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0일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9-20 06:02:14    조회 : 211회    댓글: 0

▣ 2019년 다해 9월20일 [(녹)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제1독서 티모테오 1서 6,2ㄹ-12
복음 루카 복음 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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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2019년 다해 9월20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미주 지역의 한인 공동체는 한국인만을 위한 성당을 마련하기 힘들다고
합니다. 몇몇 본당을 제외하면 대부분 현지 본당을 함께 사용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한 지붕 세 가족’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같은
집에서 서로 다른 세 가족이 지내는 게 쉽지 않지만 서로 친교를 나누고,
어려움을 함께 도와주었던 훈훈한 가족 드라마였습니다. 한인 공동체도
영어, 스페인어, 한국어 미사가 봉헌되는 현지 본당에서 서로 도와가며
잘 지내고 있었습니다. 언어와 문화는 다르지만 같은 신앙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미주 한인 공동체의 주보 성인은 대부분 한국의 순교
성인들입니다. 먼 이국땅에서 신앙생활 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순교
성인들의 전구를 구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순교 성인들의 전구와
도움으로 미주 지역의 한인 공동체가 뜨거운 신앙으로 성장하기를
바랍니다.  

한국의 국회도 한 지붕 두 가족이 지내고 있습니다. 여당과 야당입니다.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정당이니 서로 협력하고 상생하는 모습을 보이면
좋겠습니다. 삶은 새옹지마(塞翁之馬)인 걸 알아야 합니다. 삶은
역지사지(易地思之)인 걸 알아야 합니다. 삶은 결자해지(結者解之)
인 걸 알아야 합니다. 결국, 내가 던진 돌은 돌고 돌아 나에게 오기
마련입니다. 그러기에 상대방의 가슴에 지나친 비수를 던지지 말아야
합니다. 국민은 상대방의 잘못을 비판하는 정당보다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는 정당을 선택할 겁니다. 초등학생들도 잘하는 걸 국회의원이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순교는 박해가 있었기 때문에
생겼습니다. 저는 오늘 박해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사회적인 이유입니다. 조선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신분
사회였습니다. 천민과 노비가 있는 사회였습니다. 당시 서구 사회는
자유와 민주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미국의 독립이 있었고,
프랑스 대혁명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서구 사회에서
전해진 천주교는 하느님 앞에 모두 한 형제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난한 이, 굶주린 이, 아픈 이에게 해 준 게 바로
나에게 해 준 거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천주교의 교리는 철저한
신분제인 조선의 사회와 어울리기 힘들었습니다. 이것이 박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두 번째는 문화적인 이유입니다. 조선은 오랜 전통으로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몇 년씩 상을 치러야
했습니다. 조선의 관혼상제는 형식과 격식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풍수지리를 이용해서 묏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사주와 팔자를
이용해서 길일을 택하였습니다. 남녀가 유별하였고, 유교의 가르침이
마을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제사를 허용하지 않는 천주교의 방침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조선의 문화를 미신으로 여기는 태도 또한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바로 이런 문화적인 충돌이 박해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는 정치적인 이유입니다. 당시 집권세력은 사회적인 불만과
어려움을 돌리기 위해서 외국에서 들어온 천주교를 이용하였습니다.
반대파를 제거하는 목적으로 천주교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많은
선비와 학자들이 천주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유배 가야 했고,
순교했습니다. 당시 조선이 그들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탄압하지
않았다면 조선의 미래가 바뀔 수도 있었을 겁니다. 서양의 새로운
학문과 문물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조선의 학문과 사상의 폭은 더 넓고
깊어졌을 겁니다. 천주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
박해의 이유입니다. 

네 번째는 신앙과 신념이 이유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박해를 받아
순교했던 건 바로 네 번째인 신앙과 신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을 기리는 성가에서 볼 수 있습니다.
“서라벌 옛터전에 연꽃이 울어라, 선비네 휜 옷자락 어둠에 짙어갈 때
진리의 찬란한 빛 그 몸에 담뿍 안고 한줄기 무궁화로 피어난
임이시여.” 불교와 유교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당시 가난한 사람들은
새로운 개벽의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지금 이 땅에서 시작되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천민도, 노비도, 백정도 없는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신분과 능력과 재능과 출신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눔과 믿음과 사랑으로 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했기에 죽어서도 갈 수 있는 영원한
생명의 나라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수많은 사람이 박해의
칼날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초대교회부터 내려온 순교
신앙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칼로도, 환난으로도, 박해로도, 굶주림으로도,
헐벗음으로도 막을 수 없다고 했던 순교 신앙입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그 어떤 피조물도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떼어 놓을 수 없는
순교 신앙입니다. 

