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0일 등(燈)은 기름을 기름은 등을 필요로합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8-30 05:47:56    조회 : 228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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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9년 다해 8월30일 [(녹)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제1독서 테살로니카 1서 4,1-8 복음 마태오 복음 2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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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이 감정만으로 안 되는 이유 2019년 다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사랑이 감정만으로 안 되는 이유> 복음: 마태오 25,1-13 이런 것이 일반적인 이별 공식이라 합니다. 첫눈에 빠져 서로에게 콩깍지가 단단히 씌었다면 서로 모든 것이 완벽해서 이 사람은 언제나 이렇게 영원히 내 곁에서 변치 않는 사랑을 줄 것이라 확신하게 됩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콩깍지가 벗겨지는 때가옵니다. 변치 않을 거라던 영원한 사랑은 조금씩 변해갑니다. 하지만 원래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의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일 뿐입니다. 상대의 변화 때문에 더 빨리 섭섭해 하는 쪽은 일반적으로 여자입니다. 남자는 일과 사랑의 중요성을 50:50으로 여긴다면 여자는 거의 100%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더 빨리 신경을 다른 쪽으로 옮기기 때문에 여자는 조금 지나칠 정도로 남자의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그런 처지에 놓인 자신이 비참하여 변한 남자를 비난합니다. 남자는 영문도 모른 체 무언가 잘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다가 여자가 변했다고 믿게 됩니다. 자신이 처음에 봤던 그 모습이 아니라고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양쪽 다 사랑의 마음이 식게 됩니다. 이 위기를 어떻게 잘 극복해내느냐에 따라 관계가 오래가던가, 거기서 끝나던가 하게 된답니다. 하느님과 우리와의 관계로 따지자면 하느님은 남자이고 우리는 여성입니다. 오늘 복음은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대하는 두 가지 부류의 신앙인의 모습이 나옵니다. 한 부류는 관계를 잘 유지할 줄 아는 현명한 처녀들이고, 다른 부류는 그렇지 못한 처녀들입니다. 예수님은 이 예화를 우리가 잘 이해하여 당신과의 이별수순을 밟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두 부류 모두 등잔을 들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입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기름이 넉넉히 보충되어 있었고, 다른 처녀 부류는 처음엔 기름이 있었으나 이내 말라버렸습니다. 만약 기름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한다면 이 두 부류는 이렇게 나뉠 것입니다. 어떤 부류의 신부는 신랑을 위한 사랑의 불이 꺼지는 일이 없고, 또 어떤 부류는 켜졌다 꺼졌다 하는 것입니다. 좋았다, 싫었다 하는 것입니다. 한 부류는 사랑에 변함이 없고 다른 부류는 오락가락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감정만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의지’도 있어야합니다. 현명한 처녀들은 사랑의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규칙적으로 사랑을 채워 넣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기름은 신랑에게서 채워 넣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신랑을 위해 타는 것이지 신랑에게 받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사랑의 주인은 오로지 하느님이고, 그 연료는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려면 기도해야합니다. 그 기도로 사랑이 불타고 있어야 예수님을 맞을 준비가 된 것입니다. 사랑은 누군가를 만나기 전에 이미 불타게 만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랑의 감정은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것과 무관합니다. 상대를 위해 내가 미리 준비해 놓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늦게 오니 불을 꺼뜨려버렸습니다 사랑이 내가 만나는 상대가 나에게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변할 수 있게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상대가 잘해주면 좋고 서운하게 하면 화를 냅니다. 결혼했다면 그 결혼은 상대고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어서 주님께서 맺어주셨다고 믿어야 할 텐데, 조금만 상대가 마음에 안 들면 ‘헤어질까?’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랑은 감정입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내가 만나는 상대가 나에게 대하는 것에 좌지우지 되게 놓아두었다가는 금방 꺼져버립니다. 사랑의 감정은 소진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감정이 마르지 않게 규칙적으로 기름을 채우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랑하고 싶다면 기도하는 시간을 규칙적으로 가져야 합니다. 차에 기름도 소진되기 전에 채워야 하기에 주유소에 가야하는 것과 같습니다. 차 안에서 스스로 기름이 솟아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싶다면 규칙적인 기도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싶다면 그만한 의지를 기도시간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감정에 의지가 결합되어 완전하게 됩니다. 