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6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0-06 05:28:51    조회 : 190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0월6일 [(녹) 연중 제27주일 (군인 주일)]

제1독서 하바쿡 예언서 1,2-3; 2,2-4
제2독서 티모테오 2서 1,6-8.13-14
복음 루카 복음 17,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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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7주일

2019년 다해 10월6일 연중 제27주일

제가 신학교에 입학했을 때입니다. 당시에 일본의 가전제품은 모두에게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저도 입학 선물로 일본의 소형 녹음기를
받았습니다. 작고 아담한 녹음기는 저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의 가전제품은 세계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일본인의
장인정신, 성실함,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만들어낸 성공입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철옹성 같았던 일본의 가전제품은 국제무대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대신 그 자리를 애플, 삼성, 구글, 페이스북
같은 새로운 기업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실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장인정신이 없어서도 아닙니다. 기초과학에 대한 투자가 없어서도
아닙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해서입니다. 새로운 시대의
흐름은 스마트 폰을 기점으로 한 디지털 환경의 변화입니다. 애플,
삼성, 구글, 페이스북은 그런 환경에 적응해서 디지털 혁명의 대열에
함께 했습니다. 

100년 전 중국과 한국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국력과 한국의 문화가 당시 세계의 수준에서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석기 시대는 청동기 시대를 견디지 못하고, 청동기 시대는 철기
시대를 견디지 못한 것처럼 철기 시대의 문명은 증기기관으로 발전한
기계문명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일본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받아들였고, 새로운 산업혁명이라는 배에 탑승했습니다. 마차는
자동차의 등장으로 자리를 내주어야 했습니다. 증기기관의 기계문명은
디지털로 무장한 4차 산업혁명에 자리를 내주리라 예상됩니다.
변화되는 시대의 상황을 직시해야 할 겁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박해와 순교를
견디어낸 제자들의 헌신적인 선교로 예루살렘을 벗어나 중동,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로 전해졌고, 동방의 조선에도 전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복음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과 문화를
받아들였고, 견고한 교계제도와 교리체계를 확립하였습니다. 마을의
중심에는 교회가 있었고, 교회의 가르침은 권위가 있었고,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는 타성에 젖게 되었고,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습니다. 교계제도는 질서를 유지하는 좋은
제도입니다. 그러나 현장의 소리를 경청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제도입니다. 시민혁명과 민주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은 교리와 신학을
따분하게 여겼습니다. 여행을 자유롭게 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문화와
종교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진화론과 과학의 발전은 인간의 지성이
모든 것을 풀어낼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제
성소의 감소가 급격하게 이루어졌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늘어났습니다. 교회를 매각하기도 했고, 교회가 문화시설로 대체되기도
했습니다. 

한국교회는 어떨까요? 순교자들의 피와 땀으로 세워진 교회는 박해의
긴 터널을 지났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주어졌고, 교회는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섰습니다. 권위와 독재를 비판하였고, 민주화를 외치는 이들의
소리를 경청했습니다. 70년대 백만이었던 신자는 10년마다 백만 명씩
늘어났습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500만 명의 신자가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전구와 하느님의 자비하심이 함께 하였습니다. 성직자들은
겸손하지만,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박해를 견디어낸
신자들은 신앙에 충실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교회도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성당을
신축하고 대형화된 교회는 신앙을 키우는 데 소홀했습니다.
핵가족화되면서, 성공이 인생의 목표가 되면서 가정에서의 기도 시간은
줄어들었습니다. 사제들은 섬기기보다는 섬김을 받는 데
익숙해졌습니다. 권위와 독선은 공동체에 큰 상처를 주기도 했습니다.
신앙은 삶의 중심이 되기보다는 삶의 한 부분으로 전락했습니다.
사제가 마음에 안 들면 성당에 나가지 않습니다. 세상의 것에 마음이
쏠리면 성당에 나가지 않습니다. 주일미사 참례 수는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30% 미만의 신자들만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목소리가 성당에서 들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교회가 시대의 아픔과 함께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진단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사제들의 성찰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이 걸었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최양업 토마스 사제가 걸었던 길을 따라야 합니다.
권위와 독선을 버리고 겸손과 온유함을 입어야 합니다. 사제의 말과
강론은 영성을 드러내야 합니다. 사제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해야
합니다. 성체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사제는 그렇게 살라고 부르심을
받았고, 그렇게 살겠다고 서약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성찰입니다. 무엇보다 가정에서의 기도가 살아나야 합니다.
신앙이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재물을 땅에 쌓기보다는 하늘에
쌓아야 합니다.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교회의 서적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초대교회 순교자들의 뜨거운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묵주를 든
손에는 악의 세력이 가까이하지 못합니다. 자본주의와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순교자들이
보여준 영성입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바로 그런 걸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 우리 안에 머무르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그대가 맡은 그 훌륭한 것을 지키십시오. 이처럼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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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27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0월6일 연중 제27주일: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

