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5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9-12-15 06:00:20    조회 : 261회    댓글: 2

▣ 2019년 가해 12월15일 [(자) 대림 제3주일 (자선 주일)]


제1독서 이사야서 35,1-6ㄴ.10
제2독서 야고보서 5,7-10
복음 마태오 복음 1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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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대림 제3주일


2019년 가해 12월15일 대림 제2주일


1999년 10월에 저는 8년간의 보좌신부를 마치고 본당신부가
되었습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작은 성당이었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몰랐는데 본당신부가 되니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평일미사에는
10명 정도 참석했고, 주일미사에는 100여명 정도 참석했습니다.
주일헌금이 20만 원 정도 나왔습니다. 가난한 흥부의 집에는 자식까지
많았다고 하듯이, 본당에는 공소도 있었습니다. 겨울은 길었고, 눈도
많이 내렸습니다. 그러나 3년 동안 있으면서 재정적인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천사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양봉하는 교우에게 꿀을 얻어서
몇몇 선배 신부에게 찾아갔습니다. 꿀단지를 드리니, 웃으면서 뭘
도와주면 좋겠냐고 물었습니다. 큰 도움은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다만 매월 조금씩 도와주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신부님들은 매월
도움을 주겠다고 하였고, 3년 동안 본당 운영에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되로 주었는데 말로 받는 다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25인승 버스가 필요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께서 지구사제회의를
본당에서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회의를 준비했고,
맛있는 점심을 대접했습니다. 지구장 신부님께서 점심 값을 내면
좋겠다고 하면서 회의에 참석한 신부님들에게 종이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각자 점심 값을 종이에 적으라고 하였고, 지구장 신부님은
5백만 원을 적겠다고 하였습니다. 점심 값으로 25인승 버스를
마련하였고, 남는 점심 값으로 옆 본당을 도와주었습니다. 


성당 마당은 넓었고, 학생들이 머물 수 있는 숙소도 있었습니다. 서울에서
청년들이 농촌 봉사활동을 오기도 했고, 중고등부 학생들이 캠프를
오기도 했습니다. 도움을 많이 받았기에 비용은 받지 않았습니다.
학생들은 신자들이 몰고 온 트럭을 타고 오이, 인삼, 포도밭으로
갔습니다. 학생들은 트럭 타는 걸 참 좋아했습니다. 오후에는 강가에서
수박을 먹고 물놀이를 했습니다. 돈을 받지 않았지만 신부님들은
넉넉하게 후원금을 주고 가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살면
주님께서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와 분수를 모르고 거친 세상과 다투려는 사람입니다. 말의
의미처럼 작은 사마귀가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고 수레 앞에서 싸우려는
것과 같습니다. 떡줄 사람은 생각도 하지 않는데 김칫국 먼저 먹는
사람도 이와 비슷합니다. 계란으로 바위를 깨려는 사람을 말하기도
합니다. ‘당랑거철’의 고사는 결국 수레를 모는 사람이 사마귀를 피해서
갔다고 이야기 합니다. 사마귀의 용기를 가상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은 어쩌면 무모한 것처럼 보이는
‘당랑거철’이 있기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광야에서 회개의 세례를 외친 세례자 요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예수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 모진 박해를 견디면서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들은 모두 거대한 권력에 맞섰던 작은 촛불과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분들의 외침이 있었기에 우리는 재물, 권력, 명예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나눔, 희생, 사랑이라는 새로운 ‘틀’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영원한 생명을 꿈 꿀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주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또한 참고 기다리며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남을 탓하고 심판하지 말라고 이야기합니다. 고난을
참고 이겨낸 사람들의 본보기로서 하느님께서 보내 주신 예언자들을
생각하라고 이야기합니다.” 


모든 것을 털어내고 겨울을 준비하는 나무를 봅니다. 앙상한 가지만
남았습니다. 푸른 잎들은 모두 떨어져 버렸습니다. 만일 나뭇잎들이
떨어지지 않고 가지에 붙어있다면 나무는 긴 겨울을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나무들은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생존의 지혜를 터득한
것입니다. 긴 겨울을 견딘 나무는 봄이 오면 새로운 잎이 생기고,
여름에 뜨거운 태양을 마음껏 받아들여 열매를 맺고, 나이테 하나를
더 만들어 냅니다. 


