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30일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0-30 05:54:33    조회 : 193회    댓글: 0
b181675e08a97e3b8d508d18a36779465455d346
  • ▣ 2019년 다해 10월30일 [(녹)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제1독서 로마서 8,26-30 복음 루카 복음 13,22-30
0133b4a04b788c02a08de0e615e4bda0d18f16d0
  • ◈ [서울]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2019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손님이 오면 잠시 방을 바꾸게 됩니다. 방을 바꾸면서 짐을 옮기는데 생각보다 옮길 게 많습니다. 소소한 것이지만 없으면 아쉬워서 하나둘 옮기니 많아졌습니다. 이것도 몇 번 하면 요령이 생기겠지요. 저도 예전에 여행하면서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깨끗한 침구, 정갈한 욕실, 냉장고의 음료수는 그냥 되는 게 아니었습니다. 저를 위해서 세심하게 배려해준 정성이 있었습니다. 그만큼의 정성은 기울이지 못하지만, 방을 옮기는 거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지난봄 아르헨티나에 갔을 때 저를 위해서 방을 내어주시고, 맛있는 음식까지 준비해주신 어르신께 새삼 감사드립니다. 매일 아침 저를 위해서 공원 산책까지 가주신 형제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세상은 처지를 바꿔 바라보면 이해할 수 있고, 용서할 수 있고, 감사할 수 있습니다. 편견과 자신의 견해만 생각하기에 오해가 생기고, 원망이 생기고, 분노하게 됩니다. 운전면허 필기시험 예상 문제에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Detour”이라는 표지판입니다. 정답은 ‘우회하시오’입니다. 예전에는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갈 수 없다는 표시입니다. 내비게이션에는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회로는 시간이 걸릴 수 있고, 우회로는 불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회로를 따라가야 목적지에 도착하게 됩니다. 우회로를 따라가야 안전하게 갈 수 있습니다. 매일 가던 길이라고 우회로 표시판을 무시하면 다시 돌아올 일이 생깁니다. 잘못하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상문제에 ‘우회로’ 표시판이 자주 나오나 봅니다. 25년 전에 미국에 올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교님께서 면담하셨고, 저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미국에 오는 게 지금과는 다른 의미였습니다. 젊었고, 자신감도 있었고, 걱정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제게 우회로를 마련하셨습니다. 25년 동안 시골 본당에서도 있었고, 교구청에서도 있었고, 청소년국에서도 있었고, 안식년도 지냈습니다. 나이도 먹었고, 자신감도 줄었고, 걱정도 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왜 제게 우회로를 마련하셨는지 의미는 잘 모릅니다. 다만 중요한 건 지금 제가 여기 있다는 겁니다. 주님께 감사드리며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이라는 우회로를 말씀하십니다. 크고 넓은 길, 성공과 재물이 보장된 길, 남들이 다 원하는 길이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우회로를 마련하지 않으셨다면 제자들도, 교회 공동체도 그런 길을 따라갔을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멀리 돌아가는 우회로를 제시하십니다. 막히고, 사고의 위험성도 있고, 돌아올 수 없을지 모르는 길을 이야기하십니다. 무서워서 그 길을 따르지 못했던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을 체험했고, 기꺼이 예수님께서 몸소 걸어가셨던 우회로를 따라갔습니다. 그 길이 비록 험난하고, 그 길이 비록 십자가의 길일지라도 충실하게 따라갔습니다. 그 길만이 부활의 길이며, 그 길만이 영원한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길은 장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장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길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길은 선택의 문제입니다. 길은 결단의 문제입니다. 섬기는 삶, 겸손한 삶, 믿음의 삶, 사랑의 삶, 희망의 삶을 선택한다면, 그 길을 충실하게 걸어간다면 그 길은 좁은 문일지라도, 그 길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구원의 문이 되는 겁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 그분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다.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9997BA485AAEA46C04CF18
  • ◈ [수원] 연중 제30주간 수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13,22-30: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23절)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받겠느냐는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해서 구원을 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말씀하신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24절) 그래서 이렇게 동문서담 같이 대답을 하셨다.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 것인지 아는 중요하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생명으로 가는 문은 왜 좁다고 하시는가? 그리고 들어가려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바르고 더럽혀지지 않은 믿음과 흠없는 도덕성을 갖추어,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렇다면 우리 중에 누가 이런 사람에 해당될까?