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18일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1-18 07:05:19    조회 : 198회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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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2019년 다해 11월18일 [(녹)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 마카베오기 상권 1,10-15.41-43.54-57.62-64 복음 루카 복음 18,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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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2019년 다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제가 있는 곳은 브루클린 교구에 속해있습니다. 교구는 매년 ‘Shining Star’라는 행사를 주최합니다. 다양한 공동체가 브루클린 교구에 있습니다. 교구는 각 공동체에서 빛나는 봉사자를 선별하여 감사의 마음을 담아 축하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이번에는 폴란드, 중국, 한국 공동체에서 봉사자가 선별되었습니다. 신앙에 충실하고, 지역 사회를 위해서 공헌한 사람이 선별되었습니다. 한국 공동체에서는 태권도를 가르치는 형제님이 선별되었습니다. 교구장님은 각 지역 공동체와 함께 사진을 찍으셨습니다. 봉사자를 위한 교구의 배려를 느낄 수 있는 따뜻한 행사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시면서 특별히 격려하시고, 칭찬하셨던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별하신 ‘Shining Star’입니다. 어떤 사람이 있었을까요? 많이 배웠던 사람, 율법 학자, 바리사이파, 제자들도 있었겠지만, 뜻밖의 사람이 많았습니다. 가난한 과부의 정성 어린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헌금의 액수를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헌금을 내면서 과시하는 사람을 칭찬하지 않으셨습니다. 가난하지만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던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 가난한 과부의 헌금이 부유한 사람의 헌금보다 더 귀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가진 걸 기쁜 마음으로 나누었던 자캐오를 칭찬하셨습니다. 자캐오는 부유했지만 영적인 갈망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였고, 예수님께서는 자캐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은 구원 받았습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백인 대장의 믿음을 칭찬하셨습니다. 백인 대장은 하인의 병을 고치시러 오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굳이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도 제 부하에게 말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저 한 말씀만 하시면 제 부하의 병도 치유될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백인 대장의 믿음을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이렇게 큰 믿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강도를 칭찬하셨습니다. 강도는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가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죽음의 순간에 강도는 회개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자비하십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이라도 뉘우치면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오늘 낙원으로 갈 겁니다.’ 눈먼 소경의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소경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내가 무엇을 해 주길 원합니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은 ‘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보십시오. 당신의 믿음이 당신을 구원하였습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겸손한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뉘우치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뉘우친 걸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복음 때문에 박해받고, 희생하는 사람을 칭찬하십니다. 2019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나의 삶은 어떠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는 부정한 것을 먹지 않기로 굳게 결심한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음식으로 더럽혀지거나 거룩한 계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작정하였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 갔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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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연중 제33주간 월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복음: 루카 18,35-43: 주님, 볼 수 있게 해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눈먼 사람을 고쳐주셨는데, 그는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윗의 자손, 즉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치유 능력을 보는 눈이 있었다. 그래서 끈질기게 애원한 것이다. 그는 인간의 힘으로는 시력을 회복할 수 없고 하느님의 거룩한 능력과 권위로써만이 시력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께 나아가듯 예수님께 나아간다. 누가 지나가느냐고 눈먼 사람이 묻자, 사람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37절)고 알려주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부르짖었다(38절).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말렸다. 