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2일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9-22 06:10:17    조회 : 235회    댓글: 0

▣ 2019년 다해 9월22일 주일 [(홍)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 경축 이동]

제1독서 지혜서 3,1-9
제2독서 로마서 8,31ㄴ-39
복음 루카 복음 9,23-26

**********
◈ [서울] 연중 제25주일

2019년 다해 9월22일 연중 제25주일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의 담당 회계사와 만났습니다. 재정 상태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비영리 단체이지만 함께 일하는 직원이 있고,
신문사를 운영해야 하기에 재정 관리를 해야 합니다. 주된 수입은
구독료, 광고료, 찬조금입니다. 주된 지출은 급여, 신문 제작비, 사무실
운영비, 잡비입니다. 전임 신부님들이 운영을 잘하여서 적자는
아니라고 합니다. 단순히 신문을 제작하고, 발송하는 업무가
아니었습니다. 자동차가 거리를 달릴 수 있는 건 차에 기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이 제작되고, 발송될 수 있는 건 비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주 가톨릭 평화신문이 재정적인 어려움 없이 잘 운영될
수 있도록 기도와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저는 신학생 때, 재정과 관련된 일을 하였습니다. 학교 판매부에서
봉사자를 뽑는다고 해서 자원했습니다. 신학교에 학생 자치 신협이
있었고, 신학교에서는 신협의 학생들이 매점을 운영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제가 하는 일은 매점을 운영하는 거였습니다. 매점의
운영시간은 저녁 먹고 묵주기도 시간까지 대략 30분이었습니다. 판매
물품은 음료수, 담배, 과자, 학용품이었습니다. 방학 때는 과자는
식당과 빨래를 담당하시는 자매님들에게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3년
동안 매점 운영을 했고, 기억나는 물품은 당시에 등장한 ‘불티나’라는
라이터와 직접 제작한 학교 편지지와 노트였습니다. 매점 열쇠를
가지고 있었기에 선배 신학생들이 가끔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물품을
구매하기 때문에 매일 외출할 수 있는 ‘특권’도 있었습니다. 판매부
열쇠가 있는 곳에 신학생이 많이 모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었고, 유익했던 시간이었습니다. 

신학교 매점 운영은 어렵지 않았는데 제게 더 큰 재정 문제가
있었습니다. 1997년 IMF는 저와 가족에게도 큰 파도로 다가왔습니다.
형님의 사업에 어려움이 있었고, 제가 부모님을 모셔야 했습니다. 교구
신협에서 대출을 받았습니다. 당시 대출이자는 상상 이상으로
높았습니다. 동창 신부들의 도움으로 대출금을 갚았고,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부모님을 모실 수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면서 얼마나 힘들었을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기회와 능력을 주셔서 강의를 많이 하였습니다.
강사료는 부모님의 생활비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부족한 저를
불러주시고 강의할 기회를 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2014년부터 교구 신협의 일을 도와서 함께했습니다. 동창 신부님이
교구 신협 이사장이 되었고, 제게 함께 하자고 제안했습니다. 교구
신협의 일은 30년 전 신학교 신협의 일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조합원의 수가 많았고, 자산의 규모가 달랐습니다. 본당 신축이 있으면
대출에 대해 심사를 했습니다. 교직원 자녀들의 학자금 대출도
승인했습니다. 주택 자금 대출에 대한 심사도 있었고, 신부님들의
대출에 대한 심사도 있었습니다. 돈은 마치 공기와 같았습니다. 사람은
공기가 있어야 숨을 쉴 수 있듯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돈이
필요했고, 돈이 있어야 했습니다. 돈 때문에 울기도 했고, 돈 때문에
웃는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관해 이야기하십니다. 재물은
감정이 없습니다. 재물은 발이 없습니다. 재물은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재물은 하늘은 나는 연과 같습니다. 연은 연을 날리는 사람의
손에 의지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손이 왼쪽으로 움직이면 연은
왼쪽으로 움직입니다. 사람의 손이 오른쪽으로 움직이면 연은
오른쪽으로 움직입니다. 연의 줄이 끊어지면 연이 땅에 떨어지듯이
사람이 재물에 마음을 내려놓으면 재물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합니다.

