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8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9-08 06:03:36    조회 : 194회    댓글: 0

▣ 2019년 다해 9월8일 [(녹) 연중 제23주일]

제1독서 지혜서 9,13-18
제2독서 필레몬서 9ㄴ-10.12-17
복음 루카 복음 14,2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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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2019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주일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복음: 루카 14,25-33

1940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더불어 유태인 학대를 피해 수많은
유태인들이 리투아니아로 몰려듭니다. 구소련은 리투아니아내의 각국
대사, 영사관의 폐쇄 명령을 내리지만 마지막 일본 영사관만은 문을
닫지 않고, 피란민들은 마지막 희망을 일본영사관에 걸게 됩니다. 

주 리투아니아 일본 대사 스기하라 지우네는 일본외무성에 문서를 보내
유태인에 대한 비자발급을 허용해달라고 요청하지만 일본 외무성은
그의 3번이나 반복되는 요청을 묵살합니다. 일본 외무성은
대외적으로는 유태인 난민에 대하여 중립적인 입장이라 표명하고
있지만 사실 독일과 협력관계였던 탓에 비자 발급 자격 조건을 다른
난민들에 비해 까다롭게 함으로써 사실상 유대인들에 대한 비자 발급을
제한한 것입니다. 

영사관을 둘러싼 수많은 유태인들을 보며 스기하라는 결국 결심을 하게
됩니다. 물론 이 일이 불러올 파장과 다가올 파면, 불명예, 경제적 궁핍,
가족의 고통이 눈에 선하지만 수많은 생명을 살리는 일이 더 중요한
일이라 판단합니다. 

그는 자격조건을 크게 완화하여 무자격에 가까운 사람들마저도 비자를
발급합니다. 물론 일본외무성의 허락 없이 발행하는 것으로 당연히
문서위조이나 그런 것쯤 상관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위조라 할
만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1940년 7월말부터 9월 초까지 매일 비자를 발급하였으며 막바지에는
거의 하루 300장 정도를 발급합니다. 거의 한 달에 발행하는 분량을
하루에 발급했다 합니다. 2000번대 이후로는 연번호도 적지 않습니다.
영사관이 폐쇄될 때 까지 연번호가 지정되지 않은 비자까지 포함하여
수천 장 이상 발행되었으리라 보고, 비자 한 장으로 한 가족 전체의
입국이 허가됐던 것으로 보면 대략 6천명 이상의 유태인이 비자를
얻었으리라 예상됩니다.

그는 영사관이 폐쇄된 날 리투아니아를 떠나기 위한 열차 안에서까지
비자를 발급합니다. 이후 독일과 소련과의 전쟁이 발발해 리투아니아는
독일군의 수중으로 들어가며 이 기간 동안 리투아니아에서 희생된
유태인들은 20만 명이상입니다.  

리투아니아에서 탈출한 스기하라는 1941년 체코영사관서 근무하였으며
소련의 체코 점령 때 체포되어 수감생활 후 일본으로 송환됩니다. 이후
자국에서 1947년 외무성으로부터 면직됩니다. 전쟁 후 이스라엘 측에서
일본외무성에게 요청한 그의 행방에 대하여 “‘스기하라’라는 외교관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변한 사실로 미루어 괘씸죄가 적용되었으리라는
추측도 있습니다. 

이후 그는 1986년 7월 31일 영면에 들기까지 일본에서 전구를 팔면서
소박하게 여생을 보냈습니다. 스기하라의 이야기가 알려졌을 때, 기자
한 사람이 그의 아들을 찾아가서 외교관으로서 출세의 길을 버린
아버지의 선택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습니다. 그러자 그 아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저는 아버지가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저의 아버지를 필요로 하셨을 때 아버지는 옳은 일을 택했으니까요.”

스기하라는 동방정교회 신자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었습니다.

[참조: ‘생명의 비자: 양심의 법을 존중한 스기하라 지우네’,
아시아뉴스] 

하느님 나라는 소유욕을 버린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마치
층층계단식 논과 같아서 내가 받은 것을 흘려보내주지 않으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이 목이 마르게 되어있습니다. 세포가 각자가 가진 것을
옆의 세포에게 전달해주지 않으면 함께 죽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어줄 줄 모르면 암세포가 됩니다. 본인은 소유하며 살고 싶겠지만
결국 본인도 죽고 이웃도 죽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남에게 좋은 일을 해야 하는 줄은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그런 일을 함으로써 나에게 닥쳐올 가난과 고독, 멸시 등의 어려움이
두렵기 때문에 내어주지 못하게 됩니다. 내어주는 만큼 생기는 결핍에
대한 불안함이 모아들이게만 하는 것입니다. 내어주어 남을 살리는
사람이 되려면 먼저 결핍을 인내할 능력부터 키워야합니다. 

