어야지!”

그는 난생 처음으로 인생의 목표를 갖게 되었습니다. 교도소 도서관에
들어와 처음으로 책을 읽고 신문도 보았습니다. 특히 요리에 관한
책이나 신문기사는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가 모범적으로 주방 일을
하자 형도 10년으로 감형되었습니다.

출소하자마자 그는 한 음식점에 접시닦이로 취직했습니다. 설거지를
하는 틈틈이 허드렛일을 자원하면서 어깨 너머로 요리를 배웠습니다.
마침내 그는 성실함을 인정받아 큰 호텔의 주방장으로 발탁되었습니다.
그리고 몇 년 후 전국 최고의 요리사 상을 받기에 이르렀습니다. 미국
라스베가스 벨라지오호텔 총주방장인 제프 헨더슨(Jeff Henderson)의
이야기입니다. 

천재들을 많이 배출하는 유태인들은 아기가 태어나는 순간 신이
3000여 가지 재능 중에서 최소한 한 가지를 반드시 함께 선사한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유태인은 자녀 교육의 목적을 그 재능을 찾아내
키워주는 데 둡니다. 즉, 인생의 배역을 찾아주는 데 교육의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배역을 찾으면 가장 적은 노력으로 가장 많은 결실을
볼 수 있다고 믿습니다. 자신의 배역은 자신이 가장 잘 아는데, 바로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끌리는 일, 별로 힘을 들이지 않는데도 잘되는
일이 자신의 배역인 것입니다.

[참조: ‘마음을 비우면 얻어지는 것들: 인생은 연극임을 깨닫는 순간’,
김상운, 21세기 북스] 

왜 어떤 사람들은 많은 노력을 하면서도 힘겹게 겨우겨우 살아가고
어떤 사람들은 힘들이지 않는 것 같은데도 큰 성과를 내며 살아갈까요?
어쩌면 유태인들의 생각이 맞는 것 아닐까요? 인간은 무언가 만들 때
반드시 어떤 목적에 사용될 것을 염두에 두고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 목적에 정확히 사용될 때 가장 좋은 성과를 내게 됩니다. 하느님도
인간을 만드실 때 그저 자신이 원하는 것이면 아무것이나 하며 살라고
만드시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뽑으셨듯이
사람들은 어떤 역할을 할 때 가장 좋은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는 원래 나약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워낙 자신감이 없어 학교에 가면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공부도 못했습니다.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한 뒤 지방 대학에 진학해
의학 공부를 해보았지만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간디는 겨우
5개월 버티다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부모는 전 재산을 털어 그를
영국으로 유학 보냈습니다. 그곳에서 간신히 법을 전공하고 인도에
돌아와 변호사가 되었지만 사건을 따내지 못해 좌절감 속에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사건을 맡아 법정에서 발언을 하려는 찰나 심장이
쿵쾅거리고 손이 떨려 도저히 말을 할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는 냅다
줄행랑을 쳤습니다.

간디는 스스로 변호사 재목이 못 된다고 판단했습니다. 형의 도움으로
당시 영국령이었던 남아프리카로 떠나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백수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다른 도시에 가기 위해 기차
일등칸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인 경관이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화물칸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했습니다. 정당하게 돈을 내고 탔다고
따지자 경관은 간디를 기차에서 끌어내렸습니다. 그때부터 자신과 함께
남아프리카에서 백인들에게 당하고 있는 인도인들의 수모들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내 소명이구나. 힘없는 인도인들을 위해 싸우는 것.’

그는 인도인들의 인권을 위해 민사사건들을 해결해나갔고 억울한
사연의 인도인들이 모두 그에게 몰려들었습니다. 그의 명성이 인도
본국에 알려지면서 민족운동의 지도자로 급부상하였습니다. 단지
자신의 배역을 찾았기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니체는 의미를 알면 모든 것을 참아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토마스
사도가 자신만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상태에서 여드레를 버텼다면
그것은 그냥 버틴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의미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 의미를 아는 것이 곧 자신의 역할을 아는 것입니다.
토마스는 자신의 배역에 대한 확신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자면 성소를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사도로
불림을 받았다는 확신이 사도들 가운데 머물 수 있는 힘이었습니다.
맡겨진 배역을 충실히 수행하는 토마스에게 예수님은 그의 의심을
잠재워주십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에게 그에 합당한 은총을 베푸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우리의 존재이유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다면
주님께서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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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주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8일 부활 제2주일: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다스리심

오늘은 부활8부가 끝나는 날로 부활의 기쁨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날이었다. 부활은 이제 단순히 지내는 어떤 기념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고 연장되며 새로운 의미를 주고 선포되는 그런 날이어야 한다.
주님께서 살아 계셔서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제1독서: 사도 5,12-16: 주님을 믿는 남녀의 수효가 날로 늘어났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신자들 가운데 활동하심으로써
그들을 하나로 결속하시어 더욱 커지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과 구분되는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 “그들은 모두 한 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랬다.”(사도 5,12-15).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머리로 하는 공동체를 통하여 ‘많은 기적들과 놀라운 일들을’
(12절) 이루심으로써 그들에게 약속하신 바를 이루시고 계심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므로 교회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부활로써 영원한 ‘주님’이 되셨다
(사도 2,36 참조). 우리의 주님이 되셨다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를
다스리시고 이끌어주시는 분이 될 수 있도록 우리가 그분을 맞아들이고
현존하시게끔 하여야 하는 삶이 남아있는 것이다. 이때에 주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의 주님이 되실 수 있을 것이다.

