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3일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러 온 사마리아인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0-13 05:55:11    조회 : 337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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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9년 다해 10월13일 [(녹) 연중 제28주일] 제1독서 열왕기 하권 5,14-17 제2독서 티모테오 2서 2,8-13 복음 루카 복음 1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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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28주일 2019년 다해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날씨가 쌀쌀해져서 바지를 갈아입었습니다. 전에 입던 바지를 빨래 바구니에 넣었습니다. 지갑, 손수건, 안경 닦는 수건을 꺼냈습니다. 늘 가지고 다니던 것입니다. 문득 이동식 메모리 카드가 생각났습니다. 노트북의 자료를 사무실 컴퓨터로 옮기면서 사용했던 메모리 카드입니다. 혹시 하고 빨래 바구니에 넣었던 바지를 살피니 거기에 이동식 메모리 카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머니에는 묵주반지도 있었습니다. 부주의한 저 자신을 돌아보았지만, 세탁기에 넣기 전에 찾을 수 있어서 감사했습니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참 많습니다. 요양원에 계시는 어머니가 건강하게 잘 계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매일 멀리 있는 아들 사제를 위해서 기도하신다고 합니다. 어머니의 기도는 제게 커다란 힘이 됩니다. 성격이 깔끔하시고,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주시는 자매님이 있습니다. 저의 입맛에 맞도록 세심하게 준비해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교우분들이 이곳 생활에 적응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고, 도와주시니 감사할 일입니다. 30분만 걸어가면 아담한 호수가 있는 공원이 있습니다. 거위도 있고, 거북이도 있고, 물고기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모습도 보고, 담소를 나누는 노인도 봅니다. 근처에 공원이 있는 것도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제1 독서에서 우리는 시리아 장군 ‘나아만’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싸움을 잘하는 유명한 장군이었지만 나병에 걸린 환자였습니다. 엘리사를 만난 나아만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나병이 치유되었습니다. 우리가 나아만을 기억하는 건 그가 치유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감사드렸고, 하느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아만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 종은 이제부터 주님 말고는 다른 어떤 신에게도 번제물이나 희생 제물을 드리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10명의 나병 환자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10명 모두 깨끗하게 치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오늘의 복음을 기억하는 건 치유된 10명 때문이 아닙니다. 치유된 나병 환자 중에 사마리아 사람이 있었고, 오직 사마리아 사람만이 예수님께 돌아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마리아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권능으로 병이 치유된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영혼이 치유되는 겁니다.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몸과 마음이 치유될 수 있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신앙인은 3단계의 과정을 거쳐서 영적인 성장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운전의 3단계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첫 번째는 준법운전입니다.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운전입니다. 빨간 불에는 서고, 중앙선을 침범하지 않고,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만으로도 우리는 교통사고를 예방할 수 있습니다. 주일미사를 잘 지키고, 성경 말씀을 자주 읽고, 교무금 헌금을 기쁜 마음으로 내는 신앙인과 같습니다. 두 번째는 안전운전입니다. 교통법규는 당연히 잘 지키고, 무리한 운전을 하지 않습니다. 장거리 운전을 할 때 중간에 잠시 쉬고, 차량 정비를 자주 하고, 앞차와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런 운전을 하면 인생도 푸른 신호등처럼 늘 맑고 푸른 날이 될 것입니다. 주일미사는 물론이고 평일미사도 자주 참례하는 분, 본당의 단체에 가입해서 봉사하는 분, 각종 피정과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분, 소공동체 모임에 빠짐없이 참석하는 분입니다. 이런 분들이 있으면 본당도 기쁨과 평화가 넘쳐날 것입니다. 세 번째는 양보운전입니다. 급한 사람이 먼저 갈 수 있도록 양보해 주는 운전, 몸이 아픈 이웃을 병원으로 모셔다드리는 운전, 짐을 들고 가는 어르신을 태워 드리는 운전, 고장 난 차를 보면 내려서 도와주는 운전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운전은 단순히 이동수단이 아닙니다. 운전이 곧 선교이고, 운전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것처럼 나의 삶에 다가오는 시련과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놓을 수 있는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살지만 이미 하느님 나라에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나의 신앙은 어디에 속하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엘리사의 도움으로 나병에서 치유된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도움으로 치유된 사마리아 사람도 이제 몸만 건강해진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삶을 ‘복음의 기쁨’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랑하는 그대여,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그분께서는 다윗의 후손으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되살아나셨습니다. 