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0일 발길 닿는 곳마다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 되길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1-10 06:16:44    조회 : 187회    댓글: 0

~▣ 2019년 다해 11월10일 [(녹) 연중 제32주일 (평신도 주일)]


제1독서 마카베오기 하권 7,1-2.9-14
제2독서 테살로니카 2서 2,16─3,5
복음 루카 복음 20,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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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2019년 다해 11월10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가톨릭 방송에서 주최하는 ‘걷기대회’에 다녀왔습니다. 평소에 걷는 걸
좋아하기도 하고, 사람을 만나는 기회이기도 해서 기쁜 마음으로
갔습니다. 담당 신부님이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서 못 오셨고,
자연스럽게 대회를 알리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성서 모임 수녀님도
만나고, ME 담당 신부님도 만나고, 봉사하는 분도 만났습니다. 걷기를
마치고 잠시 쉬는데 한 자매님이 이런 이야길 하였습니다.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합니다.” 자매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신앙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강론을 듣는 사람보다
강론을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있을 겁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더 깊이 느낄 겁니다.


박해의 시기에 많은 사람이 모진 고문을 참아 냈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목숨 바쳐서 순교하였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 가진 것
많은 사람은 박해를 견디기 어려웠습니다. 세상에서 누리는 혜택과
지위가 크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양반이라는 신분, 고된 노동을 하지 않아도 거저 주어지는 재물,
물려받은 집과 땅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걸 포기해야 하는
박해를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목숨을 바치기에는 세상에서 누리는 기쁨이 컸습니다.


노비, 백성, 천민들은 박해를 견딜 수 있었습니다. 단순하기에 아무런
조건 없이 복음을 믿었습니다. 교회는 천대받고, 무시당하고, 가난한
그들을 친형제와 자매처럼 대해 주었습니다. 세례를 받으면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습니다. 그 이름에는 노비, 백정, 천민이 대물림 대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성체를 모심에도 차별은 없었습니다. 주님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양반에게도, 천민에게도 똑같은 사랑으로
다가오셨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천국에서 사는 듯한 기쁨과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자신들을 따뜻하게 대해 주고,
보듬어 주고, 사람으로 여겨주는 교회라면,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천국에서는 더없는 행복이 기다리고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우유를
먹는 사람보다 우유를 배달하는 사람이 더 건강하다는 말처럼 머리로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보다는 가슴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나는 아이는 엄마와 연결된 탯줄을 끊어야 합니다. 이것은
두려운 일입니다. 이제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숨을 쉬는 아이는 비로소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을 견디어내야 합니다. 아이가 맞이하는 것은 차가운
공기와 강렬한 빛입니다. 아이에게는 죽음과 같은 순간을 우리는
탄생이라는 이름으로 축하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다시 엄마의
품속으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엄마의 품속에서는 필요 없었던 것들입니다. 말을 배우고, 걷는 것을
배우고, 역사와 철학, 종교와 문학을 배워야 합니다. 엄마의
품속에서는 하지 않아도 되었던 것들을 하게 됩니다. 친구도 사귀고,
결혼도 하고, 일도 하고, 누군가를 돕고, 여행도 할 것입니다. 아이는
이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엄마의 품속과는 모든 것이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입니다. 


생각을 바꿔봅니다. 우리는 지구라는 어머니 품에서 100년을 지내는
것입니다. 지구에서 우리는 ‘희로애락’을 느끼면서 살아갑니다. 이성,
감성, 오성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봅니다. 법과 질서를 배우고, 가족,
이웃, 국가라는 틀에서 살게 됩니다. 많은 사람이 이 세상 밖에 또
다는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엄마 품속에서 아이가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과 같습니다. 지구는 우리에게
머물 수 있는 땅, 마실 수 있는 물, 먹을 수 있는 음식, 신선한 공기,
아름다운 강과 산을 마련해 줍니다. 이제 우리는 때가 되면 어디론가
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죽음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아이가
세상으로 나오는 것을 탄생이라고 불렀듯이, 우리가 가는 그곳에서는
‘부활’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를 환영해주고, 축하해 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것이 부활의 신앙이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더라도 살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어
천사처럼 된다면 그래서 사랑과 평화를 찾는다면, 행복과 기쁨을 얻는다면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여러분을 신뢰합니다. 우리가 지시하는 것들을
여러분이 실행하고 있고 앞으로도 실행하리라고 믿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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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연중 제32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1월10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주일): 부활의 신비에 개방되어있는 생명