오늘의 주제는 '믿음'이다.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말하는 믿음은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그리고 우리에게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에
온전히 의탁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의 두려움이나 자만심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는 것이어야 한다.

제1독서: 하바꾹 1,2-3; 2,2-4: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

하바꾹 예언자는 예레미아와 동시대인이다. 하바꾹은 하느님께서
인간들 사이에 정의를 다시 세워주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비난하듯
항의하고 있다(1,2-3). 이 불편에 대해 주님께서는 신뢰심을 가지라는
계시를 내리신다. 비록 쉬 오지 않으실지 몰라도 당신을 믿는 사람을
도와주시러 반드시 오신다. "네가 받은 말을 누구나 알아보도록 판에
새겨두어라. 네가 본 일은 때가 되면 이루어진다. 끝 날은 반드시
찾아온다. 쉬 오지 않더라도 기다려라. 기어이 오고야 만다. 멋대로
설치지 마라. 나는 그런 사람을 옳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써 살리라"(2,2-4). 주 하느님께서는 당신께
계속 신뢰하는 사람들의 구원을 보증하시고 계시다. 그러나 '올바른
정신을 갖지 못한' 사람, 즉 순간적인 어려움에 무릎 꿇어 하느님께
신뢰할 용기를 잃고 불의와 부정에 자신을 내맡겨 버리는 사람은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신다.

그렇다면 '신앙'이 어떻게 참으로 믿는 이들에게 '생명'을 주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육체적' 생명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과 그분의 약속에 충실한 사람들은 갈데아 민족의
폭력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며, 영신적 생명은 하느님과
그분의 말씀에 온전히 신뢰함으로써 갖게 되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악이나 폭력의 모든 위협과 안이한 것, 편의주의적인 것,
감각적인 것 등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을 강인함을, 믿는 이들의
마음속에 형성시켜준다. 믿음은 우리의 직접적인 체험을 넘어 기다릴
줄 알게 한다. 문제는 말씀을 신뢰하는데 있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영신적으로, 윤리적으로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패배할 것이다.

복음: 루카 17,5-10: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오늘의 말씀은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루가 16,13)
라고 하시며, 약은 청지기와 부자에 관한 비유를 말씀하셨는데 여기에
연결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철저하게 재물을 끊어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 때문에 사도들은 의기소침해진 것 같다. 그래서
주님께 청한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5절). 그들은 아마
자신들이 믿음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들의
믿음을 더해 달라고 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겨자씨만한 믿음도 갖고 있지 않다고 답변하신다. 그만한 신앙이라도
있었다면 그 믿음은 그 고장에서는 뿌리가 대단히 깊어서 폭풍우에도
절대로 뽑히지 않는 뽕나무를 뿌리째 뽑아 바다에 그대로 옮겨 심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신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믿음이란
양적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씀하신다.

