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3일 물고기 두마리와 빵 다섯 덩어리의 의미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6-23 13:22:10    조회 : 218회    댓글: 0

▣ 2019년 다해 6월23일
[(백)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제1독서 창세기 14,18-20
제2독서 코린토 1서 11,23-26
복음 루카 복음 9,11ㄴ-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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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2019년 다해 6월23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1991년 8월 23일 사제서품을 받았고, 부족한 제가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28년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니 만 번 이상의 미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모든 미사가 거룩하고, 소중하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는
미사가 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았던 시나이산에서
드렸던 미사가 기억납니다. 새벽 2시에 시나이산을 올랐고, 붉게
떠오른 태양을 바라보면서 함께 갔던 순례자들과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모세가 받았던 십계명이 삶의 지침이었다면, 그날 받아 모셨던 주님의
성체는 어둠을 밝히는 빛이었습니다. 

임종을 앞둔 형제님을 위해서 드렸던 미사가 기억납니다. 형제님은
성체를 모시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수녀님께 부탁해서 형제님을
위한 미사를 봉헌했고, 성혈을 영해 드렸습니다. 인생의 마지막 길에
받아 모신 성혈은 형제님에게는 큰 은총이었을 것입니다. 천국에서
그날의 은총을 생각하며 지상의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시리라 믿습니다.
수도원 미사를 봉헌하면서 제의 방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납니다.
“그리스도의 사제여! 처음 드리는 미사처럼, 마지막으로 드리는
미사처럼, 유일한 미사처럼 미사를 봉헌하십시오.
(Priest of Jesus Christ! Say every Mass,
as if it were your first Mass,
as if it were your last Mass,
as if it were your only Mass! )” 

성전에서, 성지에서, 가정에서 미사를 봉헌하였지만, 또 다른 곳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이 있습니다. 거리의 미사입니다. 용산 참사의
현장에서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거리의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강정 마을의 평화를 위한 미사가 거리에서
봉헌되었습니다. 세월호의 희생자를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는 거리의
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격식과 전례의 분위기는 다를지라도,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지친 이들의 위로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셔서 절망 중인 이들에게 희망이 되셨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이야기입니다. 모든 교인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교회가 없어서 대학교의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인들이
늘어나서 대학교의 강당에서는 더는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공동체는 교회를 신축하기 위해서 200억을 모금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눈에 보이는 성전을 짓기 위해서 200억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늘어난 신자들은 4곳의 교회로 나누었고, 다른 강당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을 짓기 위해서 마련한 200억 원을 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짓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탈북자들을 위한 학교를
세웠고, 베트남, 러시아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공장을 세웠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저는 그 교회의
공동체는 바로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이유를 알았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그대로 이웃들의 발을 씻겨 드렸다고
생각합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사랑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광야에서 지치고 굶주린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셨습니다. 만나는 하느님 사랑의 표징이었습니다. 신약에서
예수님께서는 육체를 배부르게 하는 ‘만나’보다는 영혼을 살리는
‘성체와 성혈’을 주셨습니다. 주님의 성체와 성혈을 받아 모시면 우리는
영적으로 충만해집니다. 

어릴 때, 물을 퍼 올리던 펌프가 생각납니다. 펌프에는 늘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있었습니다. 아낌없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부어주고
펌프질을 하면 수백 수천 배의 물이 흘러나옵니다. 이것은 어린
저에게는 참으로 큰 체험이었습니다. 한 바가지의 물이지만 기꺼이
내어주니, 모든 사람이 마시고도 남는 물이 흘러나왔습니다. 성체의
모습으로 오시는 예수님은 지금도 ‘마중물’이 되시어 수많은 신자의
가슴에 용기와 생기를 주고 위로와 힘을 주십니다. 축복을 받았으면
나누시기 바랍니다. 엄청난 은총이 되돌아올 것입니다. 바다의 물이
마른 적이 없듯이, 하느님의 사랑은 마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체
성혈 대축일의 진정한 의미는 우리가 모두 아낌없이 마중물이 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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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의 의미

2019년 다해 6월23일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의 의미>
복음: 루카 9,11ㄴ-17

알렉산더 대왕이 친한 친구로부터 선물을 받았습니다. 매우 잘 훈련된
사냥개 두 마리였습니다. 세상에 몇 안 되는 놈들이라고 했습니다.
한가할 때면 사냥을 즐겼던 대왕은 매우 기뻐했습니다. 어느 날 대왕은
그 사냥개들을 데리고 의기양양 첫 토끼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개들은 사냥할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습니다. 달아나는 토끼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빈둥빈둥 누워만 있었습니다. 대왕은 화가 나서
사냥개들을 모두 죽여 버렸습니다. 

