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9일 오소서 성령님!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소서.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6-09 06:51:17    조회 : 195회    댓글: 0

▣ 2019년 다해 6월9일 [(홍) 성령 강림 대축일]

제1독서 사도행전 2,1-11
제2독서 코린토 1서 12,3ㄷ-7.12-13
복음 요한복음 20,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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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령 강림 대축일

2019년 다해 6월9일 성령 강림 대축일

1982년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기숙사는 ‘대건관’ 하나였습니다. 지금은
양업관, 사목관, 강학관, 수덕관을 포함해서 5개의 기숙사가 있습니다.
도서관이 신축되었고, 학교의 운동장에는 파란 잔디가 깔려있습니다.
서울 관구 신학교에는 서울 교구, 수원 교구, 대전 교구, 인천 교구,
춘천 교구를 포함한 5개 교구의 신학생이 함께 공부했습니다. 교구는
달랐지만 우리는 함께 공부했고, 함께 기도했고, 함께 시대의 아픔을
나누었습니다. 못자리에 있던 벼가 논에 심어지듯이, 못자리인
신학교에서 공부했던 친구들은 각자의 교구에서 사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1991년 사제서품을 받고 중곡동, 용산, 세검정, 제기동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지냈습니다. 성당 앞의 큰길에는 어김없이 지하철 공사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깔끔한 길이 되었고, 완공된 지하철이
거미줄처럼 서울 시내를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길이 막히고,
소음이 있었지만 그런 시간이 지나면서 서울은 세계 어디에 견주어도
부족함이 없는 빠르고, 깨끗하고, 환승이 쉽게 되는 지하철 노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노선은 다르지만, 사람들은 하나의 지하철처럼
이용하고 있습니다. 갈아탈 수 있는 역이 있기 때문입니다. 

2019년 우리는 빛의 속도로 연결해주는 인터넷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손에는 스마트 폰, 책상에는 노트북 컴퓨터가 궁금한 것을 알려주고,
이웃과 세상을 연결해주고 있습니다. 은행 업무, 예약, 민원 업무는
손가락 몇 번의 클릭으로 해결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70억 명의
인류는 언어가 달라도, 문화가 달라도, 사는 장소가 달라도 페이스북,
유튜브, 카카오톡, 애플, 구글, 삼성이라는 공간에서 쉽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2000년 전 사도들은 새로운 체험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로
지내는 ‘성령 강림’ 체험입니다. 좌절, 근심, 두려움, 절망, 열등감,
죄책감에 빠져있던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약속하셨던 성령을
체험했습니다. 좌절은 일어섬으로, 근심은 담대함으로, 절망은
희망으로, 열등감은 자신감으로, 죄책감은 자비의 체험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은 함께 한 사람들과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언어가 다른 것도, 문화가 다른 것도, 생각이 다른 것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구가 태양을 향해서 돌 듯이,
사도들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될 수
있었습니다. 

최초의 우주인은 어두운 우주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하늘에는
하느님이 없다.’ 그런데 그다음 우주에 올라간 우주인은 다르게 말을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놀라우신 섭리에 감사를 드린다.’ 같은 우주를
보지만 두 사람은 다른 생각을 하였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삼라만상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신의
눈으로 보면 우주의 끝에서도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사랑하면
사랑스러운 것들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들이 너무도
많은 세상입니다.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 옆에 있는 이웃이 바로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손님입니다. 미워하면 미움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불평하면 짜증과 원망이 가득한 세상입니다. 풀 한 포기, 바람 한 점,
옆에 있는 이웃도 모두 내 삶의 걸림돌이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 양보하는 마음, 이해하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이루어지는 모든
것들에서 하느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커다란
축복을 받았습니다. 매 미사 때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주의 끝에서도 만날 수 없는 분을 우리는 아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우리의 몸과
마음에 모실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지갑이
두둑하면 기분이 좋아진다고 합니다. 하물며 온 세상의 주인을
모셨으니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정신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정신은 사진을 찍을 수도 없고, 무게를
잴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신이 있음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정신이 우리의 몸을 이끌고 있음을 압니다. 아무리 건강한 몸도
정신이 없으면 그냥 몸뚱이입니다. 아무리 나약한 몸도 정신이
올바르면 하느님과 접속이 됩니다.  

오늘은 성령 강림 대축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시면서 그 평화를 지켜 줄 성령을 함께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이
정신에 의해서 이끌어지듯이 교회는 성령의 이끄심으로 살아갑니다.
수많은 성인·성녀들은 성령의 이끄심으로 박해를 견디어냈고 순교의
영광을 차지하였습니다. 성령은 은사입니다. 교회는 성령의 은사를
구체적으로 7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은사는 ‘슬기, 통달,
의견, 지식, 굳셈, 효경, 두려움’입니다. 그리고 이 은사는 우리가
받아들일 때, 열매를 맺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성령이
주시는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따뜻함을 주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줍니다. 성령의 열매는 우리가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
풍성하게 열립니다.  

