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2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2-12 06:30:01    조회 : 201회    댓글: 0

▣ 2019년 가해 12월12일 [(자)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제1독서 이사야서 41,13-20
복음 마태오 복음 11,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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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대림 제2주간 목요일


2019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신문사를 찾아온 자매님과 이야길 나누었습니다. 36년 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다고 합니다. 눈에 염증이 생겼는데 치료를 제때 하지 못해서
한쪽 눈이 실명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답답했다고 합니다. 의사를 원망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가족들에게
서운한 마음도 있었다고 합니다. 본당에 피정이 있어서 참석했고,
강의를 들었다고 합니다. 강의를 들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한쪽 눈이 보이지 않으니 옆을 볼 수 있었고, 뒤를 돌아볼 수 있었고,
하느님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남은 시간 성지순례를 다니고,
봉사하면서 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어려운 이를 위해서 써 달라고
감사헌금도 주고 가셨습니다. 비록 한쪽 눈은 실명되었지만, 하느님께
감사드린다고 하였습니다. 


예전에 읽은 글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발로
차고, 화를 낸다고 합니다. 돌부리를 발로 차니 더 아프고, 화를 내니
부주의했던 자신이 한심해 보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넘어지게 한
돌부리를 파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합니다. 길을 평평하게 만들어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돌을 치우니 운동도 되고, 다른
사람이 넘어지지 않도록 했으니 보람이 있습니다. 같은 상황이지만
받아들이는 마음에 따라서 결과는 다르게 됩니다. 저도 크게 넘어진
적이 있습니다. 28년 전입니다. 유행성 출혈열로 중환자실에 보름간
있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치료가 있었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기도해 주셨고, 어머니께서 곁에 있었습니다. 다행히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남은 시간 하느님께서 덤으로 주셨다고 생각하니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있습니다. 전쟁과 폭력으로
난민이 생기고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으로 피어나지 못한 생명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생태계의 파괴로 더불어 살아야 할 생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철책과 장벽으로 가로막혀 형제들이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이
있습니다. 욕망은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갈증이 나기 마련입니다.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카인이 아벨을
죽인 건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건 시기와
질투 때문입니다. 교만과 열등감이 있습니다. 이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교만은 타인의 소중함을 보지 않습니다. 열등감은 자신의
소중함을 보지 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하늘나라에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었어도, 아무리 특출한
능력을 지녔어도, 아무리 멋진 외모를 지녔어도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저도, 저의 외모와 능력에 대해서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지금보다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참을성이 더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힘도 더 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고,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지금 저의
모습으로 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지금 저의 모습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저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북미주에는 120여 개의 한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공동체를 생각하는
기준을 보면 외형적인 크기나 숫자를 사용하곤 합니다. 땅은 얼마나
큰가, 성당은 또 얼마나 큰가, 신자 수는 몇 명인가, 보좌 신부님은
있는가, 수녀님은 있는가! 또 나누는 기준이 있습니다. 단체들은 다
있는가, 헌금은 얼마나 나오는가! 사실 이런 것은 하늘나라에서는
그렇게 큰 기준의 근거는 아닐 것입니다.  


신앙 안에서 살면서, 천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면서, 우리는
세상의 기준과 세상의 잣대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외적인 모습, 숫자, 성공 등으로 판단을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판단해야 하는 기준은 세상의 것과는 달라야 합니다. 그것은 얼마나
사랑했는지, 얼마나 봉사했는지, 얼마나 겸손했는지, 얼마나
나누었는지를 가지고 판단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 주님이 너의 하느님,
내가 네 오른손을 붙잡아 주고 있다. 나는 너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를 도와주리라. 주님의 말씀이다.” 생각을 바꾸고 마음의
문을 열면 됩니다. 생각을 바꾸면 행동이 바뀝니다. 우리는 그걸
‘회개’라고 부릅니다. 마음의 문을 열면 하느님께서 함께하십니다.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고, 하느님의 의로움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걸 ‘신앙’이라고 부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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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대림 제2주간 목요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 11,11-15: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신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11절) 그리고
예수께서는 구원사에서 세례자 요한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고
말씀하신다. 즉 구약에 예언된 엘리야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라고
선언하신다. 구세주의 길을 준비하는 위치란 다시 있을 수 없는
위치이며 요한에게 주어진 특권이기도 하다.