이런 순교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너무나 쉽게 유혹에 넘어갑니다.
세상은 화려하고, 세상은 풍요롭고, 세상은 가지고 싶은 게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환난, 칼, 박해가 없어도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사랑에서
멀어지곤 합니다. ‘다음에 하지 뭐’라고 하는 영적인 게으름이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남들도 그러는데 뭐’라고 하는 자기
합리화가 우리를 죄에 물들게 합니다. ‘나는 할 수 없는데 뭐’라고 하는
자기비하와 열등감이 우리를 일어서지 못하게 합니다. 일어서지 않으면
걸을 수 없고, 걷지 않는 사람은 엠마오의 예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죄가 진홍같이 붉어도 눈처럼 희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죄가 다홍같이 붉어도 양털처럼 희게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저희의 귀양살이, 네겝 땅 시냇물처럼 되돌리소서. 눈물로 씨
뿌리던 사람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사람들,
곡식 단 안고 환호하며 돌아오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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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20일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

복음: 루카 9,23-26: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 것이다

오늘은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피를 흘려 순교하신 이 땅의 순교자들을
기리는 날이다. 순교라고 하는 것은 신앙이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죽음을 당하거나 중형을 감내함을 뜻한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형벌이 순교자를 만들지 않고 원인이 순교자를 만든다.”고 하였다. 즉
당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 지향하는 바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이 순교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만물 위에 사랑하는 애덕에 근거를 둔 것이기 때문에 가장 완전한
신앙의 행동이다. 현 지금의 상황은 우리 선조들이 박해를 받던 그러한
시절은 아니다. 지금의 참된 순교의 정신이란 내 자신을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전히 없이할 수 있는, 나를 죽일 수 있는 그래서 참
부활의 기쁨을 느끼면서 사는 것이다.

우리 한국 교회의 특징은 세계의 교회사상 유례없는 자생적 교회라는
것이다. 선교사에 의해서 전래된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1779년 천진암 주어사에서 광암 이벽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학회를
통하여 진리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어 1784년 이승훈 베드로가 첫
영세를 받은 후 1836년 프랑스 선교사들이 올 때까지 두 분의 중국인
선교사가 잠시 활동했을 뿐 성직자 없이 오랜 기간 동안 신자들만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교회가 가꾸어져 왔다는 것이다. 교회는 그 후
100년 이상 혹독한 박해를 받았다. 여기에서 나온 순교자들이 만
오천여 위가 있다. 그 중에 많은 분들이 기록이 없이 순교하였기 때문에,
순교 성인의 반열에 들지 못한 분들이 많은 것이다. 지금 다시 교회는
순교자 시복 시성 움직임을 활발히 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순교자들의
피가 거름이 되어 오늘의 교회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자세를 말씀하시고
계시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는 조건은 바로 수난 당하고 죽으신
스승을 닮는 것이다. 그 한 가지는 “자기 포기”와 “십자가를 받아들임”
이다. 자기 포기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에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귀중한 것이지만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그 귀중한 것을 버리는 것이다.

성직자와 수도자의 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결혼을 포기하는 것이, 만일
나에게 필요 없는 헌신짝을 버리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포기가 아니다.
그냥 필요 없으니까 버리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를 한
것이다. 귀중하고 아름다운 삶이지만, 독신으로 하느님을 선택하기
위하여 다른 하나를 포기하는 것이다. 또 이 자기 포기라는 말은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자기를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러기에 우리 인간은
주님을 철저히 따름으로써 자아를 완성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누구든지 주님을 따르려면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날마다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당신의 영광에 들어가셨듯이
우리 인간은 우리의 십자가 즉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을 완성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하느님과 일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일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뜻 앞에 자신의
이기가 살려고 한다면 그는 생명을 잃을 것이며, 하느님의 뜻 때문에
자신을 죽이는 사람은 살 것이다(24절). 여기서 우리가 세속적으로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다고 하더라도 생명을 얻지 못하고 망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25절). 그러기에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거부하는 그것 자체로 이미 우리 자신이
구원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씀이다(26절).

우리가 오늘 기리는 순교자들의 정신을 이어받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내가 오늘 신앙인으로서 살아가는데, 즉 주님을 따르는데
역행하는 요소가 나에게 어떤 것이 있는가? 나 자신을 성찰하면서 나의
나약한 면을 과감히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죽이는 삶이 바로 그들의 순교정신을 본받는 것이며, 그들을
올바로 기리는 것이다. 우리가 순교자들을 공경한다고 하고, 모든
순교자들을 시성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성인이 되지 못하면,
오늘 기리는 우리 순교성인들과 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그분들을 기리고 이 축일을 지내는 것은 바로 우리들이 그분들과 같은
성인이 되도록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 이 미사를 봉헌하면서 우리 자신도 순교정신을 오늘 이
순간부터 살아 우리도 하느님 앞에서 그들과 함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우리 자신이 되기를 결심하고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또한 많은
우리 순교자들이 시성될 수 있도록 기도하도록 하여야겠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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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돈이 모든 악의 뿌리인가?

