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1일 배신과 반역의 이유

작성자 : 김 안나    작성일시 : 작성일2014-09-01 06:58:09    조회 : 466회    댓글: 0

◈ [청주] 아는 것이 힘이 되어야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9월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루카4,16-30)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6-30

아는 것 힘이 되어야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이번 주간도 주님의 사랑 안에서 행복하시기 빕니다.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좋든 싫든 누군가를 대면하게 됩니다. 다른 사람을 외면한 채 혼자 살아갈 수는 없는 법입니다. 세상은 더불어 살아가야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만남을 이루며 살아가면 좋을까요? 서로의 마음을 공감하고 주고받는 소통을 이루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가끔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을 어떻게 혼내줄까? 고민할 때가 있습니다. 소리 소문 없이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게 여의치 않아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아닌 척 하면서 상대를 물 먹일 때도 있습니다. 아닌 척하면서 자기 뜻을 관철합니다. 만나는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 있고, 그를 통해 쓴 소리를 들을 수도 있으며 그것을 통해 오히려 자기발전의 기회를 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든 눌러버리고자 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다른 사람의 의견과 결정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오히려 결정하는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를 지배합니다. 이 마음을 내려놓기까지 갈 길이 멀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벼랑까지 끌고 가 거기서 떨어뜨려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는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모두가 예수님을 좋게 생각했습니다(사도10,38). 그가 하는 말씀이 진리요, 은총의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가 목수 요셉의 아들로 알려지면서 그 권위는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여전히 은총의 보유자이시고 권위를 지니셨지만 사람들의 편견과 선입견은 주어진 은총을 놓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는 게 병’입니다. 사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고 얻게 됩니다.

그러나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이 약속된 구세주시라는 표징과 놀라운 일들을 보여주길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구미에 맞는 표징을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불경한 자로 단죄하고 죽이려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육받은 편견대로 판단하며 자기들 식으로 구원을 상상하였습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받아들이고 그러다가 의심하며 심지어 ‘예수가 밥 먹여 주냐?’ 고 외면하기도 합니다. 자기의 기대가 자기방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혼란을 겪으며‘다 필요 없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당신의 가실 길을 가십니다(루카 4,30). 일찍이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 그대로 입니다. “비와 눈은 하늘에서 내려와 그리로 돌아가지 않고 오히려 땅을 적시어 기름지게 하고 싹이 돋아나게 하여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을 주고 먹는 이에게 양식을 준다. 이처럼 내 입에서 나가는 나의 말도 나에게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반드시 내가 뜻하는 바를 이루며 내가 내린 사명을 완수하고야 만다”(이사5510-11).

결국 주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이 같지 않고 주님의 길과 우리의 길이 같지 않습니다. 그분의 길은 우리의 길보다 높고 주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보다 높습니다. 따라서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삶을 우리가 살아야지 그분이 내가 원하는 대로 맞춰주기를 바래서는 안 되겠습니다. 내 생각과 욕구에 맞지 않으면 내 것을 바꾸어야지 주님께 바꾸라고 떼를 쓰고 배척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나 현실은 여전히‘너 죽을래!’살려면 내 입맛에 맞춰! 하고 구박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 보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사랑합니다.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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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도회] 배신과 반역의 이유
 
2014년 가해 9월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배신과 반역의 이유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6-30

고향땅 나자렛을 방문하신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셔서 하신 일은 장엄한 대희년의 선포였습니다. 교회는 50년 마다 희년을 경축해왔습니다. 이유는 안식년이 일곱 번 지난해, 그러니까 7×7=49, 그리고 그 다음해인 50년이 되는 해가 희년이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희년은 해방이란 의미를 지닙니다. 좀 더 포괄적으로 생각해보면 축복, 축제, 성령, 은총, 초월, 탕감, 용서, 새로운 탄생 등으로 넓혀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의아하게 50주기도 아닌 해 당신 입으로 직접 대희년을 선포하십니다. 이는 이제 지난 인간의 셈법을 넘어 예수님 당신 존재 자체가 대희년이 기준이 됨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강생으로 인해 이제 위대한 인류 구속의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 오랜 이스라엘 역사는 예수님의 육화강생을 준비한 세월이었습니다.

이토록 의미 있고 장엄한 예수님 대희년의 선포와 당신 사명의 시작 앞에 고향 사람들이 보인 반응으로 참으로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경탄과 호의적인 반응은 잠시뿐이었습니다. 즉시 시작된 청중들의 반응은 회의와 실망, 분노와 적개심이었습니다.

