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6일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9-06 06:06:50    조회 : 228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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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9년 다해 9월6일 [(녹)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제1독서 콜로새서 1,15-20 복음 루카 복음 5,3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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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정신을 잃은 법 2019년 다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정신을 잃은 법> 복음: 루카 5,33-39 어쩌면 우리나라에서 현재 가장 잘 나가는 강사는 김창옥 씨일 것입니다. 강의를 할 때 긴장을 전혀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강의를 잘 하는 줄은 안다고 합니다. 한 번은 그가 한 기업에서 남성 500명에게 강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강의는 너무 재미있게 잘 끝났습니다. 그런데 책임자 몇 명이 오더니 막 야단치는 것이었습니다. 여성비하 발언을 너무 많이 해서 난리가 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반성문을 요구하였습니다. 김창옥 씨는 수천 번을 강의한 내용이었고 다른 곳에서는 아무 항의도 없었으며 심지어 자신이 그런 이야기를 할 때 그들도 재미있게 웃고 들었으면서 이제 와서 그러느냐고 따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강의료는 받아야하니까 참고 반성문까지 작성해서 보냈습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강의를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미움이 자꾸 솟구쳤습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습니다. 김창옥 씨는 딸이 유치원에 다니면서도 대변을 자신보고 닦아달라는 것이 이해가 안 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도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행히 두 명이 그를 판단하지 않고 그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마치 대변을 다 보고난 듯 마음이 가벼워졌습니다. 그러고 났더니 비로소 자신의 잘못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앞으로는 이런저런 발언은 삼가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것입니다. 기분이 좋아지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말하지 않아도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면 옳고 그름은 둘째고 기분 나쁘게 한 사람을 미워하게 됩니다. 독화살을 맞았는데 화살은 뺄 생각을 못하고 누가 쐈는지부터 찾는 것과 같습니다. 옳고 그름을 잘 따진다고 해서 그 말이 효과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기분을 살펴야합니다. 감정이 해결되지 않으면 옳고 그름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급류에 떠내려가는 사람에게 아침은 왜 안 먹었느냐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잔소리는 항상 옳지만 상대의 기분을 살피지 않기 때문에 잘 먹히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이 옳고 그름을 자꾸 따지게 되는 이유는 사랑의 정신을 잃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어떤 수녀님이 당신 수녀회의 회칙이 자꾸 복잡해지는 것에 대해 우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윗분들은 세세한 규정을 정해 놓아야 그때그때 편하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라 여겨 모이면 새로운 규칙들을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썩 긍정적인 모습은 아닙니다. 가족에 법이 생기면 어떨까요? 남편이 언제 일어나서 무얼 해야 하고 언제까지 들어와서 집에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확히 규정되어 있다면 그곳은 가정이 아니라 감옥일 것입니다. 아버지의 정신, 어머니의 정신, 자녀의 정신만 올바로 갖고 있다면 세세한 규정은 필요 없습니다. 세세한 규정이 생긴다는 것은 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드는 정신이 사라지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런 상태에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법은 서로 사랑하라는 것 하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모든 율법의 정신입니다. 그것을 알아듣지 못하니 하느님께서는 10가지로 규정을 정해주셨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 규율을 613개 항으로 세세히 구분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안 되어 관습법을 만들어 수천 개의 규정을 세웠습니다. 이렇게 모든 규정은 다 지키는데 사람은 미워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법에 얽매여있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에게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들은 단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불평합니다. 단식의 정신은 신랑을 되찾기 위함입니다. 육체를 죽여야 영이 강해지기 때문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있는데도 단식을 하면 그것은 예수님께 무례가 됩니다. 이에 예수님은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는 즐거운 자리입니다. 그리고 그 즐거운 자리가 되는 이유는 신랑이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어서 기분이 좋은 지부터 살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따지는 법들은 정신을 잃은 트집 잡기에 불과하게 됩니다. “이래야 당연한 거 아니야?”, 혹은 “저래야 당연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며 싸움을 한다면 잠시 멈추고 먼저 ‘지금 사랑하고 있고 그래서 기분이 좋은가’부터 살펴봅시다. 그렇지 않다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정신을 잃은 법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는 상대에게 적용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사랑하여 기분이 좋은 지부터 살피고 옳고 그름을 말해야합니다. 그래야 새 옷에 새 천 조각을 대어 깁는 것이고,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것입니다. 기분과 법 둘 다 지킬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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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연중 제22주간 금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복음: 루카 5,33-39: 단식의 정신 자기들만이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과 그 제자들의 삶을 볼 때, 자기들과 같이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재도 지키지 않고,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을 보면서 그렇게 살면서도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겠느냐고 비난한다. “요한의 제자들은 자주 단식하며 기도를 하고 바리사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기만 하는군요.”