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5일 회개 하는 죄인 때문에 기뻐할 것이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9-15 06:33:29    조회 : 213회    댓글: 0

▣ 2019년 다해 9월15일 [(녹)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 탈출기 32,7-11.13-14
제2독서 티모테오 1서 1,12-17
복음 루카 복음 15,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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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4주일

2019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잘 자라던 나무도 옮겨 심으면 ‘몸살’을 앓는다고 합니다. 뿌리를
새롭게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햇빛의 방향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나무는 물과 햇빛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 맺습니다. 물을 다시 찾는 일,
햇빛의 방향으로 잎이 움직이는 일이 쉽지 않을 겁니다. 이곳에 온 지
20일이 넘었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몸은 약간의 ‘몸살’을
보여줍니다. 나무처럼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곳으로 잎을
움직이는 과정이라 생각합니다. 먼저 오신 분들도 다 저처럼, 아니
저보다 더 심한 ‘몸살’이 왔을 겁니다. 그분들은 모든 걸 걸고 오셨기
때문입니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더 비장할 것입니다. 저는 임기가
있고, 돌아가는 저를 받아줄 교구가 있기에 마음 한편으로 여유가
있습니다. 먼저 오셔서 사목하시는 신부님의 말이 떠오릅니다.
“저희도 다 그랬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됩니다.” 저도 몇 년 지나면
같은 말을 하겠지요.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시나이산으로 간 모세를 기다리지
못하고 금붙이를 모아 ‘금송아지’를 만들어 경배했습니다. 모세는
하느님께 받았던 새로운 계명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금송아지를 숭배하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계명은 필요 없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였고, 모세는 다시금 시나이산에 올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계명을 받았고,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계명을
따라 약속의 땅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든 이스라엘
백성도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금송아지’는 무엇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사랑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인간의 욕망입니다. 하느님의 자리에 다른 걸
채우려는 인간의 욕망입니다. 결국은 사라지고, 결국은 허망할 뿐인
욕망 덩어리가 금송아지입니다.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던 독재자들도
열정은 있었습니다. 인권이 유린 되었고,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였고,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감옥에 가야 했습니다. 1차 세계 대전도, 2차
세계 대전도 열정이 있는 제국주의 정권에 의해서 발생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민주화의 과정을 통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교회도 ‘금송아지’를 만든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으로 과학적인 발견과 발명을 단죄하였습니다. 마녀라는 이유로
정당한 재판과정 없이 재산을 몰수하고 처벌하였습니다. 당시 교회도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금송아지’는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아닌 저의 뜻을 먼저 생각하는 겁니다. 제안에 거짓된 자아가 참된
자아의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금송아지’를 만들까요?
열정은 있지만, 방향이 틀리기 때문입니다. 열정이 없는 사람은
금송아지를 만들지도 못 할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가 받아온 십계명은 방향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모세의 십계명은 우리의 열정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거짓말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살인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만 잘 지켜도
신앙인으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방향을 알려주십니다. 선과 악은
공존하는 것이 아니라, 선의 결핍이 악이라고 하십니다. 빛이 있는
곳에는 어둠은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선이 충만한 곳에는 악이 자리
잡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새로운 패러다임입니다.
선이 충만한 세상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섭니다. 밤을
새울지라도, 거친 들판에서 사나운 이리를 만날지라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십니다.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저의 어머니를 보면서 오늘의 복음을 더
깊이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시대를 잘 만나지 못한 작은 형을
늘 걱정하셨습니다. 과묵했던 작은 형은 가끔 집을 나갔습니다. 저는
형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저의 자리가 조금
넓어진 것을 즐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매일 기도하셨습니다.
형이 돌아오면 먹을 수 있도록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따로
준비하셨습니다. 작은 형이 돌아오면 어머니는 무척 기뻐하셨습니다.
사랑으로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작은 형이 돌아오면 저는 담담했습니다.
이성으로 대했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열정은 있었지만, 어머니와 같은
사랑은 부족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나오는 큰아들도 열정은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해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향락에 빠진 동생과 유산을 똑같이 나눠주는
아버지에게 불평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방향이 틀렸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었지만, 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기쁨을
자신의 기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돌아온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큰아들처럼 살았다면 돌아온 아들을 따뜻하게
맞이한 아버지처럼 돌아온 동생을 따뜻하게 품어주는 사랑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아직도 방황하는 작은아들처럼 살고 있다면 방향을 돌리면
좋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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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24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용서