오늘 성령 강림 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 모두 성령의 은사를 받아, 삶을
통해서 성령께서 주시는 열매를 풍성하게 맺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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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성령 강림 대축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9일 성령 강림 대축일: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는
은총의 선물: 성령

오늘은 성령강림대축일이다. 이 시간에는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다양한 지체가 되게 하는 은총의 선물로서의 성령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복음: 요한 20,19-23: 성령을 받아라.

요한복음에서는 성령의 선물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사도들에게 주어지고 있다. 이것은 성령의 선물이 부활의 신비와
연결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성령의 선물은 부활의 결실이다. 그러므로
성령강림은 부활에서 비롯되고 있으며, 또한 부활이 활짝 피어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이 성령은 부활의 선물일 뿐 아니라,
교회에 주어진 선물이다. 이 선물은 개별적으로나 소집단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공동체를 위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21-23절)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파견하심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제자들을 통하여 대립과
분열의 근원인 죄악이 소멸된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하도록 하기 위해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것이다.

성령이 공동체를 위한 것임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첫째로,
성령이 사도들에게 부여되는 것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주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선물’이다. 둘째로,
죄를 용서해줌으로써 이기주의와 폐쇄적 태도를 버리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며 다른 사람들을 형제로 받아들이게 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서
죄를 이기고 우리를 ‘교회 지향적’이 되도록 이끄신다.

우리 교회는 이 같은 자세로써만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는
형제적 공동체가 될 수 있다. 복음에 나오는 ‘화해의 성사’는 바로
이러한 교회적 차원의 중요성을 띠게 된다. 그러므로 성령께서는
교회를 비록 그 구성원 각자가 개별적이지만 다른 사람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거룩한 이들의 모임’으로 만들어 가기를 원하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성령은 관계라고 했다. 사랑의 관계이다. 항상 이 사랑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화해의 성사’, 그러므로 성령의 첫 선물은
용서라고 할 수 있다. 나와 하느님과의 관계,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시켜주는 분이기 때문이다.

제2독서: 1코린 12,3-7.12-13: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회적 차원이 2독서에서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다. 은총의
선물의 ‘다양성’이 ‘단일성’ 안에 모아지지 않는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은사는 여러 가지지만 성령은
같은 성령이십니다. 직분은 여러 가지지만 주님은 같은 주님이십니다.
활동은 여러 가지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모든 활동을 일으키시는 분은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각 사람에게 공동선을 위하여 성령을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4-7절)

우리는 우리가 받은 성령의 선물들이 있다. 이제는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은총의 선물이 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그 가치를 드러나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성령의 도우심으로 자신의 완성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더욱 풍요해질 것이다. 공동의 이익을
위한 선물이기 때문이다. 바오로 사도는 이를 또한 몸과 지체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몸은 하나이지만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고 몸의 지체는
많지만 모두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십니다.”(12절)

몸의 각 지체는 자신을 내어줌으로써 자기 자신을 실현시켜 나아간다.
또한 다른 지체들의 협력을 통해 부요해지기 때문에 받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이와 같이 주고받는 성향을 통해, 구성원 각자가 자신의 역할을
다함으로써 다른 지체들에 의해 나오는 풍요도 입게 되는 그러한
특성을 최대한 실현시켜 나가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다른 사람들을 도구화 한다든지,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봉사와 희생과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맞이하는 태도만을
생각하는 우리의 사고방식의 전환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을 이루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우리를 쇄신시키고, 회개시키고, 결합시켜 하나로
일치시켜 나갈 수 있는 성령의 힘뿐이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3절)

한 성령을 나누어 마신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서로 간에 친교를 나누고
맡은 바 직무에 대한 은총의 선물을 주고받지 못한다면 성령을
받았지만, 성령을 전혀 모르는 이방인들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거기에는 성령께서 설 자리가 없어지게 될 것이다. 성령은 관계이다.
사랑의 관계라고 강조하였다. 이 관계를 우리 안에 갖지 못한다면
우리는 교회를 올바로 이루지 못하고 만다.

우리가 비록 모두가 다르더라도,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고, 다른 세계를
살고 있고, 또한 다른 생활체험을 하지만, 사도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들려주신(사도 2,1-11) 성령의 메시지를 알아들을 수 있도록
오늘도 기도해야 한다. “오소서 성령님, 믿는 이들의 마음을 충만케
하시며 그들 안에 사랑의 불을 놓으소서. 알렐루야!” 성령 안에
살아가는 우리 되게 기도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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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주님의 성령께서는 분명 우리 각자 안에 충만히
존재하십니다!

2019년 다해 6월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주님의 성령께서는 분명 우리 각자 안에 충만히 존재하십니다!

