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3일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1-03 05:56:08    조회 : 216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1월3일 [(녹)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 지혜서 11,22―12,2
제2독서 테살로니카 2서 1,11─2,2
복음 루카 복음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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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31주일

2019년 다해 11월3일 연중 제31주일

사제 모임에서 ‘Real ID’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법이 강화되어서
내년부터는 운전면허증으로는 국내선 비행기 탑승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한국은 운전면허증이 있으면 국내선 탑승이
가능한데, 미국은 신분을 확인하는 몇 가지 추가 사항을 운전면허증에
등록하나 봅니다. ‘Real ID’를 만들지 않으면 여권을 가지고 다니면
된다고 합니다. 미국에 왔으니 이것도 미국 법을 따라야 합니다. 신부님
한 분이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비행기 탑승이 가격에 따라서 좌석에
등급이 정해지듯이, 미국에 살기 위해서도 다양한 등급이 정해진다고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건 거주자 등록증입니다. 운전을 위해서는
운전면허증이 있어야 합니다. 관공서에 들어가거나, 비행기 탑승을
위해서는 더 높은 등급의 ‘Real ID’가 있어야 합니다. 외국인은 여권이
있으면 된다고 합니다. 

국가 간에는 방문하면서 격식과 예절이 있을 겁니다. 대통령이 오는
경우, 국회의원이 오는 경우, 정치인이 오는 경우, 기업인이 오는
경우가 있을 겁니다. 대통령이 직접 맞이하는 사람도 있고, 도로를
통제하는 때도 있고, 만찬을 하는 때도 있을 겁니다. 제가 뉴욕에 왔을
때는 전임 신부님이 공항으로 마중 나왔습니다. 저도 시간이 허락되면
찾아오는 손님을 기쁜 마음으로 맞이하려 합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는 건 쉽지 않습니다. 세상은 능력, 재산, 지위, 업적에 따라서
자리가 정해지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충분히 대접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지만 드러내지 않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나치게 자신을
드러내며 대접받으려고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 사랑받는지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의 조건을
‘산상설교’에서 상세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받는 박해와
시련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가득할 거라고 하십니다. 하느님을 볼 거라고 하십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고 하십니다. 이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Real ID’를 받을 자격이 있을 겁니다. 

저는 또 다른 의미에서 하느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 사람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람일까요? 저는 예수님의 비유와 말씀에서 어떤
사람이 하느님께 인정받고 사랑받는지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는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비유를 통해서
회개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하느님의 자비를 얻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의 비유는 회개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사랑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구체적으로 돌아온 아들의 이야기를 하십니다. 비록 죄를 지었고,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하였지만, 회개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서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고, 반지를 끼워 줍니다. 회개한 아들의 잘못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십니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고 싶으면
회개하면 됩니다. 

둘째는 회개한 걸 행동으로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말로는 회개했다고
하면서 행동은 세상의 뜻과 세상의 욕망을 따라간다면 이는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가진 재산
절반을 가난한 이에게 나누어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게 있다면 네
곱절로 갚아 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한 걸 행동으로 드러낸
자캐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셋째는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응답하셨습니다.
요셉 성인은 남모르게 파혼하려는 마음을 바꾸었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순교자들은, 성인과 성녀는 모두 하느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재물보다 가난을 택하기도 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하기도 했고, 오래 살기보다 일찍 죽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모든 사람에게 자비하시고 사람들이 회개하도록 그들의
죄를 보아 넘겨주십니다. 그러므로 주님, 당신께서는 탈선하는 자들을
조금씩 꾸짖으시고 그들이 무엇으로 죄를 지었는지 상기시키며
훈계하시어 그들이 악에서 벗어나 당신을 믿게 하십니다.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당신의 부르심에 합당한 사람이 되게 하시고,
여러분의 모든 선의와 믿음의 행위를 당신 힘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빕니다. 누가 예언이나 설교로 또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를 가지고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고 말하더라도,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회개의 삶을 산다면, 회개한 걸 행동으로 드러낸다면, 하느님의 뜻을
따른다면 그 사람은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미 천국을 사는 겁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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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31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1월3일 연중 제31주일 