이것이 나의 복음입니다. 나는 선택된 이들을 위하여 이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받은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그분과 함께 살 것이고, 우리가 견디어내면 그분과 함께 다스릴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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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연중 제28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감사하는 신앙생활 오늘의 제1독서와 복음은 다 같이 나병의 치유에 대한 기적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두 경우 다 주인공들은 하느님께서 자신들을 치유시켜주신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이방인들이다. 하나는 시리아인이고 하나는 사마리아인이다. 이 주인공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해 깊은 감사의 정을 표하고 있으며, 이는 생기가 넘치는 믿음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제1독서: 2열왕 5,14-17: 나아만의 치유와 주님께 대한 신앙고백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2열왕 5,1) 나아만은 나병에 걸렸는데 히브리인 하녀로부터 이스라엘에 그 병을 고쳐줄 수 있는 엘리사라는 예언자가 있다는 말을 듣고 많은 선물을 가지고 엘리사를 찾아갔다. 그런데 엘리사는 요르단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으라고 하자, 화를 내면서 그냥 돌아가려 했지만, 부하들의 말을 듣고 강에 들어가 일곱 번 몸을 씻고 몸이 깨끗이 나았다(14절). 이 기적은 요르단 강물이 특별히 치유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람에 대한 말에 대한 ‘믿음’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의 영역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하게 한다. 그래서 믿음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그분의 전능과 신비를 드러내시도록 하는 것이다. 치유를 받은 나아만은 야훼께 믿음이 이미 충만해져있다. 즉 자기 나라에 가서도 ‘성역’에서 야훼를 숭배할 수 있도록 이스라엘의 ‘흙’을 얼마쯤 가져가게 해달라고 청한다. 그리고 선물도 감사를 드리는 신앙의 표시일 뿐이다(15절). 그러나 예언자는 선물을 받지 않는다. 이것은 하느님 사랑의 ‘무상성’을 드러내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그가 바라는 것은 믿음(신앙)을 통한 그분의 능력과 자비로운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다. 많은 경우에 인간은 ‘신적인 것’을 자기 마음대로 다루고 또한 자기의 이기적인 욕구에 따라 제멋대로 다루려는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신앙에 의지하여 하느님의 절대적 권능에 자신을 맡기게 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1요한 3,20) 우리의 지성보다 크신 분임을 깨닫게 된다. 하느님께 대한 참된 감사는 우리의 삶과 사랑으로써 표현되는 것이다. 복음: 루카 17,11-19: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사마리아인 이러한 내용을 오늘의 복음이 전해주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같이 이곳에서도 다른 아홉의 유대인들과 달리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인식한 한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제시하신다. 그리고 이 기적은 ‘사마리아와 갈릴래아’를 지나가실 때 (11절) 일어난다. 이것은 이 기적이 예수께서 수난과 영광의 자리로 가시는 데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기적은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영광을, 다른 한편으로는 장차 사람들로부터 받게 될 몰이해를 예고해주는 구원적 행위라고 볼 수 있다. 다른 나병치유사화(루가 5,12-18)와 비교해볼 때, 차이점은 그들을 깨끗하게 고쳐주기 전에 ‘사제들에게 보여라’(14절)고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사제에게 가는 동안에 몸이 깨끗해진 것으로 보아 (14절)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복종했다고 하는 믿음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어찌 사마리아 사람에게만 믿음이 있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그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이 같은 태도는 무엇이든지 당연한 것처럼 ‘권리’만을 내세우려 하는 오늘의 이 시대가 소중히 해야 할 인간적 태도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선물이다. 이 선물에 대한 감사는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행위’는 예의바르고 양식 있는 행동 그 이상의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통해 무상으로 한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에게 드러난 하느님의 능력에 대한 진실 된 ‘믿음의 행위’이다. 그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온 것이다(15.18절).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러 돌아온 사람은 이 이방인 한 사람밖에 없단 말이냐?”(18절) 하신 것은 다른 아홉 사람이 당신을 통해 자비의 기적을 베풀어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을 설명해주시는 말씀이다. 아홉 사람은 그들이 유다인이라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모든 것을 당연히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때문에 그들의 믿음은 불충분하고 왜곡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 앞에는 모든 것이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그분의 자비는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특권은 없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모두가 다 나병에서 ‘치유’되었지만, 사마리아 사람만이 완전한 의미에서 구원을 받았다.