대왕은 씩씩거리며 돌아와 사냥개를 선물한 친구를 불러 호통을
쳤습니다.

“토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쓸모없는 개들을 내게 왜 선물했는가!
그 밥만 축내는 개들은 내가 모두 죽여 버렸네.”
친구는 대왕의 말에 크게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습니다.
“대왕이시여, 그 사냥개들은 토끼를 잡기 위해 훈련된 개들이 아닙니다.
호랑이와 사자를 사냥하기 위해 오랜 시간 훈련받은 무척 귀한
개들입니다.”

친구의 말을 듣던 알렉산더 대왕의 얼굴은 후회와 안타까움으로
굳어져버렸습니다. 

선물은 유용성이 있어야합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선물을 필요로
하십니다. 그것으로 사람의 영혼을 잡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위 알렉산더 대왕처럼 선물을 가치를 몰라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대부분은 우리가 호랑이와 사자를 잡는 선물이 되어야 하는 데도
토끼밖에 잡을 수 없는 선물밖에 드리지 못하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성당에 봉사자들이 많이 있지만 어떤 봉사자들은 수천 명의 신자들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는 역할을 하는가하면 어떤 봉사자들은 자리만 지키고
있는 듯한 봉사만 합니다. 그 차이는 물론 그분들을 옳게 사용하지
못하는 성직자들의 부족함도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을
봉헌할 때 어떤 사람은 온전한 모습으로, 어떤 사람은 부족한 모습으로
봉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기적이
나옵니다.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는 한 인간을 뜻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이 온전한 봉헌을 가지고 수천 명을 배불리 먹이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숫자 다섯은 성경에서 그리 좋은 의미로 쓰이지 않습니다. 다만
물고기 숫자 둘이 합쳐지면 그것이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됩니다. 이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가 우리
자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은 그렇게 잡은 물고기가 열두 광주리나 되기
때문입니다. 열둘은 열두지파를 상징하는 교회입니다.  

다섯은 아직 주님을 만나지 못한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 자신을
뜻합니다. 창세기 다섯 째 날 하느님은 하늘과 물속의 온갖 동물들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의 새들과 물고기들은 길들여질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길들여질 수 없는 자아의 본성, 육체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섯을 오감, 즉 육체적 본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본성에 사로잡힌 제물일 때 그것들로는 새 백성을 창조할 도구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창세기에 다섯 임금이 동맹을 맺고 시띰 골짜기 곧 ‘소금 바다’로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이들이 소돔에 살고 있던 롯을 잡아갔습니다.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삼백십팔 명을 불러 모아 조카 롯과
그의 재물과 함께 부녀자들과 다른 사람들까지 도로 데려왔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을 마중 나오는 살렘 임금 멜키체덱에게 십분의 일을
봉헌합니다. 육체적 욕망을 이겼을 때 온전한 봉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 육체적 욕망을 이길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 물고기 두
마리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성자와 성령입니다. 하느님은 소돔 땅에 있는 롯을
구해오라고 두 천사로 상징되는 성부와 성자를 보내십니다. 이는 마치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성령을 받고 153마리나 되는 인간을 잡는
어부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자신에 말씀과 진리가 함께
봉헌되지 않을 때 우리는 주님께서 쓰시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카인과 아벨은 그들이 바치는 제물에서 차이를 보였습니다. 카인은
땅의 소출을 바쳤고 아벨은 가축을 바쳤습니다. 땅의 소출은 그저 숫자
다섯(5)일 뿐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소출은 양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까지 더해 바쳤습니다. 두 가지 조건이 더 충족된 것입니다.
맏배는 신약으로 따지자면 그리스도를 상징할 수 있고, 굳기름은
성령을 상징합니다. 이 두 가지가 더해져 함께 바쳐질 때 하느님께서는
그 제물을 즐겨 받으십니다.  

그렇다면 내가 주님께 드리는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의 제물이
되었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물고기 두 마리가 나에게서 하시는
드러나는지 살펴보면 됩니다.