헤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람을 피워서? 못생겨서? 지겨워져서? 지쳐서?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등등의 수많은 이별의 이유를 대도 실은 모두 변명일 뿐입니다. 이유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고자 하는 의지가 결여되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려는 의지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의지가 있으면 상대가 어떻든 나의 감정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도 성령의 열매이기 때문에 이 세상 것들에 휘둘리지 않습니다. 사랑을 감정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미련한 처녀들입니다. 거기에 의지를 결합시킨 사람들이 현명한 처녀들입니다. 사랑하기로 했다면 상대의 상태가 어떻게 변하든 나의 사랑의 불은 그대로 타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기도를 해야 합니다. 사랑은 상대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보충해야합니다. 사랑의 불을 꺼뜨리지 않기 위해 얼마나 꾸준히 기도하느냐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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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연중 제21주간 금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가 등불을 가지고 예수께서는 하늘 나라를 혼인잔치에 비유하신다. 여기서 슬기로운 처녀들과 어리석은 처녀들은 믿는 이들과 믿지 않는 이들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관계되는 이야기이다. 이들은 우리로서 보편신앙을 가지고 있고 교회 안에서 선행을 하고 있는 이들이다. 여기서도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다.”(2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시간이 얼마 남았는지 헤아리고서 신랑의 오심에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신랑이 언제 오더라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는 이들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처녀들은 방종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잊어버리고, 현재의 것들에만 마음을 쏟으며 노력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랑이 언제 올지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모두가 등을 가지고 있었는데, 등을 가지고 있던 처녀들 중에서도 어떤 처녀들은 슬기롭고 어떤 처녀들은 어리석었다고 한다. 무엇으로 그렇게 구분할까? 그 차이는 기름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였다. 이 기름의 의미는 아주 큰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사랑이다. 왜냐? 사도 바오로께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제 여러분에게 더욱 뛰어난 길을 보여 주겠습니다.”(1코린 12,31)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1코린13,1) 이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모든 것 위에 있는 뛰어난 길”이며 기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름은 모든 액체 위에 뜬다. 기름에 물을 부으면 기름이 뜬다. 또 기름 위에 물을 부어도 기름은 위로 뜬다. 이 기름은 “더욱 뛰어난 길” 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사랑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 신랑이신 주님을 맞이할 수 없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순간에 대한 준비만 하고 앞날은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리석었고, 슬기로운 처녀들은 앞날에 대비하여 사랑의 행실을 쌓아 기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슬기로웠다. 그런데 신랑이 늦어진다. “신랑이 늦어지자 처녀들은 모두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 신랑은 “한밤중”에 온다. 가장 예기치 못한 시간을 말한다. “신랑이 온다!”(6절) 처녀들은 저마다 등불을 챙긴다. 어리석은 처녀들은 슬기로운 처녀들에게 “우리 등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나누어 다오.”(8절) 슬기로운 처녀들은 “안 된다. 우리도 너희도 모자랄 터이니 차라리 상인들에게 가서 사라.”(9절) 하였다. 하느님 앞에서는 선을, 사랑을 얻을 수도 빌릴 수도 없는 것이다. “준비하고 있던 처녀들은 신랑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혔다.”(10절) 그 뒤에 어리석은 처녀들이 왔다. 그들은 기름을 사가지고 왔을까? 기름을 파는 사람들을 만났을까? 아니다. 단지 문이 닫혀있는 것만을 본다. 문을 두드리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12절) 그러니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는 삶을 항상 노력하며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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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마태 25, 6)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8월30일 금. 신랑이 온다. 신랑을 맞으러 나가라. (마태 25, 6) 주님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 슬기롭고 어리석은 우리가 있습니다. 같은 목적지를 바라보면서도 사뭇 다른 우리들 삶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않는 우리들 모습입니다. 