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7일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1-07 07:04:31    조회 : 199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1월7일 [(녹)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제1독서 로마서 14,7-12
복음 루카 복음 15,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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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2019년 다해 11월7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미국에는 공화당과 민주당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정책으로 대결하였습니다. 미국 국민은 선거를 통해서 정당을 선택했습니다. 하나의 정당만 있으면 좋은 점이 많을 겁니다. 그러나 미국이 두 개의 정당이 서로 경쟁하는 제도를 유지하는 건, 더 좋은 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정책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국방, 외교, 복지, 이민, 경제, 난민, 종교에 대한 정책이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정책의 최종 목표와 목적은 미국 국민을 위한 것입니다. 국민이 정당을 선택하고, 정권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에도 여당과 야당이 있습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아 정권을 위임받은 당은 여당으로 부릅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지 못했지만, 여당을 견제하고, 대안을 제시하며, 국민의 선택을 받도록 노력하는
당은 야당으로 부릅니다. 야당이 없는 여당은 편할 것 같습니다.


반대하는 의견도 없고, 견제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당이 없는 여당은 자칫 독선과 독재로 흐를 수 있습니다. 여당은 야당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더욱 선명한 정책으로, 국민을 위한 국정을 수행해야 합니다. 야당은 비판과 견제는 하면서도, 더 나은 정책과 비전으로 국민의 신뢰를 받도록 해야 합니다. 이런 정당이 있는
국가는 부정과 부패가 적을 겁니다. 이런 정당은 깨어 있는 국민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정당이 성장하고 발전할 수 있는 건 국민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위하는 정책을 가질 때입니다. 깨어 있는 국민이 정당의 독주와 독선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도 많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복음이 전해지면서 다양한 문화와 사상과 제도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공동체와 이방인 공동체의 소통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베드로파, 아폴로파, 바오로파로 나뉘기도 했습니다. 교리와 신학을 정립하면서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었습니다.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었고,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다양한 생각이 교회를 분열시키고, 갈등을 불러온 점도 있겠지만, 교회가 성령의 이끄심으로 성장하는 계기도 되었습니다. 서로 다른 의견을 존중하고,
포용하며, 더 나은 길을 제시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 독서는 다양한 의견이 존재하는 교회가 나갈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의 자세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심판합니까? 그대는 왜 그대의 형제를 업신여깁니까?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교회, 제도, 신학, 교리, 전통, 역사’는 분명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런 모든 걸 아우르는 것은 ‘사랑’입니다.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으려는
목자의 사랑입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 굶주린 이를 먼저 선택하려는 연민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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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31주간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1월7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5,1-10: 죄인을 기다리시는 하느님의 마음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이 투덜거린 것은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을 구원하시려고 당신 자신을 비우고 우리처럼 되시어 인간의 남루함을 입으셨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율법 교사들에게 비유들을 말씀하신다. 오늘
복음에서는 잃어버린 양의 비유,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를 말씀하신다.

 

잃어버린 양의 비유에서 목자는 크나큰 인내를 보이고 있다. 길 잃고 헤매는 양을 찾아 나서 결국 찾아내고야 마는 목자의 인내이다.


참을성이 없으면 양 한 마리쯤 쉽게 포기했겠지만, 목자는 참고 견디며 끝까지 찾아다녔다. 그러고는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모습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예수님이 바로 그런 분이시다. 그분의 양 어깨는 십자가의 두 팔이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의 죄를 얹어 놓았다.

 

길 잃고 헤매지 않는 이들을 남겨 두고, 착한 목자는 우리를 찾아 나서신다. 우리가 마음을 고치고 돌아오면 그분은 등을 돌리지 않으실 것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우리를 자기 어깨에 태우고는 잃었던 양을 찾았다며 기뻐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와 같이 회개하는 죄안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10절)

 

잃어버린 은전의 비유에서 그 은전은 우리 자신을 의미한다. 그 은전은 하느님의 초상이 새겨진 것이기에 그렇게 소중한 것이다. 바로 우리가 하느님의 모습을 입은 존재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타락하여 길을 잃은 우리가 다시 그리스도께 발견되어 그분의 모습을 되찾았음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전이다. 그러니 그 값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자녀들이다.
그러니 언제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한다.

