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9일 가난한 라자로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09-29 06:47:10    조회 : 208회    댓글: 0

▣ 2019년 다해 9월29일 [(녹) 연중 제26주일(이민의 날)]

제1독서 아모스 예언서 6,1ㄱㄴ.4-7
제2독서 티모테오 1서 6,11ㄱㄷ-16
복음 루카 복음 16,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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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6주일

2019년 다해 9월29일 연중 제26주일

오늘은 주일이어서 축일로 지내지 않지만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생일과 비슷한 날로
세례명을 정해 주셨습니다. 큰 형은 9월에 태어나서 미카엘, 작은 형은
12월에 태어나서 사도 요한, 동생은 10월에 태어나서 프란치스카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저는 5월에 태어났으니 마티아로 하면 좋았을
텐데 부모님께서는 가브리엘로 세례명을 정해 주셨습니다. 이유는
물어보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지낸 친구처럼 가브리엘 세례명이
좋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가브리엘 천사 이야기도 좋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성모님께 전하였습니다. 성모님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라고 응답하였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은 요셉에게도 하느님의 뜻을
전하였습니다. 요셉은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결정을 바꾸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하느님의 뜻을 충실하게 전한 가브리엘 천사와
하느님의 뜻을 기쁜 마음으로 따른 성모님과 요셉의 순명이 있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인 가브리엘 천사처럼 하느님의 뜻을 전하며 살고 싶습니다.
가브리엘 천사의 말을 듣고 하느님의 뜻을 따랐던 성모님과 요셉
성인처럼 하느님의 뜻과 의로움을 따르며 살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세례명은 무엇인지요? 여러분도 여러분의 주보 성인의 삶을 묵상하며
오늘 하루 지내면 어떠신지요. 

욕실과 방에 예쁜 발판을 깔아 놓았습니다. 조금은 거칠고 투박하던
욕실과 방이 예쁘고 환해졌습니다. 욕실에서도 발판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방에서도 발판을 보니 격이 높아진 것처럼 기분이
좋습니다. 방을 바꾸거나, 집을 수리하는 건 시간도 많이 필요하고,
비용도 많이 듭니다. 하지만 작은 정성과 적은 비용으로도 산뜻하게
기분을 전환할 수 있습니다. 싸움이 빈번하고, 쓰레기가 넘쳐나던
우중충한 골목길 담벼락에 예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꽃도
그리고, 새도 그렸습니다. 어린 왕자도 그리고 백설 공주도 그렸습니다.
싸움 소리는 사라지고, 사진 찍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쓰레기는
없어지고,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생겼습니다. 발상의 전환이
쓰러져가는 골목길에 생기를 주었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의 주제는 발상의 전환입니다. 이기적인 사랑을 할
것인가 이타적인 사랑을 할 것인가입니다. 개인적인 사랑에 머물
것인가 사회적인 사랑에 동참할 것인가입니다. 이기적인 사랑도
필요합니다. 나와 내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삶의 시작입니다. 이기적인
사랑도 못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가정도
있습니다. 원수처럼 지내는 이웃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이타적인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우리에게 측은지심
(惻隱之心)의 마음을 주셨습니다. 예언자들은 이타적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이 되신
건 이타적인 사랑의 시작입니다. 사막의 오아시스는 생명의 쉼터가
됩니다. 이타적인 사랑은 공동체를 위한 오아시스입니다. 

개인적인 사랑도 필요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걸 추구하는 건
기쁨입니다. 산을 좋아하면 산엘 가고, 음악을 좋아하면 음악을
듣습니다. 운동을 좋아하면 더불어 사는 이웃과 운동하면 됩니다.
공부하고, 책 읽고, 여행하고, 가정을 이루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아무나 못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여건이 안 돼서 못하는 사람도 있고,
의지가 약해서 못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사회적인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었던 세상입니다. 사랑과 정의가 만나는 세상입니다. 사랑과
평화가 만나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 흐르는 세상입니다.
사랑과 진실이 만나는 세상입니다. 그런 나라가 오면 사자도 여물을
먹고,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춤추고, 어린이와 호랑이가 손잡고 길을
걸어갑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중에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입니다.” 인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육체적인 능력
때문이 아닙니다. 인류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건 자연을 정복해서가
아닙니다. 이타적인 사랑이 공동체를 만들었고, 사회적인 사랑이
공동체를 성장시켰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고, 가난한 이는 영원한 생명에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첫째는 믿음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다스리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생겨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이 세상에 온 것임을 믿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화의 산물이고,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서 끝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런 믿음이 필요
없습니다.