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신다”는 것이다. 오늘 복음의 세 개의
비유는 하느님의 ‘자비’가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탕자의 비유’
보다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라고 하겠다.

복음: 루카 15,1-32: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

복음에서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로부터 가르침을 이끌어내며 찬미하고 있다. 예수님의 구체적인
자비의 행위는 당시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 된 행위였다. 즉 예수께서는 죄인들이라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맞아들이시고 그들과 ‘음식을 나누시기까지’ 하신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을 비난하였을 때 예수께서는 이 아름다운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구원의 근거를 어떤 전례행위나
법적 실천 또는 단순한 도덕적 실천에 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실천적
행동으로써 하느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들으려’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받아들이신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 실질적인
태도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죄인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지 그분을 식사에 초대하는 세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짜 죄인들은 바로 그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구원이 제시되고
있다. 비유에서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태도가 단죄되면서 동시에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에게 베푸시는 용서와 사랑을
거절하지 말라고 호소하시는 것이다. 여기에 나오는 세 개의 비유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하느님의 마음이 인간의 잘못과 배반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다는 것을 드러내면서 절정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사순 제4주일에 보았기 때문에 앞의 두 비유에 관심을
집중하도록 하자.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죄인들에 대한 하느님의 ‘자비’를 나타내고 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의로운 사람들’보다 죄인들에게 더 크게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는 목자의 모습은 구약에서 당신의
백성에게 지극한 관심을 보이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표현한다
(에제 34,1-31; 예레 23,1-6 참조). 여기서 잃어버린 양을 되찾은
‘기쁨’의 의미가 강하다. 단지 목자의 기쁨만이 아니라 친구들과 이웃의
기쁨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이렇게 커진 기쁨이 애타게 찾으려 할 때에
생긴 모든 걱정과 불안을 잊게 한다.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을 때에
보면, 형이 화를 내고 우울해 하는 대신에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으니 잃었던 사람을 되찾은 셈이다. 그러니 이 기쁜 날을 어떻게
즐기지 않겠느냐?”(32절) 하신다.

즉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에 대한”(7절) 기쁨보다 회개하는
죄인 하나에 대한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때문에
충격을 받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굳어지게 한 역설적인
말씀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알아듣기 힘들었던 하느님의
논리이다. 이 기쁨의 논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보다 큰’ 사랑에
의해서, 그리고 멀리 있는 사람을 가까이 함에 있어서 극복해야할
‘보다 큰’ 사랑에 의해서 성취되는 기쁨이다. 여기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들’이란 있을 수 없으며, 이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거짓된
의(義)를 빗대어하신 말씀이다.

이 기쁨의 의미는 두 번째 비유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가난한 여자가
조금씩 돈을 모아 은전 열 닢을 마련하였다. 은전 한 닢은 농부의 하루
품팔이에 해당하는 돈이다. 때문에 그 중 하나를 잃어버렸을 때에는
마음이 아프고 그것을 되찾았을 때에는 얼마나 기쁨이 클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잃어버린 것을 찾기 위해 한낮에 등불을 켠다는 것은
창문이 없고 출입문은 낮아서 빛이 전혀 들지 않는 가난한 집을 연상케
한다. 등불까지도 그 여자의 기쁨을 더더욱 들뜨게 해주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선포하신 내용(마르 1,15)을 ‘복음’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바로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시는 소식이기 때문이다. 이 ‘복음’이라는 말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와 관심을 한 마디로 표현하는 것이다. 복음의
내용이 이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교회라고 하는 집안에
사랑과 용서를 선포함으로써만이 아니라 ‘죄를 짓고’ 문을 두드리는
모든 형제들을 기꺼이 맞아들임으로써, 그 기쁨을 널리 퍼뜨리는데
헌신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보다 멀리서 우리에게 다가온다
할지라도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놀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오직
기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공간은 비록 죄를 지었지만
예수의 말씀을 ‘들으려고’(1절) 애를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커지기 때문이다.