 

잃은 것을 찾기 위해 부인은 등불을 밝혔다. 길 잃은 자들이 그 불빛 덕분에 구원을 받게 되자 하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 한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그렇게 기뻐한다면,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구원받게 된다면 하늘의 천사들이 얼마나 크게 기뻐하겠는가? 그 때 사람들은 방랑과 타락에서 나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구원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하늘의 천사들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하느님은 부자이시다. 우리는 그의 재산 중 백분의 일이다. 그분에게는 산에 남겨둔 양 떼, 곧 대천사들과 권세들, 권력들, 주권들(콜로 1,16) 등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천사들이 있다. 그들은 사람들의 구원을 기쁨으로 여긴다고 했다. 우리의 회개가 하늘의 천사들을 기쁘게 한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더욱 정직해지려고 노력하지 않겠는가?
천사들에게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 그들이 우리의 회개와 돌아옴을 기뻐하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을 항상 하느님의 뜻으로 되돌아가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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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기도 없이 살 수 없다면 회개한 것이다.

 

2019년 다해 11일7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기도 없이 살 수 없다면 회개한 것이다.>


복음: 루카 15,1-10

 

언젠가 강력한 허리케인이 미국의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적이 있었습니다. 기상 역사상 그 유래를 찾을 수 없을 만큼 대형 허리케인이 카리브해에서 발생해서 예고도 없이 플로리다주를 강타한 것입니다.

 

그 곳에 조그마한 호수가 하나 있었는데 이 호숫가에 찰스 시어즈라는 사람이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어린 자식들과 함께 살고 있는 집이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다가온 허리케인에 의해 호수의 제방이 무너져 버렸고 그로인하여 집이 허물어졌고 간신히 빠져나왔지만 온통 물바다였습니다. 가까스로 조금 높은 지역에 있는 고목나무를 찾아
피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물은 순식간에 차올라 점점 고목나무도 물에 잠기게 되었는데 그럴수록 이들은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다가 결국 나무 꼭대기까지 오르게 되었는데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처지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폭풍우는 계속되고 물은 계속 불어나고 있었습니다. 

 

살아날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자 찰스가 절망적으로 중얼거렸다. “여보 이젠 틀렸어.”
그 말은 단란했던 다섯 식구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여보, 그런 말 말아요, 무슨 수가 생길 거예요 당신은 아이들이나 잘 보호하세요.”


그것은 소망이 아니라 마치 절규와도 같은 소리였습니다. 

물은 점점 차오르더니 이젠 물이 어른들의 턱까지 차올랐습니다. 한 손으로는 나뭇가지를 붙잡고 한 손으로는 아이들을 찰스와 그의 아내가 물 위로 바쳐 올렸습니다. 이제 조금만 차오르면 그나마 가망이 없어지는 상황이었습니다.

 

찰스는 다시 중얼거렸습니다. “이젠 틀렸어 여보.” 그러자 그의 아내는 물을 삼키며 하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아니에요, 여보. 우리는 살 수 있어요.”  그리고 순간 찰스의 아내는 무엇인가 그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음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신앙을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보 우리가 주님을 잊고 있었네요. 주님은 우리를 살려 주실 거예요.” 최대한 목을 물 밖으로 내밀고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날개 밑에 거하라. 주 너를
지키리. 주 너를 지키리. 아무 때나 어디서나 주 너를 지키리. 늘 지켜 주시리.” 

 

그 순간 찰스와 그의 아내는 솟구치는 감정을 감당할 수 없어서 울음을 터트렸는데, 그 순간 그들은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계시는 주님의 현존을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호숫가에 떠있었던 낡은 배 한척이 그들을 향해서 떠내려 오고 있음을 보게 되었고 그의 가족들은 그 배를 타고 구조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극적으로 살아난 그들이 간증한 것을 ‘가이드 포스트’에 게재한 실화입니다.

 

[출처: ‘도우시는 주님’, 믿음의 문학, 다음 카페] 

 

오늘 복음에서 두 부류의 사람들이 대조되어 나옵니다. 회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입니다. 회개한 사람은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이나 잃어버린 은전과 같습니다. 잃어버린 양은 주인이 찾으러오지 않으면 죽은 목숨입니다. 잃어버린 은전도 마찬가지로 주인이 찾아주지 않으면 아무 쓸모없게 됩니다.  

