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3일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2-03 04:48:23    조회 : 217회    댓글: 0

▣ 2019년 가해 12월3일 [(백)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제1독서 이사야서 11,1-10
복음 루카 10,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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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대림 제1주간 화요일


2019년 가해 12월3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교구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교구의 소식을 알 수 있습니다. 인터넷이
주는 장점입니다. 각종 공문을 확인할 수 있고, 교구장님의 사목
방침을 알 수 있습니다. 성직자 사진첩을 검색하면 교구 사제들의 현재
임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소속은 ‘가톨릭 평화신문 미주 지사’로
돼 있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경력 사항이 있었습니다. 검색하니,
28년 동안 제가 있었던 장소와 제가 맡았던 사목을 볼 수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오직 감사할 뿐입니다.
 

하느님 나라에도 홈페이지가 있다면 우리 모두의 삶의 순간과 행동을
검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선행과 우리의 희생을 검색할 수
있을 겁니다. 절망과 좌절의 순간에 함께 했던 따뜻한 이웃의 모습도
볼 수 있을 겁니다. 다시 보면 감사할 일, 고마운 일, 행복한 순간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끄러운 모습도 검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어려운 이가 내미는 손을 외면했던 순간, 남의 성공을
축하하기보다는 시기했던 순간, 불같은 성격을 참지 못하고 이웃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순간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위안이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신 분이시고,
우리에게는 고백성사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은 잊지
않고 기억하십니다. 우리의 허물과 우리의 잘못은 우리가 뉘우치고,
회개하면 모두 용서해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뉘우치고, 고백성사를
보면 하느님 나라 홈페이지에서 우리의 허물과 잘못은 삭제될 겁니다.
이것이 오늘 제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꿈꾸는 세상입니다. 우리의
선행과 희생은 기억되고, 우리의 허물과 잘못은 지워지는 세상입니다.
사막에 샘이 넘쳐나는 세상입니다. 늑대와 어린양이 함께 노는
세상입니다. 어린아이와 사자가 함께 춤추는 세상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예수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즐거워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하셨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입니까?” 율법 학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의 대답을 들으시고 즐거워하신 것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차, 더 좋은 것들을
얻으려고 공부를 합니다. 출세와 성공이 삶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책을 자주 읽고, 나는 누구인지를
고민하고,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며, 가진 것을 기쁜 마음으로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밤하늘은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이 세상은
그런 사람들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나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얻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해하기 때문에
이해받을 수 있고, 용서하기에 용서받을 수 있고, 사랑하기에 사랑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하나 되어, 전능하신 천주 성부에게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것이 참된 기쁨입니다. 그런 세상은 분명 있었습니다.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세상이기도 합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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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가해 12월3일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복음: 루카 10,21-24: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제자들의 전도사업의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 역시 기쁨으로 찬가를
부르신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21절). 


안다는 사람들과 똑똑하다는 사람들이란 이방의 현인이라고 하는
사람들과 점성사들, 그리고 이스라엘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말한다. 그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즉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조상들로부터 전승을 물려받은데
반해 예수님은 하느님께 모든 계시를 전해 받으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아드님만이 서로를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이미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마태 13,16-17)
라고 하신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과는 다르다. 그분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이것이 복음서의
중심 사상이며 예수님의 본 모습이다. 스승님은 우리를 ‘철부지들’
이라고 하신다. 이것은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우리가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을 배척하여 죽음으로 몰고
갔다. 얄팍한 지식으로 신앙을 논하며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신앙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도 못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태양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등불을 가지고 그냥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그 빛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흠숭과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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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똑똑한 사람들은 악마와 거래한다.


