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5-29 07:40:44    조회 : 199회    댓글: 0

▣ 2019년 다해 5월29일 [(백)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제1독서 사도행전 17,15.22─18,1
복음 요한 복음 16,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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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누군가를 영광스럽게 하는 법

2019년 다해 5월29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누군가를 영광스럽게 하는 법>

복음: 요한 16,12-15
 
제가 고속도로에서 수녀님들을 태우고 운전을 하고 가고 있었습니다.
대화를 한참 하던 터라 뒤에서 오는 차를 보지 못하고 차선을 바꾸었던
것 같습니다. 분명히 백미러에는 차가 없었는데 갑자기 “빵 ~~~”
그러며 한 차가 제가 빠졌던 차선으로 차를 붙이며 창문을 내렸습니다.
본래 추월하려면 2차선에서 1차선으로 추월해야 하는데 저는
1차선에서 2차선으로 빠지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니까 그 차는 아마
2차선으로 추월하려다가 제 차가 갑자기 2차선으로 들어서니
급브레이크를 밟았던 것 같습니다. 저도 창문을 내렸습니다. 그랬더니
그쪽에서 운전자 아주머니가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저도 “추월하려면 1차선으로 해야지, 비켜주는 나한테
왜 그래요?”라고 쏘아붙이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싸움을 하면
수녀님들이 불편해할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속은 부글부글
끊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 차를 보내버렸습니다. 그 사람도 제
차 안의 수녀님들의 복장을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와 함께 있는 누군가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서는 나 자신이 원하는
말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나와 하느님 사이에서
일어난다면 이것이 예언자직입니다. 나 자신이 할 말을 하지 않고
타인이 원하는 말과 행동을 하게 되면 타인을 영광스럽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당신께서 세상에 보내시는 성령께서 그것을 받는
사람을 통하여 당신을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요한 16,13-14)

예수님도 스스로 한 말씀도 하시지 않으셨고, 성령께서도 스스로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당신들을 파견하신 분으로부터 받은
말씀을 그대로 전해주실 뿐이십니다.  

이렇듯 예언자직은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나의 말을 참아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은 예언자직이 아닙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참아내는 것이 예언자직입니다. 예수님도 이 예언자직을
수행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셔야 했습니다. 성령을 받는 이들은 모두
예언자들이 되는데 그 이유는 자기 뜻대로는 한 마디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주는 길이
됩니다. 

한번은 또 고속도로에서 차에 소리가 나서 어디서 나는 소리인지
찾다가 앞 트럭을 살짝 박은 적이 있습니다. 그 차가 1톤 트럭이어서
제 차는 그 차 밑으로 들어가 보닛이 다 휘어질 정도로 피해가 컸지만
그 차는 멀쩡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이는 두 남자가 목을 잡고
내렸습니다. 아들은 인상을 쓰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피해가 없는데
무언가 받아내려는 속샘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기도를 하면서 가는 중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빨리
내려서 “괜찮으십니까? 정말 죄송합니다.”를 고개를 깊이 숙이며
연발했습니다. 조금 화가 난 표정이었던 젊은 사람이 갑자고 조금
당황해하더니 얼굴이 누그러졌습니다. 그러더니 “어이구, 아저씨 차
많이 망가졌네요. 잘 고치세요.”라고 하며 다시 차에 타고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빠르게 해결이 될 수 있었습니다.  

예언자직은 나를 죽이는 행위이지만 또한 나를 살리는 행위입니다.
내가 하는 말들이 사실은 나를 죽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나를 살리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매순간 하느님께서 나에게
어떤 말을 하기를 원하시는지 들어보아야 합니다. 

저도 살면서 제 마음대로 말하다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실수를 하며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 후회가 되어 항상 마음이 아픕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일 때는 후회가
없습니다. 

예언자직은 내가 하고 싶어 하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서 하고 싶어 하는
말을 하여 나를 죽이고 다시 부활하는 직무입니다. 이것이 나도 살리고
이웃도 살립니다. 하느님께서도 서로서로를 위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은 하나도 하지 않고 상대의 말만을 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도 서로 순종하시는데 우리야 얼마나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며 살아야겠습니까?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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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오늘은 지난 2014년 8월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교황 프란치스코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인 124위 순교 복자들의 기념일이다. 이분들은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들로,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때 순교한 부들 가운데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분들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1997년 추계 주교회의 정기총회에서 그 동안 각
교구별로 이루어지던 이들의 시복시성을 통합 추진하기로 하고,
2001년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 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더욱
본격적인 준비를 해 왔다.