 

반면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은 주인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는 않습니다. 이들은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을 자신들 집에 모시고는 싶어 하지만 오시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스스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고 자신들의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그들을 ‘광야’에 그대로 둡니다. 광야에 둔다는 말씀은 포기한다는 뜻입니다. 광야에서 목자가
양들을 포기하면 그 양들은 살아남을 가능성이 없습니다. 잃어버리지 않은 은전 아홉 닢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지 않는 이들은 결국 포기하십니다. 그들이 결국 그분을 바라지 않아 그러기를 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당신 없으면 못사는 사람들에게로 다가가셔서 그 사람들을 어깨에 메고 기뻐하며 아버지 집으로 향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시간이 기도입니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면 그분은 나를 당신 어깨에 메고 대신 살아주십니다. 그러니 회개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기도를 하고 사는 사람과 기도를 하지 않고 사는 사람과의 차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고정원씨는 자신의 가족을 살해한 유영철을 용서하기 위해 밤새 기도하였습니다. 기도가 아니면 용서를 할 수 없고 용서를 할 수 없다면 지옥행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기도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런 분이 회개한 사람인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신앙생활하면 실제로 나의 삶에서 예수님이 크게 필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삽니다. 우리는 예수님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어야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요한 15,5)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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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


(루카 15, 6)|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1월7일. 목.나와 함께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내 양을 찾았습니다.(루카 15, 6)

기쁜 소식의 첫 전달은 언제나 기쁜 회개였습니다. 회개로 되찾게되는 하느님과 우리의 사랑입니다.
회개의 기쁨은 주님의 기쁨입니다. 찾아나서시는 주님의 참된 사랑입니다.

주님의 참된 사랑으로 소중한 우리자신을 찾게됩니다. 기쁨의 방향은 언제나 회개의 방향입니다.
회개는 죄인인 우리가 하나되는 신선한 기쁨입니다.


생명의 맛은 회개의 맛입니다. 언제나 우리 곁에는 사랑의 주님이 계십니다.
모두를 기쁨으로 웃게 하시는 회개의 기쁨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 기뻐하시는 예수님의 이사랑을 만나는 은총의 위령성월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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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이전에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2019년 다해 11월7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이전에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오늘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 세리와 죄인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중심으로 양편에 서 있습니다. 당시 두 부류의 사람들은 서로 어울릴 수 없었을 뿐더러, 함께 서 있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이스라엘 백성의 거룩함을 보존하는 것을 자신들에게 주어진 지상 최대의 과제로 여겼습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삶의 원칙은 ‘죄인들과는 아무것도 같이 해서는 안된다’였습니다. 죄인들과 율법을 거스른 자들은 격리되고 추방되어야 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과의 친교로부터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눈에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가까이 하시는 모습이 포착되었습니다. 가까이 하시는 것을 넘어 세리와 친구가 되시고, 당신 제자단에까지 포함시키는 모습은, 백번 생각해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큰 스캔들로 여겼기에 뒤에서 투덜거렸습니다.

 

“저 사람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또 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군.”(루카 복음 15장 2절)

 

곰곰히 생각해보니, 예수님께서 당시 통용되던 관례나 율법마저 어기시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시고, 구원에로의 초대장을 보내신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 크게 차별화되는 삶의 태도, 자세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란 새로움 앞에 활짝 열린 개방성, 긍정적 수용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세리와 죄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들은 가까이 다가와서 예수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분이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의

말씀을 자신들의 두 귀로 들었습니다.

 

들음은 믿음의 시작입니다. 믿음은 회개와 용서의 시작입니다. 들음은 믿음 안에 있는 순명과 순명 안에 있는 믿음에 의해 완성됩니다.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과는 달리 듣기 위한 적극성, 믿기 위한 겸손과 단순성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당대 첫째 가는 신앙인, 선별되고 선택받은 부류라는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새로운 질서이신 예수님에 대한 열린 마음이 부족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으로 인해 역사의 위대한 전환점이 도래했다는 사실을 망각해버렸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물론 그분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말았습니다.