한 중년의 남자가 미용실에서 드라이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부인
테레사는 몇 년 전 뇌졸중에 걸려 움직이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테레사는 얼마 전, 한 미용실에서 머리를 했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그녀의 머리가 미용실에서 봤을 때처럼 예뻐 보이지 않았습니다.

몸을 움직이기 어려운 테레사는 직접 머리를 할 수 없었고, 자신의 몸에
실망했습니다. 앤드류는 테레사의 의기소침한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는 부인을 위해 새로운 기술을 배우기로 결심합니다.
바로 부인의 머리를 예쁘게 하려고 드라이하는 법을 익히기로 한
것입니다.

부인이 머리를 했던 미용실로 다시 찾아가 스탭에게 드라이 하는 법을
직접 배웁니다. 결혼생활 45년 만에 앤드류는 처음으로 부인에게
처음으로 머리를 해 줍니다.

“제 부인 테레사는 뇌졸중에 걸렸습니다. 제가 일하러 밖에 있을 때
테레사는 우리 가족을 위해 그 누구보다 노력했습니다.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일을 도맡아 했죠. 연인 관계를 위해서는 두 사람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되면 좋겠습니다.”

[출처: ‘할아버지가 왜 여자 머리하는 법을 배우고 있는 걸까?’,
체인지 그라운드, 유튜브]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뭐가 필요한지 아셨습니다. 이것은 관심입니다.
그 관심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필요한 기술을
익힙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말씀을 통해 배우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주님께 바치는 좋은 제물이라면 먼저 신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살필 것이고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고 있을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카나의 혼인잔치 때 혼인잔치에 참석한 이들이 필요한
것을 먼저 눈치 채셨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사랑이 충만한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씀이신 그리스도께로 달려가셨습니다. 성모님은
이렇게 성령과 말씀을 포함한 주님께 드리는 가장 완전한
제물이셨습니다. 하느님은 이 성모님을 통해 지상 교회에 포도주라는
은총을 내려주십니다. 그렇게 열두 광주리인 교회가 충만한 은총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 우리 안에
성령과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오히려 우리는 교회에 손해를 입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성령은
사랑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이십니다. 성령은 관심이고 예수님은
그 필요한 것을 주십니다. 성령과 예수님은 이웃을 향해 나에게서
솟아나 이웃에 대한 관심과 이웃을 채워주기 위한 노력이 솟아나게
만듭니다. 

빵 다섯 개는 나 자신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나에게 오신 성령과
예수님입니다. 예수님께서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을 봉헌하신 것처럼,
우리도 다섯 만이 아니라 일곱을 봉헌해야합니다. 주님은 그렇게
봉헌된 우리들을 즐겨 받으시고 세상을 배불리시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열두지파를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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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23일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성 토마스 데 아퀴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지극히 거룩한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내포되어 있다. 즉 우리의 ‘파스카’이시며
생명을 주는 빵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그 안에 계신다.”
(S.Th., III, q. 65, a.1 ad 1) 즉 성체성사는
“선교활동의 원천이며 정점”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우리 신앙의
‘종합’일 뿐 아니라 우리 신앙생활의 근원적인 힘이요, 또한 표현
양식이기도 함을 의미한다. 

제2독서: 1코린 11,23-26: 먹고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몸’이 ‘너희를 위하여’ 즉 사람들을 위하여
죽음에 넘겨진다는 의미의 표현을 쓰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체성사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현존’의 신비를 이루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위에서의 신비, 즉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을 위해 당신의
최고의 사랑을 쏟으시는 순간에 ‘봉헌’하신 생명의 신비를 재현시키는
것이다. ‘피’에 대해서도 똑같이 이야기 할 수 있다.

바오로 사도는 두 번씩이나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24.25절)는 예수님의 명령을 전하고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
순간 행하신 것을 그분이 부여하시는 의미와 더불어 그분이 다시 오실
때까지 제자들이 반복해서 행해야 한다는 그분의 원의를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행위를 반복해서 되풀이 하는
일이 단순히 ‘회상하는 행위’정도에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기념(anamnesis)은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성체성사적 행위를 그분이 부여하셨던 충만한 의미와 더불어 현재에
재생시키는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 식탁을 주관하고 말씀을
반복하시는 분은 여전히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
제사를 거행하는 사제는 다만 그분의 투영에 불과하다 하겠다.

