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5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6-15 06:41:57    조회 : 247회    댓글: 0

▣ 2019년 다해 6월15일 [(녹)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제1독서 코린토 2서 5,14-21
복음 마태오 복음 5,3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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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2019년 다해 6월15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지난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 중에 성령의 은사를 하나 뽑았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에 성령의 은사를 뽑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은사를 뽑으셨는지요? 저는 ‘효경’을 뽑았습니다.
안식년을 지내는 저에게 꼭 맞는 은사라고 생각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어머니를 자주 찾아가라는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시간
여유가 있으니 하느님의 말씀을 더 가깝게 접하라는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지식’을 뽑았다고 합니다. 지식은 무엇을 많이 아는
것이기도 하지만, 지식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식별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맹세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맹세하지 말아야 할
것이 무엇인지 식별하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오는 위안과 고독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인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인지 식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제게도 꼭 필요한 은사입니다. 

대부분 사람의 선택은 기준이 있습니다. 재물, 성공, 권력, 명예가
기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에서는 그것들이 많은 것들을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학생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직장에서 좋은
성과를 내는 것도,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는 것도 좋은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선택들이 모여서 지금의 사회를 만들었습니다. 좋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고, 원하는 곳으로 휴가를 갈 수 있고, 좋은 집을
살 수 있고, 먹고 싶은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좋은 공연을 마음껏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의 기준은 믿음,
희망,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다그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꺼이 좋은 직장을 포기할 수 있고, 전쟁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
곁으로 가기도 합니다. 그분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화, 행복,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제가 함께 일했던 복음화 학교의 봉사자들은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새로운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분들은
봉사하면서도 감사하였고, 힘이 들어도 주님을 찬미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분들을 다그쳤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본당 신부님들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납니다. ‘너도 본당
신부가 되어 봐라!’ 본당 신부가 되면 모든 것이 편하고,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본당 신부가 된다는 것은 더 많은 희생과 책임을 어깨에
지고 살아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보좌신부로 지낼 때는 ‘화장실
문고리가 고장 난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칠판에 아이들이 써넣은
낙서도 그냥 보았습니다. 마당에 떨어진 휴지도 그러려니 하였습니다.
소성전에 성수가 떨어진 것도 몰랐습니다.’ 하지만 본당 신부가 되면
마음이 바뀌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너도 시집가서 꼭 너 닮은 딸 하나 나 봐라!’ 

요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엄격하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나무는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고, 강물은 강을 버려야 바다에
이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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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10주간 토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15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 5,33-37: 맹세하지 말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거짓 맹세를 하지 말 것이며, 맹세를 하면 꼭
지켜야 한다는 말씀을 심화하여 아예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필요한 “참 말”만 하라고 하신다.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이고 그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기만 하면 된다. 예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참 진실이기 때문이다.

구약에서는 거짓증언을 막기 위해 맹세 의식을 세워, 거짓 맹세를 하면
벌이 따른다고 규정하였다. 그러나 신앙은 맹세가 아예 필요가 없게
한다. 신앙은 실제로 우리의 삶의 태도를 확립하기 때문이다. 믿음의
단순함 속에는 맹세의식 자체가 필요 없다. 그들에게는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언제나
참되다.

예수께서는 모든 맹세를 거부하신다. 하늘과 땅 그리고 예루살렘은
하느님께 관계되는 것 뿐 아니라, 그 맹세 자체가 실제상의 허위를
가리려는 보장 수단으로 삼는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쓸데없는 맹세를 하여 하느님을 욕되게 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맹세를 자주 하는 사람은 때때로 거짓 맹세를 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하늘이나 땅을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피조물을 피조물 이상의 영광을 지닌 것으로 여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즉 피조물을 하느님으로 높이지 말라는 것이다.
맹세하는 사람들은 “자기보다 높은 이를 두고 맹세합니다.”
(히브 6,16) 주님은 예루살렘을 두고도 맹세하는 것을 금하시며,
“네 머리를 두고도 맹세하지 마라.”(36절)고 하신다.