예수님처럼 내어주는 존재가 되기 위해 모든 상황에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친구가 없어도 행복하고 친구가 있어도 행복하며
부유해도 행복하고 부족해도 행복할 줄 아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필요할 때 힘들이지 않고 내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힘들면 아무 것도 내어주기 싫습니다. 저도 처음 유학 가서 말을
배울 때 무척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소유욕이 엄청
증가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행복하지 않은 마음을 물건으로라도 채우고
싶어지기 때문입니다. 

인도와 아프리카 친구와 함께 같은 방을 썼는데, 그들 특유의 냄새는
참아내기 쉽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정말 네 것 내 것의 분별이
없었습니다. 저의 것을 마구 가져다가 쓰고 마치 자신의 것처럼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뭐 그런 것들이 없다고 특별히 불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분별이 없는 그 친구들의 행동에 속이 상하였습니다.
그래서 저의 물건을 찾아서 다시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들보다 더
잘 산다는 것으로라도 만족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
고 하십니다. 미워하라는 말씀은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신경
쓰지 않아야 내어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으려면 다른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이 지금 이 순간 행복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합니다.  

전북 전주의 한 교회에서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이란 푯말을 붙인
상자를 만들고 신자들로 하여금 그 안에 그 같은 물품들을 넣게
했습니다. 그러자 엄청난 내용물이 수집됐습니다. 고급 양주에서부터
외설테이프, 추잡한 액세서리, 불량서적 등이 쌓였습니다. 교회에서는
이것들을 매월 정기적으로 불에 태워버리고 각자 새 생활을 다짐하도록
했습니다. 이것은 경건하고 건전한 가정생활의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이 운동 덕분으로 교회가 크게 부흥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각자의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통”을 만들어야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통”도 만들어야합니다. 내가 다른 행복에 빠져
하느님을 잊게 만드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들도 내어주기 힘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통들에 내 것을 넣으면 죄가 사라지고 광야라는 곳에
머물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시고
40일을 버티셨습니다. 이 능력이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가난과 고독과 지루함, 겉보기는 고통스럽겠지만 친해지면
평화로워지고 있는 것들에 감사하게 됩니다. 적게 가질수록 가진 것에
더 감사하게 된다고 합니다. 

하루에 1시간이라도 기도하기 위해 성체 앞에서 밀려오는 지루함과
싸워봅시다. 혹은 집에서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성경을 1시간만이라도
필사해봅시다. 그러면 사람들과 왁자지껄 노는 것보다 평화로워진다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시간이든, 재물이든 나누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딱 15가지의 물건만으로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도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수천 가지의 물건을
쌓아놓고 삽니다. 없으면 불편할 것 같아서입니다. 불편해도 괜찮을
수 있다면, 부족해도 괜찮을 수 있다면, 아무 오락거리가 없어도 괜찮을
수 있다면 참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자기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먼저 되어야 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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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23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주일 : 다해: 제자가 되는 조건

오늘 전례의 주제는 “참된 지혜”이다. 이 지혜는 지성과도 슬기와도
다른 것이다. 이 지혜는 인간의 역사 전체를 하느님의 빛에 비추어
평가할 수 있는 ‘은총의 선물’이다. 이것은 오직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고 인간의 혼자의 힘으로는 성취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는
지성과 통찰력의 선물일 뿐 아니라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것을 실현시켜 나갈 수 있게 하는 ‘능력’
이기도 하다. ‘지혜’의 완전한 표현을 그러기에 그리스도에게서 찾는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힘이며 하느님의 지혜’(1고린 1,24)이시다.
왜냐하면 신비스러운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그리스도를 통해 실현되고
또 드러난다.