오늘 대림 제 3주일은 자선주일입니다. 자선은 베푸는 것이 아닙니다.
자선은 신앙인이라면 꼭 해야 하는 의무입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가진
사람만의 몫이 아닙니다. 나누는 것은 많이 배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구원은 특정한 사람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사람만이 나눌 수 있고,
그 안에서 기쁨을 얻을 수 있고 그런 사람만이 우리에게 구세주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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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대림 제3주일: 가해 - 자선주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19년 가해 12월15일 대림 제3주일: 가해: 기쁨 주일


대림 제3주일에는 성탄이 그 찬란한 빛으로 우리를 감싸기 시작한다.
그래서 전례는 전체적으로 기쁨에 들떠있다. 그 기쁨은 하느님과
그분의 구원이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용기를
내어라. 무서워하지 말아라...하느님께서 너희를 구원하러 오신다.”
(이사 35,4). 이 기쁨은 피상적인 단순히 감정적인 기쁨이 아니다.
우리의 존재 깊숙한 곳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이다. 그 기쁨의 동기가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나러 오시고 악과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에 의해 ‘구원되었음’을 깨달음에서
비롯되는 ‘기쁨’이다. 그러므로 그 기쁨은 내가 획득한 기쁨이 아니라,
베풀어진 기쁨이며, 구원의 ‘열매’요 ‘징표’가 되는 ‘기쁨’이다.


제1독서: 이사 35,1-6a.10: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적에 의해 폐허가 되어 승냥이만 살고 있는
성도 예루살렘이 옛 빛을 완전히 되찾아 재건됨을 알리고 있다. 그
도시는 유배지에서 사람들이 되돌아옴으로써 활기를 되찾는다.
하느님의 구원은 모든 피조물에게 ‘환희’와 ‘기쁨’을 준다. 유배지로부터
‘해방된 이들’(10절)만이 아니라, 변화되고 있는 모든 피조물이
포함되고 있다.


이사야는 ‘기쁨’을 창출해내는 ‘구원’의 개념을 좀 더 형상화하기
위해 장님이 보고, 귀머거리가 듣고, 벙어리가 말을 한다고 한다.
“그 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6절). 이것은 구원이라는 것은 인간 전체가 대상이라는
것이다. 병이라는 것은 인간의 전 신체와 지체 사이에 구조적 관계적
불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불균형을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이
예수께서 하신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균형을 맞추어주는 것은
구원의 표지이며, 그를 체험한 사람들은 얼마나 큰 놀라움과 기쁨을
체험하였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다.


복음: 마태 11,2-11: 너희가 듣고 본 대로 요한에게 가서 알려라


이 예언의 말씀의 ‘기쁨’이 복음에서 다시 조명되고 있다. 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이 예수께서 ‘오시기로 되어있는’ 분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는 내용이다. 놀라운 것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아마 요한은 예수가 아직은 종말에 오실
심판자-“키를 드시고 타작마당의 곡식을 깨끗이 가려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마태 3,12)-로 분명히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 그가 생각했던 메시아 역시 강력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존재였던 것 같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우리가 바라는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또
나타나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비록 그 모습이 우리가 생각할 때에
나약하고 가치 없어 보이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런 것들이 더더욱
강하게 하느님의 능력을 드러내 보여준다.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다.
“소경이 보고 절름발이가 제대로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해지고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음 사람이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하여진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사람은 행복하다”(5-6절).


예수의 이 말씀들은 이사야서에서 몇몇 대목들(26,19; 29,18; 61,1)
과 관련이 있으며, 그 중 한 대목이 1독서에 나타난다(이사 35,5-6).
여기서 볼 때, 예수께서는 ‘심판자’로서보다도 ‘구원자’ ‘해방자’
로서의 메시아이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불의 외에도
재앙이나 불행을 온통 뒤집어쓰고 있는 듯한, 보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 즉 소경, 절름발이, 나병환자, 귀머거리, 가난한 이 그리고 죽은
이들까지 가까이 하신다. 예수님의 기적들은 권능의 행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특히 불행한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일치, 구원과 동참의
행위이다. 이러한 ‘표징’들로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이심을 잘 이해할
수 있어야 하며, 더 이상 ‘의심할’ 여지를 가지지 않게 된다.


