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2일 자신감 성실함 함께함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5-12 19:56:01    조회 : 247회    댓글: 0

▣ 2019년 다해 5월12일 [(백) 부활 제4주일 (성소 주일)]

제1독서 사도행전 13,14.43-52
제2독서 요한 묵시록 7,9.14ㄴ-17
복음 요한 복음 10,2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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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친구는 이해해주지만 엄마는 믿어준다.

2019년 다해 5월12일 부활 제4주일(성소주일)

<친구는 이해해주지만 엄마는 믿어준다>
복음: 요한 10,27-30

강론을 가장 하기 힘든 대상은 중학생 아이들입니다. 그 아이들은 세상
근심과 온갖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미사의 처음부터 끝까지 땅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성당에 와서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대견하지만
그래도 강론할 때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마치 일부러 사제를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프로 레슬링 챔피언이 미국 중학생들에게 강의하는데 모든
중학생들이 눈물을 흘리며 경청하는 것을 유튜브를 통해 보았습니다.
‘포크포크: 중학생 전체가 눈물 흘린 엄마와 아들의 사연’이란
동영상입니다. 어떤 말을 했는지 그대로 옮겨봅니다. 

“저희 엄마는 항상 제 학교 행사에 참석하셨어요. 예를 들어 축구시합이
있었다고 해봅시다. 엄마는 항상 사이드라인에 서 있었어요. 그러다
경기가 풀리지 않으면 같이 달리곤 했어요. ‘마크, 일어나, 일어나!’
그럼 저는 창피했습니다. 저희 엄마가 저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저를 믿어주신 것입니다.’ 저는 약물과다복용으로 3번이나 죽음
직전까지 갔었습니다.

친구를 알면 나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나쁜 친구들과 어울렸고 제가
결국엔 가장 나쁜 사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세상 모든 걸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친구들과 놀다가 새벽에 집에 들어갔어요.
어머니는 새벽까지 자지 않고 저를 기다리셨죠. 엄마는 ‘안녕 마크,
오늘 밤 잘 보냈니?’라고 물었고 저는 ‘좋았어요! 이제 그만 자러
갈게요.’라고 말했습니다. ‘마크, 1분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엄마, 나 피곤해. 자러 갈게.’ ‘마크, 오늘 하루 종일 보지 못했잖니,
엄마랑 잠깐 얘기할 수 없을까? 엄마가 부탁해.’ ‘제발 저 좀 내버려
두세요. 왜 귀찮게 해.’ 저는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를
믿어줬던 유일한 사람에게 말이죠. 

우리는 일본에서 레슬링 월드투어를 하고 있었습니다. 경기 후 새벽
3시에 방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마크,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 너희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 저는 전화기를 들고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밖으로 나가 히로시마의 새벽 거리 한 가운데를 미친
듯이 뛰어다녔습니다. 그리고 하늘을 보며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엄마, 정말 죄송해요.’ 저는 엄마의 관을 보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엄마, 제발 일어나주세요.’ 저는 용기를 내어 엄마 얼굴을 ‘처음’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하얀 옷을 입고 계셨어요.
천사 같았어요. ‘엄마, 엄마는 제 영웅이었어요. 내 모든 것, 내가
되고 싶어한 모든 것은 다 엄마를 위해서였어요. 엄마는 저에게 헤아릴
수 없는 사랑을 주셨어요. 제게 삶을 주셨다고요. 저를 믿어준 유일한
사람이었어요.’ 제가 어떻게 갚을까요? 술에 취해서? 높은 자리에
올라서? 멍청한 짓을 해서?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엄마가 원했던
모든 것은 그저 저와 몇 마디 나눈 거였어요. 엄마랑 얘기를 많이
나눴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일을 보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 저는 엄마에게 더 좋은 아들이 될 수 없었을까요?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의해 결정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주위환경을
술과 마약에 빠진 사람들로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 길의 끝은
죽음뿐입니다. 여러분에게 설교하려고 여기 온 거 아닙니다. 제가 그런
삶을 살아봐서 알려주기 위해 여기 있는 것입니다. 결국 감정, 관계,
꿈은 파멸되고 그 끝은 죽음입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높이 오르기
위해? 제 인생의 전부는 부자가 되고 유명해지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백만장자가 되어야 해. 나는 경기를 이겨야 해.’ 결혼생활, 친구,
가족을 희생해서 경기를 이겨야만 했어요. 도대체 뭘 위해서? 세상에
혼자가 되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배웠어요. 여러분
주머니 속에 무엇이 있는 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가슴속에 있습니다. ‘사랑’. 사랑은 단지 단어에 불과합니다. 누군가
나타나서 그 의미를 일깨워주기 전까지는요. 여러분, 여러분이 그
사랑의 의미입니다.” 