복음: 루카 14,25-33: 그리스도의 제자의 자기 포기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지혜’가 인간들의 지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데 필요한 조건을 표현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는 그 어떤 것도 대적할 수 없는 절대자시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이 헛된 감상에 젖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누구든지
나에게 올 때 자기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
미워하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6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의 ‘항구한’ 생활태도를 가리키는 말씀이다. 즉 당신을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항구하고도’ 철저하게 당신을 선택할 것을
요구하시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다른 사람들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 ‘다음 자리’에 두는 것을 뜻한다. 즉 그분은 언제나
가치서열에 있어서도 우리 마음을 봉헌함에 있어서 항상 ‘첫 자리’에
모셔야 한다는 것이다. 나 자신이 그렇게 하고 있는지 아닌지는 자신이
주님께 얼마를 할애하고 있는지 보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요구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어려운 요구를
하신다.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지 않으면 내 제자가
될 수 없다”(27절). 정말 그리스도를 닮고 따르려할 때에는 항상
십자가의 그림자가 그 생활을 뒤덮게 된다. 즉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비천하게 태어나 십자가 위에서 고통스러운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삶의 모든 순간들이 구원의 의미로 충만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용기를 잃는 것 같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면서 실망하지 않으려면 계산을
정확하게 하여야 한다고 하시면서 두 비유를 말씀하신다(28-33절).
그러면서 이 비유를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할 때에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모두 버리라’고 하는 태도에 연결하고 계시다.

즉 우리로 하여금 가지고자 하는 열망, 소유하고자 하는 열망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라는 것이다. 루가 복음에서는 하늘나라에 들어가는데
가장 장애가 되는 요소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들고 있다. “재물이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른다”
(루가 18,24; 12,13-34; 16,1-13 참조). 사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사람의 마음을 메마르게 하고 보다 고귀한 감정 예를 들면,
부모와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까지도 막아버린다. 그러기
때문에 두 비유가 주님을 따르는 본 의미를 담고 있지만, 당신의 제자가
되기 위한 가장 중대한 장애요소로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지적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잘 계산하라고 하는 것은 아무 거리낌
없이 그분을 따르기를 거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분을 ‘따르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분을
따른다는 것은 다른 생활, 다른 요구, 다른 유혹 등을 철저히 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포기하는 것이 그
자체가 악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이고
(골로 1,18), ‘만물보다 앞서 계신 분’(골로 1,15)이라는 것을 긍정하기
위해서이다. 무엇보다 그분을 사랑하고 모든 것을 포기할 자세를
갖춘다는 것은 모든 사물의 가치를 올바르게 평가하여 ‘우상화’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의미가 있다. 우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마음에서
하느님보다 더 소중하게 생각되어 거기에 집착하는 것을 우상이라고
한다. 즉 하느님이 제일 첫 자리에 모셔져야 하는데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우리는 그것을 우상에 빠졌다고 하는
것이다.

수도자는 속세를 떠난다. 그것은 세상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고, 세상을 사랑하지만 그것을 궁극적
가치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에 살면서도 그 가치관에
있어 우상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자유로우며, 하느님을 잘 따를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을 하고 사는 우리는 항상 주님을 따르는데 잘
계산하고 따라야 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 외에 다른 것에
집착하여 자기 자신까지도 버리지 못하면 주님을 따를 수 없음을
기억하면서, 모든 것 위에 하느님을 모심으로써 우상에 매이지 않고
주님을 올바로 모시며 살아가는 우리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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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주일.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 33)

거센 바람이 나뭇잎을 마구 떨어뜨립니다.
세상 모든 소유는 떨어지는 잎들처럼 분명 우리 것이 아닙니다.
그 무엇하나 버려본 적없는 우리들을 반성합니다.
내어드려야 할 삶이며 떠나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우리의 여정이란 이와같이 머물다 떠나고
사라지고 되돌아갈 삶입니다.
삶의 무게가 있기에 주님을 찾게됩니다.
삶의 무게가 무겁기에 내려놓는 법을 배웁니다.
내려놓는 것이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우리의 목숨까지도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소유를 기꺼이 다 내려놓고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내려놓고 버리는 삶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거센 바람에 나뭇잎이 마구 쏟아져 내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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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2019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주일

나 바오로는 늙은이인 데다가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님 때문에
수인까지 된 몸입니다!

오늘 두번 째 독서인 필레몬서를 읽고 묵상하면서 노년기에 접어든
바오로 사도의 모습을 세밀하게 유추할 수 있어 참으로 은혜로웠습니다.
젊은 시절, ‘열개의 팔’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펄펄 끓는 혈기와
넘치는 에너지로 온 세상을 뛰어다니며 주님의 복음을 전하던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바오로 사도는 달릴 곳을 다 달렸습니다. 마치 경주마
시절을 끝낸 폐마(廢馬)와도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이제는 기력이
떨어져 달리고 싶어도 달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은 아직 청춘이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습니다.