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19절). 이 사마리아 사람의 믿음은 하느님께서는 어떤 차별도 두지 않으시고 모든 이에게 사랑을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마리아 사람의 감사의 행위를 통해서 볼 때, 믿음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가까이 계시고, 우리에게 당신 사랑을 보증해주신 하느님께 대한 ‘감사’의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명칭 자체가 뜻하는 감사의 행위가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최고도로 표현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 감사의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이 실현되고 그분을 통해 하느님께 바쳐진다. 실제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믿음 뿐 아니라, 믿음의 표현인 감사의 행위도 그분의 사랑의 무상적 선물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는 우리의 보잘것없는 계획을 넘어 우리 안에 이루어주시는 나라이다. 그 나라는 전통적인 가르침과 관습으로 율법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 하늘나라와는 먼 것이다. 선행을 많이 하기 때문에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그 어느 것도 자신에게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 하느님께 끊임없이 감사드리는 태도와 겸손한 정신을 지녀야 한다. 오늘의 제2독서에서도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총의 선물에 근거하고 있는 이러한 확고하고도 무상적인 믿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2티모 2,8.11.13). 우리의 믿음이 감사의 행위로 항상 표현되어야 함을 명심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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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이다 2019년 다해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이다.> 복음: 루카 17,11-19 코리는 폴란드의 한 아름다운 가정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런데 독일 나치에 의해 나라가 정복되자 유태인을 숨겨준 죄목으로 온 가족이 포로수용소에 잡혀가게 되었습니다.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금되어 온갖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큰 어려움은 성경 말씀을 읽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신체검사를 받는 도중 한 그리스도인 간호원이 코리에게 “가장 갖고 싶은 것을 말씀하세요.”라고 속삭였고, 코리는 그 간호원을 통해 작은 성경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코리의 기쁨은 말할 수 없었습니다. 코리는 들키지 않게 갖은 애를 써가며 성경 말씀을 삼키듯이 읽었습니다. 한마디 한마디 가 너무도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었습니다. 어느날 코리는 테살로니카전서 5,18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코리는 그 말씀을 마음속에 깊이 새겼습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코리는 언니 벳시와 함께 감방을 옮기게 되었습니다. 옮겨진 감방으로 오자 코리는 도저히 감사할 수 없는 마음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도 비참한 곳에 있었지만 이곳은 더욱 비참했습니다. 게다가 벼룩까지 들끓어서 견딜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씀은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지만 코리는 도저히 그 말씀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언니 벳시가 눈을 감고 나즈막하게 기도드렸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벼룩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할 수 없이 코리는 “아멘!”했습니다. 얼마 안가서 코리는 벼룩으로 인하여 감사해야 할 이유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벼룩 때문에 그 감방 주위에는 간수도, 독일 군인도 얼씬 하지 않았고 그들은 자유롭게 교제를 나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덕에 코리와 벳시는 매일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나누게 되었습니다. 온종일 강제 중노동에 시달리고 굶주린 여인들과 함께 모여 서로를 위로하며 아픈 곳을 만져주고 양보하며 기도하는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벼룩 때문에 가능했음을 코리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믿지 않아서일까요? 그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꼭 믿어야하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고작 선악과 몇 개 따먹은 것인데도 야단맞을까봐 몸을 숨겨야했습니다. 나에게서 몸을 숨기는 사람과 어떻게 인격적 관계가 이루어지겠습니까? 타인에 대한 자비를 믿지 않으면 타인은 지옥이 됩니다. 당신을 지옥처럼 생각하는 아담과 하와를 계속 에덴동산에 머물게 하실 수는 없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않게 만든 대상은 바로 내 안의 ‘자아’입니다. 그것이 뱀으로 상징됩니다. 뱀은 자신들이 받은 것보다는 결핍에 시선을 돌리게 만듭니다. 그래야 자신이 사람을 이용해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아의 불만 때문에 자아의 종이 됩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불순종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죄책감을 감소시키기 위해 이웃을 판단하고 미워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표징은 무엇일까요? 불만과는 반대로 ‘감사’일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10명이 주님께 나병을 고쳐달라고 청합니다. 