그들은 눈먼 거지가 시끄럽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동시에 예수님께서 그를 고쳐주시면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과 마찬가지로 못마땅하기 때문이다.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믿음이 부족한 사람들을 다시 믿게 하시려고 빛이신 분이 이 세상에 오셨다. 매일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구걸하던 그 사람이 이제 하느님의 선물을 받게 된다.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마르 10,47) 이렇게 청하는 그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가 믿음이 구원을 주었고, 그 다음에 시력을 되찾았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41절) 예수님께서는 최고의 권위로 말씀하셨다.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42절) 이 말씀은 인간의 권한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권위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그 누가 이런 권위 있는 말씀을 한 적이 있는가? 주님은 하느님께 기적의 능력을 청하지 않으시고 당신의 능력으로 그의 시력을 되찾아 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든 하셨다. “다시 보아라!” 이 한마디가 눈먼 이에게는 그대로 빛이었다. 참 빛이신 분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보게 된 그 사람은 어떻게 했는가?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다.”(43절)고 한다. 그는 이중으로 눈먼 상태에서 벗어난 것을 알 수 있다. 육신의 눈먼 상태 뿐 아니라, 마음의 눈먼 상태에서도 벗어난 것이다. 그에게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았다면 그는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에 군중도 모두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고 한 것을 보면,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찬양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눈먼 이가 그토록 부르짖어 눈을 뜨게 되는 은총을 받았다면 우리의 눈은 어떠한가? 사물을 쳐다보는 눈은 볼 수 있다 해도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은 얼마나 밝은가? 그러기에 우리도 “주님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는 간절한 기도를 자주 바쳐야 할 것이다. 우리의 눈이 이제 주님의 참 모습을 바라보며 그 신비를 깨달아 알고 주님을 따를 수 있는 삶이 되도록 주님께 은총을, 그러한 기적을 청하자.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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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믿음은 하느님의 좋으심을 묵상함으로써 커진다. 2019년 다해 11일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믿음은 하느님의 좋으심을 묵상함으로써 커진다.> 복음: 루카 18,35-43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여기저기 버려진 시체들이 있었습니다. 한 들판에 유난히 코스모스가 응집되어 피어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가까이가보니 코스모스들은 어떤 병사의 몸에서 피어난 것들이었습니다. 군번줄로 신원을 확인해보니, 그 병사는 전쟁터에서 아무도 묻어줄 수 없는 병사들을 위해 아름다운 꽃의 향기가 휘날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자신의 몸에 한 움큼의 코스모스 씨를 안고 전쟁에 출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런 처지가 되어 썩어진 몸에서 코스모스가 피어 바람에 향기를 휘날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묵상해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썩은 시체처럼 보여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 가득한 사람의 모습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할 때도 이러한 자세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공부를 한다는 분들에게 아담과 하와가 왜 에덴동산에서 쫓겨났느냐고 물으면 많은 경우에 선악과를 따먹어서 그랬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자녀가 여러분 가방에서 돈을 훔쳤다고 호적에서 파버릴 것이냐고 물으면 웃습니다. 자신들은 그렇게 자비로우면서도 하느님은 과일 몇 개 먹었다고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는 모진 분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자비를 더 잘 알기 위해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쫓겨난 것은 선악과를 먹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해서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옷을 만들어 입고 숨었기 때문입니다.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신 모든 은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악과를 바치라고 한 것 하나에만 집중하며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판단해버렸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도 하느님을 위해 아무 일도 하지 않은 몹쓸 종이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께서 모진 분이셔서, 심지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에서 모으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물러가서 주인님의 달란트를 땅에 숨겨 두었습니다.” (마태 25,24-25) 성경공부를 하더라도 하느님을 무자비한 분으로 여긴다면 공부만 한 것이지 기도를 한 것은 아닙니다. 말씀은 묵상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이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믿음을 줍니다. 저의 어머니도 저에게 매우 모질게 대하신 적이 있습니다. 혼낼 필요가 없는 것도 혼내시고 학용품 살 돈도 안 주셔서 울려서 보내셨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붙잡고 부모는 자녀를 일곱 살까지만 키워주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는 자녀의 교육을 위해 엄한 훈육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에 집중하면 어머니에 대한 믿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면 그분과 사는 것은 고통 자체가 됩니다. 