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일 땅의 끝이 하늘의 시작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6-02 07:58:22    조회 : 245회    댓글: 0

▣ 2019년 다해 6월2일 [(백) 주님 승천 대축일 (홍보 주일)]

제1독서 사도행전 1,1-11
제2독서 에페소서 1,17-23
복음 루카복음의 끝 24,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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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주님 승천은 하느님 자비하심의 표징이다.

2019년 다해 6월2일 주님 승천 대축일
<주님 승천은 하느님 자비하심의 표징이다.>

복음: 루카 24,46-53
 
시장통을 거쳐 가는 8번 버스엔 늘 승객들이 만원입니다. 보따리 마다
주고받은 정을 받아 온다고들 입가에는 흐뭇한 미소를 매달고 있습니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 안에서 갑자기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잠시 후 그치겠지 했던 아이의 울음소리는 세 정거장을 거쳐 올 때
까지도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습니다. 

슬슬 화가 난 승객들은 여기저기서 “아줌마 애기 좀 잘 달래 봐요.”
“버스 전세 냈나.” “이봐요. 아줌마 내려서 택시 타고 가요! 여러 사람
힘들게 하지 말고.” “아~짜증 나, 정말.”

아기를 업은 아줌마에 대한 원성으로 화난 표정들이 버스 안을 가득
매우고 있을 그 때 차가 멈추어 섭니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버스기사만 바라보고 있는데, 기사는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가서는 무언가를 사들고 다시 버스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성큼성큼 아이 엄마에게로 다가간 버스기사는 긴 막대사탕의 비닐을
벗겨 애기 입에 물려주니 그제야 아이는 울음을 그칩니다.  

다시 버스는 출발을 했고 버스 안에 승객들은 그제야 웃음이
번졌나왔습니다. 다음 정거장에서 내려야 하는 아이 엄마는
버스기사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이며 “손등에 다른 한 손” 을 세워
보입니다. “고맙습니다.”라는 수화로 고마움을 표현한 아이 엄마는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청각 장애인이었습니다.

아이 엄마가 내린 뒤 버스기사는 아주머니와 아이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사랑의 불빛을 멀리 비추어 주고 있었어도 누구하나 “빨리
갑시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사람마다 사람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릅니다. 마치 각자의
액자대로 무언가를 담아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분명 버스에 탄
승객들과 버스기사는 사람을 바라보는 다른 모양의 액자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렇게 각자가 지닌 판단의 틀을 ‘프레임’이라 부르겠습니다.
프레임(frame)이란 ‘창틀’이란 의미지만 여기서는 관점이나 생각의 틀을
말합니다.  

어느 날 친구끼리 미사를 드리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한 친구가
물었습니다.
“자네는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된다고 생각하나?”

친구가 대답했습니다.
“글쎄 잘 모르겠는데. 신부님께 한 번 여쭤보는 게 어떻겠나?”

신부님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신부님, 기도 중에 담배를 피워도 되나요?”

신부는 정색을 하면서 대답했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나누는 대화인데, 절대 그럴 순 없지요.”

친구로부터 신부님의 답을 들은 다른 친구가 말했습니다.
“그건 자네가 질문을 잘못했기 때문이야. 내가 가서 다시 여쭤 보겠네.”

이번에는 다른 친구가 신부에게 물었습니다.
“신부님, 담배 피우는 중에는 기도를 하면 안 되나요?”

신부는 얼굴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습니다.
“기도는 때와 장소가 필요 없습니다. 담배를 피우는 중에도 기도는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프레임만 바꾸어도 모든 게 달라집니다. 좋은 프레임을 가진
사람은 같은 사건을 기분 좋게 바라보고 나쁜 프레임을 지닌 사람은
기분 좋은 일에도 기분 나빠합니다. 각자의 프레임에 따라 기분도
정해지는 것입니다. 

코넬 대학 심리학 교실에서 재미있는 연구 결과를 내 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1992년에 있었던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들의 표정을 분석한 것이었습니다. 기쁜 표정을 짓는 선수의
순서는 금, 은, 동이 아니라 금, 동, 은이었습니다. 분석 팀에서는 그
이유를 프레임 이론으로 풀이했습니다.

