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0일 열매를 맺는 기도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6-20 18:21:36    조회 : 229회    댓글: 0

▣ 2019년 다해 6월20일 [(녹)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제1독서 코린토 2서 11,1-11
복음 마태오 복음 6,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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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2019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아침 식사를 마치면 동네 산책을 다니고 있습니다. 1시간 정도 걸으면
물을 마실 수 있는 음수대가 있고, 그 옆에는 혼자 할 수 있는
운동기구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지나쳤는데 요즘은 이것저것
운동기구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턱걸이를 합니다. 학생
때는 20개를 거뜬히 했는데 한 개도 힘이 듭니다. 며칠 전에 2개를 했고,
5개를 목표로 운동하고 있습니다. 5개를 할 수 있다면 내 몸을 다섯 번
들어 올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이 나를 위한 것이라면 다른 4번은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산책하면서 ‘EBS 라디오 문학관’을 듣고 있습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좋은 책들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성우들의 목소리와 효과 음악이
있어서 재미있게 듣고 있습니다. 며칠 전에는 톨스토이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들었습니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이 추운 겨울
교회 앞에서 떨고 있는 젊은이를 도와주면서 생기는 일이 전체의
줄거리입니다. 젊은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던 천사였습니다.
천사는 세상에서 3가지 진리를 알게 될 것이고, 3가지 진리를 알면
다시금 하느님께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에게
말씀하신 3가지 진리는 ‘인간의 내면은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을 이룰
수 없는가?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입니다. 책을 읽어 보신 분들은
천사가 찾았던 3가지 진리에 대한 답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예전에
읽었지만, 생각이 나지 않는 분이 있다면 오늘 하루 이 3가지 진리를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으로 살았습니다. 갖은 시련과
박해가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였고,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그리스도가
내 생의 전부라고 하였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산다고 하였습니다. 환난도, 칼도, 권세도, 천신도, 세상의 어떤
것도 그리스도와 맺어진 사랑을 갈라놓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지 말씀하십니다.
기도가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가난함을 받아들이고,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잘못한 사람을
기쁜 마음으로 용서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나의 허물을 용서해
주셨음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의 구원을 위해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 네가 자주 가는 곳, 네가 읽는 책들이 너를
말해 준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요즘 내가 가족들과 함께한다면,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한다면, 봉사활동을 자주 한다면 바로 그 시간이
내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요즘 내가 자주 가는 곳, 내가 자주 읽는
책, 내가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생각해 봅니다. 

“주님께 청하는 오직 한 가지, 나 그것을 얻고자 하니, 내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사는 것이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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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기도가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2019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기도가 빈말이 되지 않으려면>
복음: 마태오 6,7-15

미국의 화웨이 제재는 엄청 무지막지합니다. 미국 대통령령에 의해
미국 부품과 프로그램의 제공이 중단되자 중국의 화웨이는 현재 존립
자체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시발점은 아마도 미국에 뿌려진 화웨이의 스마트폰에 숨겨진
프로그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프로그램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사람의 모든 정보가 중국으로 보내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이 군사목적으로 만들어진 미국의 프로그램과
유사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은 그래서 화웨이를 민간 기업이 아니라
중국 정부가 정보를 빼내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국가기업에 가깝다고
보고 있습니다. 화웨이가 지난 10여 년간 유럽과 미국 등 거래
기업들로부터 상당한 양의 각종 기술과 영업 비밀들을 빼냈다고 보고
있습니다.

반면 중국은 외국으로 자신들의 정보가 유출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적극적으로 막고 있습니다. 한국의 카카오톡과 같은 것들을 자국
내에서는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들의 정보는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철저하게 규제하면서 자신들의
스마트폰을 쓰는 나라의 정보는 빼내왔다고 보는 것입니다.

