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12일 주님 세례 축일

작성자 :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20-01-12 07:16:20    조회 : 207회    댓글: 0

~▣ 2020년 가해 1월12일 [(백) 주님 세례 축일]

 

제1독서 이사야서 42,1-4.6-7
제2독서 사도행전 10,34-38
복음 마태오 복음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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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주님의 세례 축일

 

2020년 가해 1월12일 주님의 세례 축일

 

직원들과 맨해튼에서 뮤지컬 ‘알라딘’을 보았습니다. 마술램프를
손으로 문지르면 램프의 요정 ‘지니’가 나옵니다. 지니는 자신을 불러낸
사람에게 3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에게 3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어떤 소원을 말하고 싶으신지요? 저는 어머니가
올해도 건강하시면 좋겠습니다. 신문사의 구독자가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올해도 모두 건강하면 좋겠습니다.
뮤지컬이 끝나고 콜택시를 기다렸습니다. 9시 30분에 오기로 한 택시가
조금 늦는다고 합니다. 10분이 지나니 춥기도 하고, 짜증이 났습니다.
콜택시는 40분이 지나서 약속장소로 왔습니다. 램프의 요정에게 소원을
하나 말하고 싶어졌습니다. 2020년에는 화나는 일이 있어도 꾹 참을
수 있도록 ‘넉넉한 마음’을 달라고 말입니다. 콜택시 회사에서
미안하다고 하면서 다음에 부르면 한번은 무료로 해 준다고 합니다.
눈 폭풍이 왔고, 교통사고도 났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40분이 아니라 40년도 기다려 주십니다. 우리가 굳이
변명하지 않아도, 우리가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어도 기다려 주십니다.
일곱 번씩 일흔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성서는
어쩌면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이야기인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돌아오기만 하면 하느님께서는 살찐 송아지를 잡으실 겁니다. 마을에
잔치를 벌여서 사람을 초대할 겁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아들이 살아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새롭게 옷을 장만해 주시고, 아들임을 상징하는
반지도 다시 주실 겁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기다려 주셨고, 먼저 사랑해
주셨습니다. 오늘의 제1 독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외치지도 않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으며 그 소리가 거리에서 들리게 하지도 않으리라.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 보지 못하는 눈을 뜨게 하고 갇힌 이들을
감옥에서,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이들을 감방에서 풀어 주기 위함이다.”
저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우리를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마음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오늘 세례자 요한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표시로 세례를 주었고, 많은 사람이 세례자 요한의 말을
들었습니다. 정의와 평화를 이야기하였습니다. 올바른 길을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세례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고, 사람들도
세례자 요한의 권위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하십니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셨기 때문에
세례의 품격은 더욱 깊고 높아졌습니다. 세례는 단순히 몸을 씻는
행위가 아닙니다. 세례는 지난날의 모든 죄를 용서받는 하느님 은총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세례는 이 세상에서의 평화를 추구하는 것을
넘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표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몸소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 살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보여주셨습니다. 섬김을 받을 자격과
권한이 있지만 섬기려는 삶을 사시려는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세례를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은 특혜를 받고 섬김을 받고 그래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의 삶은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버리지 않는 삶,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 버리지 않은 삶이었으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걸어가는
삶이었습니다. 소경들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인 이들을 풀어주고
캄캄한 영창 속에 갇혀 있는 이들을 놓아주는 삶이었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세례 받은 신앙인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첫째, 바른 인생길을 가야 합니다. 갈대가 부러졌다 하여 잘라 버리지
아니하고, 심지가 깜박거린다고 하여 등불을 꺼버리지 아니해야 하며,
성실하게 바른 인생길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소경의 눈을 열어주고,
감옥에 묶여 있는 이를 풀어주는 이가 되어야 합니다.

둘째, 오늘 세례자 요한이 보여주었던 것처럼 모든 영광과 기쁨은
하느님께로 돌리는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하느님께서는 차별 대우를 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두려워하며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면 어느 나라 사람이든지 다 받아 주시듯이,
세례를 받은 사람은 모든 이에게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의 세례 축일입니다. 세례를 통해서 변화된 삶을 살았는지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례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순히 이름이 예뻐서, 부르기 좋아서, 생일에 가까운 축일이 있어서
세례명을 정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가 세례명을 정하는 것은 이미
천국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는 성인과 성녀들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분들의 도움을 청하며 세상이라는 험난한 파도를
이겨내기 위해서 세례명을 정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나의 세례명을
한번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아직 세례를 받지 못한 분들은 죄의 용서를
받으며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를 잘 받을 수 있도록
열심히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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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예수님과 함께 인류가족입니다.

 

2020년 가해 1월12일 주님 세례 축일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려고 갈릴래아에서
요르단으로 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요한은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 하면서 그분을
말렸다. 예수님께서는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 하고 대답하셨다. 그제야
요한이 예수님의 뜻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그때 그분께 하늘이 열렸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당신 위로 내려오시는 것을 보셨다. 그리고 하늘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오 3,13~17)”

 

요한과 예수님이 나누신 대화주제는 의로움 이루자는 높은 뜻이었죠.
하느님의 가시적 표상과 소리로 공감하신 순간을 요한이 직면했고요.
하느님이 예수님을 마음에 든다며 인류에게 선포하신 장면이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은 하느님이 사랑하시는 예수님과 함께 인류가족입니다.
하느님과 예수님 또 세례로 새로 난 우리가 한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물론 개성 습성 고정관념 드러나면서 서로 다른 점도 압니다.