두 번째는 행동입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에게 사랑의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헌혈증을 가져오면
국밥을 무료로 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환경미화원에게 따뜻한 국수를
드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꽃동네는 어려운 이웃의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답습니다. 이 세상은
따뜻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이 있기에 아름다울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의로움과 신심,
믿음과 사랑, 인내와 온유로’ 그 일을 행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정중하게 이야기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까지
흠 없고 나무랄 데 없이 계명을 지키십시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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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26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29일 연중 제26주일 : 재물의 위험성

지난주일 독서와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재물의 사용법’에 대한
가르침을 들었다. 그 재물이 사람들 사이에 형제애의 다리를 놓아
가난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는데 사용하지
못한다면 자기파멸과 하느님과 형제들을 해치는 도구가 되어버린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제 오늘의 독서와 복음은 그 위험성이 상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임을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가난한
라자로의 비유를 통해 재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궁핍한 다른 형제들
앞에서 그 마음을 얼마나 메마르게 할 수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말씀하고 계시다.

제1독서: 아모 6,1.4-7: 기지개 켜며 흥청대던 소리 간데없으리라.

1독서는 예언자 아모스가 때를 잘 타 쉽게 돈을 벌어 갑작스레 부자가
된 사람들의 몰염치한 사치스러운 생활을 엄하게 고발하고 있으며,
마지막 절은 북부왕국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안심하고 흥청대는 사람들’은 이제 막 폭발하려는 화산 입구에서
즐기는 사람들과 같다는 것이다. 재물이 사치와 허영을 드러내는
전시품이 될 때, 그 때문에 사회는 갈라지고,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고
있고, 더 나아가 온갖 형태의 도덕적 무질서를 조장하며, 가난한 이들의
마음속에 응어리가 지게하고 또한 의지가 박약한 다른 많은 사람들을
그러한 행동으로 몰아갈 수 있으며, 사회가 커다란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이 사회에 만연되어있는 ‘소비주의’는 생필품조차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도 확산되어 있다. 이러한 풍조는 결국
그들의 생활을 더 어렵게 하고 절망적인 욕구불만과 거센 분노를
자아낸다. 그러기에 재물이 올바로 사용되지 않고 공평하게 분배되지
못할 때 그것은 참으로 사회적 재난을 야기할 수 있다.

