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9일 사랑은 만능열쇠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5-19 07:03:44    조회 : 191회    댓글: 0

▣ 2019년 다해 5월19일 [(백) 부활 제5주일]

제1독서 사도행전 14,21ㄴ-27
제2독서 요한 묵시록 21,1-5ㄴ
복음 요한 복음 13,31-33ㄱ.34-35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감사해야 사랑이 가능한 이유

2019년 다해 5월19일 부활 제5주일

<감사해야 사랑이 가능한 이유>

복음: 요한 13,31-33ㄱ.34-35
 
이영지 씨는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으로부터 이런 전화를 받았습니다.
“영지야, 네 남편 오늘 늘씬한 여자와 호텔서 나오더라. 보통 사이가
아닌 거 같았어. 여자가 스스럼없이 팔짱까지 끼던걸.”
너무나 충격적인 말이었습니다. 정말 자신의 남편이 맞느냐고
물어보았지만 친구는 확실하다고 합니다.

‘나쁜 놈.’
그때 학원에서 돌아온 딸아이가 외칩니다.
“엄마, 배고파. 밥 줘.”
영지 씨는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그놈의 밥. 한 번쯤 굶으면 병 나냐? 네가 차려 먹어!” 

귀가한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기조차 역겹습니다. 그래서 거실로 나와서
잠을 청해보지만 상상이 상상을 낳아 밤을 하얗게 지새웁니다.

‘뻔뻔스러운 이중인격자! 더러운 철면피!’
그동안 속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니 오장이 뒤틀립니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고 있는데 전화가 걸려옵니다.
“언니, 형부가 어제 저녁 사줬어. 취직 축하한다고. 멋진 호텔에서.”
“멋진 ... 호텔?”
갑자기 지금까지 남편을 의심했던 것이 미안해집니다.
‘그럼 그렇지. 그렇게 착실한 남편을 의심하다니.’

영지 씨는 번개처럼 일어나 장바구니를 들고 밖으로 나갑니다. 영문도
모른 채 아침도 거르고 나간 남편이 안쓰러웠기 때문입니다. 영지 씨의
발걸음은 매우 가볍습니다. 

[‘왓칭; 나를 바꿔놓는 요술 일곱 가지, 부정적 생각 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사랑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말 한 마디로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지옥으로 이끄는 나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생각’입니다. 이 생각이란 것이 사랑에 어떤 장애가 되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평생 온전한 사랑을 하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영지 씨는 남편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것부터 먼저 배웠어야 합니다. 

사랑은 인간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항상 삐걱거려야합니다. 인간 안에는 아기(육체적 감정)와
성인(이성)과 하느님(마음)이 공존합니다.

아기는 생존의 역할을 담당합니다. 인간의 뇌 해마 끝 쪽에 위치한
‘편도체(아미그달라)’가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아기의 유일한 목적은
생존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존과 반대되는 모든 것들을 적으로
여깁니다.

엄마를 보면 안정감을 찾지만 엄마가 아닌 다른 존재들은 자신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기 때문에 불안해지거나 두렵거나 화가 납니다.
아미그달라는 외적 요인을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감정을 옷입혀
기억저장소로 보내는 역할을 하는 동물의 가장 오래되고 원초적인 뇌의
부위입니다. 만약 여우가 호랑이를 보고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큰일 날
것입니다. 인간은 5세까지는 전적으로 이 아미그달라의 지배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5세가 넘어서며 이성이 발달하면서 인간은 이 아미그달라가
자아내는 감정에서 어느 정도는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생존만을
위한다면 부모나 형제 외에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여기게 됩니다.
사회생활을 위해여 언어의 발달과 함께 ‘이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성이 아미그달라에서 발생하는 부정적 감정들을 통제합니다.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 큰일들이 발생할 것입니다.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이런 사건이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인
제이슨 군이 물리교사를 부엌칼로 찌른 것입니다. 모든 과목 학점이
A인 하버드 의대 진학을 꿈꾸는 수재였습니다. 그런데 물리시험에서만
B를 맞은 것입니다. 그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칼을 가방에 숨기고
갔습니다. 물리 교사와 둘이 있을 때 점수를 올려 달라 청했습니다.
교사가 이를 거부했고 제이슨은 그를 칼로 찌른 것입니다. 