2019년 다해 9월20일 연중 제24주간 금요일

<돈이 모든 악의 뿌리인가?> 복음: 루카 9,23-26

어떤 유럽의 목사님이 나체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교를
하고 왔더니 목사님 사모님이 소감이 어떠했냐고, 무슨 생각을 하며
설교를 했냐고 물어보더랍니다. 목사님은 무슨 생각을 하며
설교했을까요?

이 분이 자기 부인보고 대답하기를 “저 사람들이 헌금 과연 낼 것인가
안 낼 것인가?”, 그 생각하면서 설교를 했답니다. 돈 주머니를 안
가지고 왔을 테니까. 

우리는 각자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런데 왜 하필
돈을 사랑하면 하느님이 보이지 않을까요? 하느님은 돈을 자선을
베푸는데 쓰라고 하시기 때문입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돈을
모으려는 마음이 문제입니다. 돈 자체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돈을 모으려는 마음이 뱀이 시키는 것이고, 돈을 내어주라고
하느님께서 시키십니다. 돈을 계속 좋아하며 하느님을 사랑하면
하느님은 돈을 많이 벌게 해 주는 도구로 전락됩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자들은 사람들을 파멸과 멸망에 빠뜨리는
유혹과 올가미와 어리석고 해로운 갖가지 욕망에 떨어집니다. 사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따라다니다가
믿음에서 멀어져 방황하고 많은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돈에 대한 집착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자족할 줄 알면 신심은 큰 이득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으며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돈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지금 가진 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연습을 하면
됩니다.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고, 풍족하면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하고는 나누어주며 살면 됩니다. 크게 부족하지도 않은데 자꾸
모으려는 마음이 자신과 타인에게 해를 입히게 됩니다. 

어떤 분은 노숙자 체험을 일부러 해 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것도
괜찮았다고 합니다. 이런 삶을 살게 되면 가진 아주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되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두려움도 없어집니다. 우리는 가난해지는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일부러라도 이런 경험을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질 때에야 돈을 좋은 곳에 쓸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을 위하여 봉사하던 여인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 여인들 가운데는 악령과 병에서 풀려난 여인들,
곧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가 있고, 타락의
온상이었던 헤로데 궁에서 일하는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들이 지닌 재물은 그리 깨끗한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고 하며 그 여인들의 행위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이런
여인들처럼 복음전파에 도움이 되려면 지금 가진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하고, 더 나아가 부족하게 살 줄 알아야합니다. 

어느 정년퇴직 한 노신사가 학교 부근의 작은 집을 구입해
이사했습니다. 처음 몇 주 동안은 작은 집에서 사는 것에도 만족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방과 후 꼭 3명의 아이들이 집 앞에 있는
휴지통을 발로 차서 넘어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노인은 깜짝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아이들이 휴지통을 차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다가 참으로 재미있게 논다고 칭찬해주며 “나도 차고 싶은데 나이가
들어서 못 하네. 만약 너희가 계속 와서 휴지통을 찬다면 내가 매 번
1달러씩 주겠다.”라고 약속하였습니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하면서도
일주일 동안 1달러씩 받았습니다.  

그런데 일주일이 지나서 노신사는 “참으로 미안하구나. 내가 계속 돈을
주고 싶은데 나도 생활비가 조금 딸리네. 내가 50센트씩만 줄게.”라고
하였습니다. 아이들은 50센트라도 그게 어디냐며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일주일 뒤에 노신사는 또 미안하다며 25센트씩만 주겠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불평합니다. 겨우 그것을 받고 매번 와서 휴지통을 차야
되느냐고 합니다. 그런 푼돈으로는 더 이상 일을 해 드릴 수 없다며
아이들은 휴지통을 차지 않기로 하였습니다.  

내가 돈에 대한 욕심만 없어지면 돈도 유익하게 쓸 수 있습니다. 가장
유익한 일은 돈을 통해서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입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욕심 때문에 그 좋은 일에 돈을 쓰지 못하고
모으다가만 죽는다면 하느님께 칭찬받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항상
예수님께 자신의 돈을 복음 전파를 위해 쓰라고 드린 여인들을
생각합시다. 내가 머리 쓰지 않아도 돈은 좋은 곳에 쓰일 수밖에
없습니다. 돈은 모든 악의 뿌리가 아닙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 돈을 잘 사용하면 영혼구원의 도구가 됩니다. 그리고
가장 잘 사용하는 법은 복음전파를 위해 사용하는 것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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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우리 모두는 영예롭고 자랑스런 순교자들의 후예입니다.
우리의 혈관 속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2019년 다해 9월20일 한국 순교 성인 대축일