항상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삶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항상 하느님께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중요하다. 이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주님께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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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 마음의 크기

2019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하느님 마음의 크기>  복음: 루카 15,1-32

추석명절이라 본가에 가서 옛날 자라던 고향마을을 좀 걸었습니다.
고향마을은 사실 미군부대 안으로 흡수되어 사라졌습니다. 그냥 그
동네가 보이는 둑방길을 걸은 것입니다. 둑길은 사람들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잘 정돈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냇가 주변에는 떠내려 온 쓰레기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앉아서
쉬라고 만들어놓은 벤치 주위에도 사람들이 먹다 버린 음식과 플라스틱
커피 잔과 같은 쓰레기들이 여기저거 버려져 있었습니다. 쓰레기통이
없어서 그냥 버린 것 같아보였습니다.
생전 처음으로 선행을 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습니다. 그래서 음식
쓰레기는 주울 수 없었지만 다른 것들은 비닐봉지에 담아 차에 싣고 집
가까이 와서 쓰레기통에 버렸습니다. 손도 지저분해지고 차에 냄새나는
것들을 실어서 좀 그렇기는 했지만 착한 일을 했다는 것에 마음이
뿌듯했습니다.
‘전에 같으면 절대 줍지 않았을 쓰레기들을 어떻게 줍게 됐지?’

그래도 어릴 때 살았던 고향이라고 남들보다는 더 내 집처럼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것을 버린 사람들은 아마 내 집이 아니라 버려도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자신의 방에다 음식 쓰레기나 커피가 흐르는
종이컵들을 버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것이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겠다고 느꼈습니다. 내가
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 사람들이 내 마음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 안에 있으면 나처럼 사랑합니다. 소중히 다루고
깨끗하게 합니다. 그러나 내 마음 밖에 있으면 나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더럽히는 행위도 스스럼없이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시각은 그들을
바라보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시각과는 매우 다릅니다.
자신들이 아니라 세리들과 죄인들을 더 좋아하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만을 가집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처럼
세리나 죄인들도 똑같이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는 것이고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은 경쟁자로 봅니다.
예수님은 그들도 아버지의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돌아온
탕자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아버지는 탕자 아들을
첫째 아들과 구별하지 않고 사랑하십니다. 당신 마음 안에는 두 아들이
다 살고 있는 것입니다. 누구 하나 소중하지 않은 아들이 없습니다.
반면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자신과 둘째를 좀 구별해주기를 원합니다.
자신을 들어 높이기 위해 아버지에게 불만을 갖고 동생을 미워합니다.
이런 면에서 마음은 집과 같은 것 같습니다. 나의 마음의 크기가 내
집의 크기인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의 크기는 온 우주를 포함합니다.
아들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을 아들처럼 사랑합니다. 모든 인간이
아버지의 마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첫째의 마음은 자기 자신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크기입니다. 동생도 아버지도 자신의 마음에
받아들일 공간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집 밖으로 쓰레기를 마구 버릴 수 있습니다. 만약
마음이 아버지처럼 넓었다면 동생이 돌아온 것에 대해 아버지와 함께
기뻐했을 것입니다. 가장 큰 죄인이라도 나 자신처럼 받아들이게 될
때 하느님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하느님 마음의 크기는 벌레 하나의 목숨도 소중하리만큼 온 우주를
다 포함하실 것입니다. 심지에 지옥에 있는 사탄과 악마의 무리까지도
포함합니다. 하느님은 그들이 원하기만 하면 언제든 당신 집에 살게
하실 분이십니다. 물론 그들의 마음이 자신 외에는 어떤 것도 품을 수
없게 작아지고 굳어졌기 때문에 그들이 회개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나뿐인 인간, 줄이면 나쁜 인간입니다.

