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해 12월1일 그러니 깨어 있어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2-01 06:37:11    조회 : 187회    댓글: 0

▣ 2019년 가해 12월1일 [(자) 대림 제1주일]

제1독서 이사야서 2,1-5
제2독서 로마서 13,11-14ㄱ
복음 마태오 24,3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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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대림 제1주일

2019년 가해 12월1일 대림 제1주일

오늘은 대림 제1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늘부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면서 제가 좋아하는 노래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제목은 ‘영원한 사랑’입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 별처럼 내 마음 깊은 그곳에
고요히 밝아오는 빛의 향기로 우리 사랑은 영원히
어둠이 깊을수록 더욱 빛나는 내 마음 깊은 그곳에
마르지 않는 샘물 되어 흐르오, 우리 사랑은 영원히 

때로는 외로움에 눈물지어도 그대 나에게 등불이 되어
말 없는 눈빛으로 기도해 영원한 우리 사랑을 위해
나 이제 당신 위해 꽃을 드려요. 눈빛 순결한 사랑에
고요한 두 마음이 두 손을 모아 영원한 사랑을 위해.” 

아침을 기다리는 새벽 별처럼 우리에게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면
좋겠습니다. 힘들고 지친 이웃에게 희망의 등불, 사랑의 등불이 되면
좋겠습니다. 동방의 박사들이 선물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아왔듯이,
우리도 주님께 드릴 선물을 마련하면 좋겠습니다.  

미국에서 생활하면서 필요한 것이 3가지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거주자 등록증’입니다. 신청서를 작성하고, 면담하였습니다.
전산에 문제가 있어서 보통은 1주일이면 나오는데 1달 정도 걸렸습니다.
거주자 등록증이 있으면 미국에서 취업할 수 있습니다. 사제복을 입은
저에게 직원은 강복을 청하였습니다. 이주민 센터에도 신자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는 ‘운전 면허증’입니다. 비자, 거주자 등록증, 신용카드가
있으면 필기시험을 볼 수 있습니다. 필기시험을 마치면 2주 정도 지나서
임시 운전 면허증이 발급됩니다. 1달 정도 기다리면 실기시험이
정해집니다. 감독관인 경찰이 신자였습니다. 제게 미소지으면서
걱정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긴장은 되었지만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사제복을 입고 가서 좋았습니다. 사제복 뒤에 계신 하느님의 힘과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는 ‘성사 집전 허가증’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속지주의 원칙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사목하던 사제는 현지 교구의 교구장에게
성사를 집전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의
교구장이 서면으로 요청합니다. 제가 속한 브루클린 교구의 교구장님이
성사 집전 허가증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제 조건은 다 갖추었습니다.
남은 건 열심히 일하는 겁니다.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깨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깨어 있음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시간의 차원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물속의 물고기는 강물을 거꾸로 올라갑니다. 새는 힘차게 날아오르며
노래 부릅니다. 다람쥐는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모으고 있습니다.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기 위해서 생명은 깨어 있습니다. 깨어
있음은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두 번째는 의미의 차원입니다. 이것은 인간에게 속한 것입니다. 문학,
음악, 미술, 건축, 수학, 철학은 의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발전하였습니다. 재물,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으로 오르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의미는 진, 선, 미를 추구하면서 문명의 꽃을 피우기도
하지만, 의미는 욕망이라는 전차가 되어 문명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세 번째는 가치의 차원입니다. 종교는 가치를 추구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당한 이를 도와줍니다. 가치를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닭이 울 때 회개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부끄러움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으실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사람이 되신 건 겸손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제2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깨어 있음에 관해서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지금이 어떤 때인지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이미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처음 믿을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워졌기 때문입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깨어 있는 걸까요? 가치의 차원을 사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이 세상에 온 목적을 알았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 목적을
이루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사람이 깨어 있는 사람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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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대림 제1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가해 12월1일 대림 제1주일: 가해: 깨어있는 자세

오늘의 주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모든
‘오심’을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마지막 ‘오심’을 잘 준비하는
‘깨어있는 자세’이다.

제1독서: 이사 2,1-5: 그들의 칼을 보습으로 만들 것이다

1독서에서는 두 가지 사상을 전하고 있다. 첫째, 모든 민족이
예루살렘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예루살렘에는
주님께서 ‘당신의 길을 가르쳐주시고’ ‘당신의 법과 말씀을
선포하실’(3절) 주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님의 말씀을
모든 민족들이 듣게 됨으로써 서로 다른 민족들 사이에 일치와 화해가
이루어질 것이라는 것이다.