우리 모두는 영예롭고 자랑스런 순교자들의 후예입니다. 우리의 혈관
속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언젠가 마치 한 송이 숨은 야생화처럼, 외진 곳에서 기도와 노동,
희생과 보속으로 하루를 살아 가시는 수녀님들의 공동체를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저를 보신 원장 수녀님께서는 대뜸 ‘떡 본김에 제사 지내자!고 하십니다.
사연인즉은 고백 지도 신부님께서 지난 번 바쁘셔서, 성사를 한번 건너
뛰셨는데, 이왕 오신 김에 우리 수녀님들 깨끗하게 세탁 좀 해주고
가랍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수녀님들께서는 한 달에
한번도 아니고 두번 씩이나 고백성사를 보신답니다. 그래서 저는 나름
추측을 했습니다. ‘언제나 기도 안에 영적으로 사시는 수녀님들, 그것도
격주로 안빠지고 고백성사를 보시는 수녀님들이니, 초스피드로
끝나겠지!’

그러나 웬걸! 결코 만만치 않았슥ㅂ니다. 세속에 찌들어 사는 우리들과
별반 다를 바 없었습니다. 크게 위안이 되는 점 한 가지는, 그 맑고 선한
수녀님들께서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나와 다른 그’로 인해 쌩고생하고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분들도 우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먼데 있는 사람이 아니라, 바로
옆자리에 앉은 사람, 매일 같은 식탁에 앉아 삼시세끼 밥먹는 사람으로
인해 큰 고통을 겪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제가 강의 때 마다 결론 삼아, 단골 소재로 삼아 드리는 말씀이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영예롭고 자랑스런 순교자들의 후예입니다. 우리는 자주
까먹지만 우리의 혈관 속에는 순교자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사랑의 유효 기간, 결혼의 유통 기한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전문가
집단의 연구에 따르면 그 유효기간은 통상 30개월이랍니다. 3년이 채
못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을 시작하고, 결혼생활을 시작한지 30개월이
경과하자마자, 한 가지 ‘각별한 노력’을 시작해야 합니다. 마치 로또
같은 그분, 로또 안 맞듯이 죽어도 나와 안맞는 그분, 나와 달라도
너무나 달라,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하지 못할 그분, 바로 그분을 향한
‘순교자적 노력’이 필요합니다.

나와 철저하게 다른 그분을 순교하는 마음으로 인내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정말이지 이해하지 못할 상황 앞에서는,
순교의 형장으로 끌려가는 순교자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런 영웅적인 노력으로 인해 우리는 사랑의 유효 기간을 무한대로
연장시켜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위대한 한국 순교자들의 영예로운 순교는 어느 날, 평소 조금도
준비 안했는데, 뜻밖의 선물처럼 다가온 것이 절대 아닙니다. 별 자격도
없었는데, 병인박해가 다가오고, 기해박해가 다가와서, 다시 말해서
시대가 도와줘서 순교의 영광을 맞이하신 것이 결코 아니란 것입니다.

우리의 자랑스런 순교자들은 평소 늘 순교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살아가셨습니다. 매일 나와 다른 그를 기쁜 마음으로 인내하며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매일 다가오는 결코 내게 호의적이지 않은 고통스런
현실을 크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견뎌냈습니다.

그런 일상적인 순교 훈련, 순교 연습이 매일 지속되었습니다. 그 결과
순교의 기회가 다가왔을때, 단 한걸음도 뒤로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찬미와 영가를 부르며 순교의 현장으로 기쁘게 나아가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각자 앞에 주어진 삶의 현실 속에서 어떤 방식, 어떤 자세로
순교 영성을 실천할 것인지 고민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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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9월 20일(금) - 자랑하지 못하게 하심

오늘은 ‘자랑하게 못하게 하심’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6절~29절 말씀에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약점 없는 이가 없습니다. 눈이 잘 생겼으면 코가 좀
못생겼고 코가 좀 잘생겼으면 귀가 좀 못생겼고 입술이 잘생겼으면
귀가 찌그러졌고 이마가 훤하면 인중이 짧고 어느 것 하나 완벽한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육신에 만족함을 가집니까?
눈은 이랬으면 좋겠다, 코는 이랬으면 좋겠다 하지요.

하지만 오늘의 말씀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오히려 우리에게 이
약함을 주셔서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또 약함을 통하여 나 자신이 결코 교만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한분만 의지하게 하시고 우리를 하나로 뭉치게 하시고 서로에게
힘이 되게 하신 하나님, 여러분 참 하나님 믿기를 잘했지요?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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