하느님 마음을 알게 되면 또한 나의 마음도 넓어집니다. 어떤 수녀님은
중학교 사춘기 때 청소부와 결혼하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변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는데, 청소부 아저씨가 매일 같은 시간에
청소하는 모습이 참으로 믿음직했던 것입니다. 청소부와 결혼은
못하더라도 청소부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그래서 장래 희망사항에
‘청소부!’라고 썼다가 선생님이 어머니를 모셔오라고까지 했습니다.
수녀님은 그럴 것까지 있느냐며 그냥 ‘교사’라 바꾸어서 썼지만 마음은
언제나 청소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합니다.
수녀원으로 들어와서 처음으로 시킨 일이 청소하는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밖을 청소할 때 ‘하느님은 내 소원을 잊지 않고 들어주시는
분이구나!’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던 꿈이었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꿈도 수녀가 되게 하심으로써
이루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청소할 때 매우 행복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면 그분이 사랑하는 것까지 사랑하게 됩니다. 그분의
마음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젠 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청소하는
사람이 됩니다.

하느님은 잃어버린 양 한 마리도 아흔 아홉 마리만큼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이 다다르는 곳의 모든 생명들을
당신처럼 아끼시고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혹은 잃어버린 은전 한
닢도 아홉 개의 은전이 있다고 찾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은전 한 닢도 당신 자녀를 잃은 것처럼 아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리는 영혼들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훼손되는 지구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아프시겠습니까? 우리도
상상만이라도 내 자신의 마음을 하느님의 마음처럼 넓혀봅시다. 그러면
지구도 살고 미세 플라스틱 없는 물고기를 먹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내
마음이 좁아지면 그만큼 밖에 있는 것들에게 피해를 주고 그 피해는 또
고스란히 자신에게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하느님처럼 마음을 넓히면
모두에게 잘 해 주게 되고 또 그대로 돌려받습니다. 사랑 받으며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먼저 어떤 누구도, 어떤 자연의 생명체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느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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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루카 15, 7)|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루카 15, 7)

출렁거리는 이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글어가는 이 계절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과거에 감사하며 이 순간 이 현재를 살려합니다.
하늘 나라의 가장 큰 기쁨은 분명 우리의 회개입니다.
회개로 새로 태어납니다.

익어가야 할 믿음과 성찰이 깊어질수록
회개또한 주님께 가까워집니다.
죄악을 벗어던지니 하늘 나라가 열리고 하늘 나라를 얻습니다.
기쁨 아닌 회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되찾으시는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회개로 뜨겁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얼마나 소중한 자녀인지를 절실히 깨닫게됩니다.
생명의 진리는 분명 회개임을 가르쳐주십니다.
회개를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회개를 되찾아주십니다.
하늘 나라의 입구와 몹쓸 죄악의 출구는 다름아닌 회개입니다.

사랑과 회개 믿음과 회개 진리와 회개는 가장 큰 기쁨으로
우리 영혼을 익어가게 합니다.
돌아가야 할 회개이며 찾아야 할 우리 삶의 회개입니다.
회개를 향합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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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만이 전부입니다!

2019년 다해 9월15일 연중 제24주일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만이 전부입니다!

강론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는 동시에, 강론하시는 것을 너무
행복해 하시는 한 시골 작은 본당 주임 신부님에 얽힌 사연입니다.
하필 그 주일 복음 내용이 ‘탕자의 귀환’ ‘작은아들의 비유’였습니다.
신부님은 ‘이게 웬떡이냐?’며 일주일 전부터 명강론을 준비하고 또
준비하셨습니다.

드디어 주일 교중 미사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치밀하게
준비하고, 세밀하게 손까지 본 강론 보따리를, 존재 자체로 고맙고
사랑스런 신자들, 95퍼센트가 할아버님·할머님들인 신자들에게 신나게
털어놓기 시작하셨습니다.