이 예언의 말씀은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란 바로 ‘형제애’와
‘평화’가 정말로 실현되어야 할 공동체 즉 ‘멧부리 위에 우뚝
서서’(2절) 찬란히 빛나고 있는 예루살렘 공동체, 즉 교회이다. 교회의
기능은 ‘하느님과의 친밀한 일치와 전 인류의 일치의 표지이며
도구’(교회1항)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사야의 기록은
결코 끝나지 않는 ‘주님의 도래’, 즉 그리스도의 최초의 도래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의 힘겨운 성장,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끊임없이 ‘오시는 분’(사도 1,4 참조)을
만나러 가는 여정임을 기술하고 있다.

복음: 마태 24,37-44: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

주님과의 ‘만남’을 한 순간도 그냥 지나치지 않기 위해서 그리스도인은
늘 ‘깨어있어야’ 한다. 즉 오랜 기다림 속에서 엄습되는 잠이나
피곤함의 유혹을 극복해야만 한다. 오늘 복음은 이 점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노아 시대의 일을 회상시키면서(37-39절)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하신다. 첫째, 하느님께서 ‘불시에’ 찾아오시리라는 사실을
잊은 채, 매일의 일상적 삶의 문제에 너무 빠져있으면 안된다는 것과,
둘째, 홍수 때처럼 주님의 ‘오심’에 따르는 위협적이며 위험스런 상황에
관한 점이다. 노아의 홍수 사건은 파괴와 저주의 사건이기도 하였지만,
노아와 그의 가족을 위한 구원의 기회이기도 하였다
(창세 7,11-23 참조). 오시는 하느님 앞에서의 심판은 이렇게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즉 인내롭게 방주를 만들었던 노아처럼 당신께
개방되어있고 당신의 말씀을 온순히 따르는 사람은 구원하시고,
당신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당신을 거절하여 마음을 당신께로
향하지 않는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으신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 또 두 여자가
맷돌을 갈고 있다면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다”(41절).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버려둘 것’이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그 모든
것을 마지막 날에 드러내 보이실 것이라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뜻을 잘 받아들여 온순히 따르고 실천했는지 아닌지가 그
때에 드러날 것임을 가르쳐주시는 것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이
오시는 그 날이 언제이든 간에 두려움과 ‘깨어있음’으로 그분을
기다려야 한다. 그 두려움이라는 것은 무서워함이 아니다. 나 자신이
하느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지 못하여 하느님의 자녀로서 품위를
잃을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어있어라”(42절). 이 말씀은 여러 군데서 반복되고 있는
말씀이다. 이는 밤을 지키는 야경꾼들과 같이 잠을 잠으로써 도둑에게
기습을 당하지 않도록 깨어있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3-44절). 도둑이 오는 때는 언제인지 모른다. 항상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고자 하는 그 때 그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할 ‘깨어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깨어 기다림’은 주님께서 우리 생활 가운데 여러 가지
모양으로 이루시는 그 모든 ‘오심’를 하나도 놓치지 않음으로써 그분의
마지막 ‘도래’에 대해 더 잘 준비하는 우리의 정신적 자세를 의미한다.
이것을 이미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말하고 있다. “두 번째 오심에
놀라지 않기 위해서는 첫 번째 오심을 거부하지 말아야 한다”
(Enarrat. in Psalmos, Ps 95,14).

제2독서: 로마 13,11-14: 잠에서 깨어날 때

바오로 사도는 잠자지 말라는 권고에서 더 나아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과거생활이 그리스도라는 ‘빛’
속에서의 삶이 아니라, ‘밤’에 묻혀있는 ‘잠’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활에 들어와 계신 지금은 그 ‘밤’에서
벗어나 ‘대낮처럼’ 살아가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와 그리스도의 만남을
위한 근본적인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그분의 오심과 더불어 ‘때가
찼기에’(갈라 4,4 참조) 구원의 마지막 국면이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가 처음 믿던 때보다 우리의 구원이 더 가까이
다가왔습니다”(11절). 이 말씀은 이미 이 순간부터 여러 가지 형태의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점점 더 실현되어 가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마지막 도래는 우리의 삶과 역사
가운데 이루어지는 다른 모든 ‘도래’의 종합이며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이 얼마나 나의 일상의 삶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하여 깨어있고, 주님을 맞아 드릴 수 있도록 늘 준비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지금까지의 모든 ‘밤’의 ‘잠’에서 깨어나
빛 속에서 구원을 체험하며 살아가는 우리가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여야 하겠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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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깨어있음은 사랑을 삶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2019년 가해 12일1일 대림 제1주일

<깨어있음은 사랑을 삶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는 것이다.>
복음: 마태오 24,37-44

늑대가 양 무리의 어린양을 자신의 저녁식사로 정했습니다. 그러나
어린양이 무리에 끼어 있으면 그 양을 잡아먹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는 양 인척 흉내 내며 늑대 무리에 잠입하였습니다.  

