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5일 시작은 미약하나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5-15 07:29:51    조회 : 211회    댓글: 0

▣ 2019년 다해 5월15일 [(백)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12,24―13,5ㄱ
복음 요한 복음 12,4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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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영광스러워지는 법

2019년 다해 5월15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영광스러워지는 법>

복음: 요한 12,44-50
 
성녀 구네군다는 바바리아의 공작인 성 헨리꼬와 결혼하였습니다. 둘은
결혼식 날 동정서원을 발했습니다. 남편 헨리꼬가 황제가 되어서도
둘은 동정을 지키며 신앙전파를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헨리꼬 황제가 사망하자 구네군다는 수녀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아름다운 의복은 전부 버렸으며 자신이 손수 만든 누추한
옷을 입고 주교가 축복한 수건을 쓰고 수도생활을 하였습니다.

구네군다 성녀는 수덕에 힘쓰며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싫어하지 않고
모범적인 행실로 하느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손재주가 좋아 여러
물품을 만들어 성당을 장식하였고, 병자 방문도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15년간의 수도생활을 마치고 오빠라고 불렀던 헨리꼬
황제 옆에 나란히 묻혔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시선으로는 참으로 어리석은 삶을 산 인물들입니다.
그러나 신앙인 입장에서는 성인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을 추구하지 않는 만큼
하느님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이들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 세상을 구원하러 오셨다는 오늘 복음 내용은 복음의
흐름 속에서 이해해야 더 잘 해석이 됩니다.

요한복음 12장 첫 번째 이야기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 영광을 드리는 모습인 것입니다. 여기에 두
인물이 대비되어 나옵니다. 향유를 붓는 마리아와 그것을 반대하는
가리옷 유다입니다.

마리아가 수천만 원에 해당하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드리자,
유다는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라며 불평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한
두 상반되는 자세를 말합니다. 

유다는 돈을 좋아하였기에 비싼 향유가 예수님께 발라지는 것을
아까워하였습니다. 그러나 라자로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서
세상 것을 쓰레기처럼 여겼습니다. 누가 예수님께 영광을 드렸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다음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시는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영광을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세상에서 죽으면 죽은 이에게서 나오는 피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도 당신의 생명을 주셔서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는 사람을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이것이 부활입니다. 내가 십자가를
지면 하느님은 부활을 선물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살려고 하면
영원히 죽습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게 되는 이유는 세상에서
죽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받는 영광보다 사람에게서 받는 영광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빛’으로 세상에 오셨다고 하십니다. 빛은
볼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이 세상에서
영광을 포기해야 아버지로부터 받을 영광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이를 믿지 않음으로써 아버지도 믿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빛으로써 어떻게 영광을 받는지를 보여주셨기 때문에
나중에 누구도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영광을 받기 위해서는
하늘에서 오는 영광을 포기해야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는 말로 요약됩니다. 

제가 사는 동네 이름이 ‘죽산’입니다. 우스갯말로 ‘죽어야 산다’라는
뜻이라고 말합니다. 이 곳은 순교자들이 처형을 당한 장소입니다.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았던 선조들의 숨결이
남아있습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는 저 자신을 항상 반성하며 오늘은
조금 더 주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은총을 청해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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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부활 제4주간 수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15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심판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신 주님