파스카의 신비는 예수님께서 성체성사를 세우시고 십자가의 봉헌과
부활로 이루어진 시기와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해방되어 나온 그
먼 과거가 한데 어우러져 이루어진 사건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26절) 여기서
‘전하다’는 말의 시제가 현재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성체성사의 거행은 충만한 사랑으로 역사 전체를 뒤덮는 죽음의 신비를
선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성사는 사랑 안에서 우리를 새롭게 변화시켜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대로 하느님과 형제들을 위해 죽기까지 온전히
자신을 봉헌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한다. 성체성사가 이렇게 거행되지
못하고 우리에게서 먼 이야기로 되고 만다면 그것은 단지 과거에 대한
‘기억’에 불과하고, 새롭고 신선한 분위기를 창조해주는 ‘기념’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성체성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걸쳐 있는 것이고, ‘기억’인
동시에 ‘예언’이다. 즉 성체성사는 사랑의 마지막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사랑의 마지막 표현은 오로지 우리도 그리스도와 더불어
장차 충만함 속에서 다시 임하게 될 ‘하느님의 나라에서 새 포도주’
(마르 14,2 참조)를 마시게 될 때 이루어질 것이다.

복음: 루카 9,11-17: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은 성체성사에 대한 직접적인 의미는 없다.
그러나 복음사가는 빵을 많게 하는 기적에서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때
행하실 바로 그 행동들을 그분께 돌려드리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그것을 축복하신
다음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군중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셨다.”
(16절)

여기서 또 중요한 것은 사도들이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이 기적을 통해 마련하신 음식을 사도들로 하여금
군중에게 나누어주게 하셨다. 오늘날 성체성사를 거행하는 사람들,
사제들이 하는 일이 바로 이 일이다. 우리 가운데서 성체성사를
재현시킬 수 있는 것은 오직 그분의 ‘말씀’ 뿐이다. 여기서 사도들의
행위는 외적행위 뿐 아니라, 자신도 성체가 되어야 하는 의미가 있다.

만일 성체성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랑과
헌신에 대한 ‘기념’이라고 한다면 그 성체성사의 거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연 어느 정도로 주님께서
모든 이를 위해 베풀어 주신 무상적이고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 되고 있는지를 자문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에 있어서
생활한 것이 못되는 ‘기념’은 과거에 대한 ‘기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 성체성사가 오직 우리의 존재 그대로의 봉사와 참여와 형제애가
‘봉헌’될 때에만 참되다는 것이다. 오로지 이렇게 할 때만이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께서 당신 왕국의 결정적 영광 속에 “다시 오실 때까지”
(1코린 11,26) 그분의 죽음에 대한 참된 ‘기념’과 ‘선포’가 될 것이다.

성체와 성혈 대축일을 이렇게 지내는 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당신을
바치신 그 사랑의 행위가 지금의 나를 통하여 계속 선포되고 전해질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우리를 초대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성체성사의 신비는 사랑과 나눔이며, 희생과 봉사의 삶이다. 그것을
위해 나 자신을 바칠 수 있을 때에 우리 자신이 세상의 구원을 위해
나를 봉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를 구체적으로 살아가며 그
신비를 전하는 우리가 되도록 기도하여야 하겠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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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 9, 17)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6월23일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루카 9, 17)

모든 삶의 중심에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의 삶을 향합니다.
무조건적이며 무차별적인 사랑을 언제나 우리에게 베푸십니다.
사랑은 공허한 말잔치가 아니라 살과 피 전부를
내어주는 놀라운 사랑의 신비입니다.
사랑의 신비는 내어주는 생명의 기쁨입니다.

생명의 기쁨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일치와 감사로 드러납니다.
일치와 감사를 통해 우리존재의 소중함을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 삶을 변화시키시는 성체와 성혈 안에 삶의 해답이 있습니다.
우리가 봉헌한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살과 피로 변화시키듯
우리를 사랑의 존재로 바꾸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빛이 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살과 피가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살리는 생명임을 기억하며
그 사랑을 우리의 일상안에서 행합시다.
행하는 생명의 잔치가 가장 아름다운 변화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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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2019년 다해 6월23일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성혈 대축일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성체 성혈 대축일을 준비하며, 우리 교회는 성체성사에 대해서 어떻게
가르치고 있는지 살펴보는 일도 중요하겠습니다.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크게
강조합니다.