복음: 루카 16,19-31: 부자와 라자로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는 재물이 오직 개인의 만족과 성취의 수단이
되어버릴 때, 찾아드는 모든 ‘파멸적’ 능력을 극적인 형태로 제시하고
있다. 재물은 다른 사람들의 어려움을 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마음을
굳게 닫게 한다. 오늘 복음의 두 주인공은 더 이상의 부조화를 볼 수
없을 정도이다. 부자는 풍요한 의식주의 여유를 가지고 있었으나,
가난한 라자로는 부자들이 식사 후에 손을 깨끗이 하는 빵부스러기로도
배를 채울 수 없었으며, 돌아다니는 개까지 그에게 달려들어 상처를
핥아 다시 헤집어 놓음으로써 고통을 배가시켰다. 그 부자는 정말
‘자기 집 문간에’ 드러누웠던 그 거지를 전혀 알아보지 못했을까?
팔자가 그렇다고 생각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갑자기 입장이 바뀐다. 라자로는 영원한 행복을
뜻하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배고프지 않은 식탁에 자리 잡게 되고,
그 부자는 ‘죽음의 세계’에서 고통을 겪게 된다. 그러면서 생애
동안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라자로의 도움을 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생전과 같이 누구에게나 명령을 하며 살았기 때문에 ‘죽음의 세계’
에서도 아브라함에게조차 명령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는 소리를 질러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를 불쌍히 보시고 라자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으로 물을 찍어 제 혀를 축이게 해 주십시오”(24절).
하여간에 오늘 복음의 비유는 전통적인 상징적 개념을 이용해서
하느님의 정의가 어떻게 인생의 불의와 불공평을 다시금 공정하게 짜
맞추어 주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사에 개입하시는
것 같지 않다는 이유로 어떤 사람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결코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께서 그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거지를 ’라자로‘라고 부르시는 것도
의미가 있다. ’라자로‘라는 말은 히브리어에서 ’하느님이 도와주신다.‘
(El'azàr)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하여간에 아브라함이 부자에게 한 대답은 이 정의에 입각한 ‘재균형’
에 관한 것이다. “얘야, 너는 살아있을 동안에 온갖 복을 다 누렸지만
라자로는 불행이란 불행을 다 겪지 않았느냐? 그래서 지금 그는
여기에서 위안을 받고 너는 거기에서 고통을 받는 것이다”(25절).
그러나 하느님께서 모든 균형을 이루어주실 것으로 생각하여 무기력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세상의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형제적 사랑과 재화를 나누어 쓸 수 있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부자는 자기의 불행을 근본적으로 깨닫고 아브라함에게 라자로를
보내어 자기 형제들만이라도 그곳에 오지 않도록 경고해 달라고
청한다(28절). 그 형제들이 생활을 바꾸면 그 고통스러운 곳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모세와
예언자들이 있음을 들어 그것도 거절하고 있다.

사실 형제적 사랑이나 재화를 서로 나눌 수 있도록 변화되는 데는
거창한 징표나 기회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그저 단순히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넉넉하다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은 저승에서 사자(使者)가 온다고
하여도 믿지 않을 것이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인 라자로도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의 마음이 굳어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이려고 하였다
(요한 11,46-53; 12,10-11 참조). 자기가 가지고 있는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사물을, 이웃을 바라보려고 하여야 한다.

이 부자는 어찌 가난한 이의 외침에 자기 마음의 문을 닫았을까?
그것은 “먹을 것을 굶주린 이에게 나눠주고, 떠돌며 고생하는 사람을
집에 맞아들이고, 헐벗은 사람을 입혀주며 제 골육을 모르는 체하지
말라.”(이사 58,7)는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닫은 것은 재물을 소유하고 모든 것을
다 소유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가 소유한 모든 재물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그 사물들 속에 자신을 상실해버려 더 이상
하나의 인격체이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하느님의 구원계획에 마음의 문을 열 능력이 없는 사람은 바로 그
향락을 즐기는 부자라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재물을 잘
사용함으로써 ‘위험성’에 떨어지는 일이 없이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
우리가 되도록 은총을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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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말씀 공부의 목적은 무덤에서 죽기 위함이다.

2019년 다해 9월29일 연중 제26주일

<말씀 공부의 목적은 무덤에서 죽기 위함이다.>
복음: 루카 16,19-31

전 세계의 존경을 받는 남아프리카의 첫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백인 정부에 의해 26년간 감옥살이를 했었습니다. 그가 출옥할 때
사람들은 그가 아주 허약한 상태로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70세가 넘었는데도 불구하고 아주 건강하고 씩씩하게
걸어 나왔습니다. 그래서 80세 넘어 대통령까지 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5년 만 감옥살이를 해도 건강을 잃는데 어떻게 26년
동안 옥살이를 했는데도 그렇게 건강한 상태로 출옥을 할 수 있었냐고
사람들이 질문했습니다.