금메달을 딴 선수의 표정이 제일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은메달을 딴 선수는 이런 생각을 합니다.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는데.’

그러면서 금메달의 시각으로 자신의 은메달을 생각한 반면, 동메달을
딴 선수는 메달을 따지 못한 선수들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동메달을 딴 선수가 은메달을 딴 선수보다 더 환한 표정을 짓는
것입니다. 

은메달이 분명 동메달보다는 더 기쁠 일입니다. 그러나 금메달에 대한
욕구가 커져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늘에서 바라본다면 어떨까요? 그러면
1, 2, 3 등이 보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바라보면 두 번째로 기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각자의 프레임, 즉 각자가 지닌 액자의 크기는 얼마나 높이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장기나 바둑을 둘 때, 훈수를 두는
사람이 더 잘 보는 이유는 그만큼 멀리 떨어져서 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직접 경기에 들어가면 그 경기에 쏙 빠져들어 시야가
좁아집니다.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현상이나 사람을 한 발 뒤로
물러나서 바라봅니다. 한 발 뒤로 물러나 바라보면 화가 날 일도 별거
아님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나쁜 감정에 사로잡히는 것은 자신이 너무
낮은 곳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날입니다. 왜 하늘로 가셨을까요?
땅에서 멀어지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늘에서 오셔서 하늘로
가심을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죽음도 두렵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부활하여 아버지께로 가실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서 벌어지는 일이 전부인양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칠 때, 예수님은 죽어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도 자비로우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못 박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당신이
죽는 것이 죽는 것이 아님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늘로
오를수록 더 자비로운 프레임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눈만 오면 나무에 올라가 며칠 동안 내려오지 않는 팬더가 있었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그 팬더가 정상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여우만은 그의
편을 들었습니다. 여우는 그 팬더가 눈이 내릴 때 새끼들을 위해 먹이를
찾으러 나갔다가 그 발자국 때문에 사냥꾼들에게 새끼들이 잡혀간 일을
알고 있습니다. 어미 팬더에게 눈 위에 찍힌 자신의 발자국은 공포 그
자체인 것입니다. 

더 높이 오르면 더 많이 알게 되고 더 많이 아는 만큼 여유롭고
자비로워집니다. 하느님은 높은 곳에 계시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하십니다. 높이 오름은 지식을 확장시키고 이해를 확장시키며
그래서 자비도 커집니다. 이렇게 생기는 것이 ‘온유함’입니다. 따라서
온유한 마음 자체가 곧 하늘 높은 곳에서 세상을 바라본다는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은 오늘 승천하시며 제자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십니다.
승천의 진리 안에서 복음이 선포될 때 복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자비롭고 온화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기분 나쁘게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이 없기를 바라시며 승천 때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파견된 제자들이 가르치는 진리는 하느님은
자비하시다는 것입니다. 주님 승천만 제대로 묵상해도 누구나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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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주님 승천 대축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2일 주님 승천 대축일: 다해: 우리의 고양인 승천의
신비

주님의 승천은 예수님이 지상에서 하늘로 올라가시는 지정학적 이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하느님이시고 하늘이신 분이다. 그
하늘이신 분이 우리에게 내려오시고 사람이 되셨다가 세상에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모두 이루시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이제 하느님의
영광에 들어가심을 의미하며, 그분이 바로 하늘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하늘은 우리와 멀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가까워지게 되었다.
이 승천축일의 의미를 알아보자.

제1독서: 사도 1,1-11: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오르셨다.