재물을 땅에 쌓으려고 하는 사람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친구와의 우정을 잃어버립니다. 가족과도 담을 쌓게 됩니다. 함께 한
사람에게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가난한 이를 더욱 가난하게 만듭니다. 불의를 행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돈을 가지고 싸우고, 돈이 헤어짐의 이유가 되고, 돈이 하느님과
멀어지는 이유가 됩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으려는 사람은 많은 것을
얻게 됩니다. 장학 재단은 힘들고 어려운 학생에게는 희망의 빛이
됩니다. 선교지에 보내지는 돈은 복음을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난민에게 지원되는 돈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줍니다. 가난한
이에게 전해지는 돈은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세속의 욕망을 위해서 쓰이는 재물은 심한 악취가 날 겁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이는 재물은 아름다운 향기가 날 겁니다.
지금 우리의 지갑에는 어떤 향내가 날까요?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 [수원] 연중 제25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22일 연중 제25주일: 하느님과 재물에 대한 가르침

오늘 전례의 주제는 ‘재물’에 관한 것이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목을 조르는 올가미가 되기도
한다. 오늘 복음에서는 인간이면 누구나 피하기 어려운 재물의 유혹을
극복할 수 있는 재물 사용법에 대해 몇 가지 권고를 하고 있다. 재물을
잘 사용하여 진정 하늘나라에 자신을 개방하고 준비할 수 있는 삶을
살도록 초대하고 계시다.

제1독서: 아모 8,4-7: 가난한 사람들을 돈으로 부려먹는 자들에 대한
경고

1독서는 예언자 아모스 시대에 여로보암 2세의 통치하에서
(BC 783-743)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있던 이스라엘의 참상을
그리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려고
하였다. 이 때에 양을 치던 아모스가 그들을 호되게 비난하며 질책을
퍼붓는다. 제1독서의 내용은 항상 가난한 사람들을 압박하는 전형적인
착취형태로서, 이 같은 상황은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심각하다.
수많은 국가에서 자행되고 있는 착취형태를 보면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아모스의 외침은 우리에게 있어서 이러한 상황을 거슬러, 자신들이
압박의 도구가 되지 않고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형제애’의 도구가 될
수 있도록 지상재화의 ‘의미’를 재조명하라고 하는 촉구라고 할 수 있다.

복음: 루카 16,1-13: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오늘 복음에서 청지기는 어떻게 그런 부정한 짓을 저지를 수 있었는가?
주인에게 들켜 큰 벌을 받을 수 있는 나쁜 짓임에 틀림없다. 당시의
청지기는 넓은 토지를 관리하고 주인에게 정기적으로 보수를 받는 것이
아니었다. 그 땅에서 나오는 결실을 높은 이자로 빌려주고 자신들의
보수를 챙겼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지기는 자기에게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이용하여 빚진 자들의 빚문서를 허위로 기재한다.
기름을 빚진 사람에게는 50%를 감해주고, 밀을 빚진 사람에게는
20%를 감해준다. 이렇게 이 약은 청지기는 빚을 삭감해줌으로써
개인적인 수익을 거둘 뿐 아니라, 빚진 사람들의 환심도 산다.

