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18일 '엠마오'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시간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0-18 06:50:36    조회 : 229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0월18일 금요일 [(홍)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제1독서 티모테오 2서 4,10-17ㄴ
복음 루카 복음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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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

2019년 다해 10월18일 성 루카 복음 사가 축일

설립 25주년 되는 한인 공동체의 미사에 다녀왔습니다. 공동체는 3개
민족이 함께 성당을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인 공동체, 슬로베니안
공동체, 미국 공동체였습니다. 주교님은 영어로 미사 집전하시고,
신자들은 한국어로 응답하는 미사였습니다. 미사가 끝나고, 어린이
합창단이 축하 노래를 불렀습니다. 1절은 한국어, 2절은
슬로베니아어로, 3절은 영어로 불렀습니다. 같은 노래인데 아이들의
목소리가 가장 큰 언어는 영어였습니다. 한국인이지만 영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슬로베니아인이지만 영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같은 노래를 3개 국어로 듣는 것도 재미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드라마 형식으로 전해주는 것이 복음서입니다.
예수님 드라마의 핵심은 ‘복음선포, 수난, 부활, 승천, 재림’입니다.
이런 드라마가 없었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 예수님의 수난,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에 대한 신앙을 갖기 힘들었을
겁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 사가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루카 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조금 다른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특히
루카는 성모님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순명, 성모님의 신앙, 성모님의 삶을 루카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성모님은 예수님의 어머니이지만, 성모님은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가지셨고, 성모님은 자신의 사명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걸
‘마리아의 노래’에서 알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며, 나를
구하신 하느님께 기뻐 뛰노나이다. 주님께서는 권세 있는 자를 자리에서
내치시고, 미천한 이를 끌어 올리셨나이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먹이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성모님의 삶은
예수님의 삶과 닮았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 자캐오의 이야기,
엠마오로 가는 제자와 예수님의 이야기는 루카가 전하는 감동적인
이야기입니다. 다른 이야기도 다 좋지만, 오늘은 ‘엠마오’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매년 부활이 지나면 본당에서
‘엠마오’ 여행을 가곤 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사순과 부활을 준비하면서 힘들었을 본당 식구를 위한 휴식의
시간입니다. 다른 하나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만나기 위한 시간입니다.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주는 성가 ‘엠마우스’가 있습니다.
‘우리와 함께 주여, 천년도 당신 눈에는, 나는 포도나무요, 좋기도
좋을시고’와 같은 성가를 만드신 원선오 신부님이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인 신부님의 삶은 ‘엠마오’에 대한 의미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일본에서 선교하였습니다. 일본어를 배우고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다시 한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이 일본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한국어를 배우고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아프리카
케냐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안정적인 시간이 되었을 때 더 어렵고 힘든
수단으로 갔습니다. 30대에는 일본에, 40대에는 한국에, 50대의
나이에는 아프리카에서 지냈습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신부님에게는 맞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엠마오는 어느 시간과
장소가 아닙니다. 엠마오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가는 겁니다.
엠마오는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함께한다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다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된다면 그곳이 바로
엠마오입니다. 

4시간 운전을 하고 설립 25주년 축하 미사엘 다녀왔습니다. 앞으로는
6시간 넘게 운전할 기회도 많을 거라 합니다. 제가 가는 곳이 ‘엠마오’
라고 생각하며 기쁘게 다니려 합니다. 오늘 루카 복음 사가 축일을
지내면서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있는 장소가 엠마오인가?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엠마오인가?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이
엠마오인가?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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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0월18일 금요일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

복음: 루카 10,1-9: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루카 복음사가는 바오로 사도의 동반자로서 복음서를 썼고 ‘사도행전’
에서 교회 초기부터 바오로가 로마에 체류하기까지의 복음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다. 루카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보음의 내용의
목격자도 아니었다. 바오로와 같이 2,3차 여행에 수행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후에 희랍으로 건너갔다. 

루카 복음사가는 전승에 의하면 장가가지 않고 살았으며 84세에
하늘나라에 가셨다고 한다. 루카 복음은 소로 표상 되는데 이것은
복음의 시작이 성전에서의 예절로 시작되기 때문에 제사 때 쓰인 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성인은 화가와 의사의 수호성인이시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파견하시면서(둘 사이에 주님 현존
위해) 복음을 전파하면서 그들이 지켜야할 바를 말씀해 주신다. 우선
무엇보다도 물질적인 것들로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되기 때문에
여장도 가볍게 차려야 한다는 것이다. 물품도 갖지 말고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라는 것이다. 또한 대접을 받으려 하지 말고 주기 위해서
떠나라는 것이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은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지
사소한 일에 관심과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말라”(4절)고 하신 것이다.