(33절) 그들의 단식하고 기도하는 모습은 어떠했는가? 유대인들 중에는 진정 열심히 단식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나, 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을 하는데, 해 뜰 때부터 해질 때까지 단식하고 그 외는 먹을 것을 다 먹었다. 재를 지키는 것을 모두 드러내어 남에게 과시했고, 또 그에 대한 대가를 하느님께서 주시리라고 믿는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희생과 단식이 하느님 앞에 죄를 보속하는 경건한 마음으로 하고 이웃을 이해하고 무엇인가 함께 하는 사랑의 정이 있었다면 별 문제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단식하는 의미가 그런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지 않는 재는 지키지 않은 것과도 같은 것이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을 할 수야 없지 않느냐?”(34절)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을 혼인 잔치의 기간으로, 그리고 당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신다. 제자들을 손님으로 표현하신 것은 그들이 교회의 구성원이며 잔치의 주관자들이고, 잔칫상에 앉을 이들을 부르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단식을 할 수 없다.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배불리 먹기 때문이다(요한 6,53 참조).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35절) 신랑을 빼앗기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서 떠나가신 날,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 28,20)고 하신 날,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고 하신 날이다. “아무도 새 옷에서 조각을 찢어 내어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36.37절) 형식적인 율법에 매인 사람은 그리스도의 제도를 받아들일 수 없다.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다. 하느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도 항상 새로운 자세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가난한 마음, 즉 이전의 내가 아닌 진정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세를 가지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묵은 나라고 하는 것은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반대로 행하려 하기 때문에 그 낡은 부대에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진정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으로 그분의 말씀을 담는 우리가 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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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루카 5, 39)|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6일 금.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는다. (루카 5, 39) 새 포도주를 만나는 향기로운 시간입니다. 새 포도주를 만나고 받아들이지 않는 우리들 삶입니다. 새 포도주 맛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어제의 포도주와 오늘의 포도주는 다르듯 매순간이 새로운 시간입니다. 우리를 위한 새 포도주이심을 깨닫게됩니다. 매순간이 새 포도주를 맛보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묵은 포도주는 묵은 포도주로 이어지고 새 포도주는 새 포도주로 이어집니다. 우리 영혼에 스며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으로 새 포도주를 전해야 할 우리들 삶입니다. 생명의 길에 새 포도주가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그 새 포도주가 될 때입니다. 용서하시는 새 포도주의 삶을 따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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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결국 ‘내 생각만 옳다! 내 방식이 최고다! 우리가 제일 앞서 있다!’는 우월의식, 선민의식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2019년 다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결국 ‘내 생각만 옳다! 내 방식이 최고다! 우리가 제일 앞서 있다!’는 우월의식, 선민의식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옥중서간(獄中書簡)! 듣기만 들어도 가슴이 싸하게 아려오고, 코끝이 찡해지는 표현입니다. 오래 전 함께 살았던 문제아들 가운데, 이제는 성인이 되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인생이 잘 안풀린 친구들이 가끔씩 저에게 옥중서간을 보내줍니다. 요즘 보기 드문 손편지입니다. 한자 한자 정성을 다해 꾹꾹 눌러썼습니다. 달필 중에 달필입니다. 교도소 안에 문예반도 있는지, 내용도 수준이 상당합니다. 자신의 지난 부족했던 삶에 대한 회한과 앞으로 남은 인생에 대한 굳은 결심과 각오가 생생하게 느껴지며 큰 감동을 줍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옥중서한을 쓰셨습니다. 대체로 에페소서, 필립피서, 필레몬서, 콜로새서, 이 네 개의 편지를 옥중서한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만, 정말로 바오로 사도가 직접 쓰셨을까? 하는 친저성 (親書性)에 논란이 있지만, 옥중서한 한편 한편은 참으로 매력적인 편지들입니다. 모든 것이 제한된 깊은 감옥에서의 큰 고통 속에서도, 담장 너머 그리스도 신자들 신앙의 성장을 위해 끊임없이 격려하고 고무하는 교회 지도자의 모습들에서 큰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옥중서한이라고 분류하고 추정하는 근거가 되는 성경 구절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주님 안에 수인이 된 나 바오로는 권고합니다.”(에페소서 4장 1절), “내가 갇혀 있는 것이 그리스도 때문이라는 사실이 온 부대와 그 밖의 모든 이들에게도 분명히 알려졌으며…”(필리피서 1장 13절)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갇혀 있는 나 바오로와 교우 디모테오가 우리의 사랑하는 협력자 필레몬 그대와…”(필레몬서 1장 1절) “여러분은 갇혀 있는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 은총이 여러분과 함께 있기를 빕니다.”(콜로새서 4장 18절) 콜로새는 소아시아 지역 리쿠스 계곡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이 지역은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간선도로에서 30킬로 이상 떨어져 있는 오지였기에, 긴요한 용무가 없는 한, 사람들은 이곳을 지나쳐갔습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콜로새를 한번도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오지 콜로새에도 주님의 복음이 전파되었고, 그리스도교 교회가 설립되었습니다. 지리적으로 오지인데다, 에페소 교회와도 꽤 거리가 있었던만큼, 이 교회 그리스도교인들의 신앙과 삶에 약간의 고립과 문제가 있었습니다. 초기 콜로새 교회가 안고 있던 문제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단적 요소였습니다. 