많은 교우들로부터 자주 듣게되는 하소연입니다. “하느님이 정말
계시긴 한건가요? 제 신앙이 너무 약해요! 신앙 생활이 너무 밋밋하고,
활기없고, 재미도 없어요!”

이런 하소연은 저희 같은 사제나 수도자 역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제들이 열정도 기쁨도 없이, 힘겹게 사목활동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수도자들이 목표나 방향성을 상실한
채, 그저 다람쥐 챗바퀴도는 듯이 하루 하루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정말이지 잊지 말야할 진리가 한 가지 있습니다.
열정과 활기, 기쁨으로 충만한 신앙 생활을 추구한다면, 선택과 집중,
그리고 무한 반복의 훈련과 연습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영성 생활,
기도 생활에도 훈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느님 말씀을 보다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
말씀을 집중해서 읽고, 말씀에 몰두하고, 깊이 파고들어, 말씀의
진의(眞意)를 파악하려는 열정이 꼭 필요합니다.

매일의 말씀 가운데, 심금을 울리는 화두 하나 붙들고, 부단히 내 삶에
적용하고 실천하려는 구체적인 노력도 중요합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시고 말씀을 건네시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
고요한 침묵과 묵상도 요구됩니다.

기도에 좀 더 집중하기 위해, 우리의 내면을 정화(淨化)하는 차원에서
따로 시간을 좀 내서 호흡을 살피며, 우리 내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사사로운 마음, 죄로 기우는 경향,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비워내려는
의식적 노력이 또한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른 무엇에 앞서 중요한 것 한 가지, 그런 노력들은 한 달에
한 번 ,혹은 일 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모두의 기쁨이며 자랑인 손흥민 선수의 일상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잠시 봤습니다. 그의 일상은 선택과 집중, 무한 반복되는
훈련에 있어서, 가장 탁월하고 모범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 놀랍게도 전 세계 축구선수들의 로망인 프리미어 리그,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 무대에서도 거의 탑 레벨에 자신의 이름을
내걸며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 배경에 어떤 노력이 있었는지
즉시 알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아버지와 함께 정확한 목표 한 가지를 선택했고,
무한 반복의 연습을 거듭하며, 모든 에너지를 한 방향으로 정열시켰고
집중시켰더군요.

빅 매치에서 패배한 날, 새벽까지 밤잠을 못이루며 아쉬워하고, 다음
경기에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지난 시합을 복기하고
돌아보면서 개선점을 찾는 모습, 스스로를 ‘집돌이’라고 칭하며, 시합이
없는 날이면 엉뚱한데 에너지 쏟지 않고, 다음 시합을 위해 무한 반복
연습을 거듭하고, 휴식하는 그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정말 대단해
보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활기없고 밋밋하고 재미가 없다면, 여기저기
하소연하고 하느님 앞에 투정 부리기 전에, 우리가 각자의 신앙의
성장을 위해 얼마나 시간을 투자하고 있으며, 얼마나 선택과 집중을
하고 있는지 먼저 성찰해봐야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활기찬 신앙 생활을 위해 가장 필요한 노력, 우리
일상 안에 역동적으로 활동하시는 성령의 현존에 대해 우리가 얼마나
믿고, 의식하고 자각하는지 돌아봐야겠습니다.

주님의 성령께서는 분명 우리 각자 안에 충만히 존재하시며, 우리의
발걸음을 하느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합니다.

관건은 우리 인간 측의 나태함이나 게으름, 불신이나 냉소주의로 인해
우리 내면의 중심에 굳건히 자리하셔야 할 성령께서 외곽으로 밀려나고
밀려나서, 그 존재감이 아주 미미해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현존과 동반에 대해 확고한 신앙으로 믿으며, 그분께서 내
인생길에 항상 지근거리에서 함께 걸어가심을 인식해야겠습니다.
우리가 보다 자주 그분을 느낄 수 있도록 우리 내면의 복잡함을
정리해야겠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보다 자주 그분과 대화하고
소통하며, 교감하고 감사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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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9일 성령 강림 대축일.
성령을 받아라.(요한 20, 22)

생기와 활기가 필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좋은 성령을 약속하십니다.
때가 되자 제자들에게 성령께서 오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가 탄생합니다.
교회는 성령의 참된 궁전입니다.

성령께서는 나약한 우리를 가르치시고 다양한 은사를
베풀어 주시며 다양한 지체들이 일치를 이루도록 이끄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시는
내적 변화의 가장 강력한 주체이십니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놓는
하느님 현존을 깊이 체험하게 합니다.

집착이 아니라 자유를 주십니다.
성령의 빛은 우리를 회개로 이끄시며 우리를 빛나게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시는 영이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거스르는 삶이 아니라 성령을 받아들이고
성령께 순명하는 성령 강림 대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오소서, 성령님! 우리 삶을 새롭게 하소서.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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