124위 복자 기념일 5월29일은 한국교회의 제안을 사도좌가 허락한
것이다. 기념일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천상 탄일로
지정되지만 사목적 이유 등으로 다른 적절한 날로 옮길 수 있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의 순교일은 12월8일이지만, 이 날은 한국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윤지충은 전주교구 순교자이므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29일로 정한 것이다.(매일미사 2015년 5월29일 전문)

복음: 요한 12,24-26: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모든 씨앗은 땅에 뿌려져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잃어버려야, 즉 죽는 것과 같이 썩어야 새로운 생명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밀알도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땅속에서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예수께서도 그러셨다. 그분은
혼자이셨고 영광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사람들 가운 한 사람이셨다.
그러나 십자가의 수난을 겪으면서 영광을 받으셨고, 그 열매인 부활로
모든 이가 알게 되었다. 우리의 삶도 그리스도와 같이 십자가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이 말씀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 자신을 버리고, 자기를 버림으로써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을 수
있다. 이것은 올바른 사랑을 추구하고 옳지 못한 사랑은 피하여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기만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삶속에서 하느님을
거절하게 되면 자기 자신에게서도 떠나는 것이 된다. 그러기에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마태 16,26)고 하셨다.

우리 순교자들은 바로 이러한 삶을 살아갔다. 나 자신의 원의 보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려 했으며, 신앙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칠 수 있었다.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세상의 욕심을
모두 거부하고 하느님께 대한 신앙만을 고집하였던 분들이다. 박해의
시간을 살면서 한 순간도 자신의 욕망보다는 하느님의 자녀로,
신앙으로 순교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매 순간마다 자기 자신과의
싸움을 이겨낸 결과였다. 우리는 오늘을 살면서 나 자신과의 싸움을
어떻게 해 나가고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우리가 그리스도를
올바로 섬길 수 있으려면 ‘자기 뜻대로가 아니라 주님께서 사신 것처럼
살아야 한다.’(1요한 2,6 참조) 자선을 할 때에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사랑하기 위한 행동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것이다.(마태 6,3 참조) 이러한 섬김의
모습은 그리스도를 사람이며, 마땅히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마태 25,40)라는 말씀을 들을 것이다.

이러한 삶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 안에 사는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이 구원체험이며 구원받은 자의 삶을 사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26절) 순교자들의 삶은 바로 그리스도의 섬김을 실천하며 그분만을
올바로 섬겼던 분들이었다. 우리도 그분들과 같은 삶을 실천하며 그
영광에 참여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오늘 기념하는 순교자들의 영성을 우리도 가질 수 있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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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5월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순교자들을 통해 진정 살아있는 삶이 무엇인지를 묻게됩니다.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 순교의 사랑이 있습니다.
사랑의 소중한 열매들로 밀알의 죽음을 깨닫게 하시는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밀알의 죽음으로 사랑해야 할 우리 주님을 깨닫게됩니다.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을 알게됩니다.
밀알이 죽어야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듯 우리자신이 죽어야
하느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쓴 잔을 마셔야 사랑의 참맛에 진심으로 감사하게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죽음을 뛰어넘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 자유안에서 하느님을 사랑함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를
알게하여 주십니다.
이 땅에서 보여주신 선배님들의 순교는
어리석은 우리를 치유하여주십니다.
일상의 사랑이 쌓여 순교가 됨을 믿습니다.
살아있는 삶이란 죽음까지 뛰어넘는 하느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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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죽어야만 산다’는 역설(逆說)의 진리 앞에 오늘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2019년 다해 5월29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

‘죽어야만 산다’는 역설(逆說)의 진리 앞에 오늘 우리의 선택은
무엇입니까?

제자(弟子)란 말 마디 그대로 가르침을 주는 스승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스승께서 하시는 말씀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보여주신
구체적인 삶의 모범, 사상, 가치관, 일거수일투족을 따르고 실천하는
따르고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더불어 그분의 운명을 내 운명으로
여기는 사람입니다. 결국 그분처럼 살고 그분처럼 죽겠다고 따라나선
사람들이 제자들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스승님께서 제자들인 우리들에게 꽤나 부담스럽고
걱정되는 가르침을 내려주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복음 12장 24~26절)

진정으로 살고 싶다면, 죽으라고 하십니다. 영원히 살고 싶다면, 덧없이
짧은 이 세상은 포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정녕 중요하고 큰 것을
얻으려면, 스쳐지나가는 작은 것은 아쉽지만 떠나보내라고
당부하십니다.

‘죽어야만 산다’는 이 역설(逆說)의 진리 앞에 오늘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하지만, 구체적인 현실 앞에 서게 되면, 심한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게 됩니다.