아무래도 초기 교회다보니 그리스도교 신앙과 유다교 신앙, 그리스 철학이 뒤죽박죽된 일종의 종교 혼합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단을 선포하는 지도자들의 가르침 중에 크게 그릇된 것은 자기들만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자신들은 다른 지역 그리스도교 교회 신자들보다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을 훨씬 더 깊이있게 이해하고 있다고 자부했습니다. 결국 ‘내 생각만 옳다! 내 방식이 최고다! 우리가 제일 앞서 있다!’는 우월의식, 선민의식이 그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었습니다. 더 큰 위험성은 그들이 예수님의 신성을 배척한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콜로새 교회 공동체를 위협하는 이단적 교의, 특히 종교 혼합주의, 그리고 그릇된 사고방식의 위험성을 지적합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회 주변에서도 많은 이단들과 이단적 가르침들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 사회 안에서도 백성들을 큰 혼란 속으로 몰고 가는 그릇된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와 사회의 지도층 인사들의 균형 잡힌 가르침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입니다. 방황하는 백성들이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구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명확한 가이드 라인을 제공하는 것, 많이 배우고, 많이 연구하고, 많이 기도한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중요한 책무입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콜로새서 구절은 ‘그리스도 찬가’라고 불립니다. 우주의 창조주이자 우주 구원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장엄하게 찬미하고 기리는 노래입니다. 그리스도 찬가에서는 예수님을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모든 피조물의 맏이’로 선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전체 자연 질서 위에 계신 분이시며, 만물은 그분 안에서, 그분을 통해서 창조되었음을 강조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음을 선언합니다. ‘온갖 충만함’은 하느님의 완전성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완전성이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내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장엄한 찬가는 역사 속 인물인 나자렛 예수님을 하느님의 육화하신 아드님으로 선포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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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2019년 다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 신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배웠습니다. 학점은 3학점이었습니다. 사제는 ‘제2의 그리스도’라고 배웠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론은 중요하고도 어려운 과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여러분은 나를 누구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었고, 자신들이 생각했던 예수님을 이야기했습니다. 시몬 베드로는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이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사도들의 이해는 ‘하느님의 아들’입니다. 요한 사도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셨습니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고, 우리의 생각, 우리의 언어로 우리에게 다가왔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저기 하느님의 어린양이 가신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이해했습니다. 어린양은 공동체를 위한 희생 제물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제단에 이사악을 바치려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지만 하느님의 뜻이라며 받아들였습니다. 제자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목숨을 바쳤습니다.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종교는 이런 ‘희생’을 이야기합니다. 인류가 문명과 문화를 만들었다면 그것은 인류의 지성과 이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고난을 받고 죽어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박해했던 바오로 사도는 영적인 체험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박해하였던 예수님이 바로 ‘구원자’임을 체험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를 방문하였고, 공동체를 위해서 편지를 보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우리를 죄로부터, 악으로부터,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가 공동체에 전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역사의 예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복음을 선포하신 분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 하느님의 의로움 드러나는 나라입니다.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뜻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이 하느님 나라는 명예, 권력, 재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만들어가는 나라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새로운 권위를 지닌 예수님의 말씀과 표징입니다.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따듯하게 품어주는 자비로운 아버지처럼 우리도 거룩하고 자비로운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입니다. 죄를 범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기 전에 나의 가식과 위선을 돌아보라는 가르침입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 떡 다섯 개는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일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우리의 몸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이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누가 나의 이웃인가를 생각하기보다는 누가 지금 상처받고 있는 이의 이웃인가를 생각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표징을 따라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탁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사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십자가를 지고 비참한 모습으로 죽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복음이 되셨습니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다락방에서 나왔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의 부활이 없다면 교회도, 신앙도, 희망도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부활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소생입니다. 부활은 애벌레가 나비가 되어 높은 하늘을 날아오르듯이, 삶의 변화입니다. 