오늘의 전례는 죽음의 실체와 그 죽음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확고한 희망에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이것은 죽음이
우리와 무관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죽음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는
중요한 문제이다. 현대인들은 많은 경우에 죽음을 우리의 삶과 멀리
두고, 자신이 그 죽음과는 관계가 없는 듯이 살고, 그 죽음에 저항할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찾아오면 거의 절망에
떨어지고 만다. 이에 교회는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고 우리의 생명이
죽음과 함께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하느님의 생명에
연결되는 부활의 신비에 개방되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
하느님은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며,
하느님 앞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살아있는 것이기 때문이다”(루가 20,38).


제1독서: 2마카 7,1-2.9-14: 영원히 살게 하실 것이다.


제1독서의 내용은 초기 교회의 순교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마카베오의 형제들이라고 불렸던 ‘칠 형제’
의 순교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선조들의 법에 충실하기 위해
시민법을 따르지 말라고 용기를 주었던 어머니의 순교를 서술하고
있다. 그 젊은이들과 그 어머니의 확신은 미성숙한 사려 없는 행동이
아니며, 고고한 극기주의적 태도도 아니다. 지금은 잔악한 고통을
당하고 있지만, 육신의 부활을 통해서 장차 생명을 되찾게 될 신비에
대한 깊은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아들들의 폭군에게 했던 말들이 이
희망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넷째 아들의 말은 이렇다. “나는 지금
사람의 손에 죽어서 하느님께 가서 다시 살아날 희망을 품고 있으니
기꺼이 죽는다. 그러나 너는 부활하여 다시 살 희망은 전혀 없다”
(14절). 오늘 독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 어머니의 신앙은 더욱
감동적이다. “너희들이 어떻게 내 뱃속에 생기게 되었는지 나도 모른다.

 
너희들에게 목숨을 주어 살게 한 것은 내가 아니며, 또 너희들의
신체의 각 부분을 제 자리에 붙여준 것도 내가 아니다. 너희들은 지금
너희들 자신보다도 하느님의 율법을 귀중하게 여기고 있으니 사람이
출생할 때에 그 모양을 만들어 주시고 만물을 형성하신 창조주께서
자비로운 마음으로 너희에게 목숨과 생명을 다시 주실 것이다”
(1마카 7,22-23). 이것은 단지 영혼의 불사불멸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부활도 신앙의 빛으로 피어나고 있는 모습이다.


복음: 루카 20,27-38: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


유다 사상에는 부활에 대해 대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두 부류가
있었다. 즉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였다. 사제계급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던
사람들이었다(루가 20,27; 사도 23,6-7). 이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한
여인이 일곱 남편을 맞게 되는 경우를 들어 예수께 질문을 한다.


“이렇게 칠 형제가 다 그 여자를 아내로 삼았으니 부활 때 그 여자는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33절). 이에 대해 예수께서는 그들의
생각을 거부하신다. 즉 그들이 저 세상을 이 세상의 물질적 연장 내지
반복처럼 상상하는 무지한 표현을 거부하신다. 그러면서 다가오는
세상의 현재와의 ‘단절’과 동시에 ‘새로운’ 상황을 알려주신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가지만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은 사람들은 장가드는 일도 없고 시집가는 일도 없다.
그들은 천사들과 같아서 죽는 일도 없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34-36절).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새로운 삶의 모습’이란, 부활 자체가 결혼의
목적성을 상실해 더 이상 자손을 낳을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자손을
생산하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손을 통해
가문을 잇고 대를 이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활 때에는
사람들이 ‘천사들과 같아지기 때문에’(36절) 죽는 일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36절)라고 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부활하도록
되어있고 또 그 부활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사실에 연결되고
있다. 즉 부활로써만이 완전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지금부터 ‘하느님의 자녀’이다. 지금 어떤 모양으로든지
그분의 생명에 결합되어있기 때문에 장차 부활하도록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루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 저 세상에서 설 자격을 얻은 사람들’(35절)에 대해서 말했다.