지상의 예루살렘은 저 위에 있는 하늘의 예루살렘의 예형이며
(갈라 4,26) 위대한 임금님의 도성, 즉 영적 천상교회인, ‘그리스도의
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또 머리를 두고 맹세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1코린 11,3)이시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을 두고 맹세하는 사람은 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신 분을 끌어다
대는 것이다. 자기 머리를 두고 맹세하는 것은 자기를 섬기는 것이
된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느님을 두고 하는 맹세가 허위의 수단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예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러기에 진실한 사람으로서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요.”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며 쓸데없이 맹세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절대 진실”을 말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적어도 진실한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며, 이것이 진정
하느님의 참다운 자녀가 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짜, 정말”의 의미는 가끔 자기변명이나 남의
흉으로 흐를 수 있는 말이다. 우리의 삶은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에 도움이 되는 말을 많이 하도록 하여야 한다. 주님 안에
형제자매인 우리는 진리를 찾아 사는 사람들로서 하느님과 이웃 앞에
진실로, 진리로 자유로운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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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의 감시자가 되어라

2019년 다해 6월15일 연중 10주간 토요일

<나의 감시자가 되어라>
복음: 마태오 5,33-37

일리노이 대학의 디너(Ed Diener) 교수는 어떤 학생들에게는 거울을
마주 본 채 문제를 풀도록 하고, 다른 학생들에게는 거울을 등지고
풀도록 해보았습니다.

이윽고 시험 종료를 알리는 “따르릉” 소리가 울렸습니다. “따르릉”
소리가 났는데도 계속 문제를 푸는 것은 부정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거울을 등지고 문제를 푼 학생들은 한 문제라도 더 풀려고 낑낑거리고
있었습니다. 반면 거울을 마주 본 학생들은 순순히 펜을 놓았습니다.

다른 심리학자도 이와 비슷한 실험을 하였는데 한 교실의 아이들에게
한 사람당 사탕 하나씩만 집어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전체의
34%가 두 개 이상 집어갔습니다. 다음번엔 사탕 바구니 앞에 거울을
세워놓아 아이들이 자신들이 하는 행위를 스스로 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두 개 이상 집어간 학생의 비율이 4분의
1로 줄었습니다.
[출처: ‘왓칭; 나 이상의 나 바라보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어떤 영화 대사에 보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믿지 마라. 오로지 네 자신만 믿어라.”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사람은 약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신을 믿을 수 있을까요? 사람이 다 약하다면
자신도 약한 것입니다. 자신을 포함해 누구도 믿지 말아야합니다.
오로지 믿을 수 있는 분은 변하지 않으시는 하느님뿐이십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을 믿었기 때문에 하느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아예 맹세하지 마라.”라고 하십니다. 맹세는
자신을 믿을 때 하는 행동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날 밤 세 번씩이나 배신합니다.

예수님은 그 이유를 “네가 머리카락 하나라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인간은 나약합니다. 나약하기만 한
게 아니라 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어 “너희는 말할 때에
‘예.’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나 ‘아니요’라고 결정하는 것이 진짜 나입니다. 나머지 모든 생각은
다 자아에서 나오는 것이고 그것이 악입니다. 자신을 믿는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자신의 노예가 되어
살아갑니다. 악의 노예가 되고 악이 됩니다. 