요한의 제자들이 물러간 뒤에 예수께서는 요한에 대한 찬사를 하신다
(7-11절). 세례자 요한이 위대하다는 것은 강인한 정신력과 참회의
정신에 있다. 그는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도 아니고 나약한 사람도
아니다. 또한 그가 위대하다는 것은 그가 구약에서 출애굽기(23,20)
와 말라기 예언서(3,1)에 나타나는 메시아의 ‘선구자’라는 사실에 있다.
전자에서는 야훼께서 당신의 사자를 보내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게 하시는 내용이 있고, 후자에서는 야훼께서 사람들이
당신을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킬 사자를 당신이 오시기 전에 보내주실
것을 약속하신다. 이러한 고귀한 사명 때문에 요한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실현될 ‘하늘나라’의 일원은 아니더라도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11절)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사람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라도’ 세례자 요한보다 크다고 하신다
(11절). 그러나 그렇다고 요한의 기쁨이 감소되는 것은 아니다. 그의
사명은 신랑의 오심을 알리는 것이었고 이것이 그가 행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2독서: 야고 5,7-10: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십시오.


요한의 기쁨은 불확실성과 의구심에도 불구하고 끝내 기다림으로써
이루어지고 있다. 사실 가끔 기다림이라고 하는 것은 아무 결과도 내지
않거나 무산되기도 하고, 그 ‘표징’의 의미가 약화되기도 하고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 같이 생각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인내로운 기다림이어야 한다. 천천히
완성되어 가는 하느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한다.


이 때문에 야고보 사도는 2독서에서 농부의 개념을 들어 그리스도인의
‘인내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운명적 체념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계획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끈기 있게 협력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참 기쁨이 있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계획을 ‘가까이 접근시키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음에서 큰 기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실 구원이라는 것은, 또한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불확실한 미래의
것이다. 신앙한다는 것은 지금의 우리에게는 너무나 힘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느님 안에 진정한 평화와 기쁨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 기쁨에 대해 오늘 독서가 말하고 있는데 그 기쁨은 그냥
아무런 수고 없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항구한 인내를
가지고 자신을 이기는 삶에서, 하느님의 뜻에 협력하는 자세가 기쁨을
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 기쁨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항상
갖춰 입어야 할 옷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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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모든 것을 긍정으로 보고 싶어 할 때 빛이 보인다.


2019년 가해 12일15일 대림 제3주일


<모든 것을 긍정으로 보고 싶어 할 때 빛이 보인다.>
복음: 마태오 11,2-11


‘백만장자 시크릿’을 쓴 하브 에커의 세미나에 조지라는 한 여성
간호사가 참석했습니다. 조지는 상당히 고소득자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항상 돈이 남아나지 않았습니다.


좀 더 깊이 들어가자 그녀는 11살 때 엄마, 아빠, 언니와 함께 중국
음식점에 갔던 일을 기억해냈습니다. 그때 엄마와 아빠는 돈 문제로
심하게 싸웠고, 아빠가 벌떡 일어나 고함을 치며 붉으락푸르락 한
얼굴로 테이블을 쾅쾅 두들기더니, 어느 순간에 갑자기 심장발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녀는 학교 대표 수영선수로 훈련받던 중이어서
심폐소생술을 알고 있었고,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허사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그녀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날 이후, 조지의 마음에는 돈과 고통이 함께 엮이게 되었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는 싶었지만 돈이 아버지의 죽음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에
돈을 원망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니 돈이 그녀에게 붙어있을
리가 만무했습니다. 그녀가 간호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도 아버지를
살리지 못한 죄책감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돈의 탓도 자신의 탓도 아닙니다.  


하브 에커는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 돈을 긍정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가 긍정하는 것만 나에게 모이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은 조지는
고소득을 보장하는 수술실 간호사라는 직업을 내려놓고 재무 설계사로
직업을 변경하였습니다. 고객들에게 경제적 삶을 수월하게 해 주는
일을 선택한 것입니다.