가톨릭의 인류가족마음 국내서만 아니라 세계 어디가나 늘 느낍니다.
인생을 깊이 생각하시는 분들은 가톨릭사상에 조용히 다가와 보세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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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주님 세례 축일|조욱현 토마스 신부 강론

 

2020년 가해 1월12일 주님 세례 축일

 

주의 세례축일은 전례개혁을 통해 빛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네 복음에
모두 일치하여 강조하는 것과 예수님의 세례와 우리의 세례 사이의
관계에 있다. 이 때문에 동방전례에서는 오늘 성세수가 축성되고
예비자들이 세례를 받는다. 주의 세례축일은 예수님의 세례의 사명을
알아들으면서 또한 우리가 받은 세례의 사명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게
해 준다.

 

복음: 마태 3,13-17: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다

 

복음에서 요한은 자신에게서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의
태도는 요한 자신의 놀라움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렇게 당신을
낮추셨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초기교회 신자들의 놀라움이기도
하다. 사실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표지였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스스로를 낮추시어 ‘죄가 없으신’(요한 8,46) 당신과 ‘죄 많은’
인간들과 일치를 이루고자 하심이었다. 또한 세례를 받으시는 행위는
‘십자가 나무 위에서’(1베드 2,24) 당신 자신의 몸을 바쳐 인간의
죄를 모두 없애기 위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는 행위와 같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라고 세례자 요한은 위엄 있게 말하였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없애시는 임무를 지금 그리고 당신의
생애 모든 순간에 수행하여 성취하신다. 그러기에 세례 드리기를
사양하는 세례자 요한에게,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15절). 이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신선하고도 철저한 충실성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러 오셨고 그분 자신이 맨 먼저 그
뜻을 생활화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못하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이렇게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뜻’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고, 따르셨기 때문에 그분의
순명이 첫 아담의 불순명의 죄로 파괴된(로마 5,19 참조) 태초의 질서를
회복시키신다.

 

이렇게 당신을 겸손되이 낮추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께서는 성령을 받으시며 아버지께로부터 ‘사랑하는 아들’(17절)
로 선포하시어 메시아로 들어 높이신다.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16절)라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며 암시적인 말이다.
‘하늘이 열렸다.’는 말은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과 땅이 다시
제 자리를 찾게 되고, 메시아이신 그분을 통하여 인간들이 다시
하느님께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그분을 활동케 하시는 성령께서 예수 안에
현존해 계시다는 사실과 예수께서 당신 자신의 메시아적 사명을
인식하고 계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분의 사명은 당시의 이스라엘이 기다리고 있던 메시아
사상과는 아주 다르다. 그것은 겸손과 고통으로 점철된 메시아
사상이다. 하늘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이러한 메시아니즘을 울리고
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17절).
이 말씀은 죄로부터 당신 백성을 해방시키기 위해 죽음에 이르기까지
메시아가 짊어지게 되는 고통과 능욕과 수치의 사명을 점진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 유명한 야훼의 종의 노래의 첫째 노래에서 취해진
것이다. 분명 메시아는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그러나 사랑과 자비를
베풀었던 그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고 멸시를 당한 후에 이루어질
것이다.

 

제1독서: 이사 42, 1-4.6-7: 여기 내 마음에 드는 나의 종이 있다

 

1독서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를 거의 전체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오늘 복음이 글자 그대로 취하고 있다. 다만, ‘종’이 ‘아들’로 바뀌었는데
70인 역에는 páis가 종도 뜻할 수 있고 아들도 뜻할 수 있다. 마태오
복음이나 다른 복음에서도 모두 ‘아들’이라고 하면서 예수와 성부
사이에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관계를 강조한다. 이사야서는 메시아가
특별히 성령을 받아 그 성령의 힘으로 인간들 사이에 정의와 평화와
해방을 심어야하는 사명을 이룰 것이라고 한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께서 겸손하게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며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폭력이나 지배의 논리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소박함과 순종 그리고 다른
형제들과의 화합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생명력과 바르게 살고자 하는
원의가 빛을 잃고 가물거린다 해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은 이
때문에 저지되어서는 안 된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그는 성실하게 공정을 펴리라.”(3절).