주인은 이 청지기가 일을 약삭빠르게 처리했다고 칭찬을 한다(8절).
이 청지기는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이익을 얻고 있다. 우선은
개인적인 벌이를 할 수 있었고, 또 그 빚진 사람들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다. 집주인은 이 두 번째 사실에 대해서 칭찬을 하고 있다.
“세속의 자녀들이 자기네들끼리 거래하는 데는 빛의 자녀들보다 더
약다”(8절)는 것이다. ‘세속의 자녀들’은 이렇게 쉽게 다른 사람의
환심을 얻는데 어째서 착한 이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어려울까?
아마도 자기 자신과 또한 자신의 재물을 나눌 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

“세속의 재물로라도 친구를 사귀어라”(9절). 이 비유는 ‘친구’를
사귀는 데 있어서 재물을 사용할 줄 알라는 권고로 맺고 있다. 여기서의
‘친구들’이란 누구를 의미하는지 막연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루가의 전체적인 신학사상에 비추어 알
수 있다. “너희는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헤어지지
않는 돈지갑을 만들고 축나지 않는 재물창고를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들거나 좀먹는 일이 없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가 12,33-34). 그러므로 우리가 재물로
사귀어야 할 ‘친구들’이란 구체적으로 우리가 은혜를 베풂으로써 나중에
우리의 중재자가 될 모든 사람들이며, 추상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이웃에게 베푼 모든 자선행위 및 선행을 의미한다.

이것이 루가의 입장에서 재물의 소유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정당하게 번 재물이라고 해도 부당하게
사용되는 것이며 따라서 ‘세속의 재물’이 되고 만다. 재물은 나눔이
있을 때 사랑과 우정의 공간을 넓혀주는 역할을 하던가, 아니면
이기적으로 사용되어 사회적 불안과 불평등을 야기하는 구실을 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가진 자나 가지지 못한 자나 저주만이 있게 된다.
“부요한 사람들아, 너희는 불행하다. 너희는 이미 받을 위로를 다
받았다”(루가 6,24). 오직 이 세상의 재물로부터 자유로운 마음을 가질
때만이 참 재화를 풍성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재화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것이며 ‘하늘나라’의 재화이다. 참고로 “너희가 남의
것에 충실하지 못하다면 누가 너희의 몫을 내어주겠느냐?”(12절)고
하시는데 여기서 ‘남의 것’이라고 하는 말은 재물이 혼자서 즐기는데
쓰이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베풀어진다는 의미에서 사용되고
있다.

마지막 말씀은 재물의 모든 정당성을 배제하고 있는 내용이다.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또는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마련이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13절). 재물은 사람의 모든
관심을 당겨 인간을 노예로 삼으려 하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의 마음을 차지하게 되면, 재물에 대한 집착은 버릴 수
있으며, 아씨시의 프란치스코와 같이 될 수 있다. 어떤 면에서 재물은
그리스도교 신자가 자기 신앙의 진실성 여부를 측정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와 같다. 그 재물이 ‘동참’과 ‘우정’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으면 이기주의적 폐쇄와 원한의 도구가 되고 있는지
자신의 태도로써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재물의 정당성이 인정될 수 있는
경우는 우리가 재물을 만들어 간직하거나 소유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모든 사람들의 선익을 위해 쓸 경우이다. 교부들도, 오늘의
교회도 이렇게 살도록 가르치고 있다.

지금 이 세상 재화의 대부분이 인류의 1/3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손에 쥐어져 있고,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대개가 어려움에
처해있다. 이 같은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는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고자 함으로써 복음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에도 달려있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2독서의 바오로 사도가
권고하듯 하느님께서 모든 이의 마음을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여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조용하고 평화롭게 살면서 아주 경건하고도
근엄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1디모 2,2).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다

2019년 다해 9월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다>
복음: 루카 9,23-26

제가 초등학교 때 요한 바오로 2세께서 오셔서 103위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품에 올리는 미사에 참례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린나이였음에도
많은 성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저런 신앙을 가져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만약 그때의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았다면 신앙적으로 큰
성장을 하였겠지만 살다보니 순교의 정신이 무뎌지고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당시 저와 비슷한 나이의 순교자 이야기는 그야말로 큰 충격이었습니다.
열 살 갓 넘은 어린 나이에 어디서 저런 믿음과 용기가 나왔는지 가히
부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성인은 소년 성인 유대철 베드로입니다.  