작은아들이 얼마나 불효자인지? 그가 아버지를 떠나가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그가 저지른 죄가 얼마나 불경스러운 죄인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식음을 전폐하며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을, 그야말로
감동적으로 풀어나가셨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강론을 듣고 계시던 신자들은
이제나 저제나 집나간 작은아들이 돌아 오기만을 목빼고 기다리고
있는데, 30분, 50분이 지나 한 시간이 다 되 가는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작은아들은 돌아올 줄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고정된 자세로 한 시간 가까이 강론을 듣고 계시던 신자들은 드디어
슬슬 힘겨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엉덩이를 들썩이고, 연신 하품을
해대고, 시계를 바라보고, 마침내 이렇게 수군수근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집나간 작은아들은 대체 언제 돌아온댜?” 그리고 다음 스케줄로
인해 초조하셨던 한 어르신께서 강론 중에 손을 들고 이렇게
말씀하셨답니다. “신부님, 손주 결혼식도 가야 하는디, 이제 고만
작은아들, 쌩하니 들어오라고 하시요!”

오늘 탕자의 귀환을 주제로 한 복음 말씀은 신구약 성경을 통틀어 가장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비유로 유명합니다. 많은 영성가들이 이 비유
말씀만으로 수많은 영성 서적들을 저술했습니다.

여러 화가들도 이 비유 말씀을 아름다운 작품으로 표현하였습니다.
저희 사제들도 하느님 아버지의 자비를 온 몸과 마음으로 절절히
느껴지는 탕자의 귀환을 주제로 강론하다보면 자연스레 강론이
길어지기 십상입니다.

저는 오늘 그래서 작은아들이 돌아온 이후 상황에 시선을
집중시켜봤습니다. 사실 오늘 이 아름답고 감동적인 비유의 주인공은
집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언제나 목빼고 기다리시는 아버지이십니다.

그래서 이 비유의 제목은 ‘탕자의 귀환’, ‘작은아들의 비유’, ‘잃었던
아들의 비유’라기 보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비유’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온 신경은 온통 작은아들이 돌아올 동네 초입으로 향해
있었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간절히 기다리고 계시던 아버지는 초주검
상태가 되어 터벅터벅 멀리서 걸어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거동도 불편하신 아버지께서는 그냥 있지를 못합니다. 아들을 향해
냅다 달려가십니다.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춥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는 우리가 저지른 죄와 타락, 배반을 훨씬
능가합니다. 무조건적인 용서를 베푸시는 그분의 사랑은 죄를 고백하는
죄인들보다 앞서 가십니다. 아버지에게서 오는 죄의 용서는 그 어떤
전제 조건도 없습니다. 그저 돌아오기만 하면 됩니다. 회개만이
요청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가 다가가기 전에 먼저 죄인들을
찾아오시며, 새 삶을 요구하십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명확히 깨닫게 합니다.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은 측량이
불가능한 무한한 사랑입니다. 그분의 마음은 죄인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인해 크게 고동칩니다. 참혹한 죄인들을 당신께로 인도하는
그분의 음성은 감미로운 천상음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천하에 둘도 없는 대죄인인 우리들에게 단 한 마디
질책의 말을 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환대하시고 안아주십니다. 등
두드려 주시고 일으켜 세우십니다.

아버지의 그 진하고 뜨거운 사랑으로 인해 죄인인 우리들 안에 잠시
긷들였던 짙은 어둠은 사라지고, 그분 찬란한 빛이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가 되돌이킬 수 없는 큰 죄를 지었지만, 아버지의
자비로 인해 상황은 더 나아졌고 아름다워졌습니다.

우리가 저지른 죄는 심각했지만, 결국 그 죄는 복된 죄가 되었습니다.
비록 우리 죄가 나쁜 것이었지만, 그 죄로 인해 하느님의 자비가
펼쳐졌고, 우리에게 구원이 선물로 다가왔으며, 그로 인해 하느님의
영광과 위대함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복된 죄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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