믿음의 가치는 '질'과 '순수성'에 달려있다. 겨자씨는 그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내부에 있으면서 그 씨앗 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성장시켜주는 강력한 생명력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즉
믿음이란 하나의 내적 실체로서 어떠한 형태도 갖고 있지 않으며,
거창한 행동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평범한 '일상성' 안에 살아있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모든 일에 있어서 온전히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켜 나가고자 노력함으로써 단순과 겸손을 통해 행하는 모든 것을
'비범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그 자체 안에 지니고 있다. 그러기에
믿음은 신앙인의 삶 속에서 아무 것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것으로
중요한 상황에서 뿐 아니라, 매일 매일 매순간 순간마다 '기적'을
이루어주는 삶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종의 비유에서 믿음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임을 말씀하신다.
당시의 종이라고 하면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어떤 일이든지 시킬 수
있는 주인의 소모품 같은 존재였다. 이 종의 모습과 같이, 하느님의
나라는 모든 것이 '무상'이고 사랑의 선물이기 때문에 공로에 대한
기록부도, 봉사의 시간표도 없고, 봉사의 한계도 획득할 수 있는 권리도
없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내세울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이 다 무상적인
나라에 속해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될 때에는 한
'일'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 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여야 한다.
"너희도 명령대로 모든 일을 다 하고 나서는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10절). 우리의 봉사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나라가 발전하지 못하는
것을 볼 때, 우리의 봉사가 '보잘것없음'이 드러난다. 정말 우리는
'해야 할 일을 다 했는가?'(10절).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 나라의 '무상성'에 자신을
내맡김으로써 자기 자신을 '무상'으로 내놓을 수 있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이것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요구하시는 참된 믿음이며,
제자들이 갖추지 못했던 믿음이다. 이 종의 비유는 하느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든 권리주장을 포기하도록 하는 반면에, 다른 한편으로는
믿음이 '활동적'이어야 함을 입증해주고 있다. 즉 아무 것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한 모든 것, 아니 그 이상의 것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도 주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라고 청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
그리하여 주님을 향한 첫걸음을 내딛게 하는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믿음의 성장은 우리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마음
깊이 새기며,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 무상으로 내어 드릴 수 있는 자세를
갖도록 하자. 믿음은 여기서부터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은총을
주님께 청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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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은 감사를 먹고 산다

2019년 다해 10월6일 연중 제27주일

<믿음은 감사를 먹고 산다>
복음: 루카 17,5-10

한 여성이 10년 동안 사실상 식물인간이었습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 해도 극도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뺑소니 차량과 정면충돌한
사고의 후유증이었습니다. 자신의 처지에 비관하다보니 우울증까지
왔습니다. 당연히 죽음도 생각했습니다. 

죽음을 결심한 후에 마지막으로 짧은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습니다.
어느 휴양지에서 댄스 공연을 보았습니다. 춤을 좋아했던 과거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구경꾼들이 다 빠져나갔는데도 여전히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움직이는 것은 팔 뿐이었습니다.

‘그래. 팔이라도 움직여보자.’

눈을 감고 음악에 맞춰 팔을 흔들었습니다. 그 리듬이 온 몸으로
퍼져나갔고 다리와 허리까지도 들썩였습니다. 한 시간쯤 지나니 아무
통증 없이 몸 전체를 움직여 춤을 출 수 있었습니다.

‘신기하다. 10년간의 통증이 이렇게 쉽게 사라지다니!’ 

다음 날에도 통증이 생길 때 그렇게 반복했습니다. 통증이 적은
부분부터 움직여 그 움직임이 온 몸으로 퍼지도록 했습니다. 그 다음
날엔 침대에 누워 옴짝달싹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다리를 움직여
춤을 추었습니다. 그것도 안 되면 상상 속에서 춤을 추었습니다.

‘목숨이 붙어있는 한 움직일 수 있는 곳은 반드시 있구나!’
그녀는 TV에 출연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움직일 수 없는 부분은 잊어버리고 움직일 수 있는 부분에만 리듬을
맞췄어요. 나흘째부턴 마음대로 뛰어다닐 수 있게 됐죠.”

미국의 카줌(Loolwa Khazzoom)의 기적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녀는
자신이 쓴 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통증으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있습니다. 

[출처: ‘리듬: 꿈을 방해하는 부정적 이미지 싹 날려버리기’, 김상운,
정신세계사] 

샌프란시스코 금문교에서는 평균 2주에 한 번꼴로 뛰어내리는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그들 가운데 3퍼센트 정도가 생존합니다. 생존한 두
사람의 말이 ‘뉴요커’지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난간에서 손이 떨어져 나가는 바로 그 순간. 저는 인생에서 해결할 수
없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방금 다리에서
뛰어내린 일만 빼고서요.” 

자살을 용기가 있다면 세상엔 못 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뛰어내렸다면 그것만은 되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도 제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뛰어내렸죠. 처음
떠오른 생각은 ‘방금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였습니다.” 