스승님께서는 당신의 온 생애, 삶과 죽음을 통해서 그 역설의 진리를
명백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관건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이웃을 향한 적개심과 분노, 복수심과 미워하는
마음에서 죽어야겠습니다. 틈만 나면 얼굴을 내미는 교만함과
우월감으로부터 죽어야겠습니다. 주님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나를
돋보이게 하고 빛나게 하려는 교만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일 겪게 되는 우울감이나 무기력함, 게으름과 나태함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늘의 찬란한 별이 되신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합니다. 한분 한분 순교자들의 순교 과정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분들은 어느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채, 순식간에 순교의 영광을 얻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준비
과정이 철저했다는 것입니다.

그분들은 순교하기 오래 전부터 매일 순교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사셨습니다. 마음 속으로 언젠가 다가올 영광의 순간을 그리며, 그렇게
하루하루를 불꽃처럼 살아가셨으며, 마침내 영광의 순간이 다가오자,
추호의 미련도 없이 순교의 형장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신 것입니다.

영예로운 한국 순교자들의 후예인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어떻게
순교 영성을 살아갈 것인가? 하는 고민과 성찰은 바로 오늘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몫입니다.

여기저기 극심한 병고로, 노환으로 고생하고 계시는 형제자매들을
생각합니다. 그분들 매일 매 순간 겪고 계시는 깊은 슬픔과 고통은 손에
잡힐 듯 생생합니다.

‘과연 내 병이 나을 것인가? 이러다 영영 회복 못하고 세상 뜨는 것은
아닌가? 내가 떠나고 나면면 남겨진 저들이 겪을 고통은 또 어떡할
것인가? 또 다시 해가 뜨고, 세월이 흘러가는데, 세상 사람들은 다들
저리도 활기차게 걸어다니고, 깔깔대고 웃고 다니고, 마음껏 삶을
만끽하고 있는데, 나만 이 우울한 병실에서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가?

세상과 가족들에게 기여나 도움은 되지 못할망정, 여러측면의 부담만
주고 있는 이 죄책감은 또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병고가 지속되면서
가중되는 이 극심한 고통과 심연의 고독, 점점 증폭되는 두려움은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데, 언제까지 견뎌내야 할 것인가?’

이런 면에서 순교 영성은 우리 환우들에게 가장 필요한 영성인 듯
합니다. 고통과 외로움이 다가올 때 마다 순교자적인 마음으로
견뎌내는 것입니다. 순교하는 마음으로 병과 마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간다면, 환자로서 수행할 병실 사도직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투병생활로 힘겨우시겠지만, 기회 닿을 때 마다 병실에서 성경을
펼쳐드시는 것입니다. 좋은 양서들, 영성서적을 손에서 놓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변을 한번 둘러보시기 바랍니다. 나보다 더 아픈
환우, 거동이 불편한 환우가 있다면 작은 도움의 손길이라도 드리는
것입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매일 나를 위해 고생하는 의료진들과 간병인들,
가족들, 문병객들 환한 얼굴로 환영하고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힘들다, 죽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덕담을 건네고, 희망과 사랑의 메시지를 건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병실에서 환우들이 실천할 순교 영성입니다.

병고가 극심해서 기도 조차 힘겨울 때는, 묵주를 꼭 쥐고 있는 것만도
아주 좋은 기도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세 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훌륭한 기도가 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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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2019년 다해 5월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조앤 치티스터 수녀님의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라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수녀님은 실패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실패는 또 다른 길로
가는 입구라고 이야기합니다. 다만 실패를 통해서 경계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공에 대한 갈망을 버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실패가 곧 자존감의 상실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현대사회는 성공, 1등을 기억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2등은 기억하지
않습니다. 꽃밭의 꽃들은 서로 자기가 1등이라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이라는 꽃밭에서
성공한 사람도, 실패한 사람도, 건강한 사람도, 아픈 사람도, 장애인도
모두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부활 찬송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서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듯이 모든 인간은 흔들리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신앙은 1등만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실패와 허물을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고사성어는 실패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실패란 나의 자존감이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것입니다. 실패로 인해서 자존감이 무너지고 근심,
불안, 원망이 자라면 이는 실패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라, 실패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마음이 문제인 것입니다. 젊은 인도인 변호사였던
마하트마 간디가 유색 인종이라는 이유로 기차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면,
그의 비폭력 저항운동은 없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작가 엘리 위젤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죄의 용서가 아닌 것이 무엇이었나. 하느님이
아담에게 준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권리였다.” 유학자인 구양덕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마시는 물과 흐르는 물은 그 성질이 다르지
않다.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하고, 행하는 것은 모두 하늘에 기인한다.
다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간하는
것이다.” 