준비없이 만나는 시간에는 언제나 아픔만 있습니다. 등(燈)은 기름을 기름은 등을 필요로합니다. 주님을 기쁘게 만나는 것이 우리 삶의 참된 목적입니다. 목적 없이 그냥 살았던 지난 시간을 반성합니다. 어떠한 만남이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만남과 마음은 등과 기름처럼 분리될 수 없습니다. 매순간이 말씀의 기름이 필요한 만남의 여정입니다. 슬기로운 준비의 시간을 걸어가는 순례자의 기쁜 여정되시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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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2019년 다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사도 바오로의 데살로니카 1서 말씀은 오늘 우리를 거룩함에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바로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데살로니카 1서 4장 3절) 어떤 사람들은 거룩함에 대해 약간의 거부감이랄까, 더 나아가서 약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옛날 기억이 납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안에서 누군가가 조금 거룩하게 사는 분위기를 풍기면 ‘상뚜스’라고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인들 여러 그룹 가운데 바리사이라는 나름 잘 나가던 그룹, 자칭 거룩한 그룹이 있었습니다. 사실 바리사이란 용어 자체가 ‘분리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 무엇으로부터의 분리이겠습니까? 죄와 우상숭배, 불결함과 이방인으로부터 분리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은 스스로를 죄투성이인 인간들과는 철저히 분리되는, 거룩하고 고결하며 깨끗하고 무죄한 존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종래 바리사이들이 지니고 있었던 제한적이고 그릇된 거룩함을 날카롭게 질타하시며, 거룩함의 개념을 대폭 확장시키십니다. 주님께서는 거룩함이 더 이상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 사제들이나 레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다 보편적인 것임을 선언하십니다. 세리나 죄인들도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선다면, 충분히 거룩한 사람이 될수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유다인들 시선으로 볼때 거룩함과는 거리가 먼 이방인이나 창녀들도, 두 팔 벌려 예수님을 구세주로 고백하면, 얼마든지 성인성녀가 될 가능성이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예수님의 거룩함에 대한 가르침을 고스란히 전수받으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더 이상 거룩함이 교회 만의 것만이 아님을, 교황이나 주교, 사제나 수도자의 전유물이 아님을, 교황 권고‘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를 통해 명쾌히 설명하고 계십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주교나 사제나 수도자가 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는 흔히 성덕은 일상생활과 거리를 두고 많은 시간을 기도에 할애할 수 있는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 사랑으로 살아가고 각자 어디에 있든 날마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서 고유한 증언을 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고 있습니다. 봉헌생활자입니까? 자신이 봉헌한대로 기쁘게 살아가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결혼한 사람입니까?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듯 자기 배우자를 사랑하고 배려하면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 보기가 너무 민망하기도 하고, 분노가 솟아 올라, 함께 생활하시는 수녀님들과 촛불을 들러, 서울 나들이를 몇번 다녀왔습니다. 그랬더니 여기저기서 들어오는 피드백이 만만치 않았습니다. ‘대체 사제요 수도자가 되서 그게 뭐하는 짓이냐? 시국이나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성당 안에서 기도 열심히 하시면서, 거룩하게 살면 좀 좋냐? 정 그러고 싶으면 사제복을 벗고 본격적으로 정치판에 뛰어들어라!’는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곰곰히 묵상해보니, 그 말씀도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많은 반성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석연치 않았습니다. 할 수 없이 존경하는 직속 상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정답이겠구나 싶어, 그분의 가르침을 찾아봤습니다. 고민고민하는 제게 교황님께서는 너무나 간단히, 단칼에 명확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세상의 일이 곧 교회의 일입니다. 세상 속 동료 인간들이 겪는 희로애락은 곧 우리 교회의 희로애락이어야만 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겪고 있는 기쁨과 슬픔, 절망과 희망으로부터 우리 교회가 분리되어, 홀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살아가서는 절대 안됩니다.” “좋은 가톨릭 신자라면 당연히 정치에 관여해야 합니다. 스스로 최선을 다해 참여함으로서 통치자들이 제대로 다스리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통치자들에게 제공할수 있는 최선의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기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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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2019년 다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 같이 있던 신부님이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갔습니다. 