저는 어머니가 저의 어머니인 것을 믿기 위해 어머니의 손과 발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를 위해 굳은살이 박이고 관절이 휘어져 있었습니다. 생선의 어느 부위를 드시는가도 살폈습니다. 언제나 머리 부분만을 드셨습니다. 몸통을 드시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맛있는 것을 나에게 먼저 주시는가도 살폈습니다. 새참으로 받으신 우유와 빵을 당신은 안 드시고 저녁 때 저에게 가져다 주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께서 좋으신 분임을 묵상할 때 어머니가 나의 참 어머니가 맞는다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을 성장시키지 않는 성경공부는 무익함을 넘어서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소경이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는 데도 큰 소리로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고 부르짖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십니다. 그는 비록 소경이었지만 하느님께서 너무나 좋으신 분이시기에 자신에게 좋은 것만을 주실 것임을 오랜 시간 묵상해온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 묵상해야 하는 유일한 것은 ‘하느님의 자비’ 입니다. 그 믿음만이 구원의 길입니다. 기도가 끝나건, 성경 읽기가 끝나건 항상 하느님의 자비를 찬미하며 끝나야합니다. 그래야 믿음이 증가한 것입니다. 하느님 자비에 대한 믿음이 증가하지 않는 그 어떤 것도 유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모든 에너지가 하느님은 좋으신 분이라는 믿음을 증가시키는 데 쓰이도록 합시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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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 42) |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다해 11월18일. 월. 다시 보아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루카 18, 42) 믿음은 볼 수 없는 우리 자아의 가장 확실한 해답입니다. 믿음으로 다시 세상을 보는 것이 참된 믿음입니다. 믿음은 볼 수 없는 우리의 절박함과 가난함에서 믿음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눈 먼 우리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자비를 청하는 믿음의 시작입니다. 자비로 시작하여 믿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게됩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 제대로 보게 되고 제대로 사랑하게 제대로 따르게 됩니다. 주님께 우리자신의 볼 수 없는 부분을 청할 때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영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찬미와 따름의 놀라운 삶입니다. 다시 보듯 다시 찾은 것이 우리의 잃어버린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 주님을 향한 믿음은 새로워집니다. 다시 보게 되는 믿음의 기쁜 날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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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수도회]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2019년 다해 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하느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때가(수난과 죽음의 순간) 서서히 다가왔습니다. 예수님의 발걸음은 약속된 장소 예루살렘으로 향해가고 올라가고 계셨습니다. 예루살렘을 40여킬로 남겨둔 예리코로 들어가시기 직전이었습니다. 예리코는 지구상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해저 258미터) 오아시스 도시로 유명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 한 가지 있었습니다. 이제 지상에서 예약된 당신 사명의 수행 기간이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최종 목적지 예루살렘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명확하게 파악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 머릿속에는 세속적인 왕권에 대한 욕심이나 세상 사람들의 환호나 열광, 승리에 찬 행군 따위는 조금도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아버지의 뜻에 따라 쓰디쓴 고난의 잔을 피하지 않고 마시는 것, 끌려가는 한 마리 어린 양처럼 묵묵히 수난을 견디는 것, 죽음을 넘어서 부활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가에 도열한 군중들은 전혀 다른 생각을 품고 예수님을 환영합니다. 유다인들은 구약 시대 자신들의 선조들이 주님의 권능에 힘입어, 마른 발로 요르단 강을 지나, 당시 적군들이 정복하고 있던 난공불락의 요새이자 성지(聖地) 예리코를 함락시켰던 사건을 회상했습니다. 군중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한번 그 일을 몸소 수행하시리라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전지전능한 세속적 왕권의 행사를 잔뜩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랜 로마 제국으로부터의 압제나 허약한 헤로데 왕권을 단숨에 제압하고, 그토록 꿈꾸던 새로운 왕국, 초강대국 건설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그런 허황된 꿈이나 기대를 완전 개무시하십니다. 그분은 군중의 대대적이고 열광적인 환영 앞에 일말의 반응도 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당신 사랑의 눈길을 필요로 하는 한 가련한 인간을 바라보십니다. 삶 자체가 고통과 눈물로 가득했던 인간에게 다가가십니다. 군중들의 환호소리와 박수소리에 묻혀 가느다랗게 들려오던 한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 누구도 관심주지 않던 한 가련한 인간으로부터 들려오던 구원의 외침을 들으십니다. “예수님,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루카 복음 18장 38절) 예수님 당신을 환영하는 수많은 군중들의 요란한 환호 소리에는 귀를 막으시고, 구걸로 하루하루를 연명하던 한 눈먼 사람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루카 복음 18장 41절)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군중들의 열광이나 엄청난 기적에 대한 헛된 기대, 세속적인 성공이나 승리보다, 지금 당신 눈 앞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한 인간 존재를 눈여겨봐주시고, 돌봐주시는 것이 훨씬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눈먼 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이겠습니까? 