그러므로 모든 일상의 삶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로 가는
진실한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장이라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체험하기 시작한 사람만이 마지막
부활을 믿을 수 있고 또 갈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 ‘생물학적’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고, 이미 이 지상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나누는 생명의 체험의 승화로서 이해될 때, 믿음과
기쁨의 의미가 살아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37절)이라고 한 것은 모세는 그 순간에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그 선조들과 ‘생명의’ 관계에 있고, 신비스러운 친교를 통해 계속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부활은 단순히 육체적인 사실로서가 아니라, 이미 하느님과
우리를 만나게 하는 그분과의 ‘일치된 생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의
하느님이시다”(38절). 즉 그리스도인은 현재 이 순간부터 그분과
사랑의 일치 속에 살아가야 하며, 그 일치가 죽음을 넘어 우리의
육신까지도 살려줄 마지막 부활의 영광에 이르게 되기를 기다리며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께서는 테살로니카
신자들에게 이렇게 종말론적 삶을 살도록 권하고 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총을 베푸시어 영원한 위로와 좋은
희망을 주십니다.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여러분의 마음을 격려하시고 여러분에게 힘을 주셔서 온갖 좋은
일을 하고 좋은 말을 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빕니다.”(2데살 2,16-17). 아멘!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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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 자녀의 유일한 신분증은 자신의 십자가뿐이다.


2019년 다해 11일10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 주일)


<하느님 자녀의 유일한 신분증은 자신의 십자가뿐이다.>
복음: 루카 20,27-38


어느 시골에 사는 자매가 몹시도 힘들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며 믿음으로 이겨가고 있었지만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주여, 너무도 힘듭니다. 주여 너무 힘듭니다.”라고만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어느 날 꿈을 꾸는데 그녀가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주님은 목수이시지 않습니까? 이 십자가를
잘라주세요.” 이에 주님은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 주셨습니다.

자매는 꿈속에서 세 번씩이나 자기의 십자가를 잘라달라고 하였습니다.
한결 가볍고 편안한 듯했습니다. 


그런데 눈앞에 절벽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커다란
십자가를 절벽에 턱 놓더니 그 십자가를 다리 삼아 건너 하느님나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자기 십자가는 이미 손 안에 들어올 정도로 너무
작았습니다. 자매는 털썩 주저앉아 서럽게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각자 다리로 사용한 자신의 십자가를 하늘나라까지 가져가야 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자매를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 자매가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다시 들려왔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것은 부활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반증입니다.
살이 빠져 건강한 몸매를 갖게 될 것이라는 믿음이 없다면 음식을
절제하는 십자가는 지지 않을 것입니다. 십자가는 부활과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오늘 복음은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파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부활이 있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부활신앙은 하느님의 본성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그
세포마다 부활신앙이 새겨져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부활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것입니다.

부활이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지금 죽음을 살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십자가는 자진해서
자기를 죽이는 도구입니다. 예수님께서 타인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부활을 사시는 분이기 때문에 자진해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지금 십자가를 살고 있다면 부활신앙이 있는 것이고,
부활신앙이 있다면 하느님의 자녀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삶은 미래에 벌어질 일이 아닙니다. 매일 자신을 죽이고
있어야합니다. 미국에서 지금 가장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드웨인 존슨입니다. 프로 레슬러로 활동하다가 영화배우로 활동하는데
차기 대통령감이라고 말할 만큼 인기가 좋습니다. 그는 나이 50을
바라보는데도 강한 근육과 몸매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운동을 멈추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영화촬영을 위해 이동할 때는 엄청난 크기의
차량들이 함께 이동하는데 그 안에는 드웨인 존슨의 헬스장이
있습니다. 남에게 방해를 받지 않고 운동을 하기 위해 많은 비용을
들여가면서까지 움직이는 개인 헬스장을 동반하는 것입니다.  