제1독서: 지혜 11,22-12,2: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하느님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11,26)이시라고 독서는 정의하고
있다. 이 ‘생명’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들의 육체적인 생명이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의 자비와 사랑에 달아드는 사람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라면 영적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자비와 사랑은
무엇보다도 죄의 용서를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해 참으시고, 당신의 분노를 억제하시며 달래신다(11,15-21). 그분의
기쁨은 ‘생명’을 널리 베풀어주시는 데 있다. 하느님은 ‘생명을
사랑하시는 분’이기 때문에 죄인들을 벌하고자 하지 않으신다. 사실
‘생명’이라는 것은, ‘살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특히 죄인들에게
‘악에서 벗어나 주님을 믿게 할’(12,2) 시간과 기회를 제공할 때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복음: 루카 19,1-10: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오늘 복음의 자캐오의 이야기는 이러한 ‘생명’의 풍요로움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예리고는 북쪽에서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거의 반드시 쉬어 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팔레스티나
남동쪽에 위치한 나라들과 가까이 있는 국경도시였기에 세관원들이
잘 살 수 있었다. 오늘 복음에서는 ‘돈 많은 세관장’(2절)으로 자캐오를
소개하고 있다. 루가가 자캐오를 부자로 소개하는 것은 물론 당시의
세리들이 치부를 하여 잘 살았기 때문에 부자라고 소개를 하지만은,
그렇게 강조하는 것은, 이보다 조금 앞에 ‘부자청년’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기 때문이다. 재물에 매달렸던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기를
거절했다(18,18-23). 그래서 예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18,25)라고 하셨다.

그러나 자캐오에게서는 ‘어려운 일’ 아니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18,27 참조)이 일어나고 있음을 루가는 강조하고 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꾸기만 하면, 즉 ‘회개하기만
하면’ 가난한 사람이건 부자이건 아무도 당신의 나라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신다. 이 ‘회개’의 과정이 예수님의 적극적인 사랑의 행위에 의해
자캐오의 마음속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그는 어떤 연유에서인지
나자렛의 예언자 예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분이 기적을
행하시면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베풀어주시는 분임을
소문을 통해서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뵙고 싶은 마음을
가졌고, 자신이 키가 작기 때문에(3절)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일 등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같은 행동은 자캐오가 사회적 계급적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러한
사람은 누가 조금만 도와주면 완전하게 자기 쇄신의 길을 갈 수 있다.

그 도움을 바로 예수께서 주신다. 예수께서는 자캐오의 원을 아시고
그를 불러 내려오라고 하시며 그 집에 머물겠노라고 하신다. 그러자
세리 자캐오는 “얼른 나무에서 내려와 기쁜 마음으로 예수를 자기 집에
모셨다”(6절).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기쁜 마음’과 세리에 대한
적개심이 담긴 마음이 대조를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구나.’하며 못마땅해
하였다”(7절). 복음에는 여러 곳에서 예수께서 죄인들과 어울려‘먹고
머신다’고 비난한다(루가 5,30; 15,2). 그러나 그 경우에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군중들이 그러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군중들에게 있어서는 그가 부자였다는 것 때문에
그랬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독점하려 함으로써 다른
사람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갖는 것을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결코 승부의 대상이 아니시다.

이제 그리스도의 자비의 행위를 체험한 자캐오의 마음속에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그래서 예수께 말씀드린다. “주님, 저는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을 속여먹은
것이 있다면 그 네 갑절은 갚아주겠습니다”(8절). 우리는 이렇게 아주
뒤바뀐 상황을 맞고 있다. 인색하고 이기주의적이고 착취자였던 한
인간이 일순간 돈과 자기 자신을 떠나고 있음을 본다. 지금 그의
마음에는 ‘다른 사람들’ 즉 ‘가난한 사람들’만이 들어있다.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모습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오늘 이 집은
구원을 받았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9절)라고 선언하셨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자가 된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하느님의 사랑과
부르심의 대상이며 회개하고 믿을 때 진정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이다. 자캐오는 예수께 대한 믿음과 변화하려는 확고한 의지 때문에
그를 죄인이라고 배척한 다른 사람들보다 더 훌륭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온 것이다”(10절). 이
말씀은 예수께서 어떤 체계를 미리 세워놓으시고 그 안에서 사람들을
구분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에게는 바리사이파 사람이든 세리든,
가난한 이든 부자이든, 히브리인이든 로마인이든 상관이 없다. 구원을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사람들을 여러 계층으로 나누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억압하는 자와 억압을
받는 자, 선한 이와 악한 이 등으로 갈라놓으려 한다. 어떤 때는 복음을
팔아가며 서로를 거스르고 있다. 폭력까지도 동원되기도 한다.

자캐오의 이야기는 그런 것이 아님을 강조하고 있다. 즉 매우 느리고
고달프지만 ‘내적 회개’의 길을 추구하라고 하는 것이다. 이 길을
통해서만이 압박자는 압박자이기를 그치고 피압박자도 증오의 대상인
압박자의 위치에 서게 되는 불행을 겪지 않게 될 것이다. 이것은 불의한
상황에 운명적으로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복음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랑의 힘에 의해 그 불의한 상황을
쳐부수라는 것이다.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도 그리스도인들이
‘종말론적 기다림’의 분위기 속에서 살려고 한다면 최고의 사랑과 자기
쇄신의 의지를 실현시켜나가고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에게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주님에게서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2데살 1,12). 항상 하느님께로의 내적인 회개를 통하여, 그분이
베푸시는 “생명”에 참여할 수 있는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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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예수님은 ‘내어주는 기쁨 자체’이시다.