한의원은 매번 광고를 내주시기에 인사를 드릴 겸 함께 갔습니다. 80이 넘으신 원장님은 어린이와 같은 미소로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 우리의 몸은 백만이 넘은 신경이 있으며, 우리의 혈관은 11만 킬로가 넘는다고 하시면서 우리의 몸은 신비롭다고 하였습니다. 친절하신 원장님은 제게도 침을 놓고, 쑥뜸을 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좋으신 분을 만나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스승과 제자가 길을 가다가 낡고 초라한 집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삶에 지쳐 보이는 부부는 스승과 제자를 위해서 우유와 치즈를 준비해 주었습니다. 가난한 부부에게 따뜻한 대접을 받은 스승은 어찌 이리 힘들게 사느냐고 물었습니다. 부부는 대답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늙은 암소가 있습니다. 암소가 주는 우유를 먹고, 치즈를 만들고 근근이 살고 있습니다. 다음 날, 스승은 길을 떠나면서 제자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 집의 소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리시오. 제자는 스승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스승의 영적인 힘을 믿고 소를 절벽 아래로 떨어트렸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고 제자는 우연히 가난한 부부의 집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집은 없어졌고, 번듯한 집이 있었습니다. 집에는 예전의 나약한 부부가 아니라 건강해 보이는 부부가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어찌 된 일인지 물으니 부부는 대답했습니다. 어느 날, 암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있는 힘을 다해서 약초를 캐고, 밭을 가꾸고, 기술을 배웠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번듯한 집에서 남 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을 깨달았습니다. 젊은 부부에게 늙은 암소가 있으면 암소에 의지해서 다른 일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암소가 없으니 젊은 부부는 각성하게 되었고,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문득 우리 안에 있는 ‘암소’는 무엇인지 생각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과거의 잘못된 삶으로 가려는 생각이 암소입니다. 거룩한 삶을 살도록 배웠고, 초대되었지만 욕망에 따라 살려는 마음이 암소입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마음이 암소입니다. 엄중한 국제 정세를 외면하고 당리당략으로 싸우는 정치인들의 행태가 암소입니다. 혼인 잔치에 초대되었으면 등과 기름을 준비해야 하는데 기름을 준비하지 않았던 게으름이 암소입니다. 제게도 분명 암소는 있습니다. 타성에 젖어서 현실에 안주하려는 암소입니다.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으려는 암소입니다. 스스로 일어서기보다는 누군가에 의지하려는 암소입니다. 저도 암소를 과감하게 버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내 안의 ‘암소’는 버리고 ‘기름’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하나는 ‘거룩함’의 기름입니다. 거룩함의 기름을 준비한 사람은 근심하고 걱정하기 전에 먼저 기도를 합니다. 내 앞에 놓인 장애물이 없어지기를 바라지 않고, 그 장애물을 넘을 수 있는 용기를 청합니다. 거룩함의 기름에서는 ‘겸손, 배려, 나눔, 친절, 사랑’의 불꽃이 피어납니다. 다른 하나는 ‘식별’의 기름입니다. 지금 느끼는 기쁨과 행복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기쁨과 행복이라면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 됩니다. 지금 느끼는 고독과 아픔이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한 고독과 고통이라면 이겨낼 수 있는 용기와 인내를 청하면 됩니다. 지금 느끼는 기쁨과 행복이 나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과감하게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느끼는 고독과 아픔이 분노와 원망 때문이라면 그 분노와 원망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뜨거운 여름 햇빛이 없다면 알곡을 맺을 수 없습니다. 가을의 풍요로운 결실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거룩함’과 ‘식별’의 기름을 준비하지 않으면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 또한 좋은 기름을 준비하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시차 때문에 하루 먼저 올려 달라는 문자가 와서 하루 먼저 올리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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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한결같은 삶|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금요일(마태25,1-13) 누가 보나 보지 않나 한결같아야 한다. 맥시칸의 결혼식과 인도 사람의 결혼식, 그리고 미국인들의 결혼식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서로 문화가 다르지만 복을 빌어주고 헤어지지 않기를 기원하며 자녀의 풍요를 누리기를 바라는 기원은 비슷하게 느껴졌습니다. 말은 잘 통하지 않지만 신랑신부를 끈으로 묶는 행위라든지 반지를 교환하고 부모가 자녀에게 쌀을 뿌리는 행위를 통해서 복을 기원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계약의 선언 후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는 모습을 통해 신앙인의 모습을 새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의 결혼 풍습은 약혼을 먼저 합니다. 