러닝머신은 처음에 범죄자를 고문하기 위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운동은 그야말로 몸에 고문을 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고문을 가하지 않으면 그런 몸매가 만들어질 수
없습니다. 고통이 없으면 얻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이것이 부활을 믿는
삶입니다. 지금 육체를 죽이고 있다면 부활을 믿는 증거입니다.  

기러기는 태어날 때부터 어디로 날아가야 하는지 압니다. 마찬가지로
송어가 어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지 아는 것처럼 십자가의 삶은
하느님의 자녀라면 유전자속에 새겨진 자연스러운 삶입니다.  

육체를 즐겁게 해주면 긴 고통이 오지만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면 긴
평화와 행복이 옵니다. 육체적 만족은 나를 죽이는 십자가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부활의 기쁨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만족스러울지라도 오랜 불쾌감 속에서 살아야합니다. 부활이 없는 인생입니다. 


‘최강의 인생’이란 책에 저자 데이브 아스프리는 창피를 무릅쓰고
스스로 자신에게 한 실험을 공개하였습니다. 부부관계와 삶의
만족도와의 상관관계를 밝혀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일주일에 한 번
부부관계를 할 때의 일상에서의 행복도는 어떤가,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부부관계를 할 때의 행복도는 어떤가를 체크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래프로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예외 없이 부부관계를 한 직후 삶의 만족도가 뚝 떨어졌습니다.
그리고 하루하루 조금씩 증가하다가 또 부부관계를 하면 다시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짜증과 화와 불만이 많아졌습니다. 한 달 동안
부부관계를 하지 않을 때는 그 만족도가 끊임없이 증가하였습니다.
예외가 없었습니다. 부부관계를 하지 않으면 한 달 동안 매일 더 행복해진 것을 스스로 체험한 것입니다.


인생을 성공적으로 마치려면 반드시 절제해야합니다.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합니다. 몸무게를 조금씩 줄이고 운동을 조금씩 늘리며 기도와
성경 읽는 시간을 늘려나가야 합니다. TV나 인터넷 하는 시간을 줄이고
책 읽는 시간을 늘려야합니다. 점점 더 지루한 일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뒤에 반드시 부활이 있음을 믿는 하느님 자녀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그 부활을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육체의 만족을
죽여 나가고 있어야합니다. 부활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육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이들이었습니다. 죽고 난 다음의 행복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여 가는 것이 참 행복임을 믿기에
십자가의 삶을 삽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증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매일 나를 못 박는 내 등 뒤에 십자가뿐입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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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성화(聖化)된 삶을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2019년 다해 11월10일 연중 제32주일(평신도주일)


성화(聖化)된 삶을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불가(佛家)에서 전해 내려오는 한 의미심장한 일화가 있습니다. 한
스님과 한 과부에 얽힌 사연입니다. 열심히 불공을 드리는 스님과
열심히 술을 파는 과부가 나란히 이웃에 살았습니다.

스님은 하루 온 종일 열심히 목탁을 두드리며 불공을 올렸고, 과부는
열심히 남정네들 사이에서 동동주를 팔았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흘러 둘 다 이 세상을 떠나 저 세상으로 건너갔습니다. 두 사람의 결과는 어떻게 된지 아십니까?


깜짝 놀랄 일이 발생했습니다. 극락에 들어갈 것이라고 100퍼센트
확신했던 스님은 불붙는 지옥에서 쌩고생을 하고 있었고, 100퍼센트
지옥이라고 여겼던 과부는 극락 세계에서 한 송이 연꽃처럼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습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요? 그런 결과가 초래된 원인은 두 사람의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올라오는 마음의 방향, 갈망의 방향 때문이었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스님은 열심히 목탁을 두드리고 불공을 드리면서도,
마음은 평생토록 늘 다른 데 가 있었습니다.