2019년 가해 12일3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똑똑한 사람들은 악마와 거래한다.>


복음: 마태오 10,21-24


1939년 8월 러시아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와
비밀조약을 맺습니다. 이 조약의 핵심은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
러시아는 폴란드의 등에 칼을 꽂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는 핀란드 침략 실패로 심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강력해진 독일과 협력하면 굳이 독일과도 싸울 필요가 없고
협력하여 얻은 소득도 챙길 수 있을 것이라 믿었습니다. 히틀러도
제2차 세계대전을 시작할 힘을 얻는 조약이어서 좋았고, 또 전쟁을 할
때 동쪽과 서쪽의 두 개 전선을 다 신경 쓸 필요가 없어졌기에 스탈린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히틀러의 계략은 러시아까지 집어삼키는 것이었습니다. 이
조약을 맺은 2년 뒤 히틀러는 러시아를 침공했고 수천만 명의
러시아인들이 목숨을 빼앗았습니다. 러시아 국민 중 절반은 나치
점령에 고통 받았으며, 러시아의 제조업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습니다.
스탈린이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악마와 거래한 끔찍한 대가였습니다.
 

세상은 자신의 이익을 먼저 챙기고 경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것이
현명한 삶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자기의 이익을 위하는 똑똑한
사람들은 악마와 거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타인에게 피해를 입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마는 결코
끝까지 그 사람의 편이 되어주지 않습니다. 한 사람에게 피해를
입혔다면 그 다음엔 자신과 계약을 맺은 사람을 잡아먹습니다. 악마와
계약을 맺는다면 남는 것은 이웃은 물론이요 자기멸망뿐입니다.
악마는 ‘너 자신의 이익을 우선 생각하라.’고 속삭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라고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철부지는 자신의 이익을 챙길 줄 모르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철부지 어린이가 부모의 유산을 먼저 챙기려 하겠습니까? 철부지는
철부지라 욕심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 이전 내용은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고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하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철부지들’은 복음을 전파하고 돌아온
당신 제자들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전한
‘복음’이 철부지들에게 드러내 보이시는 ‘이것’입니다. 복음은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의 표징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바로 다음 내용은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착한
사마리아인만이 강도만나 쓰러져있는 사람을 도와줍니다. 그러나
사제와 레위인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사제와 레위인은 자신을 먼저
생각하라는 사탄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고 착한 사마리아인은 비록
종교생활을 하고 있지 않을 지라도 복음을 믿는 철부지 어린이인
것입니다.  


어머니와 아이가 쇼핑을 하고 있는데 때마침 휠체어를 탄 청년과
맞닥뜨렸습니다. 그는 두 다리가 없고 얼굴도 심한 화상을 입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청년을 가리키며 큰소리로 말했습니다.


"엄마, 저 사람 좀 봐."


어머니는 아이에게 장애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흉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그 청년에게
다가서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와, 정말 멋진 모자네요."  

 

철부지 아이들이 보는 것은 다릅니다. 다른 사람을 통해 자신을
부유하게 하거나 높이지 않습니다. 오직 똑똑한 어른들만이 그렇게
합니다. 철부지들은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상대의 행복을 먼저 봅니다.


자신을 먼저 챙기는 사람은 사탄과 계약을 맺은 사람이고 이웃의
행복을 먼저 챙기는 사람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입니다. 세상은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사람들을 철부지라 부릅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영혼구원을 위해 복음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똑똑한
악마가 될 것인지, 철부지 하느님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 합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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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2019년 가해 12일3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축구 경기를 즐겨보는 편입니다. 매 게임 골을 넣어 팀을 승리로
이끄는 최전방 공격수들보다도 멋져 보이지만, 요즘 와서는 중원에서
허리 역할을 하며 경기 전체를 조율하는 미드필더들에게도 눈길이
갑니다. 수비 때는 압박의 중심에 서고, 공격 때는 기가 막힌 킬 패스
한방으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습니다.