“나는 감옥에서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하늘을 보고 감사하고 땅을
보고 감사하고 강제노동을 할 때도 감사하고, 늘 감사했기 때문에
건강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가 생활했던 감옥은 시멘트 바닥이었고 겨울에도 작은 담요 하나로
버텨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제자리 달리기를
45분, 손가락 짚고 팔굽혀펴기 200회, 윗몸 일으키기 100회, 허리
굽히기 50회 이상을 했습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다면서 왜 이렇게 몸을 괴롭힌 것일까요? 몸이
미워서였을까요? 아닙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몸을 괴롭히라는 것입니다. 건강해질 수
있도록 몸을 괴롭히라는 것이 하느님의 메시지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자는 바리사이, 율법학자의 상징입니다. 반면 거지
라자로는 예수님 제자의 상징입니다. 둘 다 성경말씀으로 양식을 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은 그 말씀을 자기를 괴롭히려는
목적으로 사용하였고, 한 사람은 자신을 배불리려는 용도로
사용하였습니다. 같은 이슬을 뱀과 젖소 두 부류가 먹은 것입니다.

거지 라자로는 말씀으로 자기를 죽인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의 거지
라자로는 예수님의 친구 베타니아의 라자로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친구가 죽어서 무덤에서 썩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래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표징이 되기 때문입니다. 유다인들은 죽은 사람을
부활시켜보라고 청할 때는 언제고, 라자로를 부활시키자 그들은
예수님은 물론 라자로까지 죽이기로 협의합니다.

반면 말씀으로 자기 배만 불리려고 했던 사람들이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지식으로 장사를 하여 배를
불렸습니다.  

예수님은 왜 부자가 지옥가고, 거지 라자로가 천국 가는지 이렇게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부자는 혀를 만족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자아를 만족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영혼을 망가뜨린 사람입니다. 부자와 부자의
형제들도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형제들이 지옥에
오지 않게 해 달라며 이렇게 청합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제발 라자로를 제 아버지 집으로 보내 주십시오.
저에게 다섯 형제가 있는데, 라자로가 그들에게 경고하여 그들만은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다섯은 ‘오감(五感)’, 즉 육체의 욕구를 의미합니다. 육체의 욕구를
채우느라고 정신없는 그들이 지옥에 오지 않는 방법은 성경을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래서 이렇게 말해줍니다.

“그들이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다.” 

성경말씀을 아무리 읽어도 몸을 괴롭힐 마음이 없다면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이들에게 라자로가 부활하여 나타나봤자 믿지
않을 것을 미리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는 모델은
그 말씀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무덤에 들어가게 만들려는 의도가
있어야합니다.  

성공하려면 배의 80%만 채우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절제의
성공학’을 쓴 미즈노 남보쿠입니다. 그가 19세기 초 국가로부터
‘대일본(大日本)’이란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절제의 습관
때문이었습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싸움과 감옥살이를 일관했던
그가 어떻게 변할 수 있었던 것일까요? 한 관상가가 “당신은 1년 안에
칼에 맞아 죽을상이니 1년 동안 보리와 흰콩으로만 식사를 하고 다시
돌아오라.”고 한 것에서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말년에 상당한 부와
명성을 쌓았지만, 그의 음식은 항상 보리 1홉 반, 술 1홉, 반찬은
1탕 1채의 간소한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몸을 건강하게 하려면 ‘혀’를 괴롭혀야합니다. 혀를 만족시키다보면
건강을 잃습니다. 피자나 햄버거나 치킨은 몸이 원하는 음식이 아니고
혀가 원하는 음식입니다. 몸을 건강하게 하려면 또한 ‘게으름’과
싸워야합니다.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운동을 해야 건강해집니다. 나와
싸워야 건강하여 타인도 도와줄 수 있습니다. 나를 괴롭히지 않으면
타인을 괴롭히는 사람이 됩니다. 

영혼에도 ‘혀’가 있습니다. ‘자아’라고 합니다. ‘육체의 욕구’라고 합니다.
영혼도 건강하고 싶다면 육체의 욕구와 반대되는 것을 먹어야합니다.
영혼이 먹어야하는 것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말씀은 우리 몸의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고 더 배고프게 만듭니다. 육체의 욕구와 거꾸로
가라는 것이 말씀의 요지입니다. 나를 죽여야 이웃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 말씀의 핵심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영혼을 건강하게 하고 영원한
부활을 약속하는 것입니다. 

