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30일 사랑의 매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08-30 06:55:56    조회 : 440회    댓글: 0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사랑의 매

2014년 가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 마태오 25,14-30

 사랑의 매

중학교 때 선생님이 시험지를 들고 반 아이들에게 질문을 하였습니다. 모두 하나같이 다 틀린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하나하나 다 틀린 답을 하였습니다. 선생님은 그들을 계속 서 있게 하였습니다. 결국 저에게도 질문을 하였습니다. 저는 답을 맞혔습니다.
선생님은 이윽고 저에게 몽둥이를 주면서 서 있는 아이들의 손바닥을 세 대씩 때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살살 때리면 제가 대신 맞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적당히 세게 때렸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마음속으로 좋아했던 여자아이 앞에 섰습니다. 마음은 하나도 안 아프게 때리고 싶었지만 제가 좋아하는 마음을 들킬까봐 다른 아이들보다 훨씬 세게 때렸습니다. 한 대를 맞고는 바로 손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저는 세 대를 매우 세게 때렸습니다.
교무실에 들렀을 때 선생님이 “너 그 아이 좋아하지?”라고 말해 깜짝 놀랐습니다. 나름대로는 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세게 때린 것인데 선생님은 저의 마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 아이가 저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 아이는 저와 눈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세게 때린다고 해서 싫어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원망만 키워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가끔 자녀들에게는 사랑해서 매를 댄다고 하면서도, 하느님께로부터 안 좋은 것을 받았을 때는 주님을 원망하곤 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은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고통의 의미를 그저 내가 죄를 지어서 벌을 받는다거나 하느님이 나를 덜 사랑한다는 식으로만 아주 단순하게 해석하곤 합니다. 사랑해서 더 큰 고통을 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로마에서 공부할 때 자주 가던 식당이 있었습니다. 야외를 좋아하는 저로서는 딱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을 다녀오면 바지가 조금씩 뜯겨져 있는 것입니다. 한 번은 새 바지를 처음 입고 나갔는데 그 곳에 다녀오고는 바지가 망가져 버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인은 의자였습니다. 야외 철제 의자를 사용하였는데 마무리가 잘 안 돼서 조금씩 뾰족한 금속에 튀어나와 있어서 살까지는 찌르지 않아도 옷을 망가뜨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알고 나니 의자를 먼저 잘 살펴보게 되고, 아니면 무언가를 깔고 앉게 되는 등 신경이 많이 쓰였습니다. 나중에는 그 식당 자체가 비호감으로 느껴지기까지 하였습니다.
‘넘버3’란 영화에서 유명한 대사가 나오는데, “튀어나온 못은 망치를 맞게 돼 있다.”란 말이었습니다. 못이 튀어나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전체적으로 불완전하게 돼 사용하기 싫은 물건이 돼 버립니다. 튀어나왔다면 망치를 맞아야합니다. 이는 그 물건이 싫어서가 아니라 좋아서 더 잘 사용하기 위한 것입니다. 싫다면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때리는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하느님의 일이 튀어나온 못을 망치로 두드리는 그런 모습으로 나옵니다. 즉,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시고,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약한 것을 선택하시며, 있는 것을 무력하게 하기 위해 이 세상의 비천한 것과 천대받는 보잘 것 없는 것을 선택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 앞에서 어떤 인간도 스스로를 자랑하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즉, 튀어나오지 못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잘남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에 의해서입니다. 다만 그것을 알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살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에게서 오는 지혜가 되시고, 의로움과 거룩함과 속량이 되셨습니다.”
내 힘으로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교만 때문에 망치를 맞게 돼 있습니다. 그 사람이 싫어서가 아니라 당신이 그 사람과 함께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마치 튀어나온 못처럼 하느님께서 자리하시기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교만한 모습이 나올 때마다 고통을 주시며 당신의 편한 자리를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앉아야만 그 의자는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당할 때 낙심하지 말아야합니다. 우리를 더 사랑하기 때문에 훈육을 하는 것이라 믿어야합니다. 훈육을 한다면 아직도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고 계심을 알아야합니다. 히브리서를 마지막으로 읽으며 묵상해봅시다.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히브 12,5-7)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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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타] 재능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이어야 합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재능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이어야 합니다.'

2014년 가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그는 각자의 능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 다른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고 여행을 떠났다.” (마태오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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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갈수록 세상이 자격지심이나 열등감으로 채워지는 듯 합니다.
어디를 가도 과시욕이나 허영심, 차별, 편견, 교만과 다양한 폭력의 흔적은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물질이 중심이 된 병든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강조되고 있고,

추한 이기심은 생존을 위한 당연한 수단이라고 여겨지는 세상입니다.
이런 모든 것은 결국 일그러진 정신세계에서 나오는 상대적 박탈감, 즉 자격지심과 열등감이 생산해낸 결과입니다.

열등감이란 무엇인가요?
남보다 못한 부분을 자신이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숨기고 싶은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의 탈렌트의 비유를 늘 염두에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세상을 멋지게 살 수 있는 충분한 재능을 주셨고,

어떤 재능도 공동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며, 그 안에서 재능의 가치가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열등감이란 우리가 경계해야 할 하나의 커다란 정신병입니다.
우월감 역시 열등감이 이루어낸 병든 성취감에 지나지 않습니다.