복음: 요한 12,44-50: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것이다.”(44절) 아들을 모르는 사람은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아드님을 부인하는 자는 아무도 아버지를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1요한 2,23)고 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아들을 고백하는 사람은
아버지와 아들, 두 분을 다 모시고 있다. 우리는 아들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 그분은 빛으로서 세상에 오셨으며 당신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분은 아들로서
아버지께로부터 오신 분이시고 당신을 믿는 것이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나를 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보는 것이다.”(45절) 이 말씀은
아들이 아버지와 본질이 같은 분이심을 의미한다. 그래서 흐르는 물을
사용하는 사람은 사실은 그 물이 흐를 수 있게 한 샘의 물을 쓰는 것과
같다. 흐르는 물의 본질은 샘물의 본질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는
말씀을 바라봄으로써 아버지를 볼 수 있으며, 아들의 말씀을 듣는 것은
아버지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를 만나시고 우리는 아들을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를 만난다는 뜻이다. 하느님께서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들을 영원으로부터 보고 계시며, 아들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당신의 자녀가 되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무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46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
라고 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면 세상의 빛의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은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빛을 받아야 하며,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에 싸일 것이다. 우리를 비추는 빛이
먼저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간이 빛으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어둠 속에 남아있지 않으려면 세상에 오신
빛을 믿고 빛이 있는 곳으로 나와야 한다. 빛을 피해 다시 어둠 속으로
가서는 안 된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다.”(47절)
주님께서는 “악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을 기뻐한다.”(에제 33,11)고 하셨다. 그래서
당신의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신 것이다. 정녕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희생제물이 아니라 자비
(호세 6,6 참조)라고 하신 것과 같이, 희생제물은 의로운 사람을 더욱
맞갖은 사람이 되게 하고, 자비는 죄인이 구원받게 해 주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구원의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단죄하는 것이다.

“내가 한 바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그를 심판할 것이다.”(48절) 이
말씀은 그분이 마지막 날에 몸소 심판하실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시는
말씀이다. 그분이 하신 말씀은 바로 그분 자신이시다. 그분의 말씀이
바로 그분이기 때문에 그분으로서 심판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이
말씀에서 말씀을 듣고도 그 말씀을 업신여긴 이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씀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함으로써 스스로를 단죄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이야기 할
것인지 친히 나에게 명령하셨다.”(49절)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살아 있는 인격적 말씀이시니 아버지를 잘 알려주실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은 당신께서 아버지의 뜻을 밝히시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아버지에 관한 지식으로 인도하시며, 우리가 당신을 통하여
아버지를 알도록 하신다는 말씀이다. 그분은 항상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끌어 주셨으며, 그러기에 그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은 아버지의
뜻이다. 그러니 이제는 변명할 여지가 없다.

“나는 그분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임을 안다.”(50절) 영원한 생명이
아들이고 하느님의 명령이 영원한 생명이라면, 예수님의 이 말씀은
‘내가 곧 아버지의 명령이다.’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말은
아버지께서 나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하는 말이다.”(50절)라고 하신
것이다. 즉, “지금 너희에게 말하는 내가 바로 말씀이다.”라는 말씀이다.
아버지는 참되시고, 아들은 진리이시다. 참되신 분께서 진리를
낳으셨다. 이 진리는 처음부터 완전해서 새로운 진리를 보탤 필요가
없다. 당신의 진리를 말씀하시면 되는 분이다.

이렇게 아버지의 말씀이시고, 진리이신 그분을 맞아들이고 따르면서
항상 빛속에 살며 세상을 비추어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께 도움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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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부활 제4주간 수요일

2019년 다해 5월15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먼 여행을 하는 동물 중에는 철새가 있습니다. 겨울이 다가오면 따뜻한
곳으로 여행합니다. 봄이 되면 다시 돌아오는 철새가 있습니다. 어떤
새들은 만 킬로가 넘는 먼 거리를 날아간다고 합니다. 지구의 자기장을
이용한다고 하고, 별을 본다고도 하고, 바람을 이용한다고도 합니다.
철새가 먼 거리를 여행할 수 있는 것은 신비로운 일입니다. 하늘을
나는 새에게 그런 능력이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남미 여행을 하면서 지프를 운전하는 분을 보았습니다. 내비게이션은
물론, 지도도 없었습니다. 오직 경험과 감각만으로 정확하게 목적지를
찾아갔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삶을 시작한 인류가 지구의 곳곳으로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경험과 감각에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도시
생활에 익숙한 저는, 편리한 도구를 사용하는 저는 도저히 찾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과학의 발전은 분명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스마트 폰, 컴퓨터, 인터넷, 구글, 페이스북, 카카오톡은
우리를 빛의 속도로 연결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삶은 우리에게
풍요로움을 줄 것입니다. 우리는 똑똑한 전자기기에 익숙해질 것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사도들의 이야기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했고, 사도들은 새로운 길을 찾았습니다. 박해와 시련을 하느님을
위한 영광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았고, 기도와
찬양의 시간을 기뻐하였습니다. 가진 것을 조건 없이 나누었고,
자신들이 체험한 예수님의 부활을 전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얼굴,
발걸음, 용기, 신념, 헌신을 느낄 수 있습니다. 편리한 과학의 도움을
받지 않았지만, 교회는 믿음, 희망, 사랑으로 연결되었습니다. 어둠
속에 있던 많은 사람이 구원의 빛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연 우리에게
어떤 사건이며, 어떤 의미를 주고 있을까요?