바오로 사도가 초기 교회 건설을 위한 불같은 열정의 선교사요 최전방
공격수였다면,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교회 역사의 허리 부분을 견고케 한 활화산같은 선교사, 멋진
미드필더였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을 두고 칭송이
대단합니다. 그분 이름 앞에 붙는 수식어만 해도 여러가지입니다.
‘선교의 수호자’, ‘사도 바오로에 버금가는 위대한 선교사’,
‘인도의 사도’, ‘일본의 사도’ 등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을 기억할 때마다 우선 드는 느낌은
‘경이로움’입니다. 500여년전 대양을 건너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선박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 극동지방까지 다섯 달 이상 걸리던
목숨을 건 선교여행을 수도 없이 계속하셨습니다.


1506년 스페인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1537년
베네치아에서 사제서품을 받습니다. 1541년 포르투갈 국왕의 요청으로
인도 선교사로 출발합니다. 13개월 만에 인도령 고아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1545년에는 말라카로 갔고, 1546년에는 뉴기니아에 인접한 몰루카스와
모로타이 지방으로 갔습니다. 다시 말라카로 돌아온 그는 한 일본인을
만나 일본에 대한 상황을 소개받고 1549년 일본으로 출발하게 됩니다.
각고의 어려움을 겪으며 2년 반 동안 일본에서 선교하던 그는 또 다른
나라 중국으로 건너갑니다. 그곳에서 선교하다 중병에 걸려 이역만리
낫선 땅에서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은 가는 곳마다 그곳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며 그들의 초라한 음식을 그들과 똑같이
나누어먹었습니다. 그들의 누추한 잠자리 바로 그 옆에 머리를
눕혔습니다. 그는 선교지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가장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 버림받고 병든 사람들, 특히 한센씨 병 환자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척박한 선교지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 자신의 장상인 이냐시오 로욜라 신부님에게 보낸 서간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열정적으로 살았는지를잘 알 수있습니다.


“여기에 온 후 저는 쉴 틈이 없습니다. 이 마을 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아직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모두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아이들이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자주 졸라서
성무일도를 드리거나 식사하거나 휴식할 시간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께서는 선교활동에 미온적인 오늘
우리에게 큰 자극이 되는 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여러분들의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국의 영광에
들어가지 못하고 지옥으로 떨어지고 있는지 모릅니다. 만일 이 광대한
하느님의 포도밭에서 저와 함께 복음을 전할 뜻이 있는 분이 있다면,
결단코 저는 그분들의 노예가 되어 섬길 것을 약속합니다.”
 

그의 전도 여행길은 바오로 사도의 전도여행길 못지않았습니다.
변변한 이동 수단도 없는 시절, 그는 12년 동안, 8만킬로의 거리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밤이면 밤마다 어김없이 성체 앞에 홀로
머물며 침묵 속에 기도했습니다. 그가 개종시킨 사람들의 숫자는
1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합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의 한 평생에 걸친 목숨 건 봉헌에
진심으로 감사드립시다. 그분의 모범을 따라 오늘도 세상의 끝에서
자신과는 전혀 관계없는 이방인들을 위해 이마에 땀을 흘리고 있는
우리 선교사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정성어린 기도로써, 성의 있는
나눔으로써 그들의 선교 사업에 함께 참여하길 바랍니다.


그분들의 노고와 헌신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겪는 고통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 겪는 일상적인 고통이나 십자가들,
그들을 위한 희생이라 생각하고 관대하게 견뎌내길 바랍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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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AD BC 중심점이신 예수님께 모여요.


2019년 가해 12월3일 성 프라치스코 하비에르 사제 기념일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 10,22~24)”


예수님은 하느님 아버지의 말씀이 뜻이 생각이 육화되신 인간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은 따로 논할 여지가 없으신 일체이신 하느님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길 바랍니다.


재물 권력을 아버지로 모시고 그 힘이 빛나길 바라는 사람 많습니다.
3대 김 독재자를 수령님이라며 그 힘이 빛나라는 좌빨이 있는가하면,
그 외에 자기중심으로 자기만이 최고라 착각하는 독선자도 있습니다.


정신없이 인생을 휘젓지들 마시고 BC AD 중심점 예수님께 모입시다.
주민등록이 예수탄생에 입각해 기록된 사실 무시하면 세상 갈데없죠.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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