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6-05 07:28:20    조회 : 217회    댓글: 0

▣ 2019년 다해 6월5일 [(홍)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제1독서 사도행전 20,28-38
복음 요한복음 17,11ㄷ-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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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2019년 다해 6월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헝가리의 다뉴브강에서 유람선이 전복되었습니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사망하고, 실종된 가슴 아픈 사고입니다. 사고의 원인을 파악하고
책임을 묻는 것도 중요합니다. 실종자를 찾아내고, 사고를 수습하는
일도 중요한 일입니다. 슬픔에 빠진 유족들과 생존자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전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정부에서도 사고수습을 위해서 해난
구조대를 파견하였습니다. 현지인들도 애도의 뜻을 표했습니다.
헝가리 한국 대사관 앞에 추모의 뜻으로 꽃과 초를 가져다 놓았습니다.
한 번도 만난 적도 본적도 없는 희생자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안타까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상대방의 슬픔과 아픔을 나의
슬픔과 아픔으로 받아들이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동양, 서양의 문명은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하였지만 닮은 점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공동체에 갈등과 분열이 있을 때,
사회가 폭력과 전쟁으로 혼란에 빠질 때, 재물과 물질에 빠져서 양심을
속이고, 친구를 배반할 때 동양과 서양은 같은 것을 찾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진, 선, 미’를 추구하라고 하였습니다. 노자는 무위의
삶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욕심, 이기심, 욕망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따라가는 것을 무위의 삶이라고 하였습니다. 공자는
용서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용서의 핵심은 내가 원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해 주는 것입니다. 용서의 핵심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을 상대방에게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환웅은 ‘홍익인간’을
이야기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종교는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습니다. 모든 종교는 다른 이름의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 나라, 무념무상의 공, 깨달음,
우주와 하나 됨일 수도 있습니다. 종교는 종교와 분쟁하고, 다투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종교는 악의 세력과 다투어야 합니다. 지친 영혼에
위로와 희망을 주어야 합니다. 우리 앞에 놓인 악이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를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자살, 낙태, 환경파괴, 종교분쟁, 전쟁,
폭력, 인권유린, 가난, 질병, 굶주림’은 21세기에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과학과 기술로 무장한 우리에게 악은 더욱 강하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유전공학, 나노 기술, 우주 탐사선, 생명공학으로는 악의 세력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그 안에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나눔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안에 배려와 양보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래 사는
것보다는 가치 있는 삶이 우선입니다. 발전보다는 보존이 우선입니다.
미지의 세계를 탐사하는 것보다는 더불어 사는 이웃들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생명은 조작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요즘 우리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고별사’를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제 곧 제자들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당부하십니다. 가톨릭교회의 가장 큰 장점은 하나 되는 모습입니다.
전 세계 모든 가톨릭교회는 같은 복음과 같은 독서를 읽습니다. 모든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알아듣지 못해도
미사에 참례할 수 있고 의미도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기도하기를 당부합니다. 기도는 우리를 악의 세력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모범을
보였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합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도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표징을 보여주셨습니다. 세상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셨습니다. 말씀에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바오로
사도처럼 모범을 보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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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5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삶