[참조: ‘백만장자 시크릿; 제1부 생각이 미래의 부를 결정한다’, 하브
에커, 알에이치코리아]  


오늘은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목만 보아도 부정적인
생각이 들 수 있을 것입니다. 돈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분들은
‘강론에서 무슨 돈 이야기야?’라고 하실 것입니다. 돈 이야기만 나오면
무조건 종교와 맞지 않는다고 여기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나 돈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그것을 좋게도 나쁘게도 만드는 것은
나 자신의 시각입니다.  


예수님께서 돈을 싫어하셨을까요? 가난을 사랑하셨지만 돈까지
싫어하시지는 않으셨습니다. 돈을 싫어해서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가난해지신 것입니다. 돈도 하느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당신 제자
중에 가리옷 유다에게 돈을 맡겨서 관리하도록 시키셨습니다. 돈이
싫으셨다면 지니지 말았어야 합니다. 돈은 우리 몸을 흐르는 피처럼 꼭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에 대해 부정적 감정을 가집니다. 누가 돈을
싫어하겠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릴 때의 돈에 대한 안 좋은
기억들이 자신도 모르게 돈을 싫어하게 만든 것입니다. 돈도 하나의
인격체처럼 자신을 싫어하는 느낌이 들면 그 사람에게는 가지 않습니다.
마치 개를 잡아먹으려고 부르면서 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는 대로 되는 것이 원칙입니다. 어쩌면 우리들은 이렇게
쪼들리게 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브 에커가 한 가지를 깨닫고 엄청난 부자가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돈과 부자에 대한 시각의 변화였습니다.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하브 에커도 자신도 모르게 돈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는 돈이 부족할 때 성격이 변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랐습니다.  


하브 에커의 아버지는 건설업자였는데 빚을 내서 집을 지을 때에는
아버지 성격이 매우 가혹하게 변했습니다. 다 지은 건물을 팔 때는 또
천사처럼 변해서 자상하게 “용돈 줄까?”라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하브
에커는 돈 때문에 무서웠다 자상했다 급변하는 그런 아버지가
싫었습니다. 


그도 독립하여 건설업에 뛰어들었습니다. 몇 가지 다른 사업들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돈을 조금 벌었다 싶어도 시간이 지나면
금세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다시 세상 꼭대기에 앉으리라
호언장담하며 또 다른 사업에 뛰어들어 보지만 1년 뒤에는 또 다시
밑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오르락내리락하던 패턴이 근 10년간
지속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패를 잘못된 사업 선택이나 동업자나
직원, 혹은 경제상황 탓으로 돌렸습니다.  


그러나 결국 ‘백만장자 시크릿’을 알게 된 이후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저 아버지 삶의 패턴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백만장자 시크릿은 그냥 돈을 긍정하는
마음입니다. 그 새로운 빛으로 보니 돈은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돈은 어려서부터 부모가 싸우는 원인이었고 자신이
아버지와 멀어지게 한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니 돈을 탓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돈을 불러들이려고 하니 돈은 그에게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돈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돈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려고 노력했습니다.
돈과 연결된 모든 기억들을 감사로 전환했습니다. 그랬더니 돈이 더
이상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거나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닌 그저 돈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신과 이웃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감사한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시각이 바뀌자 돈이 모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의심하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당신이 “눈먼 이들을 보게 하는” 분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
빛이십니다. ‘겨울왕국 2’에서 올라프가 한 걸음도 걸을 힘이 없는
동굴에 갇힌 안나에게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 방향을
향해 한 발짝만 걸으라고 합니다. 이 역할을 세례자 요한이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과거의 안 좋은 기억에 사로잡혀 모든 것을 비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도시의 삶에서 빠져나와 광야에 서면 모든 것이 밝아
보입니다. 그러면 참으로 행복이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광야에서 보는 모든 것은 다
긍정이고 감사이기에 그리스도의 빛으로 보는 모든 것은 다 긍정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돈도 감사고 죄도 긍정적이며 미움과 멸시도 도움이
됩니다. 그런 시각을 가질 수 있는 곳이 광야입니다. 시각의 변화를
원하는 사람만이 그래서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돈은 나쁜 것이고 부자는 다 나쁜 방법으로 부자가 되었다고 믿는 것은
아직 과거의 부정적인 시각과 어둠에 사로잡혀 있는 것입니다. 먼저
과거의 기억들로부터 떠나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애벌레가
이전 습성을 버리려하지 않는다면 나비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과거의 상처 속에 머물러 고통 받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새롭게 태어나게 하시기 위해 오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내가 어둠 속에 머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빛을 만날 수 있습니다.
변화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변화시키러 오시는 분이 보입니다. 인간으로
사는 것이 지겨워야 하느님의 자녀라고 외치는 이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가난한 이들만 복음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어야 긍정의 빛으로 볼 수 있는 눈을 받게 됩니다. 광야는
지금의 삶에 지쳐서 변화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향하는 곳입니다. 모든
것을 긍정으로 보고 싶어 해야 빛이 보입니다. 나는 과거의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긍정하고 싶습니까? 그러면 빛을 만날 것입니다. 그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 수원 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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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마태 11, 3)|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19년 가해 12월15일 대림 제3주일(자선 주일).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마태 11, 3)