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고 하셨다. 그 길을 가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24절)라고 하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수적으로 적다 많다가 아니라 질적으로 어떤 사람들이냐를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으로 선택받았다.” 혹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세례 받은 자답게 살고, 있는 힘을 다해서 신앙생활에 충실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저희는 주님 앞에서 먹고 마셨고, 주님께서는 저희가 사는 길거리에서 가르치셨습니다.”(26절) 세례를 받고 성당에 와서 미사 봉헌을 하고 복음의 가르침을 듣기는 하나 성경의 진리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 그 삶은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를 갈며 비통해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모른다고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마태 7,21)고 하셨다. 세례를 받는 그 자체로써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를 지고 부름을 받은 자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25.27절) 하신 이유는 “불의를 일삼았었다” 는 데 있다고 하신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의를 일삼게 되면 그 하느님 백성의 자리는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을 올바로 실천한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질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다. “동쪽과 서쪽, 북쪽과 남쪽에서 사람들이 와 하느님 나라의 잔칫상에 자리 잡을 것이다.”(29절)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과 모든 예언자가 하느님의 나라 안에 있는데 그들만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되지 않도록 항상 깨어있는 삶을 살도록 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9997BA485AAEA46C04CF18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사람이다. 2019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고 있다면 하느님께서 미리 선택하신 사람이다) 복음: 루카 13,22-30 아프리카에 가면 결혼을 앞둔 처녀들에게 행하는 한 가지 행사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많은 처녀들이 옥수수 밭에 한 고랑씩 맡아 그 고랑에서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 한 개씩을 따는 일인데 제일 크고 좋은 옥수수를 딴 처녀가 그날의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규칙이 있는데 한번 지나친 것은 다시 돌아 볼 수도 없고 다시 돌아 갈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직 앞만 보고 가다가 마음에 드는 옥수수 하나만을 따와야 합니다. 한 번 땄으면 도중에 좋은 것이 있다 해서 그것을 버리고 다시 딸 수도 없습니다. 기이한 일은 제일 좋은 옥수수를 따러 들어간 처녀들은 한결같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못나고 형편없는 옥수수를 들고 나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뒤로 돌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백화점에서 옷 하나를 고를 때도 백화점 내의 대부분의 옷가게를 한 번은 훑어보고 보아두었던 것을 다시 찾아갑니다. 이런 능력이 있어야 더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선택하실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다 훑어보신 다음에 괜찮게 보신 사람들을 뽑으시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되는 주장이 칼뱅의 예정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아예 처음부터 천당 갈 사람, 지옥 갈 사람을 뽑아놓고 지옥 갈 사람들은 잘 자라도 죽이고 천당 갈 사람들은 못 자라도 결국엔 살린다는 주장입니다. 하느님께서 과연 앞뒤 안 가리시고 시간 속에 한정되어 미리 인간의 운명을 정하셔야 하는 약한 존재이실까요? 오늘 독서에 예정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예정설은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수난하시고 그 은총을 내려주셨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미리 뽑으셨다는 말을 ‘칭의’라 하고, 그래서 의롭게 되는 것을 ‘의화’, 그리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영광을 ‘성화’라 말합니다. 이는 가톨릭교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가톨릭교리는 의화가 칭의보다 앞선다는 식으로 가르친다며 위 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주장합니다. 우선 예정설은 하느님을 정의롭지 못한 분으로 만드는 잘못된 가설입니다. 하느님께서 죄를 짓도록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을 배반할 것을 알면서도 유다를 뽑아 지옥에 보내셨으며 어떤 사람은 아무리 악해도 천국으로 보내시고 어떤 사람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지옥에 가게 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공의와 자비로우심의 본성을 예정설로 꺾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의롭게 하셨으며 그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영광을 주신다는 순서를 합리화할 수 있을까요? 