그리고 어린양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너, 지난 해 내 욕하고 다녔지?” 어린양이 대답합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그때 전 태어나지도 않았는걸요.”
그러자 늑대가 말합니다. “그러면 네 형이었나 보지.”
“전 형이 없는데요?” “그러면 네 가족 중에 누구였을 거야.”
“저희 가족은 남의 험담을 하지 않아요.” 

이런 대화를 하는 중에 어린 양인 자신이 무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결국 늑대는 양에게 이렇게 말하고
잡아먹었습니다. “어, 상관없어. 이젠 저녁시간 다 됐거든.” 

우리 안에 우리를 깨어있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자꾸 말을 시키면 나는 정신없이 그것과 대화하다가 무리를
이탈하고 맙니다. 이것이 자아입니다.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체로키 인디언 노인이 손자에게 삶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마음속에서는 늘 싸움이 일어난단다.” 그는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너무 끔찍한 싸움이어서 마치 두 마리 늑대가 싸우는 것과도 같단다.
하나는 악마 같은 놈인데 분노 질투 슬픔 후회 탐욕 교만 분개 자기연민
죄의식 열등감 거짓 허영 잘난 체하고 자신의 거짓자아를 나타낸단다.
다른 놈은 선한 놈이지. 이놈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친절 선의 고요함
겸손함 동정심 관대함 진실 연민 신뢰를 나타낸단다. 이 같은 싸움이
네 안에서도 일어나고 모든 사람의 마음에서도 일어난단다.” 

손자는 잠시 동안 그 말을 생각하다가 할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체로키 노인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긴단다.” 

우리 안에는 항상 두 목소리가 있습니다. 한 목소리는 나를 죽이고
이웃을 살리라는 것이고, 한 목소리는 이웃을 죽여 나를 살리라는
것입니다. 한 목소리는 나의 생존을 위해 이웃을 이용하라는 것이고,
다른 목소리는 이웃이 나를 이용해 이득을 보게 하라는 목소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한 목소리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고 다른 목소리는
자기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자신만을 위하라는 목소리와 대화한다면
자신도 모르게 이웃을 사랑하라는 목소리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에서도 벗어나게 됩니다. 결국 그
목소리를 내는 것에게 영원히 잡아먹힙니다. 그 상태를 지옥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은 늘 깨어 있지 못한 것의 결과입니다. 

오늘은 전례력으로 새해의 첫 날입니다. 깨어있지 못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나타나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아니라 다른 목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알려주러
오신 목소리입니다. 그 목소리를 따라가는 사람들이 교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보고도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 사람만이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1924년 파리올림픽 육상 400m에 출전한 에릭 리델은 예선에서 최고의
기록으로 수립, 금메달 획득이 유력했습니다. 그는 예선 때 출발선에서
흑인 선수와 악수를 나누는 등 숱한 화제를 뿌렸습니다. 인종차별이
심한 당시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대망의 결승전이 주일에
열리기로 결정됐습니다. 그러자 리델은 주저 없이 출전을 포기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몇 가지 원칙을 지키며 살아왔습니다. 그것은 주일을
거룩히 지내는 것과 인간 평등의 정신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원칙으로 삼고 살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 리가 없습니다.  

오늘 복음엔 예수님께서 오심이 곧 심판이 될 것임을 알려줍니다. 마치
노아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방주를 만들었는데 다른 이들은 그
목소리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배를 짓지 못한 이들은 심판 때 모두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영원한 심판에서 죽음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다른 이들과 함께 사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아버지, 성모님을 어머니로 하는
가족공동체를 꾸리실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만을 위해 이웃에게 해를
끼치며 살아온 사람은 마지막 때에 그 나라에 합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이 내려질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안에 태어납니다. 매
순간이 작은 심판인 것입니다. 내가 어느 목소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하느님 나라의 백성이 되기도 하고 지옥의 백성이 되기도 합니다.  

깨어있음이란 원칙이 있는 삶을 말합니다. 그 원칙이란 사랑이 아니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마음입니다. 이 원칙을 깨고 누군가
미워지는데도 용서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잠자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배를 만들지 못해 결국 물속에 잠기고
맙니다. 노아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 배를 만든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인 사랑을 지켜 마지막 심판을 이기게 될 방주를
만들어야합니다. 사랑의 계명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사는 사람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맞아들일 수 있습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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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그러니 깨어 있어라.(마태 24, 42)|한상우 바오로 신부

2019년 가해 12월1일 대림 제1주일. 그러니 깨어 있어라.
(마태 24, 42)

기다림으로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더욱 뜨거워집니다.
깨어 있음과 준비라는 기다림은 가장 좋으신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기다림의 여정에서는 주님보다 앞설 수 있는 순서는 없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주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기다림 뒤에 찾아오는 주님의 탄생입니다.

