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4일 믿음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1-14 05:54:24    조회 : 184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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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9년 다해 11월14일 [(녹)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지혜서 7,22ㄴ―8,1 복음 루카 복음 17,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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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2019년 다해 11월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신문사 옆에는 신협이 있습니다. 가깝기도 하고, 가톨릭 신협이기에 거래하고 있습니다. 신협 이사님들과 식사를 할 때였습니다. 한분이 제게 질문하였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디에서 사목했습니까? 세상 사람의 기준으로 미국 가톨릭 평화신문으로 온 건 영전입니까? 좌천입니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질문입니다. 사제들은 순명을 서약했기에 주교님께서 말씀하시면 따라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좌천일 수도 있고, 영전일 수도 있겠지만 신앙의 기준으로 보면 새로운 도전이며, 새로운 기회입니다.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기회이고, 신문 제작이라는 조금은 설레는 일을 만나게 됩니다. 며칠 전입니다. 은행 지점장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거래하는 사람의 자산, 사업의 규모, 재무상태는 묻지 않았다고 합니다. 다만 지금 하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 일이 세상을 얼마나 아름답게 하는지, 그 일을 하면서 무슨 보람을 느끼는지 물었다고 합니다. 은행 지점장은 당연히 돈에 관해 말할 줄 알았는데 가치와 보람, 의미와 행복을 이야기하였다고 합니다. 세상 속에서 살면서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었던 지점장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은행의 임원이 되었다고 합니다. 좋은 사람이 있다는 건 희망이 있다는 겁니다. 신문을 만들면서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걱정도 있었습니다. 수입을 생각해야 하고, 홍보 가야 하고, 광고주를 만나야 하고, 저의 능력으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신앙의 기준으로 생각하니 편해졌습니다. 아름다운 글, 따듯한 글로 닫힌 사람의 마음을 열면 됩니다. 교회의 소식, 공동체의 소식을 전하면서 하나의 신앙을 나누면 됩니다. 영성, 신학, 성서의 내용을 소개하면서 잠들었던 신앙을 깨우면 됩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지식이 필요하고, 기술이 필요하고, 능력이 필요합니다. 신앙의 기준으로 문제를 바라보면 지혜가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하고, 믿음이 필요합니다. 오늘 제1 독서도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혜는 혼자이면서도 모든 것을 할 수 있고 자신 안에 머무르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하며 대대로 거룩한 영혼들 안으로 들어가 그들을 하느님의 벗과 예언자로 만든다. 하느님께서는 지혜와 함께 사는 사람만 사랑하신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걱정과 근심이 생길 때, 원망과 분노가 생길 때면 이렇게 질문한다고 합니다. 내가 언제 노래를 불렀던가? 내가 언제 춤을 추었던가? 내가 언제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던가? 내가 언제 나와 이야기를 했던가? 노래하고 춤추지 않으면,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않으면, 자신과 대화하지 않으면 영혼은 병들기 마련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는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지금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지금 하는 일을 사랑하고, 지금 주어진 시간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신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안에 머무르는 사람은 많은 열매를 맺으리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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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연중 제32주간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1월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복음: 루카 17,20-25: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바리사이들의 질문은 그들도 군중들도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행위를 통하여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왔음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질문은 ‘당신이 말하는 그 나라가 오기 전에 십자가와 죽음이 당신을 덮칠 것이요.’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큰 사랑과 인내로 그들의 비방을 비방으로, “고통을 당하시면서도 위협하지 않으”(1베드 2,23)신다.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아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21절)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다시 일어나 다가오겠느냐고 그때를 묻지 마라. 오히려 너희가 그 나라에 합당한 자로 인정되도록 애써라. 그,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너의 의지에 달렸고, 너는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로움을 인정받고 온갖 덕행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이는 누구든지 하늘 나라에 합당한 이로 여겨질 것이다.”라는 의미이다. 사탄이 쫓겨나고 더 이상 죄가 다스리지 못하면,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 가운데 있을 수 있는 것은 진리에 대한 지식이나 무지, 즉 우리 마음이 그리스도의 나라나 사탄의 왕국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의로움에 대한 사랑이나, 죄에 대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의 기쁨입니다.”