기다림은 실천입니다.
기쁨과 인내라는 실천의 시간입니다.
기다림은 우리의 삶을 반영합니다.
기다림도 사람을 향하고 자선도 사람을 향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향해야합니다.


메마를 이땅을 메마른 이마음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바꾸어놓는 생명의 자선입니다.
자선을 통해 무엇을 위한 우리의 삶인지를 반성하게됩니다.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실천하는 살아있는 희망의 여정입니다.
주님을 맞아들이듯 가난한 이들을 맞아들이는 복음의 삶입니다.


복음의 삶은 서로가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는 실천의 삶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믿는 것을 믿음으로 기쁘게 실천한 사람입니다.
신앙이란 메마른 광야에서 희망을 뜨겁게 만나는
하느님과 우리의 여정입니다.
하늘 나라는 하느님의 여정을 필요로합니다.


하느님께서도 끈기와 기다림의 이 길을 걸으십니다.
우리의 길은 어떠합니까?
원망과 심판의 길이 아닌 기도와 기쁨의 길이길 기도드립니다.
굳세어 지십시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서 가난하고 아파하는 우리에게 오십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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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이 시대에 요한처럼 예수님을 확신하며


2019년 가해 12월15일 대림 제3주일


이 시대에 요한처럼 예수님을 확신하며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오 11,2~6)”


요한 자리에 저를 대입시켜 생각하면 예수님이 제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저에게 시각 청각 장애자들 낫고 다리 저는 이 걷게 되었고,
죽은 자 살고 가난한 자 복음 듣고 의심 없는 자 행복해졌다 하십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확신했듯 저도 확신하며 예수님처럼 살아야 되겠지요.
그래야 저도 예수님 칭찬 요한처럼 훌륭하다고 들을 수 있지 않겠어요?
이 시대에 요한처럼 예수님을 확신하며 사는 이들이 많아져야하겠어요.


세계 가톨릭은 오늘을 자선주일로 지낸다는 것에 공감하며 감탄합니다.
인류는 지구에서 태어나 하느님가족처럼 살자는 큰 개념에 동의합시다.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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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작성자: 미리내님     작성일시:

“요한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감옥에서 전해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듣는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마태오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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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나님!
 공생공빈 밀알을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번 성탄에는
 제친구 조명희의 딸,
 강민정에게 그리고, 지금 병상에 있는 환자들에게
 예수님의 축복이 가득하길 기도합니다.
 친구딸은 요즘 보름에 한번씩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데
 넘 힘든시기를 잘 견디고 있답니다.

 안나님!
 12월이 얼마남지 않았네요.
 즐거운 성탄 되시길요~^^

작성자: 안나님     작성일시:

친구분의 따님이 잘 견디고 있다니 축복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늘 우리 곁에서 지켜주시는 든든한 지원군이시지요.
주님의 은총을 새삼 느끼면서 완쾌되기를 기도드려요.

미리내님! 기쁜 성탄 축하드리고 축복속에서 기쁨을 충만히 느끼소서.

- 김안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