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6일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5-26 06:23:17    조회 : 225회    댓글: 0

▣ 2019년 다해 5월26일 [(백) 부활 제6주일 (청소년 주일)]

제1독서 사도행전 15,1-2.22-29
제2독서 요한 묵시록 21,10-14.22-23
복음 요한 복음 14,23ㄴ-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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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평화로워야 길이 보인다.

2019년 다해 5월26일 제6주일

<평화로워야 길이 보인다>

복음: 요한 14,23ㄴ-29
 
요즘 이 분 예화만 들어 죄송합니다. 그 책을 읽고 있기 때문인데
그분의 의견에 전부 동의하지는 않지만 사례들은 참고할 것이 많아
이번에도 ‘왓칭’의 김상운 저자의 경험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자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습니다. 당시 그 반에는 섬뜩한 칼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문제아 중 문제아가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있는데도 칼을
이리저리 던지곤 했고 책상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으면 불시에 나타나
손 가까이 칼을 홱 내리꽂았습니다. 그리고는 기겁을 하는 아이들을
보며 웃었습니다. 

김상운 저자는 그 친구 때문에 학교에 가기 싫었고 그 친구가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선생님들도 그 아이를 아예
내놓은 자식 취급했고 창문이 깨지던가, 누군가 다쳐 코피를 흘리면
대뜸 이렇게 말했습니다.

“또 네가 그랬지? 너 말고 그런 짓 할 사람이 누가 있겠니?”
아이는 1학년 때부터 줄곧 그런 말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누구도
그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이는 왜 칼을 지지고 다녔던 것일까요? 불안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면 아무도 그 아이를 해칠 것 같지 않지만 그 아이는 불안했던
것입니다. 칼이 그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도구였습니다. 불안한 사람은
항상 자신의 칼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힘으로 평화를 찾으려다가는 그런 참 평화 없는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뾰족한 침을 지닌 모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이는 대체적으로 보호를 받아야 할 때 부모가 보호해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고 아이를 자주
때렸습니다. 그러나 반 아이들은 친구 얼굴에 멍이 들었어도
‘또 싸우다 그랬겠지.’, 혹은 아예 멍이 든 지도 몰랐습니다. 그가 항상
점심을 싸오지 못했어도 그가 점심을 굶는 것을 눈치 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5학년 담임선생님은 달랐다고 합니다. 어떻게 알았는지 망나니
친구가 점심을 거른다는 걸 알고 도시락을 따로 챙겨온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매일 챙겨왔습니다. 그렇게 6개월쯤 지나자 친구가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담임선생님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세 살 적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그가 또 유리창을 깼습니다.
같은 반 아이들은 벌벌 떨었습니다. 선생님이 인자하시긴 했지만
잘못에 대해선 몹시 엄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망나니 친구 대신 벌을
뒤집어써야 할 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전원이 단체기합을 받아야
할 게 뻔했습니다.  

그런데 교실에 나타난 선생님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이렇게만
말했습니다.
“깨진 유리창 빨리 치워.”
그리고는 조용히 망나니 친구를 불러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문이 깨졌지?”
이전 선생님들처럼 “또 네가 그랬지?”라고 말하지 않고 단지
‘문제’만을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을 잡고 이러게 물었습니다.

“네가 이 세상에서 가장 바라는 게 뭐지?”
친구가 잠시 후 모기만한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선생님이 제 아버지였으면 좋겠어요.” 

평화는 안전하게 보호를 받고 있을 때 드는 마음입니다. 아이는
부모로부터 보호를 받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여 스스로 평화를
지키려고 칼을 든 것입니다. 칼이 세상이 주는 평화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으로, 어떤 사람은 명예로, 어떤 사람은 자녀의 출세 등으로 칼을
만들어 평화를 찾으려합니다. 이 모든 것은 참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나오는 행동입니다. 아무리 칼을 들고 다녀도 부모가
보호해주고 있다는 평안함은 누릴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더 혼자가 되어 더 불안하게 됩니다. 피를 갈구하며 침을 들고 다니는
모기를 보며 평화로운 삶을 산다고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란 당신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징표로 남겨놓고 가시는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예수님의 피입니다. 사랑이 징표입니다. 사랑이 곧 평화인 것입니다.