(로마 14,17)라고 한다. 하느님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의로움이요 평화이며 기쁨이라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나라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반대로 영의 생명을 죽이는 불의와 전쟁, 침울함 속에 있는 사람은 이미 악마의 나라의 시민이다. 이 하느님의 나라와 사탄의 나라는 이미 우리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이 삶 속에 무엇을 끌어안고 사느냐가 문제이다. 그 나라는 은총과 진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이다. 세상 종말에 그분은 하늘로부터 희미하게 또는 은밀하게 내려오시지 않고, 아무도 “다가갈 수 없는 빛 속에 사시는 분”(1티모 6,16)으로서 하느님 같은 영광에 싸여 내려오실 것이다. 주님께서는 번개가 빛을 내는 것처럼 오시겠다고 하신다. 아버지의 위엄을 입으시고 천사들을 거느리신 채 만물의 하느님이요 주님으로 오실 것이다. 그분은 이제 먼저 수난과 죽음을 당하신다고 말씀하신다. 그 나라는 먼저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먼저 구원의 수난을 겪으시고, 당신 육신의 죽음으로 죽음을 무너뜨리시고, 세상의 죄를 없애시고, 이 세상의 지배자를 파멸시키시고, 아버지께로 올라가셨다가 때가 되면 정의로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이다(시편 96,13)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근본적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우리의 삶 속에 실천하여 우리 자신부터의 근본적인 변화를 이루도록 노력하고 그러한 변화를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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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모델은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 마리아시다. 2019년 다해 11일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하느님 나라의 완전한 모델은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 마리아시다.> 복음: 루카 17,20-25 1941년 7월 아우슈비츠 수용소 제 14호 감방에서 한 사람의 탈출자가 생겼습니다. 이에 몹시 분노한 수용소장 프리치는 그 대가로 열 사람을 골라내어 굶겨 죽이는 아사형에 처한다고 하였습니다. 아사형은 큰 고통을 주는 사형법입니다. 굶는 고통보다 물을 마시지 못한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입을 벌려 이빨을 보여라” 이빨이 튼튼치 못하면 팔리지 않던 옛 노예 시장에서처럼, 분노한 프리치는 죄수를 고르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내 열 번째 죄수가 가죠프니체크로 결정되자 그는 울면서 소리 질렀습니다. “아아, 불쌍한 마누라와 가엽은 내 아들.” 이때 마르고 야윈 어떤 사람이 대신 나서서 프리치 소장을 불렀습니다. “무슨 일인가? 이 폴란드 돼지야.” “저 사람 대신 내가 죽겠소.” “너는 튜울립처럼 말라 죽을 것이다.” “저는 이미 늙었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도대체 너는 누구냐?” “천주교의 신부입니다.” 그의 짧고 엄숙한 대답에 피도 눈물도 없는 소장은 그것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아홉 명이 굶어 죽어가는 동안 힘을 북돋아주었습니다. 형리들은 콜베 신부가 그들을 바라볼 때 눈빛을 감당하지 못하고 “저리로 돌려! 그런 눈으로 보지마.”라고 외쳤습니다. 독주사를 맞고 죽은 콜베 신부가 화장장의 가마솥에서 소각되어질 때 모든 수감자들은 “오늘 콜베 신부님이 새롭게 탄생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콜베 신부 때문에 생명을 건진 ‘가죠프니체크’는 독일의 패망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그리고 훗날 자신을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걸으신 콜베 성인의 시복식에 참석하여 교황 바오로 6세도 알현합니다. 가죠프니체크는 눈물을 흘리며 교황님께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고결하신 콜베 신부님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덤의 생애를 살게 되었는데, 신부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를 지배하시면 우리가 ‘하느님 나라’가 됩니다. 가죠프니체크에게는 콜베 신부님이 그의 지배자가 되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방법은 ‘피 흘림’입니다. 피에 생명이 배어있기에 그 피를 받아들인 사람은 그 피를 준 사람에게 지배받게 됩니다. 그 지배받음이 가죠프니체크처럼 행복하다면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가죠프니체크는 콜베 신부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받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에페 1, 7)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오지 않는다.”고 하십니다. 또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먼저 많은 고난을 겪고 이 세대에게 배척을 받아야 한다.”고 하십니다. 우리 죄를 대신해 죽어야만 우리가 죄책감의 지옥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이루어지는 ‘의로움’과 기쁨과 평화라고 하였습니다(로마 14,17 참조) 의로움은 하느님께서 나의 죄를 아드님의 십자가를 통해 다 씻어주셨음을 믿는 마음입니다. 의로움은 죄가 사해진 것을 믿는 마음이기 때문에 의로운 사람은 절대 남을 심판하지 않습니다. 죄가 없으면 심판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나의 지배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우리 죄를 위해 고난을 당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하느님 앞에 그분의 가죽옷을 입고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입고 그분의 의로움 덕분으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믿으면 기쁨과 평화가 솟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마음 안에 사시는 그분의 뜻대로 살면서도 저 가죠프니체크의 말을 되풀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고결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잘것없는 나를 대신하여 죽음의 길을 가시어 내가 그분 죽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을 누리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숭고한 죽음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여 훗날 그분을 뵙기가 죄스럽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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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 (루카 17, 21)|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1월14일. 