주님의 승천은 새로운 시작이다. 승천의 의미는 사도들과 모든 시대의
믿는 이들이 복음의 증인이 되어 새 이스라엘 왕국인 교회를
세워주시는 성령의 때의 시작이다. 주님의 승천의 신비는 그러기에
주님과의 이별이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들의 삶속에 더 가까이 계시는
것이다.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의 만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가졌던 부활 이전의 체험과 계속되는 것이며, 이제 앞으로 성령체험과도
연결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도들에게 약속하심으로써 승천이 제자들과의 이별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더 가까이 현존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도들은 이것을 어느 정도 깨닫지 않았을까? 그래서 예수님께
묻는다. “주님, 지금이 주님께서 이스라엘에 다시 나라를 일으키실
때입니까?”(6절) 이 질문은 현세적인 왕국이 아니라, 성령의 선물과
더불어 마지막 때가 올 것이며 그리하여 참으로 하느님의 나라가
건설되겠느냐는 물음이다. 주님께서는 그 물음에 부인도 하지 않으신다.
주님께서는 “그 때와 그 시기는 아버지께서 당신 권한으로 정하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다.”(7절)라고 하신다. 다만 성령을 받으면
“땅 끝에 이르기까지”(8절)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하신다. 여기서
“땅 끝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은 역사를 통해서 계속 이어져 아버지
앞에서 충만하게 될 때까지를 의미한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마치 이별을 하듯이 서서히 공중으로 사라져 가심을
느낀다. 그래서 그들은 슬픔과 아쉬움에 주님의 모습을 쫓아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빈 무덤에서 그랬던 것처럼 “흰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타나”(10절) 현실을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그 현실은
무엇이냐? 바로 그리스도께서 역사의 마지막 날 심판자로 영광 중에
다시 오시리라는 것이다.
(마태 24,30; 1테살 4,16; 묵시 1,7; 14,14-16)
바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까지 세상에 그분을 증거해야 할 것이다.
주님의 천사들은 우리에게 역사 내에서 우리를 일깨워주고 있으며,
하느님의 나라가 매일의 삶속에서 건설되어 가고 우리의 삶의 모든
순간이 하느님 나라에로 열려진 역사의 장(場)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들은 이 땅을 더 사랑하며 우리 모두가 기다리는
새로운 세상의 징표가 될 수 있도록 변화시켜 나가야 한다. 그러기에
주님의 승천은 이 땅을 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세상을
부분적이라도 ‘정의가 깃들일’ ‘새 하늘 새 땅’(2베드 3,13)의 빛이 이미
비치고 있는 구원의 장소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말같이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변화를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

복음: 루카 24,46-53: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강복하시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

오늘 복음도 제1독서와 그 관심사는 일치하고 있다. 즉 사도들이
주님의 명령에 따라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47절)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48절) 그러기 때문에 사도들은 주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신비를 모든 사람을 위해 베풀어진 ‘죄의 용서’에 대한 선포와
더불어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곳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49절)

이제 사도들은 복음을 전하면서 죽음으로써까지 그것을 증거할 힘을
성령강림절에 ‘높은 데에서’(49절) 그들에게 내리실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다. 이 성령의 선물 역시 주님의 영광과 권세를
취하시게 되는 승천의 결실이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고 나서 그게 기뻐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줄곧 성전에서 하느님을 찬미하며 지냈다.”(50-53절) 

이제 사도들은 초기 교회의 사람들과 함께 성전에서 경배하며 계속해서
주님께 찬미를 드린다. 즉 제자들은 성체성사를 거행하며 주님을
찬미한 것이다. 성체성사는 주님과 제자들 사이의 간격을 없애 준다.
이 성체 성사를 통해 하늘과 땅이 서로 만나게 된다. 주님의 강복은
바로 그 일치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제는 우리와 더욱 가까이
계시는 주님이 되신 것이다.

제2독서: 에페 1,17-23: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당신 오른쪽에
앉히셨다.

이 모든 것은 이제 우리 신앙의 통찰력으로 알아들어야 한다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이 통찰력으로 하느님을 참으로 알게 되기를
바라고 있다.(17절) 이 깊이 하느님께 대한 앎이라는 것은 우리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하늘에 올리시어 당신 오른쪽에
앉으신’ 그분의 영광에 참여함으로써만이 구원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주님의 승천은 바로 주님께서 우주의 주인으로서 하늘이
되신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는”(23절) 교회의 주님이
되시게 한다.