복음: 요한 17,11-19: 아버지의 말씀이 곧 진리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이름으로 이들을 지키시어,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11절)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지켜주셨던
이들을 이제 아버지께서 당신의 이름으로 지켜주시기를 기도하신다.
그리고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보호를 받았다. 베드로의 믿음도
지켜졌다. 움츠러들었었지만 곧바로 회개가 뒤따랐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청하신다. 하나라는 말은 ‘어떤 조화를
이룬 상태’를 말한다. 서로 다른 것들이 모여 조화로운 상태, 일치된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제자들이 주님의 사랑 안에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지켜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당신께서 주신 것을
하나도 잃지 않을 것(요한 6,39 참조)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7)라고 하셨다. 그들이 잃는 자가 되는 것은 그분이 버리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떠나가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들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선택의 결과이다.
그래서 “멸망하도록 정해진 자 말고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12절) 하신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이들이 속으로 저의 기쁨을 충만히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13절) 이 기쁨은 바로 일치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다.
주님께서는 “이들도 우리처럼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셨다. 그들이 참으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기쁨은
충만해지고 이것이 장차 올 세상의 평화와 복됨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차지하려면 이 현세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충실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을 전해 주셨는데, 세상은 제자들을 미워했다.
그것은 “제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이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14절) 세상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 때문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2코린 4,18)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부터 우리를 미워했다. 우리가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세상이 우리를 미워하는 것이다. 우리는 새로이 태어났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게 산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태어난 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을 악에서 지켜 주십사고 빕니다.”(15절) 하고 기도하신다.
아직은 세상에 있어야 하는 그들을 악에서 지켜달라고 하신다. 그들이
세상에 속하지 않지만 세상을 살아야 하기 때문에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17절)라고
기도하신다. 세상에 속하지 않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시는 것은 그들이
더욱 성덕 안에서 자라게 하시려는 것이다. 더욱 거룩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진리를 본받음으로써 덕을 갖추고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 진리는 아버지의 말씀이며 그 말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아버지께서 저를 세상에 보내신 것처럼 저도 이들을 세상에
보냈습니다.”(18절) 예수께서 파견하신 이들은 사도들이다. 사도라는
말은 ‘파견된 이’를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과 비슷한 모습으로 보내시고, 그분의 아들은 당신께서 죄의
더러움으로부터 거룩하게 해 주신 이들을 파견하셨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것은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이며 아버지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이다. 그 아버지의 말씀은 바로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저는 이들을 위하여 저 자신을 거룩하게 합니다. 이들도 진리로
거룩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19절) 제자들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거룩하게 한다는 말씀은 아버지께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친다는
말씀이다. 모든 제물은 거룩하다고 한다. 특별히 거룩한 이들은
하느님을 위해 따로 떼어진 이들이다. 그러기에 “이들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라는 의미도 그들도 제물로 바친다는 의미이다.
제자들의 머리가 그렇게 된다면 지체들도 그렇게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로마 12,1)라고 하였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되도록 언제나 깨어있어야
한다. 우리는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질 것이다. 진리는 한
처음부터 계시던 하느님의 말씀이시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육 안에서 하느님에 의해 거룩해지는 동시에 당신의 신성으로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도 하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더욱
거룩해지도록 주님의 도우심을 청하도록 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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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깨우친 바를 가르쳤고, 그 가르친 바를 철두철미하게
실천했던 바오로 사도!

2019년 다해 6월5일 수요일 성 보니파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깨우친 바를 가르쳤고, 그 가르친 바를 철두철미하게 실천했던
바오로 사도!

어제에 이어 계속되는 바오로 사도의 에페소 교회 원로들을 위한
연설은 참으로 애틋하고 눈물겹습니다. 동시에 더없이 비장하고
감동적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설교가 이토록 큰 감동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는 온 몸으로 깨우친 바를 가르쳤고, 그 가르친 바를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 안에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경우 우리 사목자들의 강론과 말씀 선포가 빛을 바래고, 엄청
웃기는 개그 소재로 전락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 때는 바로 우리
사목자들이 살지도 실천하지도 못한 바를, 강론대에서 그럴듯 하게
외칠 때입니다.

저만 돌아봐도 기도에 충실하거나 전념하지도 못하면서, 강론대에서는
기도만이 살길이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기도 빼먹지 말자, 성공적인
기도의 관건은 충실성, 일상성, 지속성이라고 침이 마르게 선포하지만,
정작 제 기도는 너무나 초라하고 부끄럽기만 합니다. 더구나 기도를
주제로 한 책까지 써놓은 사람이 이러고 있으니, 이런 저를 보시고
주님께서 얼마나 웃고 계실까 걱정됩니다.

언젠가 청빈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아가는 한 수도자가
청빈생활에 대해서 공동체 앞에서 강의를 하니, 듣고 있던 형제들
모두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웃고 수근거린 적이 있습니다.

이런 우리와는 너무나 비교 대조되는 삶을 사셨던 분이 바오로
사도이십니다. 그런 연유로 초세기 그리스도 신자들은 바오로 사도의
설교 말씀을 존중했고, 귀를 기울였으며,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각고의 노력을 다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가 에페소 교회 원로들에게 건넨 몇 말씀이 제 가슴에
크게 와닿았습니다.

“내가 삼 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이른 것을 명심하며 늘 깨어 있으십시오.”(사도행전 20장 31절)

이제 막 걸음마 걸음을 뗀 아기처럼 부족했던 초대 교회 공동체
신자들과 지도자들을 위해 바오로 사도가 얼마나 인내했고, 기다렸고,
그들로 인해 속을 썩혔는지를 잘 알수 있는 대목입니다.

하루 이틀, 두서너 번 권고하고, 시정을 요구하다가, 언성을 높이고,
포기하고, 건널수 없는 강을 건너 버리고 마는 오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참으로 큽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 부족하고 나약한 어린 신자들을 위해 장장 3년을
인내하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셨습니다. 그 결과가 진정성 있는
회개요, 새생활, 새출발이요, 거듭남이었습니다.