화가 잔뜩 난 청중들은 똘똘 뭉쳐 들고 일어났습니다. 마치 짐승에게 하듯이 힘으로 예수님을 고을 밖으로 내몰았습니다. 벼랑 끝까지 예수님을 몰고 간 사람들은 예수님을 절벽 아래로 밀어뜨리려 까지 했습니다. 세상에 하극상도 이런 하극상이 없습니다. 어떻게 종이 주인을? 창조물이 창조주를?

이런 큰 배신과 반역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예수님이란 인물이 자신들의 기대에 완전히 어긋나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실 때 구름을 타고 내려오실 줄 알았습니다. 휘황찬란한 옷을 입고 오실 줄 알았습니다. 손가락 하나로 세상을 바꿀 능력의 주인공으로 오실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메시아의 모습이라니! 자신들과 동고동락했던 목수의 아들입니다. 자신들과 별반 다를 바 없이 꼬질꼬질 때 묻은 삶을 살아온 일개 청년의 모습입니다.

오랜 세월 기다려왔던 메시아의 메시지를 예수님께서 선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어떠한 지상적 번영도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자신들에게 절실히 필요한 무소불위의 권력이나 물질적인 부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물리치셨던 세 가지 유혹, 빵, 기적, 권세 이런 것들을 간절히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 지니고 있는 바람이 무엇인가 돌아봅니다. 혹시라도 그 옛날 나자렛 고향사람들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은 아닌지요?

예수님 사명의 첫출발이 믿음이 많이 부족한 보잘 것 없는 동네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예수님 사명의 첫출발이 환호와 박수갈채가 아니라 철저한 냉담함과 극도의 반대 속에, 다시 말해서 완전 제로베이스에서 시작되었음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불신앙과 죄, 살기등등한 배척이 예수님의 첫 여정을 가로막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길을 묵묵히 시작하셨습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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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지혜가 아닌 믿음

2014년 가해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6-30

지혜가 아닌 믿음

어떤 수녀님이 입회하여 애기 수녀님이었을 때의 일이랍니다. 당시에는 일이 많아서 그 수녀원에 거의 남아있는 사람 없이 소임 때문에 바빴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수녀님이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가망이 없게 된 것입니다.
원장 수녀님은 그 아픈 수녀님을 병원에만 두는 것이 가슴 아파서 다시 수녀원에 모셔오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수녀님들이 다 모인 가운데 좋은 지혜를 청했습니다. 대부분의 수녀님들이 자신들의 소임을 하면서 그 수녀님의 병수발을 들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계속 모셔두기로 결론이 났습니다. 그런데 원장 수녀님은 수녀님들의 의견을 존중하면서도, “그래도 아픈 수녀님이 우리 가족인데, 가족이 돌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하면서 안타까움의 표현을 했습니다.
얼마가 지나서 대부분의 수녀님들 마음에 그 수녀님을 수녀원에 모셔와야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바쁜 와중에서도 조금씩 고생하며 그 수녀님 병수발을 들 결심들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원장 수녀님에게 드렸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날 병원에서 수녀님이 사망하셨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모든 수녀님들은 무언가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은 수녀님들의 지혜가 아니라 원장 수녀님을 통해 밝혀준 하느님의 뜻을 따라주기만을 원하셨던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란 것이 얼마나 하찮으며 한 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지 깊이 뉘우치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인간의 힘이나 능력으로 무언가를 이루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의 능력치를 최소한으로 낮추어 모든 일이 당신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졌음을 드러내시려 합니다. 바오로도 이것을 깨닫고 오늘 독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오로답지 않게 코린토인들에게 갔을 때 약하고 두렵고 떨렸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자신의 힘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는 이를 통해 큰일을 이루심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라고 하시며 우리 힘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강조하십니다. 그저 모든 것을 당신께 의탁하기만 하면 당신의 수액으로써 열매를 맺어주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힘으로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그러면서 남편이 왜 그러냐, 본당 신부가 왜 그런 결정을 내리냐, 주교님이나 교황님이 왜 그러느냐고 불평을 합니다. 이 얼마나 하느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모습입니까?