이제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구원의 은총과 축복으로 끊임없이
채워주시는 신자들의 공동체를 의미한다. 이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모든 신비는 교회 안에서 계속되고 새로워진다. 이러한 바오로 사상을
배경으로 성 레오 대교황은 이렇게 신자들을 권고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의 고양이기도 합니다. 머리의 영광이 앞서
이루어진 곳에 우리의 희망도 있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는
기뻐합시다.”(S. Leone Magno, Sermoin Ascensionem)
이제 우리는 주님의 길을 따라 그분의 영광에 들어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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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주님 승천 대축일

2019년 다해 6월2일 주님 승천 대축일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대표작 ‘어린 왕자’는 삶에 대한 많은 조언을
해 주고 있습니다. 여우와 어린 왕자의 대화를 통해서 관계 맺는 의미를
이야기합니다. 함께 놀고 싶어 하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함께 놀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여우는 어린 왕자와 관계를 맺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관계가 무엇인지 묻는 어린 왕자에게 여우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함께 놀기 위해서는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관계란 인내심을 가지고 상대방을 기다리는 것이고, 관계란 끝까지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합니다. 관계란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그런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회개할
때까지 기다려 주십니다. 양심을 주셨고, 예언자를 보내 주셨고,
아들까지 보내 주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위해서 배려하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러십니다. 배반한 제자들을 찾아가서 평화를
빌어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성령, 협조자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하느님과 우리와 관계를 맺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과 그런 관계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신앙이며,
사랑입니다.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사물은 사용하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을 사용하려 하고, 사용해야 하는
사물을 사랑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가난, 질병, 굶주림, 고독이 사람
곁에 있습니다. 사용되면 그만인 물건들이 귀한 대접을 받고 있습니다.
금은보화는 사용되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양심을
팔고, 이웃을 배반하고, 사랑받아야 하는 사람을 이용합니다. 관계를
제대로 맺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주님 승천 대축일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부활 그리고 승천은
제자들에게는 추억 만들기입니다. 때로 험난하고 두렵고 떨리기도
하지만 희망과 신념으로 질곡의 역사를 관통하며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수많은 시련에도 정체성을 잃지 않고 고유한
문화, 언어,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다른 민족을 짓밟지 않으면서도
생존해 왔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추억을 만들어야 하는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저 하늘만 바라보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문하는 추억은 3가지입니다.

첫째는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입니다. 분열과 갈등을 넘어, 시기와
질투를 넘어서, 두려움과 걱정을 넘어서 참된 기쁨을 선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이 참된 기쁨과 평화를 주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새로운 시대에 기쁨을 추억으로 만들어 가라고 하십니다.

둘째는 마귀를 쫓아내라고 하십니다. 마귀는 집요하게 우리들의 영혼을
찾아옵니다. 때로는 달콤한 유혹으로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은 마귀가 자주 사용하는 미끼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게으름으로 유혹하기도 하며, 탐욕과 욕정으로 이끌기도 합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부족하므로 우리는 주님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셋째는 병자들을 고쳐주라고 합니다. 육신의 병은 고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에는 교만의 병에 걸린 사람, 분노의 병에 걸린 사람,
시기의 병에 걸린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용서하지 못하고, 영혼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영혼이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는 것이
육신의 병을 고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의 승천이란 우주선을 타고 가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를
옹골차게 딛고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승천은 좌절과
두려움에서 희망과 신념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나의 삶의 자리에서
변화된 삶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승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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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
(루카 24, 51)|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2일. 주님 승천 대축일(홍보 주일)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 51)

머물러야 할 때가 있다면 떠날 때가 있습니다.
하늘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하늘을 가르쳐주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하늘로 되돌아 가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법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땅에서의 삶은 죄의 용서와 회개의 삶이었다면

하늘에서의 삶은 찬미와 영광의 삶입니다.
내려놓는 법을 떠나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땅도 하늘도 하느님 안에 있음을 비로소 깨닫습니다.
땅의 끝이 하늘의 시작입니다.
주님 승천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성취이며 말씀의 완성입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신 주님께서 말씀으로 오르십니다.
말씀의 삶으로 우리의 삶을 들어높이십니다.
머물러야 할 삶이 실은 떠나서 올라가는 삶이 됩니다.
서로를 들어높이는 승천대축일 되십시오.
끝내 우리에게는 돌아갈 하늘 넉넉한 하느님의 품이 있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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