목.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 21) 삶 가운데에 십자가가 있고 우리 마음이 있습니다. 삶의 기쁨과 삶의 슬픔이 우리 가운데에 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를 속이지 않습니다. 십자가로 담아내야 할 우리의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와같이 십자가로부터 시작되는 마음의 나라입니다. 십자가에서 뜨거운 사랑의 하느님을 만납니다. 주님의 십자가에 마음을 내려놓습니다. 믿음이 필요 없는 때는 한순간도 없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은 십자가의 믿음을 통해 전달됩니다. 믿음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켜줍니다. 하느님과의 관계가 십자가로 하나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만나게 되는 만남의 나라 십자가입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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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죄인들이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2019년 다해 11월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 죄인들이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 사명 완수를 위한 최종 목적지인 예루살렘, 더 나아가서 골고타 언덕을 향해 올라가시는 중에, 바리사이들과 제자들을 향해 ‘짧는 묵시록’을 선포하십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 긴가민가 확실치 않았던 바리사이들, 언제나 예수님 정체에 대한 강한 의구심을 지니고 있었던 바리사이들이 묻습니다. ‘대체 하느님 나라는 언제 오는 것입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루카 복음 17장 21절) ‘하느님 나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가장 큰 삶의 주제요 화두였습니다. 주변 강대국들로 인한 침략과 파괴, 훼손과 멸망으로 인해, 큰 고통과 깊은 슬픔의 세월을 보내면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언젠가 도래할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희망으로 겨우 겨우 숨쉬고 견뎌왔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언제 구체화되고 실현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이스라엘 모든 계층 사람들의 간절한 물음이었으며, 동시에 예수님 입장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르침의 주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당장이 아니라, 5년 뒤, 아니면 10년 뒤, 그도 아니라면 30년 뒤...과연 살아생전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을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뜻밖에도 이미 와있다고 하시니, 다들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공생활 출발점은 이미 하느님 나라 출현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분은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악령들을 쫓아내셨습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기에, 그간 활개를 치던 악령들이 힘을 잃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 존재 자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고 지녔던 희망의 성취였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오래전 약속된 구원의 때가 도래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영광스럽게 변모하신 그분께서 당신 교회에 보내신 성령의 활동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미 목격했던 것입니다. 다만 하느님의 나라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으로 인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분으로 인해 구약 시대는 종료되었습니다. 그분을 통해 새로운 시대, 구원의 시대가 활짝 열렸습니다. 하지만 만물의 최종적인 회복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교회는 긴장과 설렘 상태에서 살아갑니다. 성취와 기대 사이에서, 소유와 희망 사이에서, 기쁨과 두려움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희망 속에서 기뻐합니다.’ “희망 속에서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로마서 12장 12~15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경천동지할 뜻밖의 초자연적 현상을 통해 알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미 우리 한 가운데 와 있으니, 이제 우리들 안에서 하느님의 나라를 추구해야 하고 실현해야 합니다. 큰 죄인들이 대대적으로 주님께로 돌아서는 곳, 바로 하느님의 나라가 실현되는 곳입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사심없는 나눔과 봉사가 이루어지는 곳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끝도 없는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도 기뻐라고 감사하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하느님의 나라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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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타] 11월 14일(목) - 하나님의 사랑 오늘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호세아서 6장 1절 말씀에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의 크기를 아십니까?