가톨릭교회는 예정설이 아니라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말합니다. 전지전능하심이란 하느님께서 시간과 상관없이 한 번 훑어볼 능력이 있으시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미리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지를 세상 시작 전부터 아셨습니다. 미리 아시기 때문에 구원될 이들에게 더 큰 은총을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저를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도록 불러주셨습니다. 그 이유는 저의 자유의지를 무시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제가 사제로 살 것을 미리 아셨기 때문에 도움을 주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도록 미리 결정하시고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죄를 지을 것을 아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구원을 위해 미리 예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미리 뽑힌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의 어떤 면을 보고 미리 뽑으시고 은총으로 의롭게 하시는 것일까요? 바로 오늘 복음에 그 해답이 있습니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좁은 문은 자기의 본성을 거스르는 삶을 말합니다. 좁은 문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인 이웃사랑은 인간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행동입니다. 돈에 대한 욕구, 성욕이나 식욕에 대한 욕구, 높아짐이나 명예에 대한 욕구를 거스르는 삶이 좁은 문으로 향하는 삶입니다. 우리는 마치 강 위에 떠 있는 배처럼 그 물살을 거스르지 않으면 저절로 흘러서 지옥의 폭포로 향하게 되어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기 자신을 거스를 줄 아는 사람을 미리 보시고 하느님께서 그에게 노를 선물하시는 것이 미리 뽑으신 이들을 의롭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미리 결정하셔서 노를 선물하시는 것이 아니라 노를 젓고 싶어 하는 사람을 미리 아셔서 노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의지가 먼저냐, 인간의 의지가 먼저냐의 문제입니다. 예정설은 하느님의 의지대로 인간의 운명이 결정된다는 주장이고 우리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보시고 주님께서 결정해주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말은 그런 사람만이 하느님께서 세상 창조 이전에 뽑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뽑히지 않아서 의지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 뽑히지 않은 것입니다. 내 자신을 거스르려는 의지, 그 의지로 하루하루 자신의 욕망과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이 미리 뽑힌 사람이 됩니다. 반면 자아와 타협하라든지, 자아를 찾고 실현하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미리 뽑힌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빨리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쓰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사람도 미리 뽑힌 사람이 됩니다. 우리는 내 자와의 욕구에 거슬러 좁은 문인 십자가의 영광으로 향할 때 주님께서 미리 뽑으신 이들인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추계 사제연수 관계로 금요일까지 묵상을 쉬도록 하겠습니다. 다녀와서 뵙겠습니다 ^^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9997BA485AAEA46C04CF18
  • ◈ [수도회]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루카 13, 30)|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0월30일 수.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루카 13, 30)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우리 삶의 내리막과 오르막의 힘겨운 길입니다. 한순간에 미끄러져내리는 수 많은 첫째들을 만납니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던 꼴찌가 오히려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지는 해처럼 삶은 참으로 짧습니다. 그 어떤 자리도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붙잡아야 할 것은 자리가 아니라 자비의 하느님이십니다. 처음과 끝 첫째와 꼴찌 모두 주님을 향해야합니다. 부패한 첫째가 아니라 회개하는 꼴찌이길 바라십니다. 첫째와 꼴찌사이에 우리가 있습니다. 마지막과 마무리가 아름다운 삶이길 기도드립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26C0D495876B4D021D83A