화웨이 이름 자체가 ‘중화를 위하여’란 뜻으로 중국의 번영을 위한
기업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런 자세로 자신들의 스마트폰을 사
달라고 한다면 누가 사주겠습니까? 그것을 사주면 나의 모든 정보가
그들 것이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할 때 화웨이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주님께 피해를 주는데도 자신의 청을 들어달라고 강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기도할 때에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빈말을 되풀이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빈말’을 되풀이하는
기도는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들어 주시는
줄로 생각한다.”라고 하시며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화웨이가 스마트폰을 사
달라고 계속 광고한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태도를
바꿔야합니다. 자신이 변하지 않는 상태에서 청하는 모든 것들은
‘빈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주님 입장에서는 내가 청하는 것이 적어도 당신께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규정을 만들어주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복음의
‘주님의 기도’입니다. 먼저 청하는 이가 당신께 합당한 사람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주님의 기도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의 아드님이
바치는 기도이기에, ‘먼저 아들이 되어서’ 무언가 청해야지 적이 되어서
청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불러야합니다. 참으로 당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분입니다. 하늘은 땅과 상반됩니다. 아버지가 하늘에 살면 나도
하늘에 살아야합니다. 나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이심을 안다면
땅의 것들에 집착하여 그것들을 얻고자 기도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은 나의 영광이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어야
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는 것을 청해야합니다. 땅의
인간을 하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 보답을
다 할 수 없습니다. 내가 청하는 것이 과연 나의 영광을 위함인지
주님의 영광을 위함인지 살펴야합니다.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는 일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게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나라란 아버지로부터 통치 받는 나라입니다. 나의 주인이
나인지 주님인지 먼저 살펴야합니다. 내가 나의 주인이면 나의 기도는
주님께 내리는 명령입니다.

아버지 나라는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그분이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주님은 당신의
뜻을 따라주는 만큼 우리 뜻에 관심을 기울이십니다.

주님의 뜻이 우리 양식이 되게 해야 합니다.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던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 당신 양식이라
하셨습니다. 주님의 뜻은 묻지도 않으면서 내 뜻만 강요하면 그것이
빈말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의 핵심은 용서입니다. 내가
이웃을 용서하지도 않은 채 다른 기도를 청한다는 것은, 내가 하느님의
뺨을 때리며 동시에 내 청을 들어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 마음에 드는 사람이 되려면 유혹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뱀의 소굴로 들어가 뱀에 물리지 않도록 기도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유혹을 물리치지 않으면서 바치는 기도는 밖에서
부모를 욕되게 하며 집에서 부모에게 이거 달라, 저거 달라 청하는
꼴입니다.

악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마귀이고 사탄입니다. 자신의
욕구에서 벗어나는 것이 악에서 구함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내가
죽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을 안다면 나를 살게 만드는 청은 들어주시지
않을 것입니다. 악에서 구함을 받는 유일한 방법은 나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에게 지금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 알고 계십니다. 문제는
주님께서 필요한 것을 우리가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화웨이 사태가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청을 드리기 이전에 그분이 원하시는 것에 먼저
관심을 가져야합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님의 기도에
다 들어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기도를 정성껏 바치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께서 알아서 다 채워주실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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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11주간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6,7-15: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님께서는 믿지 않는 이들이 기도할 때 말을 많이 하면 하느님께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 주신다고 생각하지만, 그러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마음에서 우러난 믿음의 기도를 바치라고 하신다.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우리보다 더 잘 아시며, 우리가 아뢰기도 전에
우리가 무엇을 청하는지 알고 계시다. 그러니 기도는 청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총을 내려주실 마음이 드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 주신다. 우리는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 이것은 아들을 믿는 이들의 특권이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라는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며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찾는 우리에게 든든한
확신을 주실 수 있도록 아버지라 불리기를 바라신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9절)는 우리의 기도로 더욱
거룩해 진다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한 이름이 나날이 우리 안에서
거룩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기를
기도하는 것은 우리가 열심히 살아 우리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이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은 먼저 하느님 나라가 자신들
안에 세워지기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서 다스리시기를 기도한다.
우리는 이미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며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는 그리스도이시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와 있지만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모든 것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즉 의인들이 하느님의 뜻을
행하듯이, 죄인들이 회개하도록 죄인들도 당신의 뜻을 행하게 해
달라는 뜻이 담겨있다. 그리고 이 청원은 하느님의 정의가 마침내
행사되기를 바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은 나날이 구원의 양식으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우리가 죄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
양식을 받아 모시며 우리는 거룩한 신성에 참여한다. 이 일용할 양식은
하루에 충분한 만큼만 주어지며 내일을 위한 영원을 위한 양식이며
물질로 환원되지 않는 양식이다.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기 때문에 용서를 청하라고 하신다. 그러나 이
청원은 우리가 용서를 청하는 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전제한다. 우리에게 용서를 청하는 이들과 같이 우리도 하느님 아버지께
용서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용서받았으므로, 용서에는
하느님과의 확고한 계약이 담겨있다. 그것을 소홀히 할 경우 앞서 한
모든 청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 있을 만큼 중요한 계약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죄가 용서되는 것만이 아니라, 죄를 철저히 거부할
수 있기를 기도해야 한다고 하신다.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13절) 이 청원은 우리가 사탄에게 끌려가도록
두지 마십사는 의미이며 현재와 미래에 항상 악으로부터 보호해 주시기를
청하는 것이다.