판사는 제이슨 군에게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정신과 의사 네 명이
법정에서 범행 당시 제이슨 군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입니다. 제이슨 군은 다른 학교로 전학했고 다른 학교에서 전교
1등으로 졸업했습니다.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 아미그달라의 감정에 지배당한 상황입니다.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자신의 생존이라고 하는 목표에 빨간 불이
들어오게 하는 사람은 제거의 대상이 됩니다. 이것이 동물적 본성이고
이것을 이성이 통제하지 못하면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가 현대인들이 많이 겪고 있는 ‘분노조절장애’일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알아야 하는 사실은 아미그달라가 생성해내는
이분법적인 감정은 90초면 소멸된다는 것입니다. 분노가 계속 솟구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면 오히려 생존에 장애가 되기 때문입니다.
분노를 지속하면 심장과 혈관이 버티어내지 못합니다.

부정적 감정은 가만히 내버려두면 1분 30초면 사라집니다. 그런데도
분노가 몇 시간, 몇 달, 혹은 몇 년이 지속되는 이유는 그 때 일었던
감정을 계속 생각함으로써 꺼져가는 불씨에 기름을 붓기 때문입니다.
별거 아닌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살인까지 갈 수도
있습니다. 

생각을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심장입니다. 마음인 것입니다.
서먹서먹했던 사람이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면 심장박동이 빨라진다고
합니다. 이것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아미그달라에서 나오는 두려움
때문에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성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옆에 있는 사람 때문인지 구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심장을 뛰게 하였다고 믿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갓 만난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성을 믿으면 착각도 사랑이 되어버립니다. 이성은 매우 단순해서
그저 일부러 맛있는 음식을 상상하기만 해도 입에서 침이 돌도록
만듭니다. 현실과 상상의 세계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불완전한 이성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이성보다 더 높은 수준에 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그런데 마음은 저절로
움직이지 않고 사랑에 감동되어야 움직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힘은
‘감사’인 것입니다. 부모에게 받은 사랑에 대한 감사 때문에 이성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데도 치매에 걸린 부모와 다정다감하게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가슴을 따듯하게 하고 뇌를 차갑게 합니다. 그러면
아미그달라의 생존본능에서 나오는 부정적 감정들이 빠르게
사라집니다. 이 과정이 있어야 타인을 온전히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 감사하기 위해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당신
이성의 작용을 뛰어넘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 27,46; 마르 15,34)

예수님은 이해하지 못해도 순종하십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성을 넘습니다. 바로 감사의 마음으로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미그달라에서 나오는 두려움의 감정과 ‘내가 왜 그래야 해?’라는
이성이 마음에 의해 통제됩니다. 그래야 사랑이 가능합니다. 사랑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만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합니다.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이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를
위해서는 반드시 그분들로부터 마음을 안정시킬 사랑을 받아야만
합니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에 감사하여 형제와 이웃에 대한 사랑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느님께 감사하여 그분께 영광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
있을 때에만 이웃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 [수원] 부활 제5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19일 부활 제5주일: 새로운 계명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묵시 21,5). 즉 그리스도께서
이끄시어 완성시키시는 그 ‘새로움’은 모든 경계를 초월하여, 궁극적인
‘해방’을 기다리며 신음하는(로마 8,19 참조) 온 세상을 포용하고 있다.