이 강연을 한 마크 메로(Marc Mero)는 WWE 레슬링 챔피언이었고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는 법’
(How to be the Happiest Person on the Planet)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현재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멘토로 활약 중입니다. 

마크는 처음에 어머니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듣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끝내는 어머니를 위해 살았습니다. 모든 나쁜 행동을
끊고 어머니가 바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는 모든 행동은 다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마크의 귀를 열었던 것은 어머니의
‘믿음’이었습니다. 세상에 마크를 믿어주는 유일한 사람이
어머니였습니다. 우리는 누군가 우리를 믿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고
하십니다. 어떻게 양들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까요? 어떻게
설교 듣는 것을 싫어하는 중학생 아이들이 한 레슬링 스타의 말에
일제히 눈물을 흘릴 수 있을까요?

전에 저는 이해해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믿어주는
사람보다는 이해해주는 사람을 더 찾았습니다. ‘세상에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한 사람만 있어도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나의 무엇을 이해받고 싶은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아마도 죽음이라는 목적지로 향하고
있으면서 뭔지 모를 불안감 때문에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인지 확인받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온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은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부모도, 친구도, 어떤 누구도 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이해받는 것은 나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누군가 지금 나를
이해해주면 나의 인생은 거기에서 멈추고 맙니다. 지금이 옳은 삶을
살고 있다고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정작 찾아야 하는 사람은 나를 믿어주는 사람입니다. 저를 끝까지
믿어주던 사람은 있었습니다. 바로 어머니입니다. 가족들이고 나를
사랑해주는 내 주위에 계신 많은 분들입니다. 이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도 믿어줍니다. 저는 믿어주는 것이 이해해주는 것보다 더 큰
일임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마크 메로의 어머니는 마크의 행동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언젠가는
바른 길을 갈 것이란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마크는 자신을
이해하는 친구들과 어울렸습니다. 그러나 나중엔 자신을 믿어주는
어머니의 말을 따랐습니다. 만약 어머니가 “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아이야!”라고 말했다면 마크의 인생은 거기서 멈추었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믿어주었기 때문에 마크가 결국엔 어머니의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사목을 많이 해 보진 않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수많은 신자들을
일일이 다 이해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말과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그들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조금씩 더 좋아질 것이란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끝까지 믿어주면 언젠가는 신자들도 사목자의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가슴으로 사목해야지, 머리로 사목하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제가 사목을 잘 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릅니다. 포기한 적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가장 후회됩니다.

‘믿어 줄 사람이 나 혼자였을 수도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든다면 의무를 다 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의 목소리를
잘 들어주는 양들이 많기 위해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사목해야겠습니다. 그리고 그런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믿어주는 사람은 또한 믿음을 받습니다. 나를
따르는 많은 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고 나를 보내신 분도 믿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그러니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믿어주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믿어주십니다. 믿어주시는 이유는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이 큰
사람은 더 많이 믿기에 더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의 말을 귀 기울여
듣습니다.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언젠가 저도 “내 양들은 나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행복한 사제가 되기를
희망해봅니다. 사랑하면 믿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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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부활 제4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12일 부활 제4주일: 나는 착한 목자이다!

오늘은 성소주일이다. 우리는 지금 하느님의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며 그 부르심을 향하여 나아가고 있는지 성찰하면서 진정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는 미사가 되도록
하자. 착한 목자이신 주님을 기리는 착한 목자의 주일을 맞아 또한
교회의 목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어야 하는 날이다.

복음: 요한 10,27-30: 내 양들은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유다인들은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신지를 입증해 보여 달라고 한다
(요한 10,24).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불신앙을 탓하시면서 그들이
당신의 양이 아니기 때문에 당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셨다
(10,25-26 참조). 이 유다인들의 요구는 진실하지가 못하다. 예수님의
말씀이든 업적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양떼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양떼에
속하고 속하지 못하고는 그분의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에 달려있다.
즉 우리가 우리 자신의 고집이나 판단을 주님께 내세우지 않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르는 데 달려있다. 하나의 공동체가 이루어지고 주님 앞에
단일한 양떼를 이루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똑같이 듣고 따르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님의 양떼가 되기 위한 전제조건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면,
인간이 그리스도를 향하기 전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향해
움직이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먼저 우리를
부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르심에 우리가 응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사랑으로 시작되는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개방하는 것이며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 자신을 의탁하는 것은 그리스도께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 신자들은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무도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29절)는 말씀에서
기쁨과 평온을 발견할 수 있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30절). 이 말씀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은
악의 유혹이 그리스도인들을 빼앗아가지 못하도록 보루의 역할을
한다는 말씀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이시다. 이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즉 사랑의 관계이다. 이 관계로 하나이시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의 진실한 양떼가 되기 위하여 모든 분야에서
단일한 신앙, 단일한 사랑, 단일한 행동, 일치를 재발견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성삼위의 일치의 모델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그들 상호간에 주님과의 깊은 일치를
실현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분의 소리를 듣고’ ‘그분은 그들을
알고’ 그래서 ‘그들이 그분을 따른다’(27절)는 사실을 세상에 입증할
수 있겠는가?