참으로 건강에 유익한 말씀을 찾는다면 자아를 괴롭히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몸이 건강하기를 원한다면 육체가 괴로운 것을
선택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모든 내용이 내가 죽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도 성경을
공부하면서도 자기를 괴롭히기를 원치 않는다면 오늘 복음의 부자의
결말을 맞게 될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이 다가 아닌 것처럼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기를 죽이려는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여야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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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루카 16, 25)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9월29일 연중 제26주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루카 16, 25)

물들임이 시작된 곱고 고운 가을의 따뜻한 마음입니다.
고운 가을속에서 우리의 마음 우리의 만남은
어떠한가를 성심껏 성찰하게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삶이란 우리모두를 위한 사랑의 선물이며 사랑의 시간입니다.

가장 놀라운 것은 우리의 삶이 일회적인 죽음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의 역사를 안고 하느님을 다시 만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모두에게 늘 가까이 있습니다.
모두 다 소중한 사람들입니다.

어떤 존재도 소중하지 않은 사람이란 없습니다.
소중한 사람들끼리 서로의 삶을 더 따뜻이 마주하며
더 환하게 비춰주는 사랑의 시간이 되길 기도드립니다.
가난한 라자로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사랑을 실천합시다.
지금 우리 자신이 지니고 있는 작은 것조차
우리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삶이란 더 많은 것을 지니기 위한 욕심의 시간이 아닌
더 사랑하기 위한 마음의 시간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우리모두를 구원할 것입니다.
지금 이순간 우리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위로와 믿음을 나누는 고운 가을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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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천국에는 더 이상 높음도 낮음도, 귀함도 천함도,
특별대우도 귀빈석도 없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 자매입니다!

2019년 다해 9월29일 연중 제26주일

천국에는 더 이상 높음도 낮음도, 귀함도 천함도, 특별대우도 귀빈석도
없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 자매입니다!

언젠가 스페인 마드리드에 위치한 한 고풍스런 수도원 대성당에서
봉헌된 부활 성야 미사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례를 아주
중시여기는 수도원이어서 그런지, 정말이지 성야 미사는 거룩하고
진지했습니다, 동시에 장엄하면서도 아름다워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을
제게 선사했습니다.

총 9개나 되는 성경이 봉독되었고, 매 성경 봉독 후에는 어김없이
천상음악처럼 들리는 멋진 선율의 화답송이 반복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 낭독 후에는 긴 강론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보니 말씀의
전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시간은 한 시간 반을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그 특별한 부활 성야 미사에 참여하면서 느낀 바가 한 가지 있었습니다.
제단을 중심으로 제대 뒷쪽에는 인자하신 주교님과 여러 사제들과
복사들이 줄지어 앉아 계셨고, 반대편 신자석에는 수많은 수도자들과
신자들이 경건한 자세로 앉아있었습니다.

거룩한 독서가 봉독될 때는 다들 귀담아 성경말씀을 들었습니다. 잘
훈련된 성가대원들은 매 화답송을 정성껏 노래했습니다. 신자들 역시
천상 음악에 누가 되지 않게 조용조용 성가를 따라불렀습니다.

그 자리에 앉아있던 저는 순간 무릅을 탁! 쳤습니다. ‘아! 그래! 천국이
바로 이런 모습이겠지? 예수 그리스도께서 중앙에 좌정해 계시고, 그
주변에 성모님과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앉아 계시고, 훌륭하게 살다가신
신앙인들이 한 무리가 되어 살아가는 곳, 언제나 거룩한 말씀이 계속
봉독되고, 끝도 없는 찬미가와 영가가 울려 퍼지는 곳, 그곳이
천국이겠지?’ 하는 깨달음이 왔습니다.