제2독서: 묵시 21,1-5: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든다”

제2독서는 악의 완전한 패배를 묘사하고 있다. “나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습니다. 첫 번째 하늘과 첫 번째 땅은 사라지고 바다도 더
이상 없었습니다.”(1절). 즉 지금까지의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맞이하는
것이며, 사탄의 생활의 근거지이고 악의 상징인 바다
(욥기 7,12; 26,12; 40,25)는 새로운 예루살렘의 승리 앞에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여기서의 새로움은 그러기에 사물의
‘새로움’이 아니라 인간들의 ‘새로움’이다. 

제1독서는 이 새로움을 천상 예루살렘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처럼
차리고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2절).
이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구원의 사랑을 영원히 거행하기 위해 세상
종말에 ‘어린양’의 주위에 모이게 될 구원받은 이들의 공동체를 암시한다.

이 천상 예루살렘의 시민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온전한
사랑으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사랑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예루살렘의 시민이 될 수 없다. 이 때문에 천상 예루살렘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신부’(2절)라는 표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이
때문에 구약의 예언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와 선택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했던 혼인의 비유의 주제가
나타나고 그 예언적 사상이 실현되고 있다. 이 혼인관계는 죽음
앞에서조차 변치 않는 사랑으로 자신을 내어주심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인간들을 당신의 동반자로 포용하시는 ‘혼인애’를 들어
높여주신다. 그러기에 나머지 대목에 나타나는 기쁨의 의미도 알 수
있다. “그 때 나는 어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3-4절).

복음: 요한 13,31-33a.34-35: 새 계명을 주겠다

이 혼인의 계약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사랑은 양쪽에서 흘러나와
나누어져야 한다. “하느님께서 사람의 아들을 통하여 영광스럽게
되셨으면, 하느님께서도 몸소 사람의 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이제 곧 그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32절). 예수께서는 성부께서
당신을 기꺼이 받아주실 것을 의심치 않으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 10,30)라고 하셨다. 이것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사이의 무한한 사랑의 관계를 드러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의 현존의 징표를 일치를 통해서
반향 시킬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시어 당신의 현존을
확장시키도록 하신다. 다른 사람들은 이제 제자들의 완전히 ‘새로워진’
사랑을 통해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얘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있는 것도 잠시 뿐이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33-35절). 예수께서는 이 ‘새 계명’을
‘계약’으로서 제자들에게 남기시려 한다. 예수님의 이 ‘계약’도 무상의
‘선물’이다. “새 계명을 주겠다.”(34절)의 주다라는 동사는 보통
‘선물’을 뜻한다.

그러나 어떻게 ‘계명’이 ‘선물’이 될 수 있는가? 그 ‘계명’이 어떤 의무를
부과하기보다 우리로 하여금 존재의 차원을 발견케 하고 또한 형제적
사랑을 나누게끔 되어있는 인간적이고 그리스도인적인 내적 신비를
깊이 알 수 있게 해준다면 그것은 ‘선물’이 될 수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강압적으로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을 밝혀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이제
단지 하느님의 뜻만을 알아보는 일만이 남아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형제적 사랑을 ‘새 계명’이라 하는가? 율법에서도
이웃 사랑을 요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레위 19,18; 마태 22,39)는 계명을 원수들까지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하시면서(마태 5,43-48) 당신의 계명으로 만드신다.
그러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34절)고 이웃 사랑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바로 당신이 지금 모든
사람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수난의 길에 계심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의
옹졸한 마음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히 넓은 마음을 그 사랑의 척도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형제들에게 발을 씻어달라고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이 그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을 의미한다(요한 13,1-20 참조).
그러기에 우리는 ‘새 계명’이 법적인 계명의 의미가 아니라
‘선물’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제2독서와 복음에서 내용이 ‘새로운’이라는 형용사에서 수렴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 ‘새 계명’
등등. 그러나 이 ‘새로움’은 이 세상 마지막에 가서 그 빛을 발하게
되겠지만 이미 와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오기를 기다리면서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즉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우리가 서로 나눌 수 있는 사랑으로,
그 사랑의 새로운 힘으로 교회와 사회를 활성화시켜 나아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베푸셨던 사랑을 우리도 실천하려고 노력하면서 그분을
닮아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어 그 안에 세상을 포용하는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 [수도회]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19일 부활 제5주일.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 34)