복음을 통해서 제시되고 있는 목자는 ‘권력’을 가지신 분의 모습보다는
‘사랑’을 가지신 분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제2독서: 묵시 7,9.14b-17: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은 어린양이 흘리신 피에 자기들의 두루마기를 빨아 희게
만들었습니다..옥좌 한 가운데 계신 어린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셔서
그들을 생명의 샘터로 인도하실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말끔히 씻어주실 것입니다”(묵시 7,14.17). 그분은 어린양으로
살해되셨기 때문에 구원하시는 ‘분’이 되셨으며, 나약하게 되셨기
때문에 인간들의 절대적 지배자가 되셨다. 이 ‘어린양’이 어떤 점에
있어서 자기 양떼를 보호할 힘과 권능을 행사하시는 ‘목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착한 목자이신 예수께서는
(요한 10,11) 사람들을 지배하려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생명을 선물로
주시기까지 사랑과 봉사를 베푸신다. “나는 착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안다...나는 내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요한 10,14-15). 즉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희생하심으로써 당신 양떼를 다스리는 목자가 되신다. 인간들에게
봉사하기 위해 계신 하느님! 이것이 살해당한 어린양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이며, 그렇게 해서 그분은 당신
양떼의 목자가 되셨다.

제1독서: 사도 13,14.43-52: 당신들을 떠나 이방인에게로 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새로운 현존의 형태는 세상에 ‘목자’로서
받아들여지기 위해 ‘어린양’이 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전교의 지름길일 것이다. 제1독서에서는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전교의 성공에 대해 전하고 있다. 그들은 어떠한 어려움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을 통해 “주님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49절). 그리고 바오로와 바르나바가 그들을
거슬러 주어진 박해를 당하여 이고니온으로 갔을 때 “신도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가득 차 있었다”(52절).

만일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형제들에게 사랑과 봉사의
희생제물로 바쳐지는 ‘어린양’들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아직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만한 것을 전혀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기쁨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항상 영원한 생명에로
부르시고 인도해주시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그 말씀을 듣고 따르는
것은 우리의 자유의지에 달렸다. 주님의 은총에 힘입어 우리를
부르시는 목자에게로 항상 가까이 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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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 27)|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12일 부활 제4주일(성소 주일)
나는 그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른다.(요한 10, 27)

수 많은 길들이 하느님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는 여정이 바로 성소의 여정입니다.
저마다의 부르심은 하느님의 강력한 은총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약하고 부족한 모습까지도
끌어안고 가십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응답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의 응답이 기도이며 봉헌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하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성소(聖召)는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로 바꾸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고 하느님께서 이루실 하느님의 일을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수도 성소는 공동체의 삶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삶입니다.

사제 성소는 하느님 말씀을 삶으로 선포하는 하느님의 부르심입니다.
끝까지 가야 할 아름다운 우리의 길입니다.
길이 아름다운 것은 거기에 하느님이 계시고
따르기 위한 눈물과 사랑 수 많은 기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성소를 위해 기도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은 사랑의 구원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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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부활 제4주일

2019년 다해 5월12일 부활 제4주일

오늘은 성소주일입니다. 성소주일에 생각나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아는 자매님께서 전화를 하셨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런저런 이야길
하는데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시더군요. “사제로 사는지 30년이 되어
가는데 어떻게 지낼 만한지요?” 저는 그 질문을 받고 잠시 생각했습니다.
내가 사제로 살아가는 것이 지낼 만한 것인지, 아니면 마지못해서
지내는 것인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사제 생활이 재미있으면 하고
재미없으면 시장에서 물건 바꾸듯이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게 이런 이야길 하시더군요. 둘째
애가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데 사제가 되고 싶어 한다고 합니다. 제가
생각이 나서 전화를 하였다고 합니다.

남미 여행을 하면서 가장 고마운 분은 30일 동안 편안하게 이끌어
주었던 ‘팀장’입니다. 팀장은 여행이 좋아서 여행을 직업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본인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그것이 보람이 있고, 일한만큼
보수를 받는다면 현명한 선택입니다. 늘 활기차고, 꼼꼼하게 챙겨주었던
팀장이 있었기에 아무런 사고 없는, 편안한 여정이 될 수 있었습니다.