그리고 약혼으로 법적인 혼인이 성립되지만 약 1년간은 신부가 친정에 머물러 있고 부부관계를 맺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신랑이 친구들과 함께 신부 집으로 갑니다. 신부 집에서는 신부 친구들이 등불을 밝혀 들고 신랑을 마중합니다. 그리고 신랑 일행이 도착하면 함께 들어가 밤새도록 잔치를 벌입니다. 왠 등불이냐고요? 사막지역은 낮에는 너무 더우니까 밤을 이용하는 거죠. 그렇다면 오늘 비유에 등장하는 처녀들은 신부의 친구들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섯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고 다섯은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신랑이 일찍 왔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늦어져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실 등잔에 기름이 없으면 있으나마나 입니다. 따라서 등잔불을 밝히려면 언제나 기름을 준비해야 합니다. 저는 하루일정을 마감하며 자동차의 주유상태를 확인합니다. 혹 급한 일이 있어도 일정거리를 갈 수 있도록 하기해서 입니다. 간혹 미처 확인을 하지 못하는 날이면 하필 그날에 일이 생기고 시간에 쫓기게 됩니다. 하루쯤이야! 하고 방심하는 그날이 심판의 날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가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이다”(마태25,13). 기름을 채운다는 것은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관계형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느님의 말씀을 새겨듣고 실천에 옮긴다는 말씀입니다.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였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도 행하지 않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깊은 우정을 쌓는 것은 누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천상잔치에 참여하기위해서는 늘 깨어 준비해야 합니다.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 날과 그 시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혼인 풍습은 다르지만 그 안에 예식이 의미하는 알맹이가 있듯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 하기위해서는 행동하는 믿음의 알맹이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예기치 않은 시간에 갑자기 오시더라도 더 큰 기쁨으로 감당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 한 바로 그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한 순간을 소홀히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천국에 가면 놀랄 3가지가 있는데 1). 와야 될 사람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오지 않은 것이고 2). 못 올 것 같다고 생각한 사람이 와 있는 것이며 3). 내가 거기 와 있다는 것입니다. 천국에 가면 남아있는 사람에게 미안한 것도 있는데 1). 이렇게 좋은 곳에 혼자 와 있어서 가족에게 미안하고, 2). 나를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가족들에게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어서 미안하고 3). 내 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주님의 보혈, 성인들의 통공과 가족, 이웃들의 희생과 기도로 온 것이기에 미안하답니다. 천상의 행복을 누리는 것은 내 공로가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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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타] 예수의 삶이 내 삶 오늘은 ‘예수의 삶이 내 삶’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내 속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평생을 자신을 믿고 살았습니다. 자신의 지식은 남보다 뛰어나고 자신의 학벌 또한 당시 가마리엘 문하생으로 타의 추종을 불허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으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어느 누구에게도 기죽을 필요가 없는 바울이었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하늘에서 빛이 비추고 그 빛을 쳐다본 뒤 눈이 멀었습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3일 동안 맹인으로 살아야 했습니다. 상상도 해보지 못하고 꿈에도 꿔보지 못했던 처절한 절망을 3일 동안 겪으면서 진정한 인생의 의미는 내 힘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화장실도 혼자 갈 수 없고 밥도 혼자 먹을 수 없었습니다. 혼자는 한발자국도 떼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을 처절하게 체험한 바울은 아나니아라는 선지자의 기도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토록 핍박하던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다시 눈을 뜨게 된 것을 알고 예수를 위하여 생명을 바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힘으로도 우리는 나 자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의 삶에 중심에서 그 예수님의 삶을 대신 살아갈 때 진정한 승리의 삶이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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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침과 밤의 노래...12 Edward Elgar Wo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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