기다림이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주님을 향한 기다림이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기쁨의
만남이 됩니다.
기다림이라는 만남 안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기다림의 길은 우리가 돌아갈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기다림의 여정을 필요로합니다.
기다림은 사랑하는 사람들의 가장 큰 사랑임을
깨닫는 시간 되십시오.
기다림안에 주님과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다림이라는 대림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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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세상의 옷을 벗고, 불멸의 옷, 예수 그리스도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2019년 가해 12일1일 대림 제1주일

세상의 옷을 벗고, 불멸의 옷, 예수 그리스도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또 다시 맞이한 대림 시기, 첫번째 주일 독서들과 복음 말씀을 쭉 읽고
묵상하다가 유난히 눈길이 가는 단어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품위’
라는 단어였습니다.

“밤이 물러가고 낮이 가까웠습니다. 그러니 어둠의 행실을 벗어 버리고
빛의 갑옷을 입읍시다. 대낮에 행동하듯이, 품위 있게 살아갑시다.
흥청대는 술잔치와 만취, 음탕과 방탕, 다툼과 시기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로마서 13장 12~14절)

품위라는 단어를 접하니 많이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분의 제자로서, 이제 어느 정도 세월을 살아온
사람으로서, 그에 걸맞는 품위나 품격을 갖추고 살아가고 있나?’
반문해보니 더욱 큰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을 살펴보니, 저뿐만 아니라 적지않은 분들이 품위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민의 손으로 선출된 국민의
지도자요 대변자, 봉사자로서 그에 걸맞는 품위는 기본인데,
품위라고는 손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분들이 참 많습니다.

모 정당 국회의원들은 정말이지 해도 해도 너무합니다. 품위까지는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한 인간 존재로서 갖춰야할 가장 기본적인
상식이나 예의범절조차 찾아볼 수 없습니다.

어찌 그리 똘똘 뭉쳐 집단적 천박함과 몰상식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지
안타깝습니다. 너무 신기한 것이 백명도 넘는 그 많은 분들 가운데,
품위는 고사하고 평범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분이라고는 단 한명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꿈꿉니다. 품위있는 삶, 품위있는 언어, 품위있는 행동,
품위있는 노년, 품위있는 죽음...그러나 백방으로 노력하지 않으면
품위는 커녕 추악함과 천박함만 덕지덕지 남게 됩니다. 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지 않으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를 통해 자신의 신학 사상을 나름 정리합니다.
(사상편: 1장~11잘) 이어서 그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의화되 그리스도인으로서 윤리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훈계합니다.(훈계편: 12장~16장)

훈계편에서 바오로 사도는 의화된 그리스도인에게 걸맞는 행동거지,
즉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새로운 생활 방식에 따른 새로운 삶, 다시
말해서 성령에 따른 행동을 강조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시대’‘결정적인 시점’
‘잠에서 깨어날 시간’이 다가왔음을 강조합니다. 그 때는 바로 하느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때이며, 주님께서 다시 오실 재림의
날입니다.

주님 재림은 역사의 밤과 낮은 가리는 결정적인 분기점입니다. 따라서
재림이 가까이 다가오면 인류 역사의 밤은 종말을 고합니다.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고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립니다. 그때 모든 죄악은
사탄과 더불어 사라집니다. 선과 의가 구현되는 때이므로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죄와 저주 상태에서 의화와 구원의 상태로 변화됩니다.

새로운 세상, 결정적인 때,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세상의 옷, 어둠의 옷을 벗어버리는 일입니다. 대신 빛의
갑옷, 불멸의 옷,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 일일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으로 갈아입는다는 것은 매사 매 순간 그분께서
나와 동행함을 강하게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분과 나는 따로
따로가 아니라 일심동체라는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갑옷으로 바꿔입는 과정에서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낡은 옷, 과거의 남루한
옷, 옛사람의 옷을 미련없이 훌훌 벗어던지는 일입니다.

낡은 옷을 벗는 행위는 자신의 지난 죄와 허물을 깨닫는 일, 회개하는
일, 새로 태어나는 일입니다. 거듭남은 위로부터의 새로운 탄생으로,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니라 주님 십자가에 의한 새로운 탄생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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