팀장에게서 몇 가지 배울 점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자신감입니다. 비행기가 지연되고 결항 되었지만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우리에게 새로운
길을 알려주었기에 우리는 팀장의 결정을 따를 수 있었습니다. 언제나
웃은 모습으로 우리를 대해 주었기에 팀장을 더욱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큰 부담이 되는 결정은 본사와 상의를 하였지만 그것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제도 언제나 자신감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제가 걱정하고, 근심하고, 불안해하면 공동체도 흔들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해야 할 때 사제는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제는 새벽을 기다리는 파수꾼처럼 외로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굳은 믿음이 있다면
사제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일 것입니다. 

둘째는 성실함입니다. 팀장은 항상 제일 먼저 일어나서 우리를
맞이하였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습니다.
항공 티켓의 이름과 수화물 짐표를 하나하나 챙겨주었습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은 앞자리로 옮겨주었고,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주었습니다. 팀장이 알려주는 기념품 가게는 물건이 좋았고,
팀장이 알려주는 식당은 맛있었습니다. 섬세하게 우리를 챙겨주었던
팀장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제도 무엇보다
성실해야 합니다. 미사 전에 고백성사를 정성껏 주어야 합니다.
교우들이 고백성사를 통해서 하느님과 화해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시대의 징표를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본인이 선포한
하느님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셋째는 함께함입니다. 현명한 스승은 배고픈 제자에게 물고기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배고플 때 물고기를 잡을 수 있도록
낚시하는 법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팀장은 숙소, 항공권, 꼭 해야 할
일정을 제외하면 모든 것을 우리가 스스로 하도록 맡겨주었습니다.
처음에는 길을 찾는 것도, 시간을 배분하는 것도 어려웠지만 차츰
우리는 각자가 원하는 방향으로 각자의 방법으로 여행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저는 부활 주일에 성당을 찾아가서 미사에 참례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좋아하는 분은 그곳을
선택하였고, 멋진 경치와 맛집을 좋아하는 분은 그곳을 선택하였습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예전 주일학교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고, 모처럼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시간을 스스로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것을 혼자 하시지
않았고, 제자들에게 역할을 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부족하지만 복음을
선포하였고, 결실을 맺을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하게 신앙의 신비를 선포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한 사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믿고 사명을 맡겼던
것처럼 신자들과 함께 사목해야 합니다. 혼자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멀리 갈 수 없습니다. 함께하면 조금은 느릴지라도 먼 길을 갈 수
있습니다. 

30일 결코 짧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잘 마칠 수 있었던 것은 팀장의
도움도 있었지만 팀원들이 서로 배려하고, 협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짐이 나오지 않는 팀원을 위해서 기꺼이 기다려 주었습니다. 불평과
불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격려하고 용기를 주었습니다. 아픈 사람이
있으면 서로 가지고 있는 약을 나누어 주었고, 한국에서 가져온 음식도
함께 나누었습니다. 배가 목적지를 향해서 가기 위해서는 선장의
지도력도 있어야 하지만, 선원들이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저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은 사제의 몫만은 아닙니다.
세례를 받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라고 응답한 것입니다.
제게 진한 감동을 주었던 신자들이 생각납니다. 

비가 몹시 내리는 여름날, 성당에 와서 창문을 닫고, 하수구를 치우고,
성모상 앞에서 기도하던 형제님이 생각납니다. 해님만 달님만 보신다면
깊은 산속 골짜구니에 피어도 좋다는 두메꽃의 시처럼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해주던 형제님입니다.

방앗간을 하던 형제님은 남모르게 어르신을 도와주었습니다. 가정
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에게는 학자금을 도와주기도 하였습니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하였던 형제님의 선한 눈빛이 생각납니다.

도축장에서 일하던 형제님도 생각납니다. 화가 나서 큰 싸움을 하려는
순간에 싸우지 말라는 본당 신부의 말을 생각하였고, 잘못한 동료를
용서하였습니다. 형제님은 ‘신사부일체’라고 하였습니다. 신부님과
스승님과 부모님은 동급이라고 후배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본당 신부가 피정을 가거나, 휴가를 가면 언제나 성당에 와서 수녀님을
도와드리고 사무실 일을 도와주었던 형제님도 생각납니다. 눈이 오면
마당을 쓸었고, 수녀님을 위해서 차량 봉사도 하였습니다. 있을 때
잘하는 것도 고맙지만 없을 때 잘하는 것은 더욱 고마운 일입니다.

집의 가장 중요한 곳에 성경책이 있었던 형제님도 생각납니다. 기도
초는 언제나 촛농이 가득했고, 성경책은 손때가 가득했습니다. 결코
남의 말을 옮기지 않았고, 상대방의 좋은 점을 이야기 하였던 형제님의
온화한 미소가 생각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고,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며, 나의 모든 것 주님께 돌릴 수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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