  • ◈ [청주] 지금 여기서 힘써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10월30일 연중 제30주간 수요일(루가13,22-30) 지금 여기서 힘써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고에는 유명한 매장 패션밸리가 있습니다. 한국의 백화점이나 마찬가지인데 규모는 훨씬 큽니다. 한국은 땅이 귀한 까닭에 위로 치솟지만 미국은 땅이 넓은 탓인지 바닥에 넓게 펼쳐놓았습니다. 지진을 대비한 안배인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고층빌딩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참으로 매장이 넓습니다. 동행한 분이 명품코너를 가리키며 아름다운 보석들이 있는데 아주 비싸다고 하시며 한번 구경하시겠냐고 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보석인데 어디서 보석을 찾습니까?” 했더니 “신부님은 왕자 병”이랍니다. 반짝반짝 빛나는 아름답고 귀한 보석을 들여다보면 욕심이 납니다. 귀한 보석을 보는 사람들은 그 보석을 갖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보석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하느님의 걸작품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귀한 보석입니다. 그러므로 이 보석을 아름답게 빛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 (루가13,23)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구원받을 사람의 숫자를 얘기하지 않으시고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도록 힘써라. 많은 사람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하겠지만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루가13,24).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여기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힘을 다하는 것이 중요하지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약속된 미래는 오늘을 통해 오기 때문에 미래를 희망하는 만큼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 나의 보석을 잘 가꾸어야지 남이 만들어 놓은 보석에 마음을 빼앗길 여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힘써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운동선수가 사력을 다해서 승리를 얻으려고 분투노력하듯이 우리도 구원을 위해 힘을 쏟아 노력해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하느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방심하지 않고 주어진 기회를 최선을 다해 이용해야 합니다. 오늘 여기서 영원을 살지 않으면 결국은 마지막 날 울며 이를 갈 것입니다(루가13,28). 지금 노력하지 않고 훗날 우정과 연줄에 매달려 호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과 같은 고향 사람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 형제들이라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루가8,21참조).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7,21). 요한사도는“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 ”(1요한 2,17). 라고 선언합니다. 사실,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것은 한 순간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있는 힘을 다하십시오. “끝까지 견디어 내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마태24,13). 잊지 마십시오. 주님께서는 지금 영적인 갈망으로 힘쓰고 있는 하나하나의 수고와 땀을 헤아리십니다. 문은 좁지만 들어가면 있을 곳이 많습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있을 곳이 많다” (요한 14,2).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9997BA485AAEA46C04CF18
  • ◈ [기타] 10월 30일(수) - 영적 베들레헴, 교회 오늘은 ‘영적 베들레헴, 교회’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룻기 1장 1절 말씀에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남편 엘리멜렉과 아내 나오미는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을 데리고 베들레헴이 극심한 흉년이 들어서 온 가족을 데리고 모압 지방으로 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모압 지방에서 큰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곳에 가서 두 아들을 장가보냈는데 오르바와 룻이라는 두 며느리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참 공교롭게도 두 아들 말론과 기론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졸지에 두 며느리는 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말론과 기론만 죽은 것이 아니라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도 아들의 죽음에 고통스러워하다가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순식간에 과부 3명이 된 것입니다. 물론 성경을 해석하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 갈래로 해석을 하겠지만 저는 이 말씀에서 받은 은혜는 베들레헴은 영적인 하나님 나라로 예수님이 태어난 곳입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힘들고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교회를 떠나버리게 되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고통과 고난을 겪게 됩니다. 엘리멜렉도 하나님의 임재를 떠나 자신의 생각대로 모압 지방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완전히 고난의 수렁으로 빠지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교회를 떠나면 안 됩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내가 출석하는 교회에서 나무하나 풀 하나라도 가꾸며 그 교회를 부흥하는데 사용되는 성도가 되는 것, 성도가 해야 할 본분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226C0D495876B4D021D83A
  • 모차르트/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위한 협주 교향곡 E-flat장조 K. 364 - 안네 소피 무터(vn) 유리 바쉬메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