예수님과의 사랑에서 모든 사랑은 시작됩니다.
모든 사랑에 함께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서로 사랑하게 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결과가 아닌 사랑하려는 우리의 모든 여정입니다.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모든 것을 새롭게 하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그래서 사랑에는 실패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또한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전교입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아있는 영광입니다.
주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사랑의 주일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삶이란 사랑할 때 완성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 [수도회] 아아, 나는 어쩌자고 그랬던가. 그때는 왜 그 잘못을
몰랐던가.

2019년 다해 5월19일 부활 제5주일

아아, 나는 어쩌자고 그랬던가. 그때는 왜 그 잘못을 몰랐던가.

나름 배웠다고 자부하시는 분들, 그래서 아직도 떡 하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분들께서 어찌 그리 분위기 파악을 하지 못하고, 이토록
민감한 시기에 보기 민망한 상황들을 연출하면서 정제되지 않은
망언들을 일삼고 있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나라와 국민을 향해 씻을 수 없는 과오를 저지른 분들, 이제 떠나실
날도 그리 많이 남지 았았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니...보편적 정서나 상식의 결핍, 자신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를 다시금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우리나라 문학계 안에 굵은 획을 그으신 김훈 선생님께서 최근 내신
산문집 ‘연필로 쓰기’(문학동네)를 읽다가 참으로 공감가는 표현을
접했습니다.

“늙어서 슬픈 일이 여러 가지겠지만 그중에서도 못 견딜 일은 젊어서
저지른 온갖 못난 짓거리와 비루한 삶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 어리석은
짓, 해서는 안될 짓, 함부로 써낸 글, 너무 빨리 움직인 혓바닥, 몽매한
자만심, 무의미한 싸움들, 지겨운 밥벌이, 계속되는 야근과 야만적인
중노동...이런 기억이 몰고 오는 슬픔은 뉘우침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한(恨)이나 자책일 뿐이다. 그 쓰라림은 때때로 비수처럼 가슴을
찌른다. 아아, 나는 어쩌자고 그랬던가. 그때는 왜 그 잘못을
몰랐던가.”

대체로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은 무지해서, 혹은 어려서 저질렀던
자신의 과오나 흑역사를 떠올리며 괴로워하는 것이 인지상정
(人之常情)인데, 지금 메스컴을 장식하는 그분들은 어찌 그리 조금도
자신의 지난 부끄러움과 수치를 뒤돌아볼 줄 모르는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오늘 요한 묵시록을 통해 주님께서는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솔직히 인정하는 사람들, 그래서 진정성있는 성찰과 참회
작업을 통해 늘 자신을 갈고 닦는 사람들에게 참으로 은혜롭고 감사한
약속을 건네십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요한 묵시록 21장 3~4절)

요한 묵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래로 인해 마침내 하느님 아버지의
인류 구원 계획이 완성됨을 선포합니다. 이제 알파요 오메가, 시작이며
마침, 세상 만물의 원천이요 완성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믿고
바라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고 그분의 품 안에 머무는
자녀가 될 것임을 약속합니다.