나를 부정적인 생각으로 이끄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 안에 있는
악입니다. 그 악에게 이용당하여 감사한 면을 볼 수 없을 때 자신도
모르게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볼 줄 알아야합니다.  

우리는 더 늦기 전에 더 긍정적인 면, 더 감사한 면을 발견하려
노력해야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다고 믿는다면 그 믿음은 감사한 일들을 통해 힘을 얻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믿으면 반드시 시련이 따르게 되어있습니다.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살아야한다고 믿기 때문에 힘든 것입니다.
지금은 힘들고 미래는 두렵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두려움을 수반합니다.
그 두려움이 믿음을 갉아먹습니다.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면 믿음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두려움에 지면 믿음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
믿음이 살아야 한다는 믿음이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두려움을 이기게 만드는 힘은 무엇일까요? 바로
감사입니다. 지금 감사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합니다. 이것은
믿음에게 밥을 주는 일입니다. 감사가 없으면 믿음은 굶어죽습니다.

방탄커피를 만들어 1억 잔 이상을 판 데이브 아스프리가 어떻게 그런
성공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는 커피 전문가가 아닌 컴퓨터
전문가였습니다. 그런 그가 커피에 버터를 섞는다는 생각이 세상
사람들에게 잘 받아들여졌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외면하였고 커피
전문가들은 비판하였습니다. 그런 때는 수도 없이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는 말합니다.  

“수많은 비평에도 불구하고 내 믿음에 따라 행동한 결과, 나는 성공을
거머쥐었다. 자신만의 미션을 갖는 것은 중요하다. 미션을 품어야
자신의 신념을 끝까지 지킬 수 있다. 감사함이 중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당신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는 ‘다른 사람들이 비평가들의 말을
믿을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
누군가 비난을 할 때마다 이렇게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했든 결국 당신에 대한 더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킬 테니 감사한
일이라고.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하며 머릿속 이야기를 바꿔라.” 

[출처: ‘최강의 인생: 제3장 두려움을 감수하고 틀을 파괴하라’,
데이브 아스프리, 비즈니스북스]

TV의 동물에 관한 프로그램에서 어떤 철새들이 히말라야의 아주 높은
산을 넘으려고 며칠 동안 사투를 벌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며칠 동안
맞바람과 맞서 싸우다보면 바람이 잔잔해지고 순풍이 불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넘을 수 있게 됩니다. 그 철새들이 산을 넘으려는 것은
믿음입니다. 그것들의 믿음을 역풍이 빼앗을 수 없는 이유는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실제로는 믿음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믿음의 모범을 비유로 보여주십니다.  

어떤 하인이 있는데 밭에 나가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을 하였습니다.
초죽음이 되어 돌아왔을 때 주인은 저녁을 차리라고 명령합니다.
기꺼이 저녁을 차리고 주인이 식사를 하는 동안 음식 냄새만 맡으며
시중을 듭니다. 설거지까지 다 하고 나서야 간신히 남은 음식으로 밥을
비벼먹고 잠자리에 듭니다. 그때 주인이 와서 “오늘 고생했지?”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하인은 이렇게 대답해야합니다.

“저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어떻게 이런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주인이 자신을 종으로 맞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기 식솔들은 밖에서 굶어 죽어야 할
수도 있고 산적 떼에 부인과 딸이 잡혀갈 수도 있었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그저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는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나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해 주셨는지를 믿는 것입니다. 그 안에 나를 당신 자녀로 삼아주신 것도
포함됩니다. 주님을 믿으면 동시에 감사가 함께 증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옥 가는 것보다 주님의 집에 살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러니 지금 감사하지 못한다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 감사가 큰 만큼 주님께 대한 믿음이 더욱 강한 사람입니다.
믿음은 감사를 먹고 삽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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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
(루카 17, 6)|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10월6일 연중 제27주일(군인 주일).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다면...(루카 17, 6)

사도들에게 믿는 법을 가르쳐주십니다.
믿는 법이란 예수님과 한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한 마음으로 자라나야 할 우리 삶의 믿음입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도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도 믿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 모든 것은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우리 삶의 슬픔도 기쁨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게됩니다.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성장입니다.
믿음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자연스레 주님을 드러냅니다.