 

제2독서: 사도 10,34-38: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지 않으시고 모두에게 성령의
선물을 베풀어주신다. 오늘 2독서의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을 통해 축성되신 것이 바로 그분의 구원의
사명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표지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악마를 이기시고 하느님 나라를 이루실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대한 완전한 순명 그리고 형제들을 받들어 섬김으로써
이었다. 그분의 이러한 행동은 이제 ‘하느님의 자녀’로 선포되어 빛과
사랑의 불로 성령을 증거하도록 세상에 파견되고 있는 우리의 세례를
통해 전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주의 세례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알아야할 것이 있다. 예수님의
세례는 십자가와 부활을 향한 것이다. 그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구원하신다. 우리의 세례도 마찬가지다. 즉 우리의 세례의 마지막
도착점은 우리가 다른 형제들을 위한 생명의 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무한한 빛 앞에서 빛이 되어 그 빛의
초자연적 광채가 넘쳐흐르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세례가 세상의
구원을 위해 바쳐져야 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활동하실 때, ‘인기’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힘에
의존하신다. 예수님의 신적 ‘자녀관계’는 세례 그 순간에 그랬듯이
권세를 통해서 보다는 나약함을 통해서였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같이 나약함과 겸손을 본받을 수 있을 때, 우리 역시 세상의
구원을 위한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수원 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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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
(마태 3, 16)|한상우 바오로 신부 강론
 
2020년 가해 1월12일 주님 세례 축일.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셨다.(마태 3, 16)

 

저마다의 첫마음 저마다의 가슴 뛰던 세례를 기억합시다.
우리와 같아지신 주님께서 세례를 받으십니다.
세례는 의로우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세례는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심판이 아닌 구원의 세례입니다.
세례는 참된 신앙의 고백입니다.
세례는 사랑의 봉헌입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는 새로운 탄생입니다.

 

세례는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세례로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세례는 하느님과의 일치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세례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겠다는 우리의 결단이며 변화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그리스도의 삶에 동참하는 것이 세례의 본질이며
핵심입니다.
그리스도의 세례는 그리스도의 삶이었음을 기억하는 은총의
세례축일 되십시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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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평생토록 일관되게 지니셨던 겸손의 덕의 구체적인
표현, 주님 세례!


2020년 가해 1월12일 주님 세례 축일

 

평생토록 일관되게 지니셨던 겸손의 덕의 구체적인 표현, 주님 세례!

막 사제품을 받고 난 새사제 때의 일입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그야말로
천사처럼 살겠다고, 절대로 죄짓는 법 없을거라 다짐하고 확신했는데...
웬걸! 원판불변의 법칙이라고, 서품 이전의 모습 그대로 안고 살아가게
되더라구요. 그전 악습 그대로 안고, 같은 죄를 또 다시 반복하고...
그래서 솔직히 참담했습니다. 제 자신에 대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성인(聖人) 소리 들으시는 존경하는 원로 신부님을
찾아가 면담 겸 고백성사를 봤습니다. 낙담해하고 있는 저를 따뜻하게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더군요. ‘너무 큰 기대도 하지 말고 너무 크게
좌절하지도 말고, 넘어져도 또 일어서고 또 일어서면 아주 조금씩
좋아질거라며, 힘내라.’고 용기를 북돋아주셨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나오려고 하는데, 신부님께서 잠깐! 하고
외치셨습니다. 무슨 부탁하실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여쭈었더니...
신부님께서는 대뜸 두르고 있던 고백성사 사제용 작은 자색 영대를
저에게 건네시면서, 당신도 제게 고백성사를 보시겠다는 겁니다.

깜짝놀란 저는 천부당만부당한 일 같아 크게 외쳤습니다. “안됩니다!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저같은 새내기 신부가 어찌 감히 대선배요
살아있는 성인 같으신 신부님의 고백성사를 듣는단 말입니까?”

그랬더니 신부님께서는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면서 그러셨습니다.
“괜찮습니다! 너도 신부! 나도 신부! 무슨 문제?” 하면서 당신 죄를
고백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 세례 축일에 우리는 비슷한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세례를 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는 세례의 주관자, 세례의 창시자인 예수님께서
나약한 한 인간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십니다.

 

너무나 깨끗하신 분, 무죄하신 분, 그래서 세례가 전혀 필요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 사이에 서셔서, 마치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님의 세례는 마치 한 기업의
CEO가 신입사원 연수를 받는 일입니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연대장이
훈련병에게 거수경례하는 일입니다. 대학교 총장님이 대학교
신입생에게 허리를 굽히는 일입니다.

 

얼마나 당혹스럽고 송구스러웠던지 세례자 요한 역시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예수님께 이렇게 외칩니다. “제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선생님께서 저에게 오시다니요?”(마태오 복음 3장 14절)

 

예수님 세례를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그분의 지극한 겸손의 덕을 엿볼
수 있습니다. 마구간 탄생으로 참된 겸손이 무엇인지를 온몸으로
보여주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세례 사건을 통해 또 다시 자신을 극도로
낮추십니다. 보다 완벽히 인간 세상 안으로 육화하시려는 하느님의
강한 의지 표현이 예수님 세례인 것입니다.

 

일관되게 자신을 낮추시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시는 예수님의 겸손한
모습에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크게 기뻐하십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오 복음 3장 17절)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은 모습을 택하신 지극히 겸손하신 예수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려야 할 주님 세례 축일입니다. 그분께서 평생토록
일관되게 지니셨던 겸손의 덕을 우리도 청해야겠습니다. 우리 역시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 아랫사람들 앞에 용기 있게 고개 숙일 수
있어야겠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살레시오회)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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