절망에서 희망으로의 변화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의 변화입니다. 의혹에서 믿음으로의 변화입니다. 욕망, 시기, 질투, 원망의 삶에서 헌신, 나눔, 용서, 사랑의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던 사람은 새 포도주를 원하지 않습니다. 사실 그런 사람은 ‘묵은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변화된 삶을 살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 술을 새 부대에 담는 삶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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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9월6일 연중 제22주간 금요일(루카 5,33-39) 불을 위하여 등잔이 있다. 새것과 헌 것은 충돌하게 마련입니다. 헌 것이 다 나쁜 것도 아니고 새것이 다 좋은 것만도 아닙니다. 그것이 어떻게 쓰이느냐가 중요합니다. ‘등잔을 위하여 불이 있지 않고 불을 위하여 등잔이 필요한 이치’입니다. 단식은 슬픈 일이 있어서, 뜻이 있어서 합니다. 슬픈 일이 없는데, 오히려 기뻐해야할 날에 단식을 하는 것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단식은 단순히 밥을 굶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묵은 것이 아무리 좋다하더라도 새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는 항상 준비되어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단식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단식을 하셨듯이 하느님으로 가득 찬 나머지 하느님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기 위해 세상적인 모든 것을 내려놓고 하느님으로 채울 수 있을 만큼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합니다. 단식은 하느님께로 가는 방법의 하나일 뿐 목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차지하도록 준비시켜주고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수단입니다. 수단을 목적으로 정당화 시킬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루카5,37-38).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의 전통과 아집, 지식 때문에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하신 말씀입니다. 묵은 것은 익숙한 것이기에 편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편안함이 우리를 마비시키기도 합니다. 과거의 경험과 지식에 안주하여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마치 내 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나이든 사람들이 쉽게 노여움을 타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여러 이유가 있지만 자신의 삶의 경륜과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하고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말에 동조하고 아첨하는 사람만 좋아하는 함정에 빠지게 됩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기도를 많이 하고 오래 단식한다는 이유로 스스로 성스럽다고 믿고 있지만 거룩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찾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찾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거룩한 체 하지 않았고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성령으로 가득 차 있어서 거룩했습니다. 사목자들이 구교신자들이 많은 지역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는데 그곳에는 성직자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남다르기도 하지만 아주 고집스런 분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어느 신부도 알고, 어느 수녀도 알고, 누구는 예전에 어떻게 했는데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다는 등 말도 많고 아는 것도 많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일수록 정작 본인은 새 영세자만도 못한 신심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틀 안에 갇혀서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의 경륜을 보아서는 모두를 품을 것 같은데 그 속이 밴댕이요, 좁쌀입니다. 우리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따라서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도 배려하면서 믿음의 쇄신을 이루어야 합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어머님께 말했습니다. “여인이여! 당신이 전에 부르던 아우구스띠노는 이미 죽었고, 지금의 나는 그리스도님과 함께 사는 아우구스띠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해야 할 참 변화라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변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님의 수난의 모습을 닮는 것이요, 영광으로 변하는 것입니다”(성 아타나시오). 새로운 가르침은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가르침은 “다시 근본으로 돌아가는 가르침”입니다. 시련과 역경, 모든 혼돈 속에서 다시금 주님을 삶의 중심에 모실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밥을 굶기 위한 단식을 하지 말고 근본을 회복하는 단식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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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타] 강하고 담대하라 오늘은 ‘강하고 담대하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여호수아서 1장 5절~8절 말씀에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니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그들이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한 땅을 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지전능하신 이 엄청난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거나 자신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줄 때 왜 이렇게도 기죽은 모습입니까? 왜 이렇게도 당당하지 못합니까?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하십니다. 우리를 대적할 자가 없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시고 강하고 극히 담대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선물해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십니다. 결코 세상을 향하여 기죽지 마십시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딸이 아닙니까!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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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모차르트/마술피리 제2막 이 신성한 전당에서는 복수를 생각할 수 없어 In diesen heil'gen Hall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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