묵시록의 핵심은 미래에 대한 예언이자 저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인류 구원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분을 통해 세상 모든 악의 세력이 파멸됩니다. 승리의 근원은 바로
그분이십니다. 결국 새로운 창조란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중심으로 한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관계 회복, 그로 인해 샘솟은 위로와 희망을
가리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 [서울] 부활 제5주일

2019년 다해 5월19일 부활 제5주일

프랑스의 앙굴렘 교구에서 주교님과 신자들이 한국을 방문했습니다.
앙굴렘은 한국의 103위 순교 성인인 성 오매트르 신부님의 고향입니다.
성 오매트르 신부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는 수원교구
신봉동성당과 앙굴렘의 성 오매트르 성당은 자매결연의 인연을 맺고
있습니다. 앙굴렘 교구 신자들은 수원교구 신봉동성당의 신축 입당
미사를 함께 봉헌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길이었습니다. 오매트르
신부님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하셨습니다. 프랑스에서의 편안한
삶을 포기하고, 박해가 진행 중인 한국으로 온 것은 숭고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프랑스의 남쪽에 있는 마르세이유에는 바다가 내려 보이는 성당이
있습니다. 이 성당에서 파리 외방 전교회 사제들은 한국으로 가기 전에
파견 미사를 하였습니다. 파견 미사를 하면서 가족들은 모두
울었습니다. 박해가 심한 한국으로 가면 다시는 가족들과 만날 수
없다는 것을 가족들도, 사제들도 알았기 때문입니다. 박해와 죽음이
기다리는 한국으로 갈 수 있었던 것도 숭고한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오매트르 신부님도 마르세이유에 있는 성당에서 파견 미사를 하였고,
한국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사랑해서 결혼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고 싶지만, 우리의 현실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많은 갈등과 아픔이 생기곤 합니다.
언젠가 창밖에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볼 때가 있었습니다.
바람이 불고, 그 부는 바람에 나뭇잎들은 하염없이 흔들렸고, 그날은
나뭇잎이 불쌍하게 느껴졌습니다. 나는 내가 원하지 않는 많은 일을
하게 될 때가 있었습니다. 직책 때문에, 욕심 때문에, 눈치를 보기
위해서, 남의 눈이 두려워서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아! 나는 저
나뭇잎과 무엇이 다른가! 

바람만 불면 흔들려야 하는 저 나뭇잎은 그러나 한 번도 불평하거나,
불만을 표시하지 않습니다. 그저 부는 바람대로 흔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바람이 결국은 나뭇잎에 생기를 주고, 나뭇잎이 자연의
한 부분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임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나는 나의 삶에 있어서 고난의 바람, 절망의 바람,
눈치의 바람, 욕심의 바람, 분노의 바람이 불어올 때 얼마나 많이
원망했는가 생각해 봅니다.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내색을 하지 않는 나뭇잎, 그 바람 때문에 미처
피워보지 못하고 땅에 떨어진다 해도 그것을 서러워하지 않는 저
나뭇잎을 보고 배우려 합니다. 말 없는 나뭇잎이 제게 새로운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새로운 길을 보여 주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일까
생각해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적인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는 것은 악마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나를 미워하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나에게 죄를 지은 사람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서입니다. 용서는 왜 해야 합니까!
그것은 하느님의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이른
번이라도 용서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나를 살리기
때문입니다. 분노하는 사람은 ‘분노 스트레스’가 나와서 혈관이
수축하고 피의 순환을 방해하기 때문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보다, 심장
질환에 걸린 확률이 3배나 높다고 합니다. 실제로 화병 때문에 죽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탄 다음날 축일은 스테파노 축일입니다.
스테파노는 바로 예수님처럼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했고, 그들을 용서했던 성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의 탄생
축일 다음에 스테파노 성인의 축일을 정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그 사랑 때문에 비록 박해와
고통이 따를 수도 있지만, 그 사랑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후회 없는
사랑을 합니다. 그 사랑은 비록 많은 수고와 땀이 필요했지만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었고 그분들은 지금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만능열쇠입니다. 잠겨있는 모든 것들을 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종합비타민입니다. 고통과 번민, 원망과 분노, 갈등과 상처를
치유합니다. 사랑은 최상의 거름입니다. 사랑을 뿌려주면 죽은
뿌리에서도 싹이 나옵니다. 사랑을 뿌리면 10배, 100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받으면 ‘새 하늘과 새
땅'을 볼 것입니다. 그 사랑은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