대부분의 하느님 뜻은 우리의 ‘머리’를 통해 옵니다. 몸이 원하는 것대로만 하면 망하고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살아야 건강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가정은 가장을 통하여, 성당은 본당 신부를 통하여, 교구는 교구장님을 통하여, 전 교회는 교황님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당신 지혜를 나타내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머리에 온전히 우리 자신을 맡기지 못하기도 합니다.
저도 유학을 가라고 할 때부터 지금 교구청에 들어오는 것까지 저의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발령만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그런 발령을 받으면 그 명에 순명하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래도 내 생각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라보고 나면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좋은 결과를 냄을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래서 자기 생각을 버리고 당신 지혜를 따라주는 이들을 통해 당신 구원의 일을 성취하십니다.
구약의 요셉은 끊임없이 형제들에게 배신당하고 감옥에 억울하게 갇히는 등 자신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만 당합니다. 그렇게 외국에 끌려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게 생겼습니다. 그러나 기근이 왔을 때 그를 통해 이스라엘 온 백성을 살리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그분의 지혜는 당장의 인간의 지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지혜를 나의 것으로 삼기 위해서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버리고 순명하는 정신을 기를 때 그 사람을 통해 깜짝 놀랄 일을 우리에게 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 힘이 아닌 하느님의 힘이 우리를 통해 드러나도록 우리 자신의 능력을 믿지 말고 오롯이 그분의 뜻에 순명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겠습니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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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욕심 채우려고 종교를 믿는 건 아닌지
 
2014년 가해 9월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6-30

욕심 채우려고 종교를 믿는 건 아닌지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라고 고향친구가 고향에 와서 말한다면 저는 미쳤나보다고 생각할 겁니다.

예수님이 고향에서 그리 말씀하셨으니 누군지 빤히 아는 고향 사람들.
전혀 믿지를 않고 오히려 미쳤다며 예수님을 죽이려 했다니 그게 그거지요.
지금도 진리보다 욕심 채우려고 종교를 믿는 건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루카 4,21)”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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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2014년 가해 9월1일 연중 제22주간 월요일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16-30
 
안녕하십니까! 한 주일이 시작되는 월요일 아침입니다. 9월의 첫 날이기도 합니다. 8월까지는 여름의 기운이 강하지만, 9월이 되면 코스모스가 생각나고, 높은 하늘이 떠오르고, 가을의 문턱이 가까워진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9월의 첫날, 월요일 아침에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이 한열, 박 종철, 미선이와 효순이, 용산, 강정, 밀양, 세월호’가 있습니다. 이런 이름들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억울함, 고통, 죽음, 불의, 권력’과 같은 공통점입니다. 이런 이름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 이름들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유, 희망, 변화, 연대, 사람’입니다. 그들의 억울함, 비참함, 고통, 절망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의 파도는 작은 힘으로 머물지만 함께 하는 파도는 거대한 물결이 되어서 새로운 세상, 새로운 희망을 가져옵니다. 
 
오늘 복음에서 유대인들은 참된 진리이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마음이 닫혀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을 쫓아내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부르기만 하면 언제든지 창문을 열고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하느님께 창문을 열어달라고 청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 하실 것입니다.”

‘공존의 그늘’은 어느 세상, 어느 사회에나 있었습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이 살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선진국이라는 나라에도 있습니다. 가난한 나라에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에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그늘을 외면하면서 살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그늘에 작은 촛불을 들었습니다. 곧 꺼져 갈 것 같은 촛불은 그늘을 환하게 만들곤 했습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성공, 행복, 명예, 권력, 물질’ 만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더불어 살아야 하고, 함께 고민해야 하고, 나누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 그토록 열광했을까요? 그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말로만이 아닌 삶으로 자신의 말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권위가 있었지만 권위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섬기려 했기 때문입니다. 가까이 오려는 어린아이들을 받아 주셨고,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에게서 2000년 전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물질이라는 신이 득세하는 세상에 가난한 이들에게 자유를 주고, 묶인 이들을 풀어주는 자유와 해방의 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분명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디딤돌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해야 합니다. 가정과 이웃을 위해서 밑거름이 되는 것도 감수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수많은 디딤돌과 밑거름이 있었기에 아름다울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건강하고, 부유하고, 오래 살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의 꿈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위해서라면 질병도, 가난도, 단명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신앙인의 태도입니다. 많은 순교자들은 바로 그런 길을 걸어갔습니다. 많은 성인들은 바로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고통과 수난 중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에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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