명심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열등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귀한 자녀로 나왔습니다.
저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있는 생명들입니다.
누군가의 존엄성을 업신여기고 짓밟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업신여기고 짓밟는 처사입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열등이니 우월이니 하는 잣대가 존재하는 한,

어떤 이기적인 방법을 동원한다고 해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세상은 신기루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자와 이기적 정신병자들만 생산해낼 뿐입니다.
편견과 차별의 세상을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무조건 더 행복할 것이라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재능을 세상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돌려드리지 못한다면 아니 받은 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재능의 목적은 아름다운 삶이어야 합니다.
(2014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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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구절을 가지고 한 작년 묵상입니다.)

언젠가 데나리온과 탈렌트라는 예수님 당시의 통화량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다시 한 번 기억을 해보도록 합시다.
한 데나리온(1Denarius)은 당시 노동자들이 하루의 평균 품삯으로 받던 정도의 돈입니다.

그리고 한 탈렌트(1Talent)는 6,000데나리온을 의미했습니다. 계산을 해보면 한 탤런트는

보통의 노동자들이 16년이 넘는 시간을 하루도 빠짐 없이 일해야 받을 수 있는 엄청난 돈입니다.

오늘 주인은 각각의 세 종에게 다섯 탈렌트, 두 탈렌트, 한 탈렌트를 맡깁니다.

그리고 다섯 탈렌트를 받은 종과 두 탤런트를 받은 종은 주인이 여행을 간 사이에 받은 것의 두 배를 만들었고,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냥 땅에 묻어두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우리는 한 탈렌트밖에 받지 못한 종이 그 돈으로는 무엇을 하기에는 부족한 돈이라서 땅에 묻어둔 것이라고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세 사람이 받은 돈은 비록 차이가 있어 보여도,

모두 큰 돈을 모으기 위해 충분히 종자돈이 되고도 남는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오늘 날, 탈렌트라는 말은 재능이라는 말로 바뀌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크기는 다를 수 있지만 저마다 재능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재능의 크기를 가지고 교만해지기도 하고 열등감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복음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기에 충분한 재능을 하느님께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만 그 재능을 살리려 최선을 다하고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오늘 복음의 핵심입니다.

사실 재능의 많고 적음은 복음적인 해석으로 볼 때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재능을 많이 타고난 이들의 몫이 더 버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결코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재능의 주변에는 늘 유혹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재능을 받은 목적에 대해 얼마나 충실하고 있는지 의식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재능을 목적에 맞게 잘 사용하다가 하느님께 돌려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절대로 ‘나’의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눈으로 볼 때 나는 나의 소유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을 하느님 뜻에 맞게 얼마나 잘 가꾸고 소중하게 사용하다가 그분께 되돌려 드릴 수 있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재능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지만 그 재능이 자신을 넘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재능은 선물입니다.
그리고 그 선물은 아름다운 삶을 위해서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재능은 하느님과 하느님이 지으신 세상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때 그 가치가 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잘 쓰다가 돌려드려야 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20130831)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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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8월30일 연중 제21주간 토요일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 마태오 25,14-30
 
사랑하는 동창 신부가 단식을 한다고 하기에 광화문엘 갔었습니다. 참 많은 분들이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세월호의 유족들, 정치인들, 영화인들, 시민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와 많은 말은 하지 않았지만 함께 기도를 하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굵은 비가 내렸습니다. 무엇이 사랑하는 동창이 단식을 하게 하는지 생각합니다. 무엇이 평범한 시민이 50일 가까이 단식을 하게 하는지 생각합니다. 무엇이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단식하게 만들었는지 생각해 봅니다.

단식은 요란한 구호를 외치지 않습니다. 단식은 화염병과 돌을 들지 않습니다. 단식은 폭력을 수반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단식은 결연함을 보여 줍니다. 단식은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단식은 욕심과 욕망 때문에 원하는 것을 이루려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어찌 보면 무모한 행동입니다. 어리석은 행동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단식은 새로운 세상을 열망하는 표징입니다. ‘권력, 명예, 재물’로 얻을 수 없는 것들이 있음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는 결코 하느님께 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표징입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야기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강하다는 사람을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 약한 사람을 선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깨우치기 위해서 부족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유한 사람들 빈손으로 보내시고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삶입니다.

한손에 묵주를 들고 기도하는 사제와 수도자들 보았습니다. 말없이 단식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불의한 세상을 향해서 ‘아니요’라고 외치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은 주님께서 주신 것들을 기꺼이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바로 그분들이 하느님께서 주신 ‘달란트’를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썩어 없어질 세상의 곳간을 가득 채우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지와 같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남을 속이고 양심을 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통장의 잔고는 늘어가고, 더 좋은 집은 가질 수 있지만 어쩌면 그런 분들이 가졌던 ‘달란트’마저 빼앗겨 버리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달란트’를 나를 위해서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말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달란트’를 남을 위해서 나누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말을 참 좋아합니다. 감사하면 감사할 일이 생기고, 미워하면 미워할 일이 생깁니다. 웃으면 웃을 일이 생기고, 찡그리면 찡그릴 일이 생깁니다. 이해하면 이해할 일이 생기고, 오해하면 오해 할 일이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능력과 힘을 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바로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감사와 기쁨, 이해와 사랑, 나눔과 봉사는 우리의 능력을 키울 수 있는 가장 커다란 힘입니다. 미움과 분노, 오해와 불신은 우리의 능력을 땅에 묻는 가장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있습니다.
 
- 서울 대 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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