또 수입을 바라고 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아무 음식이나 잘 먹고, 더
좋은 음식, 더 나은 숙소를 바라거나 찾아다녀서도 안 된다. 손님
접대는 당시에는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거룩한 의무였다. 낯선 여행자가
마을에 들어왔을 때 손님접대는 그 마을의 의무였고 풍습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현세적인 어떤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직 복음의 전파만을 위하여 주님께 의지하며 헌신하는
것임을 예수님께서는 가르쳐 주신다.

그런데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일꾼이 적다는 것이 예수님의 아쉬움으로
보인다.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꾼이 적으니 주인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달라고 청하여라”고 분부하신다. 그러면 우리는 오늘 똑같은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떠한 일꾼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는가? 지금
상황으로는 성직자들도 부족하지만, 우리 신자들로서도 일꾼이 너무나
부족하다. 나 자신의 봉사가 이 공동체에 필요한 줄 알면서도 뒷짐 지고
있는 신자들이 많다. 일꾼이 부족하면 일을 할 수 없는 것이며, 일꾼도
어떤 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여기서 말하는 일꾼은 누구를 위해 일하는 것이며, 무엇을 위해서
일하는 것인가? 어느 누구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서로의 축복과
구원을 위해 일을 할 사람이고, 그런 일꾼으로 부름 받은 것이며
현세적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 전파되도록 그래서
하늘나라를 이 땅위에 이루도록 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 가운데서,
우리 공동체 안에서 더 많은 훌륭한 일꾼이 나오도록 우리 자신부터
먼저 투신하도록 하고 현재와 미래의 일꾼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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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이름을 남기려하지 말고 이름이 들어간 것을 남겨라.

2019년 다해 10월18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이름을 남기려하지 말고 이름이 들어간 것을 남겨라.>
복음: 루카 10,1-9

영화 ‘나를 찾아줘’(2014)의 여자 주인공은 자신의 부모가 쓴 책의 주
인공이기도 하고 한 가장의 아내이기도 합니다. 책이 많이 팔린
덕분으로 미국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지쳐갑니다. 자꾸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하는 말과 행동에 지쳐가는 것입니다. 여자 주인공은 남편을 통해
자신이 기억되기를 바랐습니다. 특별히 결혼기념일엔 숨바꼭질
놀이까지 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받으려합니다. 이에 남편은
지쳐갑니다. 그리고 바람까지 핍니다.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여자 주인공은 남편이 자신을 살인한 것처럼
꾸미고 또 사라집니다. 자신을 찾아달라는 쪽지만을 남기고. 경찰들은
그녀의 남편을 의심하고 남편은 결국 내키지 않지만 TV에까지 출연하며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물론 연기를 한 것입니다.  

이것을 본 아내는 다시 남편에게 돌아옵니다. 그리고는 이전처럼 계속
자신을 기억하고 찾아달라고 요구합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아내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합니다. 이렇게 참으로 무섭게
영화가 끝납니다.  

남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으려는 심리는 무엇일까요? 자존감이
낮기 때문입니다. 자존감이 낮으면 타인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은 그런 사람에게 지쳐갑니다.

반면 자존감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자존감을 사람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업적을 통해서 확인하려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고 그 업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억됩니다. 내
이름이 기억되고 싶다면 자신을 기억해 달라 하지 말고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할 업적을 만들어야합니다.  

오늘은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루카라는 이름이 길이 기억될 수
있었던 이유는 루카가 복음을 썼기 때문입니다. 루카복음이 사라지지
않는 한 루카란 이름은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 영원한 분을 알게 하는 복음이 사라질 리는
없습니다.  

우리도 성 루카처럼 이름을 남기려하지 말고 그 이름이 들어간 업적을
남겨야합니다. 그리고 그 이름이 들어간 것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라야 합니다. 하느님께 의미 있어야 그 의미가 영원히 지속됩니다.
그 업적을 하느님 앞으로 가져갈 것이 아니라면 다 허망한 것입니다.

‘파브르 곤충기’로 유명한 장 앙리 파브르가 10권의 곤충기를 완성했던
나이는 85세였습니다. 파브르는 정식교사도 아닌 임시 교사로 일하며
평생 생활고에 시달렸습니다. 파브르는 30년간 몸담은 교육계를 떠나
인생의 말년을 곤충기를 쓰는데 바쳤습니다. 그 곤충기는 그의 대작이
되었습니다. 세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브르의 곤충기를 읽어보진
못했을지라도 그 곤충기 덕분에 파브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말년에 곤충기를 쓰기 시작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가 말년에 곤충기를 쓸 수 있었던 이유는
그런 업적을 남길만한 존재라는 자존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스톱에 ‘449통’이란 말이 있습니다. 열심히 하고도 1점을 내지 못했을
때를 이르는 말입니다. 띠와 십자리는 5개씩 모여야 1점이고 피는
10개가 모여야 1점입니다. 띠와 십자리가 4개씩이고 피가 9개인 것이
449통입니다. 