위 사례에서는 선생님이 아이에게 준 도시락이 성령님이고 비난하지
않고 손을 잡아준 것이 성령님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가 맺힙니다. 그리고 이제 그 성령을 주시는 이의 뜻을
따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예수님은 평화를 주시기 때문에 살아야 할 방향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다. 평화 없는 사람은 마치 천둥번개가 두려워 머리를 감싸고
구석에 움츠린 사람과 같습니다. 길이 있어도 보지를 못합니다. 평화가
있어야 주님의 뜻도 따를 수 있습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선생님은 그 망나니 친구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그가 땅바닥이나 종이쪽지에
그림을 끼적거리는 것을 보고 그림에 흥미가 있음을 알아차렸습니다.
아이들은 미술시간에 성생님이 그 친구에게 “넌 미술에 소질이
있구나.”라고 말하는 걸 자주 듣게 되었습니다.  

그 친구의 그림실력은 날로 향상되었고 서서히 다른 과목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 친구가
남을 괴롭히는 일이 싹 사라진 것입니다. 5년 내내 아이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칼도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더 이상 칼의 도움이 필요
없었던 것입니다. 길을 찾으면 지팡이만 있으면 됩니다. 1년 후 졸업식
날, 그 친구는 최우등상을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시기 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칼 한 자루, 아니 몇 자루씩을 차고 다녔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평화를 보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전쟁과 싸움과 공포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성령을 주시어 우리가 그런 무기를 들지 않아도
됨을 알려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당신
십자가상 죽음을 통하여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평화를 위해
칼을 내려놓아도 됩니다. 천상 임금의 자녀들이 굳이 무기를 들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던 우리들
어둡고 캄캄한 곳에 갇혀 있던 우리들
하느님이 어딨냐며 대들던 우리들
알려고 만했을 뿐 느끼지 못했던 우리들
하느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니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네.
그 사랑 야훼께 모두 감사드려라
우리에게 베푸신 기적들 모두 찬양하리니
그 사랑 야훼께 모두 감사하여라.
기쁜 노래 부르며 감사하여라.” 

‘그 사랑 야훼께 감사하여라.’란 청소년 성가 가사입니다. 오늘은
청소년 주일입니다. 청소년은 불안합니다. 주님께 사랑받고 있다는
것과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만 알게 한다면 이런 찬미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평온해야 길이 보입니다. 갈 길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먼저 길을 알려주기보다 먼저 안아주어야 합니다.
칼을 놓아야 펜이든, 붓이든, 뭐든 잡게 됩니다. 불안함에서 벗어나야
길이 보입니다. 이를 위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평화를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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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부활 제6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26일 부활 제6주일: 교회는 사랑의 공동체

오늘도 지난 주일의 천상 예루살렘의 이야기(묵시 21,1-5)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천상 예루살렘은 구원이
하느님으로부터만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21,2 참조). 찬란히 빛나는
열두 대문 위에 씌어진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
(12절)- 이것은 모든 민족들이 그 도성을 건설하는데 참여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과 그 성벽을 받치고 있는 열두 개의 주춧돌 위에
새겨진 “어린양의 열두 사도의 이름”(14절)을 언급하는데, 이것은 옛
이스라엘과 새 이스라엘 사이의 사상적 연속성이 있음을 뜻한다.

제2독서: 묵시 21,10-14.22-23: 천상 예루살렘의 모습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성전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과 어린양이 도성의 성전이시기 때문입니다.”(22절). 천상
예루살렘에 성전이 없다는 것은 ‘세속도시’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성스러움과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즉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깊이 들어와 계시어 그들과 하나를
이루고 계심을 뜻한다. 

그런데 이렇게 하느님과 인간들이 일치를 이루는 것은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만날 뿐 아니라, 그분 안에서 이미
하느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전정화에서 예수께서는
“‘이 성전을 허물어라. 그러면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그러나
그분께서 성전이라고 하신 것은 당신 몸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다.”
(요한 2,19-21)

그러므로 ‘하느님과 어린양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라는 사실은
구원된 모든 사람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이며 또한 만물이 하느님께
대하여 새로운 관계를 회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의 공통
사제직이 의미를 나타낸다. 우리 모두가 예배를 드리며 거룩하게
삶으로써 이 세상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다. 