예수님은 다 고쳐주십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외국인만이 돌아와서 예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만 “일어나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말씀하십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구원을 못 받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10명을 다 고쳐주셨다는 말은 지금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은혜를 이미 다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감사만 하면 됩니다. 감사가 곧 이미 많은 것을 받았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성당에 나오는 신자들은 두 부류로 나뉩니다. 감사하러 나오는 사람들과 청하러 나오는 사람들입니다. 청하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목적은 감사하기 위한 것이어야 입니다. 감사하면 이미 받았다고 믿는 것이기에 사실 하느님께서 청하지 않는 것까지도 다 알아서 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살려주실 때 아버지께 이렇게 청하십니다. “아버지, 제 말씀을 들어 주셨으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 언제나 제 말씀을 들어 주신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드린 것은, 여기 둘러선 군중이 아버지께서 저를 보내셨다는 것을 믿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1,41-42) 예수님은 청할 때 감사기도를 드리십니다. 이미 청한 것을 받았다고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청한 것을 받으면 감사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청은 거의 들어주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감사하지 않으며 무언가 청한다면 “무자비한 분이시지만 내 청 좀 들어주세요. 만약 들어주시면 당신이 자비하신 분이라고 인정해줄게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잘 들어두어라. 너희가 기도하며 구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그대로 다 될 것이다.”(마르 11,24) 예수님은 오천 명을 먹이실 때도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를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고, 빵과 포도주를 당신 살과 피로 변화시키는 기적을 위해서도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감사가 믿음을 보증하는 것이기에 감사가 없는 청원은 오히려 주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감사했다면 선악과를 따먹었을까요? 죄를 짓지 않았을 것입니다. 내가 감사하지 못하면 하느님께서 자비롭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어떤 어른이 아이에게 귤을 하나 주었습니다. 그 아저씨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지 못하니 어머니가 당황하며 아이를 야단쳤습니다. “엄마가 그런 거 받으면 주신 분께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어? 어?” 그러자 아이는 이제 깨달았다는 듯이 다시 귤을 아저씨에게 내밀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까주세요!” 감사 없는 청원은 청원이 아니라 강탈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먼저 감사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받은 것도 주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미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지 못하면 주신 분에 대한 예의를 지키지 않으면서 또 달라고 하는 것이니 강탈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지금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미합시다. 그러면 나의 부족한 부분은 생각만 해도 들어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미 넘치도록 주셨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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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 18)|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10월13일 연중 제28주일.이 외국인 말고는 아무도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러 오지 않았단 말이냐?(루카 17, 18) 이 시월에도 어김없이 꽃은 피었다 집니다. 하느님께 돌아갈 우리모두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자체가 자비이십니다. 자비의 빛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입니다. 끝내 자비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지 못하는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치유는 모든 순간에 하느님과 함께하는 여정입니다. 자비를 올바로 체험한 이는 자연스레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영광은 껍질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깨어나는 삶으로 이끕니다. 영광의 삶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은 언제나 우리자신입니다. 신앙의 여정은 이렇듯 치유가 목적이 아니라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하느님께 돌아가 영광을 드리는 우리들이길 기도드립니다.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감사와 찬미 기쁨과 영광이 중심이 되는 은총과 자비의 주일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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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빌라 로보스 /브라질풍의 바흐 제5번 아리아 칸틸레나 - 시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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