세례자 요한은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인물일 것이다.
요한은 어머니 태 안에서 성령을 충만히 받아 “뛰놀았으며”
(루카 1,41), 그의 어머니 또한 성령을 받아 예언을 하였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11절)고 하신다.
즉 성령이 충만한 곳에서는 성령을 아주 조금 나누어 받은 사람이라도
죽음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즉 하느님과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하늘 나라를 아직 기대하며
싸움터에 있는 이보다 더 크다는 것이다. 승리의 관을 받은 것과 아직
군대에 몸담고 싸우는 중인 것은 다르다. 하늘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가장 나중에 성인이 된 사람도 여전히 지상에서 하늘 나라를 희망하며
사는 가장 훌륭한 이보다 더 크다는 말이다.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12절) 하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세례자 요한을 믿지 않았으며,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들도 하찮게 여겼다. 그분의 백성들은 그분을 비난하고, 그분의
적들은 그분을 감싸 주었다. 자녀가 되는 권한이 상속으로 주어졌지만,
가족이 그것을 거부하였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유언을 받들기를
거부하고, 집안의 종들이 그것을 받았다. 이것이 폭행을 당했다는
말이다.


성조들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고, 예언자들이 예고하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영광이 이제 믿음으로 다른 민족들에게 넘어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이 완전한 말씀께서 율법 아래에서 자유를 기다리던 이를
따뜻이 맞아들여 그에게 아버지의 상속을 주신다면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13절)는 말이 맞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엘리야라 하셨다. 그가 엘리야의 힘과 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브리엘 천사도 요한에 대해 같은 말을 했다.
“그는 또 엘리야의 영과 힘을 지니고 그분보다 먼저 와서”
(루카 1,17)라는 말은, 요한이 비록 사람의 모습이서는 엘리야와
달랐지만 바로 엘리야임을 알려준다.


예수님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음에도 그렇게 어려웠다면,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에 앞서 그 길을 마련하러 왔고, 그 사명을 다하였으며, 예수께서
사랑과 봉사로 하늘 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우리의 자세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우리의 자세는 사랑과 봉사의 원리에서 길을 발견하는
것이어야 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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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나에게 폭력을 쓰지 않으면 남에게 쓰게 된다.


2019년 가해 12일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나에게 폭력을 쓰지 않으면 남에게 쓰게 된다.>
복음: 마태오11,11-15


인도 영화 ‘당갈’(2016)은 한 때 인도의 레슬링 전국 챔피언이었던
아빠가 두 딸을 레슬링 선수로 키운 이야기를 그렸습니다. 아들을 낳아
세계적인 레슬링 선수를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는 그만 줄줄이 딸 넷을
낫게 됩니다. 아버지는 첫째와 둘째 딸에게 레슬링을 가르치고
싶었지만 여성이 레슬링을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사회 분위기상
공식적인 레슬링교육을 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딸들이 14살이면
팔려가듯 시집을 가야하는 인도 여인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합니다. 아버지는 논 위에 모래사장을 만들고 딸에게
직접 레슬링 훈련을 시킵니다. 머리가 길면 모래가 모리에 박히기
때문에 삭발까지 시켰습니다.
 

첫째 딸 기타는 실력이 매우 뛰어나서 몇 년 뒤 전국대회 우승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올림픽 대표팀에 들어가 국립체육학교에서 훈련을
받아야했던 기타는 새로운 코치의 말에 따라 그동안 배운 것들을
모조리 버립니다. 그리고 그 새롭게 배운 기술들로 아버지까지
이겨버립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구식 기술을 비웃고 지금까지 자신을
혹독하게 훈련시킨 것에 대해 원망합니다. 머리도 기르고 화장도 하고
세속에 물들어갑니다. 물론 세계대회에서 기타는 매번 예선탈락을
합니다.
 

패배의 쓰라림에 고통스러워하며 기타는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하고 초심으로 돌아갑니다. 머리를 다시 삭발하고
아버지식대로 자신을 혹독하게 다룹니다. 그리고 아버지 가르침에 따라
방어가 아닌 공격위주로 경기를 합니다. 그리고 승리를 이어갑니다.
이에 코치는 분노합니다. 기타가 모든 공을 아버지에게 돌렸기
때문입니다.
  