2019년 다해 11일3일 연중 제31주일

<예수님은 ‘내어주는 기쁨 자체’이시다>
복음: 루카 19,1-10

어떤 구두닦이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자 한 사람이 고급
승용차를 타고 와서 소년에게 구두를 닦았습니다. 소년은 구두를
닦으면서 그 승용차를 자꾸 쳐다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소년은
부자에게 물었습니다.

“아저씨, 저 차는 아저씨가 산 거예요?” 부자가 대답했습니다.
“아니, 우리 형이 사주었어.” 그러면서 부자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얘야, 너도 그런 형이 있으면 좋겠지?”
그러자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제가 그런 형이 되고 싶어요. 제 동생이 다리가 불편해서 걸을
수 없거든요.”
부자 어른은 받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고 구두닦이 소년은
내어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출처: 심종미 수녀님 복음묵상 중] 

오늘 복음에서 자캐오는 예수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면 그 원하는 것이 그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에 올라갔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간절히 원하는 사람에게 향하십니다. 예수님을 원하는
사람은 변화를 원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자캐오는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4배로
갚아주겠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사실 집에 구원에 내린 것이 아니라 당신을
모신 자캐오에게 구원이 내렸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은 집과 같습니다. 그리스도를 모시면 구원을 모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모신 사람이 특징이 어떠한지 잘 보여줍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모신 기쁨으로 가진 재산을 나누어주려고 합니다.
만약 예수님을 모시지 못했다면 그런 마음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돈만 알던 자캐오가 예수님 때문에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을 모시는 것과 가진 것을 기쁘게
내어주는 것과 결국 같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서 내어주는 것이 기쁘지 않을 수 없고, 반대로 내어주는 것을
싫어하면서 예수님을 모시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내어주라.’는 하느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곧 ‘기쁘게
내어주심’ 자체이십니다.  

보슨톤에 가면 켄모어 스퀘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켄모어라고
하는 재봉틀 공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켄모어 회사에서 처음에는
재봉틀만 만들었었는데 지금은 냉장고, 세탁기, 전자제품들을 만드는
유명한 회사가 되었습니다.  

켄모어 회사에서 재봉틀만 만들어 시판할 때의 일입니다. 외판 사원들
가운데 어느 외판사원은 남들보다 두세 곱절씩 성적이 좋았습니다.
매년 한 번씩 외판 성적이 좋은 사원을 불러서 공로를 치하해 주고
보너스도 주었는데 그 외판사원은 내리 3년 동안 일등을 했습니다. 

사장이 그를 불러 좋은 성적을 올리는 성공의 비결이라도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빙그레 웃으면서 그 외판사원이 사장에게 대답을 했습니다.

“사장님, 별다른 비결이 있는 것은 아니고 저는 상품을 팔기 위해 남의
집에 갈 때에는 그 집 문 앞에 서서 제가 결혼했을 때 그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생각해보며 기쁜 얼굴로 그 집 초인종을 누릅니다.” 

기쁜 얼굴을 하면 보는 사람도 즐거운 것입니다. 상품 하나를 팔아서
기쁨이 넘쳐흐르는 사람의 상품을 사게 마련인 것입니다. 기쁨이 이미
내가 내어주고 있다는 표징입니다. 그러니 기쁜 사람을 보면 다른
사람도 전염되어 기쁘게 내어주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은 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쁘지
않았습니다. 기쁘지 않으니 내어줄 줄도 몰랐습니다. 그러면서도
예수님은 모시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습니다. 기쁘게 내어줄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그 본성상 기쁘게 내어줄 수 없습니다. 만약 기쁘게 내어주고
있다면 분명 하느님의 본성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기쁘게 내어줌 자체’이십니다. 예수님은 당신 때문에 기쁘게 내어줄
수 있는 세관장 자캐오의 집을 선택하셨습니다.  

자신의 재산을 늘리는 것이나 자녀가 성공하는 것 등의 모아들이려는
마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다가가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것을
빼내어 가난하게 만들려고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기쁘게 내어주려는
목적의식 없이 예수님께 다가간다면 우상숭배자가 됩니다. 예수님의
기쁨이 나를 기쁘게 하여 이웃도 기쁘게 내어주는 사람으로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하신 성모 마리아는 늙은 나이에 아기를 잉태한
엘리사벳에게 당신 모든 것을 내어주고도 기쁨의 마니피캇을
노래하셨습니다. 그 기쁨의 힘은 당신에게서가 아니라 당신 태중의
아드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집에 모셔 기쁘게
재산을 내어주는 자캐오의 모습은 예수님을 잉태하여 당신을 기쁘게
내어주시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과 같습니다.  