어디에로? 바로 옆집 술집 과부와 동동주에게 마음이 가 있었던
것입니다. 입으로는 열심히 목탁을 두드리고 염불을 외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늘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야, 나도 저 술 집에 가서, 젊은 과부가 따라주는 시원한 동동주 원 없이 마셔봤으면...”


그러다보니 그가 평생 드린 불공은 헛불공이었습니다. 그런 헛불공을
부처님께서 갸륵하게 받아주실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 스님은 옷은
스님 옷을 입고 있었지, 평생 헛물만 켠 것입니다. 그 결과가 불붙는 지옥인 것입니다.


그런데 과부는 어떻게 된 것입니까? 그 여인은 열심히 술을 팔면서도
마음으로는 늘 옆집 스님을 부러워했습니다. ‘스님은 얼마나 좋을까?
새벽마다 예불을 드리고, 부처님 앞에 꽃을 올리고, 하루 온 종일
경전을 읽고, 나도 그래봤으면...’ 늘 거룩한 갈망이 지속적으로 그 여인 안에 있었습니다.


여인은 어쩔 수 없는 태생적 현실로 인해, 진흙탕 같은 속세에서, 술을
팔고 살았지만, 마음으로는 언제나 불공을 드리며 살았습니다. 마치
진흙 속에 핀 한 송이 연꽃처럼 살았습니다. 그 결과가 극락이었습니다.

저희 같은 성직자·수도자도 예외가 아닐 것입니다. 사제복·수도복이
천국과 구원의 보증 수표가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고 있는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교계 제도
안에 성직자·수도자들은 평신도들보다 훨씬 더 하느님 가까이 있고,
평신도들보다 훨씬 거룩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고, 결혼생활이 이루어지는 가정이나 세상은 속된 것으로 여기는 착각입니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런 그릇된 생각을 완전히 새롭게 혁신한
은총의 사건이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황님이나 주교님들은 1중대,
사제나 수도자들은 2중대, 평신도들은 3중대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그게 아니라며 이렇게 천명했습니다.


“평신도들은 교회의 주체이자 교회의 주인공입니다. 교회의 위계 제도,
다시 말해서 주교직, 사제직이 하느님의 백성인 평신도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존경하는 성 요한 23세 교황님께서는 평신도들 역시 성화의 길로
불림받았음을 명백히 강조하셨습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평신도들은 세상 안에서 거룩함을 지향하는
신앙생활을 해나가야 합니다. 성화(聖化)된 삶을 교회 밖 세상 안에서
실천하는 것이 평신도에게 주어진 소명입니다.”


훌륭한 평신도들을 만나면서 저는 늘 확신합니다. 신분이 절대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진흙탕 같은 세상 한 가운데서
살아가면서도, 한 송이 청초한 연꽃처럼 살아가시는 분들도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끝도 없는 고통의 세월 속에서도, 언제나 거룩함을
갈망하며,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평신도들은 이미 성화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을.


오늘 평신도 주일을 맞아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세상 안에서도
충분히 거룩하게 살 수 있다는 것을. 평신도들께서도 간절히
열망한다면, 거룩한 갈망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신다면, 세상 안에서
충분히 봉헌생활을 해나가실 수 있다는 것을.

특별히 평신도들께서는 매일 수행하고 계시는 작은 사랑의 실천을
통해,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 못지 않은 성직을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평신도들께서 매일 행하고 계시는 가까운 사람들 가족들을 향한
봉사의 현장에서, 짜증내면서 억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기쁜
얼굴로 봉사하실 때, 여러분들은 이미 성화의 길을 걷고 계시는 것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이웃들 한 명 한명이 다 변장하고 찾아오시는
예수님이다.’ 생각하고, 그들을 대한다면, 여러분들은 그 어떤 위대한
주교님이나 수도자들이 수행하는 직무보다도 훨씬 고귀한 성직을 수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스님이 술집에 들어가면 술집이 절간이 되고, 술꾼이 절간에 들어오면
절간이 술집이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평신도들께서도 술집에
들어가시면 그 술집을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러분들 발길 닿은 곳마다 주님의 성전으로
변화시켜나가시길 바랍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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