기타는 2010 영연방 경기대회 55kg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동생
바비타는 51kg에서 은메달을 획득합니다. 인도 역사상 국제대회에서
여성이 메달을 획득한 것은 그들이 처음이었습니다. 이후 두 자매는
국제대회에서 총 29개의 메달을 따며 인도 여성도 하면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심어주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아버지는 딸에게 혹독한 훈련을 시켰습니다. 이에 딸도 더 이상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방법으로 아버지에게 폭력을
가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그동안 수고한
아버지에 대한 배신입니다. 그렇게 자신을 믿고 자신에게 잘해줬음에도
진정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사랑을
폭력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딸은 나중에서야 아버지가 자신에게 가한 폭력이 좋은 것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더 혹독하게 대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에게 보답하는 길이고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길이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지 않으면 하느님과
이웃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됩니다. 오직 자신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만이 세상에 유익을 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늘나라는 당신 자신을
가리킵니다. 하늘나라는 하느님께서 주인이신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하늘나라가 어디 있는지 알려주는 표지판이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어린양만이 우리의 행복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세례자 요한만이 하느님 나라를 알아볼 수 있었으니
예수님께서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너무나 혹독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낮엔 뜨겁고 밤엔 추운
곳에서 생활하며 짐승의 가죽을 입고 메뚜기와 들꿀로 허기를
채웠습니다. 옷을 지어입거나 곡식을 경작하지 않은 극기의 삶을
살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좋은 옷을 입고 좋은 집에서 좋은 음식을 맛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가르침을 버렸기 때문에 그 파견한 분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 폭력을 가하려면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새로운 요한인
교회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폭력의 결말은 결코 좋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가르치는 것이 비록 극기의 삶이고 자신을 죽이는
삶일지라도 그 가르침을 따르는 길이 하늘나라에 당도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십자가 외에는 영광의 길이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분야에서든 자수성가했다는 사람들은 다 자신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람입니다. 독일의 철학자 칸트는 항상 5시에 일어나고
7시에서 9시까지 강의를 하고 이후 12시 45분까지는 집필활동을
하였습니다. 하루 한 끼의 식사를 했는데 정확히 오후 1시에 의사나
상인 등을 초청해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3시 30분에 산책을 하며 다리를 건넜는데 사람들은 칸트가 다리를
건널 때 시계를 맞출 정도였습니다. 산책 후 다시 연구에 몰두하다 밤
10면 정확하게 침대에 누워 하루를 마감하였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삶이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라며 자신을 혹독하게
다루는 칸트를 어리석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는 모든
사람들을 비웃는 꼴이 됩니다. 자신을 사랑해야 하는데 왜 폭행을
가하느냐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분명 자신을 만족시키기 위해
누군가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나에게 폭력을 가해
하느님과 이웃을 만족시킬 수 있을 때 십자가에 자신을 죽이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행복과 영광을 함께 누리게 됩니다. 나는 누구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있습니까?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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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낡은 옷은 훌훌 벗어버리고 구원의 빛나는 갑옷으로
갈아 입어야겠습니다!


2019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낡은 옷은 훌훌 벗어버리고 구원의 빛나는 갑옷으로
갈아입어야겠습니다!


예수님 시대 당시 사람들은 무척이나 궁금해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대체 누구인가? 또 후발주자인 예수님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세상 사람들의 궁금증 앞에 세례자 요한은 이미 자신의 신원에 대해서
명확히 선을 그었습니다. 단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명쾌하게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분은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묶을 자격조차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그저 그분이 오실 길을
미리 닦는 선구자에 불과합니다. 그분은 주인이시고 나는 종입니다.
그분은 주인공이시고 나는 조연입니다.”


이윽고 예수님께서 구세사의 전면에 등장하시자 세례자 요한은
기다렸다는듯이 손가락으로 정확하게 그분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여러분들이 그토록 고대하던 분, 그분이 저기 오십니다.
하느님의 어린 양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분이십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내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부터는 저분을
따라가십시오. 저분의 가르침을 따르고 저분의 제자가 되십시오.”


참으로 쿨하고 쌈박하면서도 지극히 겸손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오실 길을 완벽하게 닦았으며, 마지막으로 멋진 레드카페까지
쫙 깔아놓은 세례자 요한은, 때가 되었음을 알아차리자, 단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구세사의 무대 뒤로 홀연히 사라져버린 것입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예수님의 증언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오 복음 11장 11절)


언뜻 들으면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을 극찬하는 것 같은데, 또 동시에
그를 깎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살짝 세례자 요한을 디스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절대로 그런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구약시대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고,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강조하시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와 신약시대를 연결한 사람입니다.
그는 역사 안에서 과도기적인 인물로 반은 어둠 속에, 반은 빛속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새시대가 도래했으니 그의 역할은 끝났음을
알리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활짝 여신 새시대 사람들은 그분의 빛과 사랑에 힘입어
새사람, 위대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이 시대
사람들은 그분의 은총과 축복속에 있으며, 구원된 사람으로서 구시대
사람들보다 훨씬 높은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등장으로 인해 이제 예언의 시대는 가고, 완성의 시대, 구원의
시대가 도래했습니다. 이제 우리도 새시대 사람으로서 그에 걸맞는
삶을 계획하고 실천해야겠습니다. 낡은 옷은 훌훌 벗어버리고 구원의
빛나는 갑옷으로 갈아입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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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예수님을 절정으로 인생 길안내 끝

2019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

예수님을 절정으로 인생 길안내 끝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모든 예언서와 율법은 요한에 이르기까지 예언하였다. 너희가 그것을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요한이 바로 오기로 되어 있는 엘리야다.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태오 11,11~15)”

세례자 요한보다 인류사에 더 큰 인물 없다고 예수님 선언 하셨습니다.
덧붙여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요한보다는 더 크다 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는 세상의 큰 인물 큰 권력자들 자리는 없다는 뜻일 겁니다.