그는 유진길 성인의 아들이며, 서울의 유명한 역관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 아버지의 모범과 가르침을 받아 입교하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천주교를 싫어하고 방해하는 어머니와
누나에게 끊임없는 괴로움을 당했지만 그 때마다 오히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았으며, 어머니와 누나를 위해 항상 기도하였습니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많은 교우들이 순교하였고 아버지도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 자신도 순교하기로 결심하고 자수합니다.
재판관들은 어린 소년을 배교시키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사용하였지만
소년 유 베드로의 마음은 변치 않았습니다.  

어느 날 저녁에 한 옥쇄장이 담배통으로 그의 넓적다리를 사뭇 내리쳐
살 한 점을 떼어 내며 소리쳤습니다.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
“그럼요. 이것쯤으로 배교할 줄 아시나요?”
이에 옥쇄장은 부젓가락으로 벌건 숯덩이를 집어 입을 벌리라고
했습니다. “자요.”

유대철이 서슴없이 입을 크게 벌리니 이번에는 옥쇄장도 기가 막혀서
뒤로 물러났습니다.
“너는 이쯤으로 아마 고생을 많이 한 줄로 생각할 거다만 큰 형벌에
비기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다.”
어떤 교우가 말하니 유대철은 이와 같이 대답했습니다.
“저도 잘 알아요. 그것을 쌀 한 알을 한 말에 비기는 것과 같은
것이지요.”

포청에서 총 14차의 형벌과 100여 대의 매질, 그리고 40도의 치도곤을
맞아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으나 항상 만족스럽고 평화로운 표정을
띠었습니다.

하루는 심한 고문을 당한 끝에 까무러친 채 옥에 끌려왔습니다. 함께
갇혀 있는 교우들이 정신을 들게 하느라고 허둥지둥할 때 그가 말한
첫마디는 “너무 염려하지 마세요. 이 까짓것쯤으로는 죽지 않아요.”
라고 하였습니다.  

관원들은 어린 소년을 공공연하게 죽이면 군중이 반발할까 두려워
1839년 10월 31일, 형리들을 옥 안으로 들여보내 상처투성이가 된 그
가련한 작은 몸뚱이를 움켜잡고 목에 노끈을 잡아매어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가장 어린 순교 소년 유대철은 아버지와 함께 순교하여,
우리 민족 모든 어린이들의 신앙적인 모범이 되었습니다. 

유대철 성인은 주일학교 어린이들의 주보성인으로 알고 있습니다.
요즘도 어린이들에게 이런 신앙을 들려주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란 말씀처럼, 아이들에게 이 세상에서 돈 많이 벌고
성공하게 만드는 예수님이 아니라 순교 앞에서도 당당한 유대철로
만드는 신앙을 주시는 예수님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순교자들의 피는 새로운 믿음을 키우는 씨앗입니다. 예수님은 피가 온
세상에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자라나게 한 것과 같습니다. 부모님의
피가 아니면 자녀는 그 부모가 자신의 부모라는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피 없이 생겨나는 믿음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다못해
누군가에게 자신의 사랑을 믿게 만들려면 작은 선물을 준비합니다.
그런데 요즘은 순교자들의 이야기를 너무 하지 않는 것 같은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 그들의 피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피가 지금의
신자들의 심장 위에 계속 떨어지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들의
순교가 신앙인들의 가슴 위에서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최양업 신부님의 아버지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도 아들을 나라
밖으로 내보내어 신학공부를 시킨다는 죄가 추가되어 남달리 혹심한
형벌로 큰 고통을 받은 분이십니다. 태장 340도, 곤장110도를 맞았으나
끝까지 신앙을 잃지 않았고, 9월 11일 최후로 곤장 25도를 맞고 그
다음날인 12일에 옥중에서 일생을 마쳤습니다.  