또한 천상 예루살렘은 성전이 필요 없듯이 빛이 필요 없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이다
(23절). ‘세상의 빛’(요한 8,12)이신 예수께서는 당신 빛으로 선택된
이들을 감싸시며 그들은 그분의 빛을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2고린 3,18). 그렇게 되면 구원된 자들은 자신들 안에서 그리스도의
현존이 드러나 보이는 삶이 될 것이다.

복음: 요한 14,23-29: 성령은 모든 것을 되새기게 하여줄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우리가 이루고 있는 오늘의 교회 역시 되어야하는
모습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에서 우리 모두가 ‘종말론적 교회’를 예견할
수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살아있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기를
바라고 계시다. 신앙의 종말론적 차원은 어떠한 결과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일어나도록 강력히 밀고 나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모습은 어떻게 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하느님의 성전, 거처가 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23-24절)

그러므로 하느님의 거처라고 한다면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하느님의
성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삶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천상
예루살렘으로 기어오르지 않으면 결코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갈라지고,
그리하여 참된 목적지를 찾고 있는 사람들의 갈망을 대신하지
못함으로써 진정한 구원을 전해주지 못한다면 그 모든 것은 우리의
탓이다. 

이제 또한 말씀을 들을 뿐 아니라, 사랑으로 표현되고 실행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23절). 즉 사랑함으로써 하느님을 차지할
수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8.16 참조).
사랑함으로써 그분을 체험할 수 있고 그분과 같이 사랑을 나눌 수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하느님과의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모든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랑의 공동체가 될 때에 신자들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모든 것’(1고린 2,12 참조)을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리라는 것을
예수께서 약속하신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
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25-26절). 즉 성령은 모든 선물의 ‘완성’과 같은 것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보다 철저하게 들어가게 하신다. 

반복적인 되새김만이 아니라 ‘깊이 있게’ 함으로써 구원적 체험을 항상
새롭게 하는 창조적 역할을 한다. 시대는 변한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주님을 온전히 기억하기에 충실해야 한다. 계속적인 ‘새로움’
속에서의 ‘충실성’, 이것이 성령께서 교회 안에 끊임없이 이루어주시는
기적이다. 이 성령의 활동은 언제나 확고한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게 된다.

제1독서: 사도 15,1-2.22-29: 성령과 우리의 결정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제1독서에서도 나타난다. 초기 교회에서 이방인들을
받아들이는 문제에서 성령께서 주인공으로 개입하시면서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원로들에게’ 사랑의 ‘충실성’과 ‘새로움’의 지침이 제시된다.
그럼으로써 예수님의 선교사명(마르 16,15)에 충실할 수 있는 융통성을
발휘하라고 하신다. 

“성령과 우리는 다음의 몇 가지 필수 사항 외에는 여러분에게 다른 짐을
지우지 않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곧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불륜을 멀리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들만 삼가면 올바로 사는 것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28-29절).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가 하늘에서 내려오는 천상 예루살렘의 표지가
될 수 있도록 항상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 하에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성령께서 비추어주시고 굳게 일치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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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요한 14, 28)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26일 부활 제6주일(청소년 주일)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요한 14, 28)

사랑한다는 것은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께로 가는 것을 오히려 기뻐합니다.
그 어떤 것도 붙잡을 수 없는 우리들 삶입니다.
성장과 성숙이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삶의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간입니다.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변화가 필요합니다.
변화의 첫출발점이란 먼저 하느님을 잃어버린
우리의 이기심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본질에는 중심을 잃어버린 우리의 마음입니다.
복음의 생명력은 하느님 중심으로 살아가는 변화의 삶입니다.

변화의 삶이 청소년들을 힘껏 밀어주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생각한 것을 기쁘게 실천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기쁨을 하루하루 실천하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을 향하는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이 행복한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가야 할 길을 아름답게 걸어가는 이는 매순간 하느님께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임을 믿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당신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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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부활 제6주일

2019년 다해 5월26일 부활 제6주일

짧은 시간이지만 ‘광고’는 소비자가 물건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줍니다. 제품의 장점을 소개하는 광고도 필요하지만,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광고가 판매에 더 큰 영향을 줍니다. 제가 기억하는 광고
중에는 제품의 성능과 장점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마음을 움직이는
광고가 더 많습니다.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 이것은
텔레비전 선전입니다. 소중한 사람과 함께 할 때면 잠시 꺼주셔도
좋습니다. 이것은 휴대폰 선전입니다. 엄마 아빠와 함께 Together!
이것은 아이스크림 선전입니다.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이것은 어린이 영향제의 선전입니다.” 모두가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광고입니다. 짧은 시간에 소비자에게 선택받는 것은
제품의 기능이 아니라, 소비자의 마음을 얻는 것입니다. 