온몸 여기 저기가 쑤시고 아픕니다. 수시로 닥쳐오는 통증으로 인해,
자면서 몇번이나 깨어 끙끙 앓습니다. 아침이면 안간 힘을 다 써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날씨라도 궂으면 삭신이 부서지는 듯 합니다.
지팡이를 짚어야만 겨우 운신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혹독한 상황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늙고 병든
것도 모자라 투옥된 신세였습니다. 연세 드셨지, 갖은 병고로 괴롭지,
옥에 갇혀있지, 정말이지 바오로 사도의 상황은 최악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토록 울적하고 힘겨운 상황
속에서도 바오로 사도의 목소리에는 초대 교회 신자들과 동료 이웃을
향한 사랑과 자비, 희망과 연민의 정으로 가득합니다.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들텐데, 마지막 남은 모든 에너지를 모아 초대
교회 신자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오늘 쓰신 편지의 수신자는 콜로새
교회의 지도자로 추정되는 필레몬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께서는 다른 편지와 달리 필레몬에게 쓰신
서한에서는 무척이나 간곡함이 돋보입니다. 필레몬에게 한 가지 어려운
부탁이 있었는데, 꼭 좀 들어 달라고 신신당부하십니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습니다.

어떤 연유인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필레몬의 소유의 종 오네시모스가
어느날 갑자기 도망쳐나왔습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에 갇혀
있던 바오로 사도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극진히 바오로 사도의
옥바라지를 하였습니다. 자연스레 오네시모스는 바오로 사도에 의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마음 같아서는 충직한 오네시모스를 곁에 두고 싶었지만,
당시 법이 정하는데로 노예 신분인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로
돌려보내야만 했습니다.

도망쳐 나온 노예 오네시모스를 주인 필레몬에게 돌려보내는 바오로
사도의 심정이 참으로 착찹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큰 걱정이 앞섰을
것입니다. 혹시라도 분노한 필레몬이 오네시모스를 힘들게 할지
모른다는 걱정이겠습니다. 서한의 내용 중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그가 그대에게 손실을 입혔거나 빚은 진 것이 있거든 내 앞으로
계산하십시오. 나 바오로가 이 말을 직접 씁니다. 내가 갚겠습니다.”
(필레몬서 19절)

아마도 오네시모스는 주인 집에서 도망나오는 과정에서 도피 자금으로
주인 필레몬의 돈을 훔쳤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한 오네시모스가
도망나옴으로 인해 생긴 피해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바오로 사도가 갚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늙은이’ ‘예수님 때문에 수인이 된
몸’이란 표현까지 구구절절 써가며 필레몬에게 간청하십니다.

노예 오네시모스를 바라보는 노인 바오로 사도의 시선이 참으로
따뜻합니다. 당시 다른 사람들은 오네시모스를 사람도 아닌 가축 같은
존재, 자신이 어떻게 해도 상관없는 소유물, 매매의 대상으로
바라봤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오네시모스를 더 이상 종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사랑하는 형제로 바라봤습니다. 주님 은총 안에
새로운 인간이요 신앙의 동지, 총애하는 아들로 바라봤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바오로 사도가 오네시모스에 대해 ‘내 심장과 같은
그’라고 까지 표현합니다. 노예 제도를 자연스럽게 바라봤던 당시,
바오로 사도의 이런 자세는 놀라움을 넘어 스캔들이 될 정도였습니다.

오늘 날 노예 제도 등과 같은 신분으로 인한 차별은 사라졌지만, 아직도
다양한 측면에서의 심각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언제나 눈과 마음을
활짝 열어 유심히 살펴봐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은연 중에 우리 공동체 안에 그런 차별이 존재하는지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물론 예수님께서 가장 가슴 아파하셨던
측면이 구성원들 사이의 차별이었음을 결코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전국민적 관심사였던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인사청문회를 틈틈히
시청하며 정말이지 슬펐습니다. 청문회장 한켠을 차지하고 줄줄이 앉아
계셨던 분들, 그들이 보여준 언행 하나 하나는 마치 인간이기를
포기하는 듯한 모습이었습니다.

그 오만하고 무례한 모습, 파렴치하고 비인간적인 모습들을 수많은
우리 어린 청소년들도 보고 있을텐데, 하는 마음에 큰 걱정이
앞섰습니다.

아무리 상대가 밉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할지라도, 동 시대를 살아가는
한 인간 존재에 대해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습니다. ‘정치’라는
동종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로서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하더군요.

후보자를 앞에 두고 깐죽거리며 우롱하고, 상대를 올가미에 옭아매기
위해 갖은 유치한 언행들을 총동원하는 모습을 보며,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그 산더미 같은 죄를 어떻게 갚을 수 있겠는지, 걱정이
되더군요.