형리가 그에게 고통을 더하기 위해 도둑 한 명을 그와 함께
잡아매었습니다. 도둑은 그를 조롱하고 욕설을 퍼부으며 그의 상처를
장난삼아 발로 차서 덧내 놓곤 했습니다. 그러나 경환은 모든 것을
아무 말 없이 참아 견뎠습니다. 본래 최경환 성인은 다혈질의
성격이었다고 하는데 신앙을 가지고 성격도 바뀐 것입니다. 그러자 이
몹쓸 도둑도 일찍이 본 적이 없는 이 인내심에 감격한 나머지 최경환과
천주교를 아울러 탄복하고 찬미하며 외쳤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천주학쟁이다.”
그리고 옥에 갇힌 다른 교우들을 보고 덧붙여 말했습니다.
“너희들도 이 교를 믿으려거든 이 사람처럼 믿어라.” 

그러던 어느 날, 옥쇄장들이 교리책을 가지고 와 읽어 달라고 청하자
최경환은 책을 들어 웅변으로 그것을 해설해 주었습니다. 이에 청중은
감탄하며 말했습니다.

“무서운 사람이야! 형벌을 받아 초죽음이 되었다가도 종교 서적을
들든지 교리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는 상처나 죽음에 대한 모든
걱정을 잊어버리고 아주 마음이 흡족한 것 같단 말이야.”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로마 백인대장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

피는 분명 믿음의 씨앗입니다. 자녀들의 믿음이 크지 못했다면 어쩌면
부모님이 신앙을 위해 피를 덜 흘렸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뜨거우면 분명 옆에 있는 사람에게 그 뜨거움이 전달되게 되어있습니다.
믿음은 혼자 노력해서 절대 얻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믿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누군가가 나의 믿음을 위해 피를 흘렸기 때문입니다.  

한국 교회의 믿음은 순교자들의 피 위에서 굳건히 서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을 위해 피를 흘린 분들을 배우고 또한 그렇게 피를 흘리시는
분들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믿음도 강해집니다. 만약 제가
마더 데레사나 이태석 신부님을 가까이 했었다면 지금보다는 믿음이
더 성장했을 것입니다. 믿음을 성장시키고 싶다면 믿음의 선배들의
피를 받읍시다. 믿음을 성장시키고 싶다면 믿음으로 흘리는 내 피를
뿌려줍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믿음으로 흘리는 피만이
부활의 영광의 약속을 성취시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
◈ [수도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 24)|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22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루카 9, 24)

믿음과 순교는 함께 존재합니다.
삶과 죽음도 마음과 몸도 끝내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순교는 믿음의 뿌리가 됩니다.
한국천주교회는 이 분들의 순교로 이루어진 순교자들의 교회입니다.

이 분들의 순교로 지켜야 할 믿음을 뜨겁게 만납니다.
모든 순교는 소중한 가치를 다시금 일깨워줍니다.
순교는 우리의 죽어있는 정신을 다시 살립니다.
내 뜻을 내려놓는 것이 우리 일상의 참된 순교입니다.
자아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하느님만이 남을 뿐입니다.

순교자들의 피가 죄많은 우리들 삶을 깨끗이 씻어주길 기도드립니다.
가장 단순한 진리이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가장 숭고한 실천이 순교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순교로 바로 세우는 은총가득한 대축일
되시길 바랍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 [수도회] 불현듯 다가올 ‘마지막 날’을 위해, 지금 당장 신속하게
회개의 결단을 내리십시오!

2019년 다해 9월22일 연중 제25주일

불현듯 다가올 ‘마지막 날’을 위해, 지금 당장 신속하게 회개의 결단을
내리십시오!