제2독서: 묵시 1,9-13.17-19: 나는 죽었었지만 이렇게 살아있다

묵시록에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일곱 등경 가운데 서 계신 분’(13절)
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기 때문에 ‘영원무궁토록
사시며 죽음의 열쇠를 손에 쥐고 계시다’(18절). 그분은 이제
‘살아있는 존재’로서 사람들과 모든 피조물들의 운명을 손에 쥐고
계시다. 부활이 그분에게 모든 만물에 대한 지배권을 부여했다.

“그분은 ‘처음과 마지막이다’. 그래서 모든 만물은 그분과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선교사명을 실행함으로써 이 세상에서
그 분을 증거하여야 한다. 부활한 자들이 없이 어떻게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지 않고서
어떻게 그분을 ‘주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겠는가?

복음: 요한 20,19-31: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오늘 복음은 두 장면으로 되어있다. 첫째는 ‘선교사명’에 관한 것으로
성령의 선물을 통해 ‘사죄권’이 부여되는 장면과(19-23절), 둘째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신앙고백을 하는 토마의 불신앙이다
(24-29절). 여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사건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으나 현재에도 영원히 사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 부활은 항상 계속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생명을 얻게 됨을 알려주고 있다.

오늘 복음은 모두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통치’에 대한 표징과 증거로
가득 차있다. 예수께서는 잠겨있는데도 드나드심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시는 분임을 확인시키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이미 새로운 창조적
세계에서 활동하고 계심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이 통치에 대한 것은
우선 제자들에게 주시는 ‘평화’, 그들에게 맡기시는 ‘선교사명’, 그리고
‘사죄권’이다.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19.21.26절)이라는 표현은 고별사에서
제자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이행하시는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이 평화는 자기 자신과 타인의
두려움에서, 그리고 생명과 죽음의 모든 두려움에서의 해방이다.
부활에 대한 신앙은 온갖 불안에 대한 절대적 보증이 된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21절)
는 ‘선교사명’이다. 이 파견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것과 같이 제자들이 파견되어 예수께서 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의
구원의 말씀을 세상에 전할 것이며 구원의 행위를 채워갈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선교사명’은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없이 교회 안에 하느님의 말씀의 선포와 구원에 대한
권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 다음의 증거는 성령의 ‘선물’이다. 이 선물은 죄를 사하거나 사하지
않는 권한을 통해 드러난다.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2-23절).

‘숨을 내쉬는’ 행위는 창조적이고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힘
(창세 2,7; 에제 37,9 참조)을 의미한다. 생명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통해 완전히 충만케 된다. 이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을 통해 새로이 창조되었고, 죄를 사하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그것은 죄를 정복하기 위해서이다. 만일 죄가 정복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의 통치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토마 사도가 고백한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28절)은 토마 개인의
신앙고백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의 절대주권을 개별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모든 개개인의 주님이시다. 이것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모든 개개인의 마음과 생명의 ‘주님’이 되시지 못하면
결코 교회의 ‘주님’이 되지 못하실 것이다. 그분은 신앙 안에서 우리의
‘주님’이 되신다.

그리고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부활하신 주님만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실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예수께서는 토마의 정신자세를
보다 높은 차원으로 이끌어주신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29절).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면에서 우리의 생명의 절대적 ‘주님’이 되신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다. 그 주님께 모든 것을 의탁하고 맡길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때에 진정 그분의 증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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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4월28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의 자비 주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토마스 사도는 이순간 부활하신 주님, 못 자국의
상처를 통해 뜨겁게 만납니다.
자비는 목숨처럼 뜨겁고 자비는 십자가의 상처처럼 어우러집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는 살아계신 자비의
하느님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자비의 시작은 자신의 뜻을 내려놓는 여기에서 시작됩니다.
자신의 뜻을 내려놓을 때 상대방이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됩니다.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만나게 되는 은총의 자비 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손이 쓰러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자비는 생명을 살리는 기쁜소식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고 무덤에서 부활하셨습니다.
우리를 끝까지 사랑으로 존중하십니다.

존중은 헐뜯는 악한 마음을 멈추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만이 병든 영혼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자비는 서로의 마음을 평안케 하는 것입니다.
자비는 선한 일을 우리가 실천하는 기쁨입니다.
자비는 부활하신 주님의 상처를 뚜렷이 직시하는
생명존중임을 체험하며 실천합시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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