주님의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나라가 오게 하시며, 하느님의 뜻이 완전하게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세 가지 청원은 영원한 삶과 관련된 것이다. 일용할 양식과 죄의 용서,
유혹에 빠지지 않고 악에서 구원되기를 바라는 뒤의 네 가지 청원은
현세의 삶과 관련한 것이다.

주님의 기도를 잘 묵상하며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바치며, 우리의
삶으로 이 기도를 살아야 한다. 이 주님의 기도를 잘 살려고 노력할
때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더 좋은 방법으로 더
풍성하게 우리에게 베풀어 주실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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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여라.(마태 6, 9)

주님의 기도는 삶을 위한 가장 아름답고 빛나는 기도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을 가르쳐줍니다.
하느님의 현존은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분명히 깨닫게합니다.
일상의 용서와 사랑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아버지 하느님께 우리 삶을 겸손되이 바치는 사랑의 기도입니다.
사랑의 이 기도는 삶의 나눔이며 삶의 봉헌이 되어
주님과 하나되는 일치의 참된 기쁨으로 초대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를 분명히 가르쳐줍니다.

우리의 삶이란 주님의 간절한 기도처럼 기도의 힘이
매순간 필요한 기도의 여정이 우리의 삶입니다.
기도와 은총 용서와 사랑 하느님 나라와 구원이
주님의 기도안에 모두 담겨있는 복음의 참기쁨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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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주님의 기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넘쳐 흐르는 사랑의 기도!

2019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주님의 기도!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넘쳐
흐르는 사랑의 기도!

가톨릭 신앙과 전례 안에는 정말이지 빛나는 보물같은 중요하고
본질적인 요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값진 보물들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별 의미나 비중을 두지 않은 경향이 있습니다.
이유는? 너무 가까이 있다보니, 너무 익숙해지다보니 그렇습니다.

한 신앙인이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발돋움하는 데, 가장 유익한
도구이자 빛나는 보물은 성체성사입니다. 고백성사입니다. 아침 저녁
기도입니다. 성모님을 비롯한 성인들의 모범입니다. 성경입니다.
성호경입니다. 그리고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는 주님의
기도입니다.

초기 교회에서는 주님의 기도가 얼마나 귀중한지에 대한 의식이 살아
있었습니다. 교리 교육을 마친 다음에야 비로소 주님의 기도를
‘수여’받을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비 신자는 세례를 받기
직전에야 비로소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에 합당한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교회는 이를 전통적으로 ‘기도의 수여’라고 불렀는데, 예비 신자는
세례를 받은 다음에야 장엄한 예배에서 온 공동체와 함께 처음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수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주님의 기도가 많이 퇴색되었습니다. 너무 많이
소모되었다고나 할까요. 그 말마디와 문장들이 안개 속의 풍경마냥
아득합니다. 너무 습관적으로, 그저 아무런 생각없이, 영혼이나 정성이
사라진 주님의 기도를 바친 탓입니다.

예수님의 입과 제자들의 귀에 주님의 기도는 아주 분명한 기도였고,
기도의 말마디들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명확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일차적으로 제자들의 기도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야 하는
제자들이 자신들의 원의와 계획은 잊고, 오직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만을 바라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이 주님의 기도 속 모든 청원의
마디마디 핵심을 이룹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들 본연의 기도로 주신 주님의 기도는 오롯한
청원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자들에게 당시 대세였던 찬미의
기도를 가르쳐주시지 않고 청원의 기도를 가르쳐주신 것일까요?

설득력 있는 대답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느님 백성에게 닥친 급박함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당상 개입해주시라고 부르짖는
외침의 기도입니다. 급박하게 외치는 청원 기도야말로 막 시작된
하느님의 다스림에 제대로 들어맞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기도가 당시 성행되던 고대근동의 장황하고 화려한 청원기도와
크게 차별화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짧고 단순하다는 것,
지극히 가족적이고 친밀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에서 기도하는 이와 하느님 사이의 대화를 지배하는 것은
왕궁의 격조높은 의식이 아닙니다. 가족 내의 친숙함, 정확히 말해서
예수님의 ‘새 가족’의 친숙함입니다. 가족 사이에서는 이리저리
에두르지 않고, 거창한 말로 꾸지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말하는데, 그런
가족적인 분위기가 주님의 기도 전반에 흐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정말로 ‘새 가족’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혈육으로 이루어진 옛 가족을 떠나야 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부인도 형제도 떠나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신에 새 가족은, 백배나 되는 형제자매들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상황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한없이 부족하고 나약하며 큰 죄인인 우리,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 우리들이 전지전능하신 창조주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을 주신 예수님의 자상하고 따뜻한 마음이 넘쳐흐르는 사랑의
기도가 바로 주님의 기도입니다.