수많은 군중들의 목소리를 제쳐두고 오직 내 절박한 목소리만을 귀담아들어주신 주님이 얼마나 나를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친히 물어봐주셨습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아마 오늘도 주님께서는 가난하고 절박한 우리 각자를 눈여겨 보실 것입니다. 간절히 외치는 오늘 내 목소리를 들으시고 우리에게 친히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자상한 목소리로 물어보실 것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사실 예리코에는 눈먼 거지 뿐만 아니라 수많은 눈먼 이들이 있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은 그 수많은 눈먼 이들은 정작 자신들의 눈이 멀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도들을 포함해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 군중들이 아직도 새로운 눈,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날에도 눈먼 이들은 도처에 널려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의 참된 실체와 정체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 아직도 예수님으로부터 세속적인 기대만을 품고 있는 사람들, 결국 아직도 신앙의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눈먼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눈만 뜨면 외쳐야겠습니다.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주님, 제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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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청주]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월11월18일 연중 제33주간 월요일(루카18,35-43) 영혼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시력이 6.0 인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그는 아주 멀리 있는 것도 잘 봅니다. 그렇다고 그가 늘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이기도 하지만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 오히려 힘들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외적으로는 잘 보지만 혹 자기 자신을 볼 수 없다면 그는 불행합니다. 육신의 눈이 중요하지만 내면의 세계를 보는 마음의 눈은 더 소중하고 내세의 세계를 보는 영혼의 눈은 더욱 더 고귀합니다. 우리는 감겨진 영혼의 눈을 떠야 합니다. 어떤 눈 먼 이가 예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소리를 듣고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카18,38)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런데 앞서 가던 사람들이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습니다. ‘이웃사촌’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눈 먼 소경은 이웃을 잘못 만난 것 같습니다. 절박한 부르짖음을 외면한 사람들은 아무리 좋은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마음의 눈은 뜨지 못했으니 정작 “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외쳐야 할 사람은 눈먼 소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웃의 마음을 읽고 그의 부족함을 채워야 할진대 시끄럽다고 야단을 치고 있었으니 그들이 소경입니다. 자비는 적선이 아닙니다. 함께하면 손해 볼 것 같아도 주님의 마음으로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그의 필요를 절박함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어려움이 있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줄 수 있을 때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눈먼 이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으려는 심정으로 발버둥치듯이 그렇게 절박하고 간절하게 매달렸습니다. '잠자코 있으라'는 꾸짖음에 굴하지 않고 믿음을 가지고 외쳤습니다.“주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믿음은 군중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믿음은 군중의 손가락질도 마다하는 예수님께 대한 일편단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믿음을 보시고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눈먼 이는 다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하느님을 찬양하며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하느님을 찬양하며 따랐다는 것은 단순히 외적인 눈만 뜬 것이 아니라 영적인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도 눈을 떠야 합니다. 믿음의 눈을 뜨면 세상이 달라 보이고 이웃의 요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영혼의 눈이 뜨여 내가 변하면 세상이 아름답습니다.‘잠자코 있으라’고 꾸짖기 전에 그의 처지와 절박한 마음을 공감하게 되고 오히려 주님을 불러 세우고 주님께로 인도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하고 부르짖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영적인 시력을 키울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미룰 수 없는 사랑에 눈뜨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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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assoon Concerto in G minor Danzi, Frsnz (1763-1826 G) Albrecht Holder, Bassoon New Brandenburg Philharmonic Nicolas Pasquet, C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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