주님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올바로 섬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섬기는 믿음이란 기다리고 준비하는 겸손한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겸손해지는 행복한 주일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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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나는 주님의 위대함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요?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요?

2019년 다해 10월6일 연중 제27주일

나는 주님의 위대함 앞에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요?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요?

요즘 시대가 바뀌어서 늘 조심 또 조심해야 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특권의식, 우월주의, 특혜, 특별대우, 갑질, 차별대우 같은 구시대적
악습들입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근현대사를 돌아보니, 그런 악습에
깊숙히 빠져 살았던 악한 무리들의 횡포와 갑질로 인한, 가난한
국민들과 힘없는 서민들의 수난사(受難史)였습니다.

청문회장과 국정감사장에서, 아주 거만한 자세로, 폼이란 폼은
있는대로 다 잡고, 틈만 나면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참으로 봐주기
힘든 꼰대중의 꼰대인 한 국회의원을 보고, 정말이지 기가 차지도
않았습니다.

국회의원! 그거 뭐 그리 대단한 거라고, 어찌 그리 쌩난리를 다
피웁니까? 보아하니, 지금쯤 집에서 지난 세월 반성하며, 손주손녀나
보면 딱 좋을 분 같은데, 그분도 죽을 고생을 하길래, 참
불쌍해보였습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 너무나 나약한 존재여서, 지속적인 자기 성찰을
게을리 할 때, 순식간에 안하무인, 꼴불견으로 돌변합니다. 쥐꼬리 만한
권세라도 손에 쥐게 되면, 천하를 다 얻은 듯 거드름을 피우며
돌아다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뒤돌아서서 코웃음치는 것도 모르고,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내가 누군줄 알아?’하며 허세를 부립니다.

그저 야심으로 가득차 영혼은 사라진 채 좀비처럼, 불나방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드는 의 미없는 것에 목숨을 거는 그들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들 인간의 시선으로 볼 때도 웃기고 가증스러운 데,
하느님께서 보실 때는 얼마나 더 웃기고 가증스럽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제자 직분의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장 기본이 되어야 할 지침을 가르치십니다. 요점은 제자들
자신의 신원에 대한 명확한 인식, 그리고 겸손의 덕을 지니라고
가르치십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하고 말하여라.”
(루카 복음 17장 10절)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제자는 종이라는 것, 제자로서의
사도직 수행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에, 그에 따른 보상이나
특별대우를 바라지 말라고 가르치십니다.

어떤 사람들, 참으로 봐주기 힘들고, 견디기 힘든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의 업적을 한껏 부풀려
과대 포장하는 사람들입니다. 인간으로서의 근본, 원초적 결핍,
태생적 나약함을 잊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 특징이 마치
이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사람들, 불과 20년 30년 세월이 흘러 정신을 차려보면, 자신의
육체는 아무 볼품없이 모습으로 차갑고 황량한 들판에 누워있을
것입니다. 영혼은 저 세상 어딘가에서 초조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도 꼭 쥐고 있던 재물들은 사방천지로 흩어져버렸을 것입니다.
남겨놓은 글도, 명성도 순식간에 잊혀져 버릴 것입니다. 그리도
자부심을 느꼈던 소중한 저서들은 킬로그램당 얼마씩에 팔려 고물상
한켠에 쌓여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니 이 세상에서 뭔가 대단한 인물, 엄청난 존재가 되고자
발버둥치는 노력들이 얼마나 가소롭고 한심한 일이었는지를 쉽게 알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받은 것,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을 사실 하느님에게서 온
것입니다. 그러니 쓸데 없는 허영심, 자만심, 하늘을 찌르는 교만함을
버려야겠습니다.

우리가 지금 영적·육적으로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은 위쪽에서부터
오는 은혜요 선물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내가 지금 뭔가 작은
기여라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하느님 덕분이라는 것을 늘
고백해야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느님의 위대함 앞에 나는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
그분의 거룩함 앞에 나는 얼마나 큰 죄인인지? 그분의 무한하심 앞에
나는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지, 나는 얼마나 작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를 늘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그것이 주님 마음에 드는 제자직
수행을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갖추어야할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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