“지극히 거룩하신 성체 안에 교회의 영적 전 재산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성체성사는 선교 활동 전체의 원천이요 정점입니다.”

존경하는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2001년 봉헌생활의 날을 맞아,
모든 사제, 수도자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매일의 성체성사 안에서
개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과 사도적 활동의 원천이자 정점으로서
우리가 매일 기념하고 경배하는 성찬례 안에서 가장 특별한 방식으로
그분을 만나고 관상하십시오.”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는 성체성사와 선교, 그리고 일상 안에서의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을 연결시키셨습니다.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으로 건너가지 않는 성찬례는 그 자체로
불완전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찬 식탁에 나아가면 선교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교적 노력은 그리스도인 삶의 성찬적 모습의 한
부분입니다.”

저희 살레시오회 25차 세계 총회 문헌에서는 매일의 무미건조하고
밋밋한 성체성사를 탈피하라고 강조합니다.

“매일의 성체성사를 기쁨, 창의성, 열정으로 거행하십시오.”

곰곰히 생각해보니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참여하다보니, 어느 정도
습관화되고, 타성에 빠지게 되는 성체성사야말로 정녕 은혜로운 성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유한한 인성이 영원한 신성에 참여하는 길이 바로 성체성사입니다.
부족하고 나약한 한 인간이 하느님성, 그리스도성, 신성, 영원성에
완전히 참여하고 일치할 수 있는 성사, 그래서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맛보는 성사, 우리를 영원히 살게하는 축복의 성사가 바로
성체성사인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성체성사는 우리 인간 각자의 영혼 성장을 위해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건네시는 종합선물세트입니다. 왜
종합선물세트인가 한번 짚어볼까요?

성체성사 시작 부분의 참회 예절은 우리의 발걸음을 한없이 자비하시고
따뜻하신 하느님의 품으로 인도합니다.

이어지는 말씀의 전례에서는 하느님께서 말씀을 통해 우리 각자에게
오시며, 세파에 지친 우리에게 사랑의 메시지를 건네심으로 충만한
위로와 격려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구원의 파스카 신비가 재현되는 성찬의 전례를 통해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과 구원으로 초대하십니다.

한 부분 한 부분 그 무엇 하나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소중한
성체성사이기에, 우리가 조금만 더 잘 준비한다면, 조금만 더 정성을
기울인다면 이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 역사상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명강론가 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의
성체성사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체성사가 시작되기 전 천사들은 우리를 위한 청원기도를 하려고
기다립니다. 바로 이때가 천상의 은총을 얻기에 가장 좋고 유리한
시간임을 천사들은 잘 알기 때문입니다.”

베트남의 성자 구엔 반 투안 추기경께서는 성체성사를 기쁨과
연결시킵니다.

“만일 그대가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체성사를 봉헌하십시오. 성체성사만큼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선물은 다시 또 없습니다.”

살레시오회 요셉 과드리오 신부는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여, 매일 그대가 봉헌하는 성체성사를 그대 하루의
태양처럼 여기십시오. 그대가 매일 미사 경본을 덮을 때마다 그대의
미사는 다시 한 번 그대의 생활 안에서 새롭게 시작됨을 기억하십시오.”

성체성사가 단순히 전례행위로 끝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겠지요.
성체성사의 정신, 영성, 교훈이 하루 온 종일 우리 삶 가운데 자주
기억되고 반복되도록 노력하라는 부탁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체성사에 참여했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성체성사는 우리를 가만 두지 않습니다.
성체성사의 핵심정신인 희생과 자기증여로, 선교에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가난한 이웃들에게로 버림받고 고통당하는 이웃들에게로
우리를 파견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성체성사를 거행했다면 우리는 편안하게 지낼 수가
없습니다. 성체성사의 중요한 요소인 화해와 용서에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을 포기하고 이타적인 삶을 살도록 우리를
촉구합니다. 결국 우리를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영성체를 했다면 우리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체성사는 우리로 하여금 지연이나 학연, 빈부격차, 인종이나 국가
등등의 모든 장벽을 허물어뜨리게 합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세상 끝으로, 분쟁지역으로 우리를 나아가게 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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