그들이 몰염치하게도‘국민이 보고 있습니다!’ 운운할 때는 정말이지
뒷골이 다 땡기더군요. 국민의 대표라고 자처하려면, 품위있고
격조높은 우리 대한민국 국민의 수준이 걸맞게, 정중하고 예의바르게,
겸손하고 진지하게 질문하고 발언해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시종일관 시정잡배도 그렇게 하지 않을 정도로,
껄렁껄렁·후안무치, 수준 이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루 온 종일
그들이 한 일은 온 국민을 모욕하고, 범 국민적 스트레스 지수를 한껏
드높인 것 뿐이라는 생각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정말이지 지도자를 잘 뽑아야겠습니다. 국민들 생각은 눈꼽만치도
하지 않는 지도자, 틈만 나면 버럭 버럭 소리 지르는 지도자, 언행에
품위나 성숙함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지도자, 비열하고 천박한 지도자를
뽑는 순간, 그 뒤로의 감내해야 할 고통과 부끄러움은 순전히 우리
국민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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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3 주일

2019년 다해 9월8일 연중 제23 주일

뉴욕은 교통이 혼잡하고, 주차비가 비싸기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좋다고 합니다. 저도 기차와 지하철을 이용해서 시내에 나갔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시간이 남아서 아는 형제님의 소개로 ‘Stardust’라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습니다. 30분가량 기다려서 맛있는 버거를
먹었습니다. 식당은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습니다. 그 특이한 점
때문에 형제님은 저를 그 식당으로 안내했던 것 같습니다. 종업원들은
모두 뮤지컬 배우를 지망하는 젊은이였습니다. 음식을 주문받고 자리를
안내하지만 멋진 노래를 춤과 함께 불러주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일하지만 언젠가 뮤지컬 무대에서 노래할
젊은이였습니다. 그러기에 젊은이들의 표정은 밝고, 활기찼습니다.
주인은 젊은이들을 미래의 멋진 뮤지컬 배우로 소개하였습니다.
손님들도 젊은이들의 노래에 격려와 응원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작년에도 이곳에서 일하던 젊은이 중에 20명이 뮤지컬 무대에 섰다고
합니다. 주인은 종업원들의 꿈과 열정을 보았습니다. 손님은
종업원들의 열창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습니다. 종업원들은
식당이라는 자리에 서 있지만 이상은 멋진 뮤지컬 무대를 향해 날고
있었습니다. 뉴욕 맨해튼에 오실 기회가 있으시면 ‘Stardust’를
방문하면 좋겠습니다. 음식도 먹고, 젊은이들의 꿈과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평강공주는 바보라고 불리던 온달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온달의 가슴에 있던 열정을 보았습니다. 온달의 타고난 성실함을
보았습니다. 온달은 모든 걸 내려놓고 자신을 선택한 평강공주를
신뢰하였습니다. 온달의 가능성을 알아본 평강공주와 평강공주를 믿고
따랐던 온달은 고구려를 위기에서 구한 장군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종의 신분이지만 오네시모스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
오네시모스를 종이 아니라 아들로 여겼습니다. 오네시모스는 자신을
종으로 대하지 않고 아들로 여겨주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랐습니다. 성서는 전하지 않지만 오네시모스는 초대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큰 역할을 했으리라 믿습니다. 

한국을 떠나 뉴욕으로 온 지 보름이 넘었습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식당의 종업원들처럼 열정과 꿈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왕에
뉴욕에 왔으니 기쁘게 지내려고 합니다. 한국처럼 빠르고 신속한
사회는 아니지만, 이곳의 문화와 제도를 배우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사람은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없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유능한 영업사원은 북극에서도
냉장고를 판매하고, 아프리카에서도 가스난로를 판매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정도의 능력은 없지만, 저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함께하려고 합니다. 오늘도 일정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뉴저지 성 미카엘 성당의 9시 미사이고, 다른 하나는 12시에 있는 롱
아일랜드 한인 성당 40주년 기념미사입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기회를 주셨고, 지혜를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필요한
건 힘과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능력과 재능을 보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은
넘어졌고, 배반했고, 좌절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제자들을
이해하셨고, 용기를 주셨고, 평화를 주셨습니다. 제자들의 능력으로
교회가 발전한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셨기에 제자들은
두려움을 떨쳐버릴 수 있었습니다. 담대하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입니다.
여러분은 포도나무에 붙어있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겁니다. 그러나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지 않으면
말라버려 길가에 버려질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우리의 신앙이 희망으로 자라나 사랑으로 열매 맺기를
바라며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이라는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여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겁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놓은 좋은 말과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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