그렇다면 자신을 믿지 않는 방법이 어떤 것이 있을까요? 믿지 않는다면
감시를 해야 합니다. 믿지 않아야 하는 것들과 함께 몰려다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거울을 놓아두면 자신이 자신의 감시자가 될 수 있고
그러면 자신의 욕구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 자신에 빠져 허우적댑니다. 그리고 어디로
떠내려가는지도 모릅니다. 물 위로 올라와야합니다. 물 위에 서면 자기
자신을 발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기도가 시작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 자신을 바라보게 하심으로써 자신의 발밑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발견하게 합니다. 하와가 뱀과 대화하는 것을 멈추고
자신의 등 뒤에 있던 하느님을 바라보았다면 뱀의 꾐에 휩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 설문조사 결과, 80세 이상 노인들의 90% 이상이 자신의 인생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후회하는 것은 세계 여행이나, 많은 돈,
성공 등의 거창한 것을 이루어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내 아이가 원하는
것을 못 해 준 것”, “가족에게 좀 더 따듯하게 말을 건네지 못했던
것”, “돌아가신 어머니께 좀 더 친절하지 못했던 것” 등의 사소한
것들이었다고 합니다. 작은 사랑을 베풀지 못했던 것이 죽을 때 가장
후회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게 했던 장본인은 무엇일까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기 때문에 정작 해야 했던 일을
놓쳐버린 것입니다. 자신의 생각은 끊임없이 출세하라고 하고 즐기라고
합니다. 만약 한 발 떨어져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그렇게
쓸려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결코 자신을 믿지 말라고
합니다. 기도를 통해 마치 거울로 자신을 보듯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
살피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어야합니다. 항상 기도하라는 것은 항상
그리스도의 눈으로 마치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듯 자신을 바라보라는
뜻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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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2019년 다해 6월15일 연중 제10주간 토요일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겪었던 주님 체험 이후, 그
체험이 얼마나 강렬하고 황홀했던지,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했던지, 그
뒤로 그냥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고 말았습니다.
내가 극적으로 만난 이 좋으신 주님, 아무 것도 아닌 나, 미물이요
천덕꾸러기였던 나, 노골적으로 미워하고 박해했던 나를, 무한한
자비와 사랑으로 안아주신 주님을 더 이상 내 안에 가둬 놓을수
없었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내면과 영혼은, 이 좋으신 주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그분의 존재를 알려주고 싶은 마음으로
가득했습니다. 지칠줄 모르는 선교 열정은 바오로 사도를 끝도 없는
전도 여행길로 이끌었습니다.

강직하고 자존심 강했던 바오로 사도는 선교 여행길에 교우들에게
신세 지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선교 여행에 소요되는
경비와 자신의 생활비는 손수 천막 짜는 일을 통해 마련했습니다.

당시 바오로 사도 외에도 여러 순회 설교가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들
가운에 어떤 설교가들은 기적도 행하면서 군중들에게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잘나가던 설교가들은 엄청난 기부금을 받아 큰 부를
축척하기도 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당대 잘 나가던 유급 설교가들에게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거듭 날리며, 자신은 철저하게도 정도(正道)만을 걷는 청빈한
설교가로서의 길을 고집했습니다.

군중들이 아무리 큰 박수와 환호를 보내면서, 붙들어도 바오로 사도는
선교를 위해 결코 한 장소에 오래 머무는 일이 없었습니다. 한 도시나
한 마을에 몇달, 길면 일년 정도 머물면서 신생 교회의 초석을 놓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다음, 기초가 놓였다 싶으면, 즉각 다른 도시로
옮겨갔습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것을, 오래 머물면 떠나기 어려워진다는 진리를
바오로 사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보다도 그는 자신이
지상에서 머물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한 명이라도 더 주님을 만나뵙게 하겠다는 일념에서,
즉시 즉시 일어서고, 떠나고를 반복했던 것입니다.

선교 활동과 관련된 바오로 사도의 조급함이랄까, 강렬한 열정이 오늘
독서에 잘 표현되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2코린토 5장 14절) ‘다그칩니다’라는 말은 다른 표현으로
‘재촉합니다’ ‘일어서라고, 움직이라고, 행동하라고, 떠나라고
부추킵니다.’라는 말과 같습니다.

이천 년 전 바오로 사도가 지니셨던 그 마음, 그 뜨거운 선교 열정,
조금이라도 빨리, 단 한명에게라도 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그분을 믿게 하고픈 그 마음이 오늘 우리에게 조금이라도
남아있는지...정말이지 부끄럽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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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6월15일(토) 성막은 교과서

오늘은 ‘성막은 교과서’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출애굽기 25장 22절 말씀에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깡패를 만나면
깡패가 될 확률이 높아지고 반항적인 사람을 만나면 반항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확률이 높아집니다.

이렇듯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되고 예수님의
사상을 알게 되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바로 이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신 분이며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교과서입니다.

이와 같이 성막을 공부하게 되면 진리를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며 신약
시대의 예수님의 뜻과 사상을 알게 되고 이 모든 것들을 성막에서
영적교과서로 지켜나가면 영적 제자가 되고 영적 제자가 되면 주위의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영적지침인 성막교과서가 될 것입니다.

인생은 결코 복잡하지 않습니다. 성막 교과서는 정해진 7단계 과정을
가는 간단한 자기 점검 지침서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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