그 순간 옆에 앉아 있던 동료 형제를 힐끔 쳐다봤는데, 평소 거룩한
전례보다는 역동적인 외부 사목활동이나 스포츠를 좋아하던
형제였는데, 그 얼굴이 세상 괴로운 얼굴이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끝나지 않는 길고도 긴 말씀의 전례 때문에, 그 얼굴이 살아 생전
지옥벌^^ 을 받고 있는 표정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들었던 한 가지 생각! ‘지상에서부터 미리 미리 천국 생활을
준비해야겠구나. 지상에서 늘 지극히 세속적이며 인간적인 것들에만
몰두하지, 영적인 삶, 거룩한 전례적 삶에 맛을 들이지 않을 때,
주님께서 우리에게 천국을 허락하신다 할지라도, 천국의 거룩한 삶
자체가 지옥이 될 수도 있겠구나!’

수백·수천억의 막대한 자산을 보유한 회장님들, 그러나 죽기살기로
모을 줄만 알았지, 죽었다 깨어나도 그 재물을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선용(善用)하지 않는 재벌들 뵐 때 마다, 큰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아차! 하고 크게 가슴 칠 날이 순식간에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할 것 같았던 그 재물이 결코 영원한 것이 아니라는 불변의 진리를
깨닫는 순간, 크게 후회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갑작스레 다가온 마지막
날, 그들은 깨달을 것입니다. 재물이라는 것! 결코 내것이 아니었구나.
죽써서 개주는구나!

죽기살기로 애써서 모은 그 많은 재물들 남겨두고 떠날려니, 너무나
분하고 아까워서, 어디 눈이나 제대로 감을 수 있겠습니까? 따지고
보니, 미래를 위한 영적 준비에 소홀했던 그들은 요르단 강 건너기
전, 살아생전 이미 혹독한 지옥의 형벌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지상에서 누릴 것 안 누릴 것 다 누린 사람들, 늘 떵떵
거리며 유세를 부리던 사람들, 언제나 높은 자리에 앉아,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편안하게 살던 사람들, 어디 가나 귀빈석에 앉고
특별대우를 받던 사람들을 봐도 걱정이 앞섭니다.

그들은 이 지상에서부터 이미 받을 것을 다 받았기 때문입니다. 누릴
것을 다 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토록 추구하고 집착했던 자리
역시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리에서 내려오는 순간, 그들이 겪게될 상심감과 비참함은
상상을 초월할 것입니다. 더구나 천국에서는 더 이상 높음도 낮음도
없습니다. 귀함도 천함도 없습니다. 더 이상 특별 대우도 귀빈석도
없습니다. 모두가 한 형제 자매이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와 특별 대우에 익숙했던 그들이 천상에서 받을 느낌 자체가
지옥일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도 이 지상에서부터 미리 미리
천국에서의 공평하고 형제적인 삶에 적응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해야할 것입니다.

아모스 예언자도 바로 이점을 정확하게 적시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읽고 묵상하다보니, 정말이지 오늘 우리를 향한 섬뜩한 경고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불행하여라, 시온에서 걱정없이 사는 자들,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 놓고
사는 자들! 그들은 상아 침상 위에 자리 잡고 안락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양 떼에서 고른 어린 양을 잡아 먹고 우리에서 가려낸 송아지를
잡아먹는다. 이제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 끌려가리니, 비스듬히 누운
자들의 흥청거림도 끝장나고 말리라.”(아모스 예언서 6장 1~7절)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부를 은총의 선물로 받았지만, 그 부를 자신의
호의호식만을 위해 사용했지, 바로 옆에 굶어죽어가는 이웃 라자로를
개무시·개취급한 부자를 향한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 역시 오늘
우리를 향한 것이 분명합니다.

“애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복음 16장 25절)

아모스 예언자와 예수님의 강한 메시지에 마음이 많이 찔리시는 분들,
오늘 이 자리에서 곧 바로 결단을 내리시면 좋겠습니다. 마치 한 줄기
바람처럼 소리도 없이 순식간에 다가올 우리의 그날, 땅을 치며
후회하지 않도록, 관대한 나눔과 이웃 사랑의 실천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시면 좋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SDB)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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