첫째,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로마의
힘과 권력이 막강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받았지만, 율법 학자들과
대사제들이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하느님 나라는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의 것들에 의존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둘째, 변화입니다. 근심과 걱정으로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금도, 은도 없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을 보여주었습니다. 거짓된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두려움과 걱정으로 하루를 보낸다면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셋째, 삶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빈 무덤에서 찾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모습을 본 사람도 없습니다. 부활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부활의 기쁨은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굶주린 이에게 전해져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이 주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러 왔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세상에서 뽑아 세웠으니, 가서 열매를 맺으십시오.
여러분의 열매는 길이 남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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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5월15일 부활 제4주간 수요일 (요한 12,44-50) 

하느님은 사랑이시다.

우리가 일생을 살아가면서 결정적으로 바라는 것은 구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질그릇처럼 깨지기 쉬운 연약함을 지녔기에
구원의 도구로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빛
안에서 구원 받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모든 말씀을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구원을 실현하러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입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십니다.“누가 내 말을 듣고 그것을 지키지 않는다
하여도, 나는 그를 심판하지 않는다. 나는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러 왔기 때문이다”(요한 12,47). 언제나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신다는 말씀에 희망을 둡니다. 우리는 죄악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고해성사를 통해 묶인 매듭을
풀어주십니다. 고해성사가 심판이라면 얼마나 두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러나 ‘나는 다시는 너의 죄를 기억하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과거를
치유시켜주십니다. 그분의 사랑이 우리를 지켜주고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럼에도 그분을 무시하면 그분은 심판자가 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악의 어둠, 무지의 어둠, 불신의 어둠 속에 있는 인간을
비추는 빛으로써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기에 심판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심판자체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안 하고는
우리의 자유의사에 달려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의 결과는 마땅히
선택한 사람이 감당해야만 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어둠 속에
머물러있다면 그것은 이미 단죄를 받은 것입니다. 사실 “어둠 속을
걸어가는 사람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요한12,35)
그러므로 빛이 우리 곁에 있는 동안에 그 빛을 믿어 빛의 자녀로
굳건해져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아버지의 명령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에게
그대로 전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 입니다. 언제든지
아버지의 말씀에 순명하시는 예수님처럼 우리도 항상 주님의 말씀에
순명함으로써 생명을 누리기를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심판을 원치
않으시고 사랑을 원하셨다면 우리도 남을 심판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겠습니다. 세상이 어두워져도 어둠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그만큼 더
큰 사랑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사랑을
실천하기 어렵다면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일만큼은 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보내신 분께서 나도 보내셨다는 것을 상기하며
언제나 우리를 구원에로 인도하시는 주님께 한발 더 다가가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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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5월 15일(수) -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

오늘은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욥기 8장 5~7절 말씀에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것입니다.

시작이 미약하여 창대하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 앞에 죄를 회개하고 깨끗하게 씻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바로 이렇게 해야 할 조건을 갖출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완전한 고백을 통해 완전한 회개를 통해, 완전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집을 소유할 수 있고 하나님의 집을
소유한 그 성도는 평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늘 우리는 하나님을 대면하고 살고 하나님과 동행할 때
하나님께서 영원히 잘되고 발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대로 된 조건을 갖출 때 시작이 아무리 미약해도 아무리
부족해도 나중에는 창대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창대하게 된다면 개나 소나 다 달려들지 않겠습니까?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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