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아들 예수를 죽이면서까지 우리를 참 사랑하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마치 부모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용서하고 끊임없이 감싸주고 어떤 경우에도 부모 자식 관계를 이어가기를 원하는 우리의 부모님의 모습 이 모습처럼 하나님은 과거에든 현재에든 미래에든 우리를 사랑하는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사랑하는 자식이기에 채찍을 들고 치시기도 하고 때로는 질병으로 환난으로 어려움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우주적인 전 인생 전체를 사랑하는 그 사랑의 크기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를 찢으셨지만 도로 낫게 하시고 우리를 치셨지만 싸매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역사를 지나며 세대를 넘기며 끝없이 사랑하는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합니다. 바로 이 사랑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결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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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으면 천국|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다해 11월14일 연중 제32주간 목요일(루카17,20-25) 주님의 사랑이 내 안에 있으면 좋은 곳, 아름다운 곳에 머물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특별히 신앙인은 더없이 좋은 곳, 하느님의 나라에 머물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계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보라,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17,21)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묵시록에는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에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예수님을 모시는 곳에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고 또 사는 곳이 바로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 있는 상태가 곧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오신 것이 문제가 아니라 지금 내 마음 속에 오시는 것이 문제입니다.”하느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주권이 내 마음에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요, 안 미치면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의 나라는 육적인 눈이 아니라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잘 볼 수 있습니다.”요한 복음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요한 3,3).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내게는 이제 천당 영복이 시작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영복을 얻고자 한다면 하느님만을 열심히 공경하시오” 하고 말씀하시며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성 정하상 바오로는 “ ‘내 눈으로 천당과 지옥을 보지 못하였으니 어떻게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으리요?’ 하는 이는 마치 소경이 제 눈 어두운 것을 생각하지 않고, 눈으로 하늘을 보지 못하니 해와 달이 있음을 믿지 못하겠다는 말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하고 말씀하시며 하느님 나라에 대한 믿음을 촉구하였습니다. 사실 하느님의 나라는 먼 훗날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자 예수님을 통해서 이미 우리에게 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13,34)는 새 계명 안에 성장되고 마지막 날에 완성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를 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번 일상 안에서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는 사람은 기쁨 속에 있고, 거기가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러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슬픔 속에 있습니다. 그곳이 지옥입니다. 사랑이 있으면 천국이고, 사랑이 없으면 지옥입니다. 여러분은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십니까? 그렇다면 사랑하십시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주님께서 눈물로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시며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이 우리를 위한 사랑의 발걸음이었다면 우리도 어떤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사랑의 끈을 결코 놓아서는 안 됩니다. 그곳이 하느님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지 마십시오. 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고 여러분 가운데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부터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믿는 이들이여, 이 땅 위에 살지만 천국을 그리워합시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나 “안락의자에 앉기만을 원하는 사람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성 필립보 네리).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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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Mozart, 1756 ~1791 Sinfonia Concertante for Violin, Viola & Orchestra in E flat major, K3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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