신앙은 능동적일까요? 아니면 수동적일까요? 내가 하느님을 선택하고,
내가 종교를 선택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느님께서 나를 부르시고,
나에게 힘을 주시는 것일까요? 구약의 위대한 지도자 중에 ‘모세’가
있습니다. 이분은 40년은 자신의 힘으로 살았습니다. 이집트의
궁궐에서 교육을 받았고, 모든 것을 능동적으로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주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모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힘과 지혜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지만 모세는 이집트에서 도망쳐야 했고, 미디안 땅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이제 모세는 장인의 집에서 양을 돌보면서 좌절과 절망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고, 앞날에
대한 희망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40년을 보낸 모세는 이제 또 다른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의 음성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힘을 모두 뺀
모세에게, 앞날에 대한 희망까지도 포기한 모세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십니다. 그리고 모세는 자신의 힘이 아닌 하느님의 이끄심에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가게 됩니다. 모세가 자신의 힘과 능력으로 하려 했다면 광야에서의
40년을 견딜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의 능력을
믿고 의지할 때 모세는 비로소 자신의 가능성과 능력을 회복하게
됩니다. 신앙을 갖는 것은 이제 내가 내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내 안에서 나와 함께 사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쁨도, 슬픔도, 희망도, 절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30년 동안 공무원으로 있다가, 시골로 가서 ‘洗心院’이라는 작은 집을
지어서 지내는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마음을 정화하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그분은 열쇠를 100개 만들어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누구나 원하면 하루 쉬었다가 갈 수 있는 집입니다. 물론
비용은 받지 않았습니다. 세심원을 이용하는 비용이 한 달이면
300,000원 정도 든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비용으로 이웃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본인에게도 기쁨이라고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집주인이
매일 하려는 일이 있다고 합니다. 아궁이에 불을 피우는 것입니다.
누군가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하루를 지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빨갛게 타오르는 나무를 보면서 본인도 누군가를 위해서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나면 보리를 심는다고 합니다.
보리는 추운 겨울에도 파란 싹이 돋아난다고 합니다. 보리를 보면서
삶의 시련이 올지라도 이겨낼 수 있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틈이
나면 집 주위에 ‘차’를 심는다고 합니다. 차의 향은 지친 심신을 위로해
주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차가 자랄 것이고, 또 누군가는 그 차를
마시면서 정신을 맑게 할 것이라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정말이지
사랑은 뜬구름을 잡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원하는 것을
차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실천이며, 사랑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서 무엇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내
말을 잘 지킬 것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제 아버지께서 보내 주실 협조자 성령께서 너희에게 이 모든 것을
다시 알려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은 죄인까지도 품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고통과 수난을 감수하시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조건이 없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끝까지
믿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죽기까지 열정을 다하는
사랑입니다. 

예전에 읽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신앙으로
잉태되었습니다. 세례를 통하여 재생의 삶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어머니이신 교회의 교리와 교훈으로 젖을 먹고 생명의 빵으로
자라납니다. 우리는 거룩한 생활로 어른이 되며 지혜와 혼인을 합니다.
우리의 자녀는 희망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유산과 재물은 하느님
나라의 복된 생활입니다. 우리가 거처할 곳은 하느님 나라이며 우리의
끝은 죽음이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삶입니다.” 

오늘의 제2 독서는 끝 날에 보여주는 하느님의 사랑, 그 끝 날에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뽑히는 이들의 표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지만,
아무에게나 열려있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세상의 흐름을 당당하게 거슬러 가는 사람, 그 세상의 흐름에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맞서는 사람에게 주어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우리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구세주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내어놓은 사람들이었다고 이야기합니다.
세상이라는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예수님의 협조자가 되었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말씀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협조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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