인생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자신을 기억해달라고 아무리 졸라봐야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업적은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남기셨습니다. 교회가 존속하는 한 예수님의 이름은 영원히
기억됩니다. 우리는 분명 주님 앞에 무언가 가져가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일을 할 능력도 주셨을 것입니다. 그런 믿음으로 열심히
하다보면 성 루카처럼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는 복음서까지 쓸 수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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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펼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자비의 책,
루카 복음!|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10월18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펼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자비의 책, 루카 복음!

요즘 저는 개인적으로 ‘역사가’ ‘역사학자’들께서 지닌 소명의 중요성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고 있습니다. 역사가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공정하고 균형잡힌 시선, 허구가 아니라 진실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아닐까요?

역사가들은 각자 나름대로 역사를 바라보는 자기만의 고유한 관점
(觀點)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관(史觀) 혹은 역사의식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최근 기승을 부리며 우리 선량한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관이
있습니다. 식민사관(植民史觀)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일제에 뿌리를
두고 있기에 일본인들보다 더 일제를 더 찬양합니다. 일본강점기
시절을 그리워하고 두둔합니다. 그것도 모자라 일제를 미화하고
찬양합니다. 일제를 통해 조선이 성장했다고 억지를 부릅니다. 그릇된
사관이 초래한 불행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루카복음사가 역시 당대 걸출한 역사가이자
위대한 신학자였습니다. 그는 희랍어에 능통한 이민족 출신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그가 저술한 복음서 역시 유다 역사나 지리에
낯설었던 이방계 그리스도인 독자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루카복음사가는 복음서를 기술하면서 이스라엘이 지리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바로 그날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루카복음 24장 13절) 또한
히브리어나 아람어가 등장하면 항상 희랍어로 소개해줍니다.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루카복음7장 34절)

참으로 친절하고 자상한 루카복음사가입니다. 그럼 이제
루카복음사가의 사관(史觀)을 조금 살펴볼까요?

루카복음사가가 이방인 출신이어서 그런지, 그에게 있어 하느님 백성에
대한 개념은 보다 보편적입니다. 참 하느님 백성은 율법을 목숨처럼
소중이 여기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 유다인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활짝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유연하고 개방적인 역사관입니다.
하느님 자비의 역사관이라고나 할까요?

특히 루카복음사가는 당시 유다인들의 시각에서 절대로 구원의 대상에
들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졌던 태생적 죄인들, 이방인들, 세리들,
창녀들, 양치는 사람들, 고리대금업자들, 개똥 수거인들 ㅋㅋㅋ 까지도
모두 구원의 대상에 포함시켰습니다.

이처럼 루카복음사가는 아무도 돌보지 않던 가난하고 방황하던 양떼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의지가 얼마나 각별하고 강렬한 것인지를
잘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서를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의 복음서’ ‘자비의 복음서’‘여인들의 복음서’라고까지 칭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만나기만 하면‘쳐죽일 놈’ ‘민족의 배신자’로 생각하며
침까지 뱉던 세리들, 죄인의 대명사들이었던 이방인들, 악령들린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셔서, 친히 그들과 눈을 맞추시고,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시는 예수님의 따뜻하고 자상한 모습을 상세히 우리에게
전해주신 루카복음사가에게 마음 깊이 감사해야겠습니다.

루카복음사가를 본받아 부족하고 나약한 이웃을 매몰찬 시선이 아니라
따뜻하고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습니다.
우리의 하느님께서 냉혹한 관찰자, 심판자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 더없이 자상하고 한없이 부드러운 위로자 예수님으로 오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하는 노력을 계속해야겠습니다.

펼치기만 해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는 복음, 구절 구절 우리
죄인들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가 역동적으로 펼쳐지는 복음, 힘들때
마다 손에 들면 다시 살아갈 힘과 용기를 주는 루카 복음서를 좀 더
자주 읽고 묵상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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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10월 18일(금) - 올무가 되는 불순종

오늘은 ‘올무가 되는 불순종’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사사기 2장 3절 말씀에 “내가 그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지 아니하리니
그들이 너희 옆구리에 가시가 될 것이며 그들의 신들이 너희에게 올무가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일곱
족속과 그들의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땅에 들어가 불순종 하였습니다.
마치 사울이 아말렉 군사와 싸울 때 하나님은 분명히 아말렉의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고 하면서 사람뿐 아니라 모든 소와 양과 짐승들을
다 진멸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울은 좋은 것은 다 자신들이 가지고 가고 나쁜 것만
없애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곳에다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하여 기념비까지
세웠지요.

결국은 그 모습에 사울은 왕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나안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진멸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좋은
물건들은 자신들이 취하고 잘생기고 좋은 사람은 자신들과 같이 살거나
종으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옆구리에 가시가 되고
그들로 인하여 올무가 되었습니다. 현재 여러분들의 믿음 생활 속에서
버려야 할 것과 함께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십시오.

옛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새로워지고자 하거나 버려야 할 것을 계속
지니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려고 하는 것 잘못되었지요?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테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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