오늘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선교사가 없이 시작된 한국 천주교회는 100년 동안 50년은 사제 없이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신유, 기해, 병오, 병인박해가 있었습니다. 글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참혹한 박해와 시련이 있었습니다. 순교자도
있었지만, 배교자도 있었고, 밀고자도 있었습니다. 순교자들의 뜨거운
피와 숭고한 신앙이 열매 맺었고, 오늘 한국 천주교회가 있는 것입니다.

저의 삶에도 바람이 있었습니다. 서품을 받은 후 유행성 출혈열에
걸려서 20일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IMF의 거센 파도가 저에게도
밀려와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다리가 골절돼서 15일간 병원에
입원했습니다. 혈압도 높고, 치아도 좋지 않은 편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에 대해서 감사드립니다. 나중에 알찬 열매만 맺을 수 있다면 지금
당장 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이 세상 모든 꽃은 흔들리며, 비에
젖으며 피듯이 우리의 삶도 그렇게 흔들리며,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을
피우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시련을 견디어 내는 사람은
행복하다. 시험을 통과하면 생명의 화관을 받으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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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진리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5월29일 부활 제6주간 수요일(요한16,12-15) 

진리는 언제나 변함이 없다.

민주주의 원칙 중 하나가 다수결의 원칙입니다. 그러나 다수결의
원칙이 진리는 아닙니다. 따라서 진리가 다수에 의해서 바뀔 수는
없습니다. 다수에 의해서 이랬다저랬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닙니다. 진리는 누가 아무리 흔들어도 진리일 뿐입니다.
성 막시밀리안 콜베는 말합니다. “이 세상의 누구도 진리를 뜯어 고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진리를
추구하고 발견하며 진리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자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결국 진리의 길을
따르면서 우리의 마음이 하느님께 충실하게 고정되고, 우리가 그분께
기쁘고 은혜로운 일들을 찾으며 그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찾아
행한다면 그 안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될 것이요, 자유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굳건히 서서 진리로 허리를 동이고 정의로 가슴을 무장하고
발에는 평화의 복음을 갖추어 신고 손에는 언제나 믿음의 방패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 방패로 여러분은 악마가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
버릴 수 있을 것입니다”(에페6,14-16). 진리의 영을 받은 제자들은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안내하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진리의 성령을 보내주셨고 진리
안으로 부르신다는 것을 믿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안내하고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하겠습니다.

진리를 거짓과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섬기고 예배하도록
이끄는 세상의 많은 어두운 세력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진리 안에 더욱
굳건해야 합니다.“숨기려고 하면 왜곡할 수밖에 없고 모든 것을 자신의
논리로 합리화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을 무시하거나 없애려고까지 하게
됩니다.”그러나 진리의 영을 따라 살아가려는 이들은 이웃과 세상에
열려있습니다.

한 때‘다빈치 코드’소설이 영화 되어 상영되고, 많은 이야기 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입니다. 허구는 허구요, 픽션은
픽션일 뿐입니다. 근래에는‘신천지’라는 이단이 많은 이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진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고 꾸며낸
이야기와 굴곡 된 성경해석에 마음을 팔 것입니다.‘구해줘’라는
드라마가 개신교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아무리
흔들고 뜯어 고치려 해도 진리인 것입니다. 거짓논리를 통해 진실처럼
보이게 할지라도 진실처럼 보이는 것이지 거짓은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시간과 정성을 진리를 찾는 것에 두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라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구원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모든 영적인 지혜, 계시 및
지식입니다. 그리고 최고의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에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요한17,17).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진리다”(요한 14,6). 이제 진리의 영께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달을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마음을 열어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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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5월29일 은혜와 평강을 원하는 목사

고린도전서 1장 3절 말씀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인사를 하는 대목입니다.
여러분 중에서 혹시 목사님이 미워지고 관계가 불편한 적은 없었나요?

목사님에게 섭섭하여지고 목사님의 하는 일이 미워지게 되면 이거야
정말 난감한 환경이 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목사님의 진정한 뜻을 우리는 얼마나 알까요? 일부 자기만을
아는 목사님이 없지는 않으나 대다수 목사님은 성도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또 다른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일생의 직업이요.
사명이요. 생명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목사님에게 섭섭하여지고 미워진다면 이것은 정말
기도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가장 먼저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바로 목사님의 모든 것에 대하여 이해하고 그리고 순종하겠다는
자세가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목사님의 원래의 뜻은 성도들의 은혜와 평강이 가정에
건강에 소원하는 것! 이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너무나도 원하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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