또 다른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한번 들어보십시오. “나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을 탐낸 일이 없습니다. 나와 내 일행에게 필요한 것을 이 두
손으로 장만하였다는 사실을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사도행전 20장 33~35절)

틈만 나면 이런저런 이유로 신자들에게 물질적으로 의존하는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크게 부끄러워집니다. 바오로 사도의 모범을 본받아,
우리 사목자들도 우리 힘으로 할수 있는 바는 우리가 직접 해결할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그것이 여의치 않다면 프란치스코
교황님처럼 미니멀너즘의 삶을 살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연설을 마친 바오로 사도와 에페소 교회 원로들의 작별 장면이
정말이지 눈물겹습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였다.
그들은 모두 흐느껴 울면서 바오로의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었다.
다시는 자기 얼굴을 볼 수 없으리라고 한 바오로의 말에 마음이 매우
아팠던 것이다. 그들은 바오로를 배 안까지 배웅하였다.”
(사도행전 20장 36~38절)

오늘 우리 교회 공동체에도 꼭 필요한 아름답고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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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6월5일 부활 제7주간 수요일(요한17,11-19)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세상에 발을 붙이고 있는데 천국을 살라고 하시면 어떻게 하십니까?
그게 말하는 것같이 쉬운지 아십니까? 정말 어렵습니다. 신부님은 자꾸
하늘을 보라고 하시는데 하늘을 보니 제가 땅에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땅에 있으니 땅의 처지대로 살아야겠습니다. 저도 먹고 살아야지
어찌합니까! 그래도 하느님은 이해하실 것입니다. 저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실 테니까요!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진리 안에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진리는
곧 “아버지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사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곧
진리이십니다. 길이신 예수님을 따라 걸으면 진리인 말씀을 발견하고
깨닫게 되며 결국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삶을 살면 세상이 그를 미워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이 어둠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둠은 빛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빛으로 나아가는 길을 방해합니다. 그러나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요한1,5). 그러므로 두려워 마십시오. 지금 당장 힘에
겹더라도 반드시 빛의 진가는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갑니다. 자기가 한 일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요한3,21).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를 깨닫게 되기를
원하십니다”(1티모2,4). 그리고 육화를 통하여 인간이 되신 진리인
(요한14,6)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이들을 거룩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인정받는 사람으로, 부끄러울 것 없이 진리의 말씀을
올바르게 전하는 일꾼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있도록 애쓰십시오”
(2티모2,15). 사실 “우리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을 알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분을 안다.”하면서 그분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고, 그에게는 진리가 없습니다”
(1요한2,3-4).

우리가 비록 땅에 발을 붙이고 있지만 진리를 거슬러 살 수는 없습니다.
세상이 험해지면 험해질수록, 어두워지면 어두워질수록 믿는 이들이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세상이 어두워지는 것은 남의 탓이 아니라
내가 빛나는 삶을 살지 못한 까닭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세상에
속하지 않으신 주님의 뒤를 이어 세상에 있으면서도 이미 천상을
사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어둠을 탓합니다. 믿는 이들이
제대로 살지 못한다고 불평불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기모순에 빠져있는 것입니다. 나만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못 마땅한 것이 보이면 보일수록 더 많이 사랑하고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마음을 키워야 하겠습니다. 사실 “하느님께서
어디계시냐는 물음에 확실한 답을 줄 수 있는 건 바로 믿는 이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며 다독이며 살아가느냐에
달려있습니다”(박병규).

예수님께서는 시련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와 깊은 일치를 이루면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온전히 순명하셨습니다. 그 그리스도의 거룩함으로
인해 제자들이 거룩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주님과의 일치 안에서
거룩함을 잃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혹 죄에 떨어졌다면 주님의 거룩함에
온전히 맡겨드려 다시 거룩함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복음의
기도는 ‘하나가 되게 하소서.’ ‘악에서 지켜 주소서.’ ‘진리로 거룩하게
하소서’로 요약 됩니다. 그 기도가 풍성하게 열매 맺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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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6월 5일(수) - 약함을 쓰시기 위하여

오늘은 ‘약함을 쓰시기 위하여’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 -29절 말씀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서 약한 부분이 있지요. 어떤 이는 그 약함이 지식적으로
약한 성도가 있고 어떤 사람은 체력적으로 약한 성도가 있고 어떤
사람은 나서는데 약한 성도가 있지요.

누구나 이 약함이 있습니다. 그 약함을 주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쓰시려고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천한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하시고 어떤
육체의 자신감을 가진 자도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약한 이유 하나님이 쓰시기 위해서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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