예수님의 비유로 들어하신 말씀들은 당대 ‘가방끈’이 짧은 사람들이나
가난한 백성들의 귀에도 쏙쏙 들어올 정도로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또한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당시 율법 교사나
지도자들의 고리타분하고 난해한 가르침과는 달리, 지극히 단순하고
명쾌하고 흥미로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리도 환호하고 박수를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소개하신 ‘불의한 집사’ 혹은 ‘약은 청지기’의 비유 말씀은
꽤나 난해합니다. 몇번을 되새김질하며 읽어도,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이 특별한 비유를
통해 강조하시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해야 합니다.

사실 불의한 집사의 행동 하나 하나는 명백한 범법행위였습니다.
따라서 재판에 넘겨져야 마땅합니다. 그는 주인의 재산 관리를 총
책임지는 담당자였습니다.

집사가 주인 허락도 없이 재산을 낭비했으니, 절도죄에 해당되겠습니다.
비리가 주인에게 발각되자,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 문서를
위조했으니, 공문서 위조죄에 해당되겠습니다. 불의한 집사는 갖은
비리의 종합선물셋트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특별하게도 주인은
불의한 집사가 영리하게 대처했다며 칭찬합니다.

이 비유 앞에 많은 분들이 ‘이게 대체 무슨 말씀인가? 이렇게 알아듣기
힘들어서야! 대체 주장하시는 바가 무언인가?’하고 고민해 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집사의 비리와 위법행위를
칭찬하신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보다는 불의한 집사의 민첩하고
슬기로운 처신, 신속 정확한 미래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를
칭찬하셨습니다. 긴박하고 다급한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고 탈출구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한 것을 칭찬하신 것입니다.

불의한 집사가 현명하게 처신했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비리와 불법
행위가 용서되거나 의롭게 되는 것을 절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편법적인 행동으로 인해 끝까지 불의한 집사로 남아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재물과 관련해서 불의를 저지를 것이
아니라, 불현듯 다가올 ‘마지막 날’을 위해, 지금 당장 신속하게 회개의
결단을 내릴 것을, 그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구체적인 계획을
수립할 것을 요청하신 것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세상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현세적 이익을 위해서는
목숨까지 걸면서, 할 짓 못할 짓 다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빛의 자녀들
역시 자신들 영혼의 유익을 위해, 불의한 집사처럼 목숨을 걸 정도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말고, 지금 이 자리에서, 바로
이 순간, 신속히 결단을 내리라는 요청이 불의한 집사 비유의
핵심입니다.

초고령화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불과 4~50년 전만 해도
60세까지 살았으면 장수했다고 잔치까지 벌였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80에 세상을 뜨시면 살짝 아쉬을 정도입니다.

다들 길어진 노년기에 대비해서 걱정도 많고, 또 각자 나름 철저히
준비를 하십니다. 재취직 계획, 넉넉한 연금 수령을 위한 준비,
정기적인 건강검진, 적당한 운동, 철저한 식단 관리...

그러나 그러한 육적인 준비에 비해 영적인 준비는 어느 정도 하고
계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90퍼센트, 100퍼센트 육적인 준비에만
몰두하고 계시다면, 10퍼센트, 아니면 20퍼센트 정도 ‘뚝!’ 떼어 영적인
준비에 할애해보시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가 손에 쥐고 있는 현세적 재산은 엄청 대단해 보이지만, 사실
불완전한 것입니다. 지금은 죽기살기로 꽉 움켜쥐고 있지만, 불과
10년, 20년, 30년 뒤면 고스란히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현세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세의 재물로는 조만간 반드시 다가올 죽음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을 향한 사심없는
자선과 희사는 언젠가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우리를 적극적으로
변호해주는 가장 좋은 증인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죄가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아무리 부족하고 부당하다 해도, 우리가 지상에서 행한 자선과
희사를 통해 우리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대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물이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 백배로 보상받게 하시려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빌려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거처에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입니다.”(요한 크리소스토모 주교)

“땅의 재물을 가진 사람들이여, 가난한 이들에게 마음을 엽시다.
하느님의 법에 복종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 줍시다. 우리 것이 아닌
물질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이가 됩시다.”
(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교부)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