우리는 눈 있어 이 성구를 보면서도 이 세상에서 최고인물 되려합니다.
하늘과 세상 위치를 뒤바꿔놓고 세상위해 온 정열 다 쓰는 인생입니다.
도리어 하늘을 박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만 가는 세상실정이란 것입니다,

하늘 예언은 요한에서 끝났고 예수님을 절정으로 인생길안내 끝입니다.
세상중심의 헛길 가는 인생들 눈이 있으면 보고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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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다|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9년 가해 12월12일 대림 제2주간 목요일(마태11,11-15)


우리는 참으로 위대하다.


세례자 요한을 구약시대의 마지막 인물로 얘기합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입니다. 주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 보다 더 큰 인물은 없었다”(마태11,11)고
선언하였습니다. 당대의 어느 누구 보다도 뛰어난 사람, 과거에 있었던
수많은 하느님의 사람보다 더 뛰어난 인물로 요한을 칭찬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 이라도 그보다 더
크다”(마태11,11).하십니다.
 

이 말씀은 결국 요한은 이미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하며 새로운 시대를
살기 시작하였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새 시대가 성취되고 완성되어
거기에 속한 사람은 은총 속에 구원된다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은 신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도,
구약의 어떠한 위대한 예언자보다 더 높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가 그만큼 크다는 말씀입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이
구약의 위대한 예언자보다도 더 크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다
주님의 덕분입니다. 주님께 감사드릴 뿐입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구원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세아가 오실 것을 예언하면서 이미 미래를 준비한
인물이기에 구약의 마지막 인물이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인물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 때부터 지금까지 하늘 나라는 폭행을
당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들이 하늘 나라를 빼앗으려고 한다”
(마태11,12) 하신 것을 보면 세례자 요한 때부터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현존하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은 진리를 외치다가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목이
베어졌습니다. 폭행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마귀들의
힘을 빌어 일한다고 비난 받기도 하였으며 사람들은 언덕 위에서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하였으며 적대자들의 공격을 받아야 했습니다. 요한과
예수님께서 하느님나라의 도래를 선포하였으나 결국은 처참한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실들이 하느님 나라가 폭행을 당한
모습입니다.


유혹사화를 보면 사탄은 모든 것을 노립니다. 빵으로, 명예로,
부귀영화를 주겠다는 정치적인 유혹으로 적대자들의 뒤에 숨어서
하느님의 통치권을 빼앗으려 하며 그 자리에 자신의 권력을 구축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어둠의 세력은 오늘도 여전히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함을
우습게 여기고 성을 상품화하며 물질만능주의의 노예가 되도록 만드는
세상입니다. 진리를 추구하기보다는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거짓을
합리화하는 권력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불의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술과 도박 때문에 패가망신을 하고 권력에
집착하다가 제 명대로 못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정말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하는 세상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빛이 되어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의 유혹에 결코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폭력의 힘이 크다
하더라도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하게 대답함으로써 하늘나라를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십시오! 주님께서“너희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요한15,5)하셨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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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12월 12일(목) - 떠들게 하는 독주


오늘은 ‘떠들게 하는 독주’라는 내용으로 은혜의 시간이 되겠습니다.


잠언서 20장 1절 말씀에 “포도주는 거만하게 하는 것이요, 독주는
떠들게 하는 것이라 이에 미혹되는 자마다 지혜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가까이에서 아는 몇몇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평소에는 참
조용합니다. 말이 없고 점잖습니다. 그런데 술만 들어가면 그 사람이
평소 때 하지 못한 말을 다 쏟아냅니다.


그러다보니 거만한 자가 됩니다. 떠드는 자가됩니다. 얼마나 실수를
많이 하는지 지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또 중국에서 가까이에 사는
한 성도는 얼굴도 잘생기고 중국말도 잘하고 예의도 바르고 목소리도
좋고 집안에 돈도 많고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단점은 술만 먹으면 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말
안할 말 마구 쏟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일차로 끝나지 아니하고 일차,
이차, 삼차, 사차까지 가서 인사불성이 돼서 얼굴을 갈아야 끝이
납니다.


잔치 때 술 한 두 잔 하는 것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참
아이러니하게도 그 한두 잔으로 끝나지 않고 그 다음잔, 그 다음잔, 두 '
잔, 석 잔으로 건너갈 때부터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분위기를 띄우는 사람이지 분위기를 흩트리는 성도
결코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할렐루야!


- 인천 부평 사랑밭 교회 권태일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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