(게르하르트 로핑크, ‘주님의 기도 바로 알기’, 생활성서 참조)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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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열매를 맺는 기도|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6월20일 연중 제11주간 목요일 (마태 6,7-15)

열매를 맺는 기도 

기도는 사람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찬미와 감사 청원이 다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하느님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기도하기보다 입으로 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이 간절할수록 말은 적어지는 법인데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마라, 떠들어 대지 마라”고
하십니다. 이는 세속의 시끄러움, 허영의 시끄러움입니다.

살아가면서 흔하게 하는 말 중에 하나가 ‘기도해 주겠다. 기도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그 기억을 되살리고 약속을 지켰는가를
생각해 보면 소홀함이 많습니다. 약속도 하고 결심도 하지만 그저
흘려버린 경우도 있습니다. 간절함으로 청하고 믿음의 기도를 드려야
하며 삶의 기도를 봉헌해야 효과 있는 기도가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원의를 알고
계시는 분께 떼를 쓰는 것보다는 제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니 그
바람을 ‘당신께서 원하시는 때에 당신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
주십시오. 무엇이 주어지든 당신이 주시는 것이라는 것을 제가 잊지
않게 해 주십시오’하고 말씀 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해야 하겠습니다. 

허공에 대고 빈말을 되풀이하기 보다는 의심하지 말고 때를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사람이 들으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니만큼 어눌한
말이면 어떻고 두서없는 말이면 어떻겠습니까? 더군다나 우리
아버지신데 말입니다.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모시고 그 앞에서
재롱을 떨 수 있다면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로움인지요? 그저
마음을 담고 사랑을 담아 믿음으로 올리면 그 정성을 헤아리셔서
흔들어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담을 그릇은 항상 준비해야
합니다. 사실 “기도는 사람들이 쓸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
전지전능하신 이도 양보하시는 힘, 견줄 바 없는 특권, 전능하신
아버지가 그 자녀들의 필요와 염려에 관심을 나타내실 수 있는 길, 주
하느님의 창고는 기도로 열리며 믿음은 그 열쇠를 돌리는 것”
(작자미상)입니다.

혹 누군가에게 약속한 기도를 잊었다면 오늘 그 기도를 채우시고
지나가는 소리로 청했다면 진지하게 갈망하기 바랍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바라는
간절함이 큰 만큼 걸 맞는 삶으로 기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지적인 사색에 있다기보다는 사랑에, 그리고 의지의 실천에 더
있기 때문입니다(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사실 간절함이 크면 클수록 입은 다물게 되고 마음은 하늘을 향하게
됩니다. 아직도 입에 있다면 깊은 침묵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기쁨을
차지하시기 바랍니다. 소음이 크면 그분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기도하려면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십시오. 기도는 분명 하늘의 열쇠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남미 우루과이의 작은 성당 벽에 써있는 기도문

"하늘에 계신" 하지 말아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 하지말아라. 너 혼자만 생각하면서.
"아버지"라 하지 말아라. 아들 딸로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말아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아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소서" 하지말아라.
내뜻대로 되기를 원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말아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아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말아라.

죄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말아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도 듣지 않으면서. "아멘" 하지말아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주님의 기도에 대해 ‘완덕의 길’에서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를 마음을 다해 자주
바쳐야 하겠습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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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

오늘은 요한복음 6장 16-21절 말씀에 ‘바다 위를 걸으신 예수님’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다 위를 걸으셨습니다.

거짓말 같은 상황이 실제 일어난 것입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역사는 오늘도 이루어집니다.

사람의 생각과 지혜를 떠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은 오늘도
이루어집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림자만 밟아도 치료가 될 있다는 믿음이 병을 고치기도 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예수님은 온전히 사용하실 수 있고 그
능력을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대로 보여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바로 예수님의 전지전능의 기적을 수시로
사람들에게 보여주듯이 우리 성도들도 이 전지전능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활용하여서 사람들에게 믿어질 수 있게 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서 수많은 기적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이유는 그와 똑같은
기적, 아니 그보다 더 큰 기적을 행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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