우리도 내어주는 기쁨을 배우기 위해 예수님께 다가갑시다. 예수
그리스도만 함께 계시면 굳이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분
자체가 나를 감염시켜 변화시키는 ‘기쁘게 내어주심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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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죄인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죄인과 친구 맺기를
원하시는 주님!

2019년 다해 11월3일 연중 제31주일

죄인의 이름을 부르시는 주님, 죄인과 친구 맺기를 원하시는 주님!

며칠 전 한 뉴스에 한 초등학교 선생님께서 맡고 계시는 반 아이들 한명
한명에게 그리 유쾌하지도, 듣기 좋지도 않은 별명들을 일일이
지어놓고 부르셔서 아이들과 학부모들의 원성을 크게 샀더군요.

저라도 존경해마지 않는 담임 선생님께서 제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셨으면 좋을텐테, 유독 내가 싫어하는 별명, 예를 들면 돼지코,
깜생이, 숏다리...이런 별명을 불러주신다면, 기분이 참으로 ‘거시기’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요즘 자주 드는 생각 한 가지!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그의 존재를 인정해주고 존중해준다는 표현입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너와 나 사이에 친교의 다리를 놓고 싶다는 의지의
표명입니다.

그래서 돈보스코는 당시 교육자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외쳤습니다.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며 청소년들에게 다가가십시오. 왜냐하면
다정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그 자체로 아주 좋은 교육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전 세계 살레시오 교육 현장에서는
신학기만 되면 살레시안들이 아이들 이름 외운다고 ‘쌩고생’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주간 복음의 첫번째 가는 조연 배우인 자캐오 역시 세상 사람들이
자신을 향해 던지던 호칭으로 인해 스트레스가 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할아버지께서 공들여 지어주신 ‘자캐오’라는 번듯한 이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캐오라는 이름으로 불려본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다들 그를 향해 참으로 듣기 싫은 별명을
불러댔습니다. ‘매국노’ ‘수전노’ ‘반역자’ ‘배신자’ 그리고 ‘숏다리’

그런데 예리코에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돌 무화과나무 위에 숨어있는
자캐오를 발견하십니다. 그리고 다정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 복음 19장 5절)

사실 자캐오가 그간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웃 동료 인간들에 바란
것은 뭔가 대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별명이 아니라 그저 본래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 평범한 이웃들 사이에 끼어 편안하게 담소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동료 이웃들이 자캐오에게 보여준 모습은
참으로 서글픈 것이었습니다. 쌓아둔 재물은 엄청났지만 자캐오는
사람들 사이에 끼이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캐오의 마음은
언제나 공허했습니다.

거기다 치명적인 신체적 콤플렉스(작은 키)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어딜
가든 사람들은 그를 향해 손가락질하고 비웃었습니다. 그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인격적인 대우를 받아보지 못했습니다. 당연히 철저하게도
세상으로부터 왕따였습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으로 그는 오로지 돈을 벌고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만 온힘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 결과 예리코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재산이 늘어날수록
그의 마음은 점점 공허해졌습니다. 이런 그에게 예수님께서 다가서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무나 다정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자캐오야!”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너무나도 친근하고 다정한 그분의 음성에
자캐오는 지난 모든 상처가 즉시 치유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그 어떤
말도 필요가 없었습니다. 연민과 사랑이 마음이 흠뻑 담긴 예수님의
한 마디에 그가 오랜 세월 쌓아올렸던 세상으로부터의 장벽은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 것입니다.

저는 나뭇잎 뒤에 몸을 숨기고 있는 자캐오를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눈빛에 대해서 묵상해봤습니다. 예수님은 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처량한 모습의 그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그의 시선이 마주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번에
그의 내면 상태를 파악하셨습니다. 혹시라도 사람들의 시선과
마주치지 않을까, 그래서 제대로 한번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잔뜩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몹쓸 구제 불능으로 여기며 이름은 커녕 별의
별 듣기 싫은 별명을 다 불렀습니. 그러나 오직 한 분! 예수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카복음 19장 5절)

다른 모든 것을 떠나서, 누군가가, 특별히 주님께서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주신 것 하나 만으로 자캐오는 오랜 상처가 그 자리에서
씻은듯이 나았습니다. 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자캐오 집 방문을 통해 우리는 구세주 하느님께서 지니신
사명의 본질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죄인의 집을 찾아오시는 하느님.
죄인에게 다시 한 번 새 출발의 기회를 주시는 하느님, 죄인의 이름을
부르시는 하느님, 죄인과 친구 맺기를 원하시는 하느님....

그런 하느님께서 오늘 이 아침, 2천 년 전과 똑같이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다가오십니다. 우리와 친구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이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요? 결국 구원은 주님의 부르시는 목소리에 응답함을
통해서 시작됩니다. 또한 구원은 한 인간이 주님의 현존 앞에서
근본적인 변화를 추구함을 통해서 완성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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