 

끝까지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는 예수님, 등돌린 죄인을 찾아나서시는 예수님, 상처투성이의 죄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시는 예수님, 죄인의 회개를 당신 일처럼 기뻐하시는 예수님, 이런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 설레고 행복한 일인지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이 회개하기 전에는 결코 죄인을 사랑하지 않으신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죄인이 악습을 끊고, 보속을 이행했을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그에게 사랑을 베푸신다는 것이 그들의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메시지는 사뭇 다른 것이었습니다. 죄인이 주도권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도권을 지니고 계심을 선언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죄인이 다가오기 전에 먼저 죄인을 찾아나서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가 용서를 청하기 전에 먼저 우리를 용서하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오래 전부터 두 팔 활짝 펼치시고 우리의 회개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사랑하기 이전에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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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11월 7일(목) - 다니엘의 믿음

 

오늘은 ‘다니엘의 믿음’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다니엘 1장 말씀에 “다니엘의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는데 다니엘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나라에 끌려가 그곳에서 지도자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마치 우리나라를 지배했던 일본이 우리나라의 총명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교육시켜 다시 한국으로 내보내 지배를 계속 하고자 하는 계획의 일환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와 함께 교육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때 다니엘은 밥을 먹는데 고기와 포도주를 내놓은 것을 봅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친구들은 결코 고기와 포도주를 먹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식사를 담당하는 환관장은 “만일 너희들이 밥을 제대로 먹지 않아 마르게 되면 내가 왕에게 처벌을 받으니 잘 먹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니엘과 친구들은 “청하오니 당신의 종들을 열흘 동안 시험하여 채식을 주어 먹게 하고 물을 주어 마시게 한 후에 고기와 포도주를 먹는 이들과 비교해보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즉, 고기와 포도주를 먹는 이들보다 더 나쁘게 되면 뭐든지 먹이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환관장은 그대로 시험을 해보게 된 것입니다. 실제 채소와 물을 먹은 다니엘과 친구들은 오히려 얼굴이 아름답고 윤택하고 혈색이 좋아지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니엘이 이렇게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오직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한다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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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십시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11월7일 연중 제31주간 목요일(루가15,1-10)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십시오.

 

고해성사를 볼 때마다 의지가 참으로 약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같은 고백을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뉘우치고 결심했다면 같은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할 터인데 성찰해 보면 여전히 약점을 드러내고 맙니다. 그래서 늘 고해 신부님 앞에 얼굴을 붉힙니다.
때로는 모르는 신부님께 고해를 하고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넘어짐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이 없이는 제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돌아보게도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는 죄인 한 사람 때문에 하느님의 천사들이 기뻐한다”(루가15,10). 하시며 죄인의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의인 아흔 아홉도 소중하지만 죄인 하나도 결코 그 소중함이 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죄인이 회개하면 기쁨이 더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비를 입는 죄인 하나가 바로 나라면 그 은총이 얼마나 큰 것인지요? 예수님의 십자가 옆의 두 강도 중 하나는 구원되었습니다. 그는 서둘러 회개하였습니다. 죽음을 앞둔 순간이었지만 옆에 계신 예수님께 “예수님, 선생님의 나라에 들어가실 때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루가23,42).하고 간절히 청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루가23,43)라는 대답을 얻어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하고 “회심의 노력이나 기간은 죽는 순간까지 항구해야 합니다”(시리아의 성 이사악).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서는 모습을 주님께서는 언제나 반기십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죄인의 모습과 하느님께 드러나는 죄인의 모습은 분명히 다릅니다. 투덜거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어떤 이들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미루신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여러분을 위해서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주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 그를 가엾이 여기시리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너라. 그분께서는 너그러이 용서하신다”(이사55,7).고 말합니다. 요엘 예언자도 “주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너희는 단식하고 울고 슬퍼하면서 마음을 다하여 나에게 돌아오너라.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 그는 너그럽고 자비로운 이 분노에 더디고 자애가 큰 이 재앙을 내리다가도 후회하는이다”(요엘2,12-13).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더욱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가5,32).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부끄럼 없이 살면 좋지만 혹 부끄러운 모습이 있더라도 주님을 찾으십시오.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일입니다. 허물을 안고 있음에도 우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으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의 자비를 청하십시오. “회개한 죄인의 모습이 가장 아름답습니다”(성녀 소화데레사). 고해성사를 통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확인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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